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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59:39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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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마케도니아 왕국 35대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Πτολεμαῖος Κεραυνός | Ptolemy Ceraunus
파일: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jpg
프톨레마이오스
Πτολεμαῖος
별명 케라우노스
Κεραυνός
출생 기원전 319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사망 기원전 279년
마케도니아 왕국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기원전 281년 ~ 기원전 27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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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 35대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의 후계자 쟁탈전에서 패한 뒤 리시마코스에게 망명했다가 셀레우코스 1세가 리시마코스를 죽이자 그에게 귀순했다. 그 후 트라키아를 공략할 준비를 하던 셀레우코스를 암살하고 그의 군대를 가로챈 뒤 마케도니아 왕을 칭했지만, 2년만에 켈트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

2. 생애

기원전 319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안티파트로스의 딸 에우리디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케라우노스(Κεραυνός)는 별명으로, 번개를 의미한다. 이는 그의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이 앞서는 성격을 빗댄 것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파라오에 오른 뒤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베레니케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새롭게 떠오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두 사람은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장고 끝에 기원전 28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후계자로 삼기로 했다. 이에 케라우노스는 이집트를 떠나 마케도니아-트라키아-서부 소아시아 일대의 군주 리시마코스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당시 리시마코스는 케라우노스의 이복 자매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고, 장남 아가토클레스가 케라우노스의 여동생 리산드라와 결혼했기에,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케라우노스를 이집트로 압송하라고 요청하자, 리시마코스는 어느 한쪽과 관계를 끊기를 원치 않았기에, 케라우노스를 이집트로 보내지 않는 대신 자신의 딸 아르시노에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리시마코스가 장남 아가토클레스를 처형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자기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었던 아르시노에 2세의 모함에 넘어갔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가토클레스의 아내 리산드라와 페르가몬의 재정관리인 필레타이로스셀레우코스 1세에게 망명하였고, 셀레우코스 1세는 리시마코스의 장남 처형 사건으로 민심이 등을 돌린 틈을 타 침공했다. 기원전 281년, 셀레우코스는 사르데스 인근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전사시켰다. 케라우노스는 즉시 셀레우코스에게 귀순했다.

그 후 셀레우코스는 소아시아 해안가의 여러 도시국가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정복하고자 헬레스폰트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에 진입하면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에 자신을 민주주의와 자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폭정을 저지르는 압제자들로부터 해방시켜줄 인물로 소개했다. 그런데 기원전 281년 9월, 리사마키아 인근에 도착한 뒤 희생제를 치르고 있을 때 케라우노스가 등 뒤에서 칼로 찔러 죽였다.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서는 셀레우코스를 죽이고 그의 영토를 탈취하려 했다는 설, 은인인 리시마코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랬다는 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매수에 넘어갔다는 설 등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맞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셀레우코스를 암살한 뒤, 그는 곧바로 셀레우코스가 이끌었던 군대를 자기 편으로 삼았고, 리시마코스의 옛 영토를 확보한 뒤 마케도니아 왕을 자처했다. 셀레우코스 1세의 장남 안티오코스 1세는 즉시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이후 양자는 1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쉽사리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화해하고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가 그의 수중에 있는 걸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케라우노스는 칼키비아 반도의 카산드레아에서 버티고 있던 아르시노에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결혼해준다면 그녀의 자식들을 잘 대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이를 받아들였고,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결혼식이 거행된 뒤 카산드레아에서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다. 그러나 케라우노스는 약속을 어기고 아르시노에의 어린 두 아들을 죽였다. 그녀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만이 탈출하여 일리리아에 망명할 수 있었다. 아르시노에는 도시에서 쫓겨나 사모트라케 섬에 숨었다.

이리하여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나, 기원전 279년 켈트족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면서 위기에 빠졌다. 그해 봄 켈트족 지도자 볼기우스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에 맞서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적군을 목격하자 모든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전투를 개시했다, 그러나 전투 도중에 적군에게 붙잡힌 뒤 참수되었고, 켈트족은 그의 수급을 창 위에 올려놓고 전장을 돌아다녔다. 마케도니아 장병들은 그걸 보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도망쳤다. 이후 동생 멜레아그로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몇달 만에 군대에 의해 폐위되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은 켈트족의 대침략으로 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