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9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 Amenhotep II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 | |
출생 | 기원전 1401년/1400년 | |
사망 | 기원전 1353년/1351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391년/1388년 ~ 기원전 1353년/1351년 (약 38년) | ||
전임자 | 투트모세 4세 | |
후임자 | 아케나톤 | |
부모 | 아버지 : 투트모세 4세 어머니 : 무템위야 | |
배우자 | 티예, 길루케파, 타두케파, 시타문, 이제트 | |
자녀 | 아케나톤 | |
무덤 | 왕가의 계곡 WV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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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9대 파라오. 후대에 등장하는 람세스 2세에 묻힌 감이 있지만 이집트 신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이집트인들은 그를 '아멘호테프 대왕'이나 '아멘호테프 대제'로 추앙해 부르기도 했다.아멘호테프 3세는 약 3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재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2세 등을 포함해 전임 파라오들이 연이어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이집트의 강역을 넓게 확장한 것과 달리, 아멘호테프 3세는 정복 전쟁보다는 내치와 내수 번영에 집중했다. 평화를 추구했던 아멘호테프 3세의 시대에 이집트에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왕궁을 신축하거나 나일 강변에 거상을 세우는 등 수많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열렸고, 문화적으로는 빠른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경제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바빌론 등을 포함해 부유한 메소포타미아의 대도시들과 교역하며 막대한 양의 물화들이 양국 사이를 오갔으며 이집트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 기간 내내 평화를 구가했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지킬 것은 지키고 내줄 것은 내줄 줄 알았다. 또한 혼자서 사자 10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1] 일신의 무력도 굉장했기에 여러모로 위대했던 파라오.
2. 통치
2.1. 즉위 이전
아멘호테프 3세가 등장하기 이전 이집트에서는 한창 하트셉수트 여왕, 투트모세 3세 등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이집트의 강역을 역대 최대로 늘려놓은 시점이었다. 5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좌를 지킨 투트모세 3세의 경우 정복왕이라는 칭호를 따낼 정도로 수많은 정복 원정을 펼쳤는데, 시리아로 진군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당시 최강대국들 중 하나였던 미탄니를 기습침공해 승리를 거두는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머나먼 이집트의 파라오가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올 줄 상상도 못했던 미탄니 군대는 그대로 쓸려나갔고, 투트모세 3세는 유유히 빈집털이하다가 막대한 전리품을 얻어 이집트로 개선했다. 투트모세 3세는 이후에도 시리아와 레반트 일대를 심심할 때마다 공격하며 이집트의 영향권을 크게 늘려놓았고, 기원전 1425년 경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투트모세 3세가 죽은 이후 즉위한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와 적대적인 공존 정책을 취했다. 26년 간 이집트를 통치한 아멘호테프 2세는 시리아로 진군해 7명의 적군 사령관을 죽이는 등 많은 공적을 올렸고, 3번에 걸친 원정에서 갈릴리 호수 이남까지 진출하여 1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을 끌고 왔을 정도였다. 아멘호테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투트모세 4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투트모세 4세가 그 유명한 기자의 대스핑크스[2] 일화의 주인공이다. 한 왕자가 모래 위에서 잠자고 있던 도중, 왕자의 꿈 속에 스핑크스가 나타나 자신을 왕자가 누워 자고 있는 모래 아래 속에서 꺼내준다면 보답으로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왕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인부들을 시켜 모래를 파내 그 속에 묻혀있던 스핑크스를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후 왕자는 진짜로 파라오로 즉위했고, 그가 바로 투트모세 4세라는 이야기. 투트모세 4세가 이 이야기를 비석에 새겨 스핑크스 앞발 사이에 새겼는데(통칭 '꿈의 비문') 그 비석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알려지게 된 이야기이다. 학자들은 스핑크스 이야기 자체는 숭배를 위한 허구라고 보고 있지만, 이를 통해 투트모세 4세가 원래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으며 어쩌다가 덜컥 왕위를 차지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2.2. 39년 간의 재위
아멘호테프 3세는 투트모세 4세와 무템위야 왕비가 기원전 1401년 경에 낳은 아들이었다. 이후 투트모세 4세가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자 대략 6세 정도의 매우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섭정들이 대신 이집트를 맡아 통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재위 2년 되는 해에 티예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재위 11년 되는 해에 티예 왕비의 고향 자카루에 인공 호수를 만들라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재위 10년에 100마리가 넘는 사자들을 단신으로 상대해 죽였다는 설화가 기록에 남아 전해져 내려오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이 사자 100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아마도 과장되거나 미화를 위한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이를 통해 아멘호테프 3세 개인의 무력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는 것까지는 어림짐작 할 수 있다.아멘호테프 3세는 뛰어난 무예가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의 재위기 동안 파라오는 쿠시 지방으로 한 번 밖에 원정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도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거나 적국에 맞서 강역을 넓히려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 재위 5주년에 그는 누비아의 쿠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친림했고, 결과적으로 반란을 손쉽게 제압했다. 이후 아스완과 누비아 인근에 석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렸는데 이 석비는 아직도 남아있다.
파라오는 즉위 내내 정복 활동이나 무력 시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 거대한 궁전 축조나 축제 개최같은 내정에 신경을 많이 쏟았다. 테베 인근의 말카타 지방에 '페르-하이', 즉 '찬양의 궁전'을 지었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 역사상 가장 거대한 궁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진흙 벽돌들을 쌓아 축조했고 약 18년 동안 지어졌을 정도로 공사 규모가 거대했다. 재위 29년에 궁전이 마침내 완공되자 파라오는 바로 이 궁전으로 입주해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는 재위 30주년, 34주년, 37주년 되는 해에 이 궁전에서 '세드 축제'를 집전했다. 세드 축제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유서가 깊은 축제로, 주로 파라오의 공덕을 찬미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축제는 한 번 열릴 때마다 대략 2달 정도 지속되었는데 아멘호테프 3세는 이 축제를 위해 말카타 궁전에 아문 신에게 바치는 홀을 짓거나 대신전을 신축하여 봉헌하는 등 많은 건축물들을 지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아멘호테프 3세가 상하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왕으로서 다시 한번 대관식을 치르는 행사였다. 많은 인파들이 이 행사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세드 축제는 이집트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그의 재위 도중 이집트의 외교 관계에 대한 상세 내용들은 대부분 아마르나[3] 지방에서 발굴한 '아마르나 문서'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아마르나 문서란 파라오가 아시리아, 미탄니, 바빌론 등을 포함한 중동 각국의 군주들과 교류했던 서신 내용을 담은 토판으로, 아멘호테프 3세 재위 30주년 되는 해부터 파라오 아케나텐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에 걸친 이집트의 외교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서로 금이나 보물 따위를 보내고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물건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 따위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나마 눈여겨 볼만한 내용들 중에는 바빌론의 왕이 파라오에게 그의 딸을 바빌론으로 보내 왕비로 맞게 해달라고 한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 등이 있다. 굳이 파라오가 바빌론의 부탁을 잘라 거절한 이유는 혹시 바빌론이 왕비의 혈통을 핑계로 아멘호테프 3세 사후 이집트 왕위를 주장할까봐 우려했기 때문.
아멘호테프 3세의 장남은 투트모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왕세자로 있었다. 그러나 투트모세 왕세자가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차남인 아멘호테프가 왕세자직을 물려받았고, 이가 바로 훗날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케나텐[4]이 된다. 아케나텐은 아버지와 함께 일정 기간 동안 섭정을 맡으며 사실상의 공동통치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멘호테프 3세의 말년에 파라오가 날이 갈수록 관절염과 비만 증세가 심해졌고, 이에 따라 건강이 심각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노년을 묘사한 티예 왕비 무덤의 벽화에 아멘호테프 3세는 약하고 왜소해진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의 미라를 학자들이 분석해본 결과 심한 충치에도 시달리고 있어 매우 고통이 심했을 것이다. 결국 아멘호테프 3세는 시름시름거리다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후계자 아케나텐이 즉위하며 이집트 사회에 대격변을 일으킨다. 아멘호테프 3세는 왕가의 계곡에 안장되었다.[5]
3. 여담
멤논의 거상 |
아멘호테프 3세를 묘사한 조각상은 현재 약 250여 개가 남아있다. 모든 이집트 파라오들 중 가장 많은 수의 조각상들을 후대에 남기는 데에 성공한 것인데, 심지어 신왕국 최고 황금기를 이끈 람세스 2세보다도 많은 조각상들을 남겼다. 아멘호테프 3세는 재위 기간 내내 아문을 모시는 대신관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실어주었고, 수많은 재물을 신전에 기부하며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케나텐은 아문 신앙을 혐오했다. 아케나텐은 아문 신앙을 부정하고 유일신이자 태양신인 아텐 종교를 새로운 국교로 정하고 널리 포교했는데, 워낙 종교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지 자신의 이름이었던 '아멘호테프'마저도 개명했을 정도였다. 아케나텐은 이름을 바꾼 후 전국에 있는 아버지의 석상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들을 열심히 지우고 다녔다. 때문에 이름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조각상들까지 포함하면 아멘호테프 3세의 조각상은 더욱 많을 것이다.
아멘호테프 3세는 멤논의 거상들을 포함해 테베의 카르나크 대신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당시 카르나크 신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이 이중으로 서있었는데, 이 앞쪽에 탑문 한쌍을 더 세워서 삼중으로 세웠다. 새로운 탑문과 기존의 탑문 사이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열주들을 세워 회랑을 만들었고 오벨리스크를 세워 태양신 아문, 달의 신 콘수, 그리고 무트 등을 새겨넣었다. 그 외에 카르나크에 600개에 달하는 세크메트 여신의 석상들을 기부했으며 자신을 묘사한 여러 조각상들을 카르나크 곳곳에 박아넣었다. 또한 테베에 룩소르 신전을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그 외에도 나일 강 서안에 거대한 장제전을 만들어 제 위엄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나일 강이 홍수가 날 때마다 물에 잠기는 지역에 세워서 아멘호테프 3세 사후 200년도 되지 못해 완전히 버려졌다. 이후 신전의 석재들은 후대 파라오들이 자신 이름으로 신전이나 궁전들을 세우기 위해 제각기 떼어가면서 하나하나 사라졌고,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장제전의 흔적이 바로 위의 '멤논의 거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