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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어 Candaroğulları / İsfendiyaroğulları영어 Candar / Isfendiyar dynasty
1292년부터 1461년까지 아나톨리아 중북부의 파플라고니아 지방을 지배하던 왕조. 이스펜디야르 왕조로도 불린다.
2. 역사
1330년의 아나톨리아
왕조의 기원은 룸 술탄국의 술탄 메수트 2세가 파플라고니아의 주요 도시 카스타모누를 잔다르 왕조의 영지로 하사한 것이다. 잔다르 왕조는 건국 당시부터 사실상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다. 잔다르 왕조는 1309년 2대 베이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고부터 30년 동안 왕위 계승 분쟁으로 분열되었다가, 1339년에 이르러 이브라힘이 마침내 베이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잔다르 왕조는 잔다르 왕조 이전에 파플라고니아를 통치하던 베이국인 페르바니 왕조를 멸하고 파플라고니아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잔다르 왕조는 오래 가지 못해서 다시 내전에 휩싸인다. 1383년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1세의 지원을 받은 쉴레이만 2세가 아버지 바예지트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카스타모누를 점령한 것이다. 이후 바예지트는 시노페로 달아났고, 이는 또 다시 잔다르 왕조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쉴레이만 2세는 사실상 무라트 1세의 봉신으로서 오스만 술탄국의 전쟁에도 종군했다. 그러나 무라트 1세의 사후 뇌제 바예지트 1세가 즉위하였고, 바예지트 1세는 1391년 카스타모누를 공격하여 정복하고 쉴레이만 2세를 살해하였다.
한편 시노페에 남아있던 잔다르 왕조 역시 비슷한 시기에 오스만 술탄국의 봉신이 되지만, 자치권을 유지하는데는 성공하였다.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잔다르 왕조는 카스타모누 일대를 돌려받았고, 오스만 내전기 동안은 중립을 유지하며 영토를 간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잔다르 왕조는 1423년에 무라트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 다시 카스타모누를 상실한다. 이후 오스만 술탄국의 봉신으로서 조용히 살아남아 있던 잔다르 왕조는 1461년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흐메트 2세에 의하여 합병당했다. 다만 잔다르 가문은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 좋은 대우를 받으며 20세기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