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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23:12:58

아르켈라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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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조 13대 국왕
아르켈라오스 1세
Ἀρχέλαος|Archelaus
파일:아르켈라오스 1세.jpg
아르켈라오스
Ἀρχέλαος
출생 미상
미상
사망 기원전 399년
마케도니아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
기원전 413년 ~ 기원전 39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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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13대 왕.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회삼아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국가로 육성했으나 말년에 암살당했다.

2. 생애

페르디카스 2세와 시미하의 아들이다. 플라톤을 비록한 그리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시미하는 노예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이것은 아테네 측의 반 마케도니아 선전이며, 실제로는 마케도니아의 저명한 귀족이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 따르면, 아버지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술독에 빠져지내던 알케타스 2세와 사촌 알렉산드로스를 술에 취하게 한 후, 그들을 수레에 싣고 밭으로 데려가서 죽인 후 암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7세의 이복동생 알케타스 또는 메로프스를 우물에 빠져 죽게 한 뒤 어머니에게는 사고로 죽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나, 실제로 마케도니아에서 정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기원전 41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르켈라오스 1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아테네를 어느 정도 도와줬다. 시칠리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뒤, 아테네는 함대를 복구하기 위해 목재를 구하려 애썼다. 그는 목재 공급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조선소에 아테네 선박을 건조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얼마 후 피드나가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는 그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병력을 보내줬다. 그 덕분에 피드나를 공략한 뒤, 아르켈라오스 1세는 도시를 바다로부터 약 3.5km 떨어진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가 이렇듯 아테네를 도와준 덕분에, 금방 무너질 듯했던 아테네는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쟁에 정신이 팔려 마케도니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르켈라오스 1세는 부친 대에 끝을 내지 못했던 린케스티다와 일리리아 부족 연합과 전쟁을 벌였지만 이번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딸과 린케스티다 왕의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화해했다. 또한 부친 대에 상실했던 비샬티아를 탈환하여 풍부한 은광을 확보했으며, 서부의 오레스테다와 팀테아도 탈환했다. 이후 수도를 아기스에서 펠라로 천도했는데, 이는 항구도시인 피드나와 메토네에 군사적으로 근접한 곳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펠라는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마케도니아 최대 도시가 되었다.

아르켈라오스 1세와 동시대 인물인 투키디데스는 그의 치세에 각지에서 펠라로 이어지는 직선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이전의 여덟 명의 왕보다 더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고, 군대와 군사 장비 준비에 더 많은 노력이 동원되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국경지대에 여러 요새가 세워져서 외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게 하였다. 한편, 그의 시대에 청동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했다. 이는 마케도니아가 물물 교환에서 화페 유통 경제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은광을 탈환한 후에는 은화를 대규모로 주조하였는데, 페르시아의 표준을 따른 걸 볼때 동방의 국가들과 활발한 무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잘 만들어진 주화는 대외 무역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선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헤라클레스, 아폴론 등 신화 속의 신 또는 영웅을 어떤 식으로든 왕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했다.

기원전 408년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마케도니아로 찾아왔다. 아르켈라오스 1세는 그를 잘 대접했고, 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06년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할 때까지 비극 작품을 4편 집필했다. 그 중 2편은 현재까지 전해지니,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박카이》(Bacchae)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아르켈라오스》에서 테메노스의 아들 아르켈라오스를 아르게아스 왕조의 창시자로 제시했다. 이는 에우리피데스가 아르켈라오스 1세의 총애를 받기 위해 임의로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켈라오스 1세는 이외에도 당대의 유명한 화가 제욱시스를 초청하여 궁정 기둥을 그림으로 장식하게 하고, 음악가들과 시인들을 초청하는 등 그리스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종교 축제인 올림피아를 올림피아 제우스와 뮤즈를 기리는 음악 경연과 운동 경기로 재정비하여 디온에서 개최하도록 했다. 그리스의 뛰어난 운동선수와 예술가들이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왔는데, 아르켈라오스 1세 본인도 여기에 참가하여 올림픽과 파티아 경기 모두 우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 지식인들은 친 아테네 정책을 펼치는 그를 "반 야만족 왕"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그들은 아르켈라오스 1세에게 기용된 아테네 인사들을 야만족 왕의 통치 아래에서 부유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고 빌붙었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아르켈라오스 1세는 소크라테스를 펠라에 초대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보답하지 못하는 건 똑같이 모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글에는 아르켈라오스 1세에 대한 악의적인 기록이 많이 있다. 그는 《고르기아스》에서 아르켈라오스 1세를
'정의의 최악의 적이며 마케도니아인들 중 가장 불행한 자'
라고 규정하고,
'가장 큰 범죄와 가장 큰 부정을 저지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처벌을 성공적으로 피한 자'
라고 규탄했다. 그들이 이토록 아르켈라오스 1세에게 적대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나, 마케도니아가 자신들의 독립을 위협하기 시작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대의 소피스트였던 트라시마코스는 본인의 연설 《라리사 사람들을 대변하여》에서
"우리 그리스인들은 야만인 아르켈라오스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구절을 쓰기도 했다.

치세 말기, 마케도니아 남쪽의 테살리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알레바드 왕조의 도움 요청을 받은 걸 명분삼아 테살리아에서 마케도니아로 가는 산길이 있는 잔략적 요충지 페레비아를 획득했으며, 뒤이어 라리사를 점령했다. 테살리아의 알레바드 왕조 반대자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기나긴 전쟁에 지친 스파르타는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399년, 아르켈라오스 1세는 돌연 암살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사냥 도중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아르켈라오스 1세가 자기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의 동성연인이었던 크라테로스가 앙심을 품고 죽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파파리고풀로스에 따르면, 한 명의 테살리아인(엘라노크라티스)과 마케도니아인(데캄니코스)이 암살에 가담했다고 한다. 데캄니코스는 왕의 총애를 받던 시종이었으나, 아르켈라오스 1세 앞에서 에우리피데스가 입냄새가 심하다며 모욕했다가 아르켈라오스 1세의 분노를 사 채찍형을 받고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그 후 번성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정국 혼란으로 인해 침체기를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