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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트모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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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6대 파라오
투트모세 3세
Thutmose I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thmosisIII-2.jpg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존호 의 온전한 현현(顯現) | 완벽한 존재이신 투트모세
Menkheperura Djehutimese-neferkheperu
출생 기원전 1481년
사망 기원전 1425년 (향년 56세)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1479년 ~ 기원전 1425년
(약 54년)
전임자 하트셉수트
후임자 아멘호테프 2세
부모 아버지 : 투트모세 2세
어머니 : 이제트
배우자 네페루레[1]
사티아
메리트레-하트셉수트
네브투 등등
자녀 아멘호테프 2세
무덤 왕가의 계곡 KV34
상형문자 [ 펼치기 · 접기 ]

1. 개요2. 통치
2.1. 하트셉수트의 공동통치2.2. 정복 전쟁2.3. 건설 사업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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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6번째 파라오. 하트셉수트 여왕의 공동 통치자이자 후계자로, 할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와 함께 고대 이집트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정복왕으로 꼽힌다.[3]

투트모세 3세는 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5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54년 넘게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만 즉위한 후 22년까지는 고모 겸 계모 그리고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던 하트셉수트와 공동 통치를 하면서 여왕의 그림자에 가려 살았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 여왕을 증오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현대 들어서 이를 반증할 증거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어쨌든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죽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이집트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최소 17차례에 달하는 대원정을 펼치면서 이집트 왕국의 영토를 역대 최대 규모로 넓혀놓았고, 시리아, 누비아, 리비아 등 온갖 곳에 군사 작전을 펼쳤다. 투트모세 3세는 죽기 2년 전 후계자 아멘호테프 2세를 공동 파라오로 임명, 기원전 1425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2. 통치

2.1. 하트셉수트의 공동통치

기원전 1481년 투트모세 2세와 후궁 아세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투트모세 2세의 정실 왕비는 하트셉수트였고, 투트모세 2세와 하트셉수트 사이에는 딸 네페루레가 있었다. 파라오의 하나밖에 없는 남성 후계자로서 왕궁의 모든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어야 했으나, 그가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 투트모세 2세가 사망하고 말았다. 투트모세 2세가 다른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 어린 꼬마가 파라오가 되었다. 다만 사리분간조차 명확히 못 하는 나이였던 만큼 통치 일선에 나서진 못하고 고모 겸 적모인 하트셉수트가 실권을 행사하였다. 하트셉수트의 딸로 자신의 이복누이 네페루레와 결혼해서 하트셉수트가 그의 장모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그가 네페루레와 결혼했단 증거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네페루레가 투트모세 3세의 요절한 첫아들 아메넴하트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아메넴하트를 낳은 건 투트모세 3세의 첫 정비 사티아라는 설도 있다. 대체로 네페루레는 이복형제인 투트모세 3세와 결혼하지 않고 파라오 역할을 수행한 어머니 하트셉수트의 왕비로서 신의 아내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석된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투트모세 3세의 왕위를 부정한 적은 없지만 거의 실권은 혼자 쥐고 이집트를 다스렸다. 나름 능력있던 지도자였던 하트셉수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왕국은 풍요를 누렸다. 하트셉수트는 푼트 지방으로 원정대를 파견하거나 교역 활동을 펼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고, 통치 중후반부부터는 성인이 된 투트모세 3세에게 제 군대의 지휘권을 맡기는 등 서서히 권력 이양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절대로 통치권을 완전히 넘겨주지는 않았고, 하트셉수트가 살아있는 동안 이집트의 명실상부한 1인자는 언제나 하트셉수트 여왕이었다. 그랬기에 투트모세 3세에게 실권이 돌아온 것은 하트셉수트가 기원전 1458년에 죽고 난 이후, 즉위하고 무려 22년이나 지난 이후였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하트셉수트의 기록을 지우는 기록말살형을 행하는 등 투트모세 3세가 노골적으로 증오했다는 설이 강했으나 현대에는 여러 반증들이 등장해서 거의 사라진 학설이다. 이에 대해선 하트셉수트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2.2. 정복 전쟁

하트셉수트가 죽은 이후 본격적인 친정에 나선 투트모세 3세는 20년간 무려 17차례에 달하는 정복 사업을 펼쳤다.[4] 파라오는 군사 방면에서는 천재였고, 덕분에 이집트는 역사상 최대 규모로 빠른 확장을 거듭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생 동안 350개의 도시를 정복했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중동 지방으로부터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는 누비아까지 온갖 곳을 종횡무진하며 영토를 넓혔다. 참고로 유프라테스 강을 넘은 것은 투트모세 1세 이래 처음일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투트모세 3세는 후대의 람세스 2세 대왕에 비견될 정도로 이집트를 국제적인 패권을 휘두르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한 정복왕으로, 이집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투트모세 3세를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전쟁광으로 꼽고는 한다.[5] 투트모세 3세 지휘 하의 이집트 군이 연전연승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제2중간기 시절 힉소스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차의 영향이 컸다. 당시 힉소스인들이 끌던 전차의 위력을 실감한 이집트가 대대적인 전차 병단을 꾸리면서 이집트 군대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죽은 직후부터 전쟁에 나서야 했다. 하트셉수트가 죽은 지 채 2달도 되지 않아 인근 카데시의 왕[6]이 군대를 끌고 메기도 지방으로 쳐들어왔던 것. 소식을 들은 투트모세 3세는 바로 대군을 편성해 메기도로 향했다. 해안을 따라 북상한 투트모세 3세는 2개월의 강행군 끝에 적군이 버티고 있는 메기도 인근에 다다랐다. 당시 메기도와 투트모세 3세 사이에는 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투트모세 3세는 산맥을 넘어가기 위해 3가지의 방법들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다. 산을 북쪽과 남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방법이 각각 1개씩 있었고, 왕실 신하들은 산맥을 우회하는 경로가 가장 안전하다고 고했다. 그러나 투트모세 3세는 신하들의 제언이 겁에 질린 것이라 생각해 물리쳤다. 대신 그는 산맥 가운데로 뚫려 한 사람씩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를 통해 산을 바로 돌파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대성공했다. 투트모세 3세의 군대는 바로 적군 사이에서 쏟아나왔고, 산맥에서 이집트 병사들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적군은 쓸려나갔다. 적군은 패퇴해 메기도 성벽 안에서 농성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 투트모세 3세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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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트모세 3세가 치른 것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투[7]였던 메기도 전투로 인해 중동 정세가 급변했다. 가나안 북부와 시리아가 이집트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아시리아, 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 히타이트의 왕들이 이집트에 선물을 보내면서 이집트의 명성은 급상승했다. 메기도 전투를 통해 이집트군의 힘을 널리 알린 투트모세 3세는 크게 고무되었다. 파라오의 2차, 3차, 4차 원정은 주로 가나안과 시리아 일대가 도착지였는데, 원정이라는 거창한 말과는 달리 그냥 한 번 일대의 조공국들을 쭉 순회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투트모세 3세가 재위 40년 차에 남긴 방대한 양의 원정 기록문에 이때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정말 별 것 없었던 원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적힌 것이라고는 각지의 군주들이 알아서 조공을 바쳤다는 것, 그리고 인근의 아시리아 왕이 다시 파라오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 마지막으로 레바논 일대에 요새와 군사기지들을 지어 방비를 보강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이집트의 영향권이 닿는 영토들을 한 번 쭉 순회한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 지방으로 5차, 6차, 7차 원정을 떠났다. 투트모세 3세는 재위 29년 차에 5차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시리아에 위치한 페니키아 계열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아무래도 영토를 정복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재물을 약탈하고 노예들을 끌고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파라오는 비블로스와 인근 지중해의 항구들을 통해 함대로 병사들을 시리아로 파견했다. 투트모세 3세는 6차 원정에서 가나안 지방을 그대로 지나쳐 요르단 강 계곡으로 들어갔고, 군대를 몰고 북상해 카데시가 다스리는 영토들을 싸그리 약탈했다. 또한 도시들을 다스리는 귀족들에게서 일부러 포로들을 뜯어내 혹여나 일어날 반란을 방지했으며, 인근의 강대국 미탄니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다만 포로들을 이집트에 잡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투트모세 3세는 재위 31년 차에 7차 원정을 떠나 반란을 강제로 진압해야만 했다. 7차 원정을 통해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고자 했던 투트모세 3세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 주민들을 몰살한 후, 그 곳의 곡식을 포함해 모든 재물들을 이집트군이 주둔하는 기지와 항구에 쌓아놓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리아인들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에 협력해야만 했다.

시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한 투트모세 3세는 인도아리아인 계열 국가이자 당대 중동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탄니를 공격했다. 그러나 미탄니를 치기 위해서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야 했기에, 파라오는 배를 타고 비블로스까지 항해한 후 그 곳에서 배를 만들어 병사들에게 끌고 가도록 시켰다. 그는 이미 저번 원정에 정복했던 도시들을 재약탈하면서 평범한 시리아 원정인 것처럼 미탄니를 속였다. 투트모세 3세는 알레포와 칼케미쉬 등의 적대국가들이 다스리는 영토를 그대로 지나쳐 빠른 속도로 유프라테스 강을 도강했다.[8] 유프라테스 강을 지키고 있던 미탄니 군대는 전혀 이집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햇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탄니는 이집트 병사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허사로 돌아갔고, 투트모세 3세는 대군을 이끌고 미탄니 일대를 휩쓸었다. 공포에 질린 미탄니 귀족들은 도시에서 도망쳐 인근 산맥의 동굴이나 은신처에 숨어버렸고 이집트 군대는 텅 비어버린 도시를 마음껏 약탈했다. [9] 미탄니에서는 뒤늦게서야 군대를 모아 이집트 병사에 맞서려 시도했지만 한 번 작정하고 쳐들어온 투트모세 3세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투트모세 3세는 유유히 미탄니를 유린한 후 막대한 전리품을 실은 배를 타고 이집트로 귀환했다.

재위 34년 차에 치러진 투트모세 3세의 9차 원정은 시리아가 주무대였고 별 것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냥 반-유목민 집단이 거주하고 있던 시리아 인근을 약탈한 정도로 여겨지는데, 심지어 전리품 목록도 상당히 보잘것없기에 제대로 된 약탈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차 원정은 꽤나 강렬했다. 8차 원정 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칼을 갈고 있던 미탄니는 꾸준히 군대를 모아 이집트를 칠 준비를 했고, 재위 35년 되는 해에 바로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다. 투트모세 3세와 미탄니 왕은 알레포 근처에서 대격돌했고, 이집트 측 기록에 의하면 투트모세 3세는 여기서도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10] 하지만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 치고는 사로잡은 포로가 10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등 노획한 전리품 목록이 워낙 협소해 학계에서 대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아마 미탄니에게 약간 우세를 점하거나 필사적인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굳이 투트모세 3세의 승리일 것이라 추정하는 이유는 전투가 끝난 후 히타이트의 왕이 파라오에게 선물과 조공을 보냈기 때문.

11차 원정과 12차 원정에 대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각각 재위 36년과 37년 되는 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이지만 자세한 원정의 경위는 알려진 바 없다. 13차 원정에서는 9차 원정 때 공격했던 도시들 중 하나인 누카쉬셰를 재공격, 14차 원정 때에는 유목민족인 샤수족[11]의 공격을 맞아 싸웠다. 14차 원정 이후에 벌어진 15차, 16차, 17차 원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나 실시 연도는 기록이 훼손되어 정확히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연이은 패배로 앙금이 깊게 쌓였던 미탄니가 끊임없이 시리아의 도시들을 선동하여 이집트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는 것이고, 투트모세 3세는 죽을 때까지 이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는 것이다. 미탄니가 시리아인들을 선동하는 것을 선제 차단하기 위해 투트모세 3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안가에 주둔하던 이집트군을 데리고 카데시로 재진격, 인근의 미탄니 요새 3개를 함락한 뒤 이집트로 돌아와 개선식을 치렀다. 말년에는 나일 강 상류의 누비아를 정복하여 나일 강의 네 번째 폭포까지 진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정복사업이 되었다. 기원전 1425년 54세를 일기로 그의 영혼은 검은 땅을 떠났으며, 그의 무덤은 선왕들과 같은 왕가의 계곡 KV34에 조성되었다.

2.3. 건설 사업

50여 개에 달하는 사원들을 지었다고 전해지나, 대부분이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12] 가장 유명한 것은 카르나크 대신전에 바친 탑문과 오벨리스크로, 그 자신의 정복 사업을 대문짝만 하게 새겨넣어 만천하에 자신의 위명이 울렸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아문-라를 비롯한 이집트의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utmose_III_at_Karnak.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ppodrome_of_Constantinople_Obelisk_3.jpg
투트모세 3세의 정복 부조 투트모세 3세 오벨리스크.[13]
투트모세 3세는 그 어떠한 파라오들보다 테베카르나크 신전에 공을 들인 파라오였다. 그는 할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지은 카르나크의 열주 홀을 개축했고, 하트셉수트 여왕이 지은 붉은색 사암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문 신의 방주를 보관하는 저장고를 지었다. 또한 중앙의 대신전 건물 주위에 벽을 세우고 창고, 부신전 등을 연달아 세웠으며 세드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석상을 크게 세워 장식했다. 카르나크 신전 동편에는 이집트 역사상 최대 높이의 오벨리스크를 세우기 위해 미리 기단을 닦아놓았다. 다만 이 오벨리스크는 35년 후인 투트모세 4세 시기에야 완성되었고, 그마저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떼어가서 현재는 로마의 라테라노 광장에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바로 옆에 세워 한 쌍으로 세우는 오벨리스크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지만, 그 와중에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주변에는 벽을 둘러 잘 안 보이게 해버렸다. 그 업보인지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는 지금도 카르나크 대신전에서 멀쩡히 자리 보전 중이지만, 투트모세의 오벨리스크는 지금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그 곳의 히포드로메 광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 34번째 무덤(KV34)인데, 내부 벽화가 정복왕으로 알려진 그의 명성이 무색하게 상당히 수수한 편이다. 벽화 몇 점은 온전히 부조를 새긴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려둔 것에 불과하며, 비문 또한 완전한 신성 문자라기보다는 신성 문자와 신관 문자의 중간 단계에 가깝다. 추가로 그의 미라는 무덤 안이 아니라, 참으로 뜬금없게도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근처의 무덤(DB320)에서 제18 ~ 19왕조의 다른 파라오들과 함께 발굴되었으며 그나마도 도굴꾼들에 의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14] 미라는 1881년 발견되었지만 무덤은 그것보다 뒤늦은 1894년 프랑스의 빅토르 로레에 의해 발견되었다.[15] 즉, 미라의 상태를 볼 때 무덤이 이미 도굴되었다는 것은 발견 전에도 기정사실화 되었던 것이다. 무덤은 높은 절벽 중턱에 뚫어 놓은 형태였는데 무덤 건설 당시 석공들이 계단을 만들어 굴을 뚫어 만들고 장례가 끝나고 봉인한 후 계단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탈 털려서 발견 당시 내부는 엄청난 폐허였으며 명성이 높았던 파라오답게 부장품은 극히 일부만 수습되었다. 거기다 말기 왕조 시대에 재사용된 누군가의 미라가 안장되어 있었다.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데이르 엘 바하리 위쪽의 무덤에서 제18왕조와 제19왕조의 파라오들인 아모세 1세,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2세,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람세스 9세, 그리고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된 미라는 1880년대에 미라 해체 작업을 통해 감싸고 있던 붕대가 모조리 풀려나갔고, 1886년에 다시 붕대를 감아 원상태로 되돌려놓았다. 당시 미라의 붕대를 풀었던 가스통 마스페로의 말에 의하면 이미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도굴꾼들은 붕대 사이사이에 숨겨진 부적이나 보물들을 찾기 위해 미라에 흠집이 나는 것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고 마구 미라를 헤집거나 내동댕이쳐댔다. 게다가 불과 몇 년 전쯤에 데이르 엘 바하리의 무덤을 발견한 아마추어들이 호기심에 미라의 붕대를 마음대로 찢고 풀어버린 탓에 미라 자체에도 심각한 흠집이 가있었다. 그나마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파라오를 위해 제작된 목재 관에 들어있었고,[16] 얼굴 부분은 그나마 봐줄만한 상태였다. 현재 그의 미라는 카이로의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있다. 참고로 그의 키는 대략 161.5cm 정도였다고.[17]

3. 여담



[1] 확실하지 않다.[2] 맨 위의 카르투슈에 쓰여진게 즉위명으로 메네 케페르 라로 읽는다. 뜻은 "태양의 나타남은 영속된다."이다.[3] 아래 설명을 보면 나오지만 투트모세 3세의 업적은 대체로 투트모세 1세와 함께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정복왕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투트모세 3세로 보이지만 이집트 학자들은 기록을 근거로 볼 때 투트모세 1세가 최대 판도를 넓힌 왕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상당하다.[4] 17차례도 최소한으로 잡은 수치. 기록이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은 것까지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5] 그의 업적은 대부분 테베의 카르나크 대신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카르나크의 벽화를 보고 알아낸 것들.[6] 인근 가나안 계열의 왕국.[7] 각각 1만 명 정도가 부딪혔던 것으로 추정된다.[8] 그의 할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가 유프라테스 강에 도달한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 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유역에 진출한 대역사였다. 이 당시 이집트 인들은 나일 강만 보고 살았기에, 나일 강과 반대로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강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투트모세의 칭호 중에는 역류를 건넌 자라는 호칭이 있다.[9] 투트모세 3세는 이때 할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세운 기념비 옆에 자신의 정복 기념비를 세우고는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돌아왔다. 또한 시리아에서 코끼리 사냥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였는데, 그 외에도 다양한 동물들을 이집트로 데리고 와 아문의 대신전인 카르나크 신전에 바쳤다. 이 모든 정복 사업이 람세스 2세마냥 쩌리 의혹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다.[10] 물론 이집트 파라오가 졌다고 기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11] 레바논부터 에돔 지방까지 넓게 퍼져 살던 유목집단들 중 하나.[12] 그의 장제전은 데이르 엘 바하리로 알려진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바로 옆에 지어졌는데, 지반이 침하되어 무너지고 말았다.[13] 이스탄불 히포드로메 광장의 투트모세 3세 오벨리스크.[14] 코는 뭉개져 있고 양쪽 발은 아예 찢어져서 없는 상태였다.[15] 여담이지만 이 무덤 다음으로 발견한 무덤이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이며 역시 빅토르 로레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는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를 포함하여 DB320처럼 다른 무덤에서 이장해 온 미라들이 대거 발견되었다.[16]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들은 관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등 보존 상태가 처참했었다. 그래서 미라들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추가 훼손을 우려해 붕대조차도 풀지 못할 정도였다.[17] 다만 측정에 사용된 투트모세 3세의 미라가 발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161cm보다는 컸을 것이 확실하다.[18] 가나안 쪽으로 병력을 돌린 기록이 있었고, 그 원정이 그의 마지막 원정이었다는 것, 그리고 장남인 웨벤세누도 진짜로 일찍 죽어서 결국 그의 차남이자 투트모세 3세의 손자 투트모세 4세가 즉위한 것을 근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