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의 역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상고대 | 미탄니 | 히타이트 | 트로이 | 미케네 문명 | |||||
히타이트 | ||||||||||
신 히타이트 | 프리기아 | 리디아, 리키아, 카리아 등 | 그리스 (이오니아 / 도리스 / 아이올리스) | |||||||
신아시리아 제국 | 리디아 | |||||||||
메디아 | ||||||||||
고전 고대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 |||||||||
마케도니아 제국 | ||||||||||
헬레니즘 국가 (안티고노스 / 리시마코스 / 셀레우코스 / 프톨레마이오스 / 아탈로스 / 비티니아 / 갈라티아 / 폰토스 / 카파도키아 / 콤마게네) | ||||||||||
로마 제국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중세 | 동로마 제국 | ||||||||
우마이야 칼리파국 | 동로마 제국 | |||||||||
아바스 칼리파국 | ||||||||||
동로마 제국 | ||||||||||
셀주크 제국 / 1차 아나톨리아 베이국 (스미르나 / 다니슈멘드 / 멩귀치 왕조 / 아르투크 / 샤아르멘 / 살투크) | ||||||||||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 룸 술탄국 | 동로마 제국 | ||||||||
룸 술탄국 | 니케아 제국 | 라틴 제국 | 트라페준타 제국 | |||||||
동로마 제국 | ||||||||||
맘루크 | 2차 아나톨리아 베이국 (오스만 / 카라만 / 아이딘 / 잔다르 / 게르미얀 / 에레트나 / 멘테셰 / 사루한 / 카라시 / 하미드 / 둘카디르 / 에슈레피 / 자니크 / 아히 형제단) | 동로마 제국 | ||||||||
라마잔 | 카라만 / 잔다르 / 둘카디르 | 오스만 술탄국 |
근현대 | 오스만 제국 | |||
앙카라 정부 [[튀르키예 독립 전쟁| 그리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 | ||||
튀르키예 공화국 | }}}}}}}}} |
1. 개요
튀르키예어 Aydınoğulları Beyliği (아이든오울라르 베일리이)[1]1308년부터 1426년에 이르기까지 아나톨리아 서남부를 통치했던 아나톨리아 베이국. 14세기 초 당시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에게해를 호령하였으나 스미르나 십자군 이후 쇠퇴하였고 결국 오스만 술탄국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현 터키 아이든 지명의 유래이다.
2. 역사
2.1. 성립
13세기 말에 이르러 튀르크인들의 대이동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통치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각각 1293년~1295년, 1298년~1300년 동안 튀르크인들의 침입을 잘 막아내던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와 요안니스 타르카니오티스가 모두 경질당하면서 튀르크인들의 침략이 재개되었다. 14세기 초에 이르면 더 이상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방어선은 튀르크인들을 상대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02년에 국운을 건 대대적인 군사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알란족 용병들의 이탈로 군세가 대거 약화되었고 바페오스 전투에서 오스만 1세가 이끄는 튀르크군에게 패배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딤보스 전투에서도 패배한 아나톨리아의 동로마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아이딘 왕조를 세운 부족은 이 무렵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정착하였던 부족 중 하나였던 게르미얀 부족의 산하 부족이였는데,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변모하게 된다.2.2. 전성기
아이딘 왕조는 14세기 초 2차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의 형성 당시 게르미얀 왕조와 함께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건국 당시부터 과거 동로마 제국의 주요 항구도시 중 하나였던 스미르나(이즈미르)를 보유했던 덕분에 아이딘 왕조는 다른 베이국들과는 달리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아이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우무르 베이(재위 1334-1348)의 치세에 아이딘 왕조는 수백여척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이딘 왕조의 함대는 동지중해의 해적으로서 에게해 뿐만 아니라 동지중해 전역과 흑해까지 약탈했다고 한다. 이런 아이딘 해적들의 만행에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까지 혀를 내둘렀다. 또한 우무르 베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6세의 친우였고, 그가 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에서 승리하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당시 아이딘 왕조는 2만8천명의 군대와 380척의 전선을 파견했다고 한다.2.3. 스미르나 십자군
그러나 아이딘 왕조의 동지중해에서의 해적질은 교황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스미르나 십자군을 일으켜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스티의 앙리, 키프로스 국왕 위그 4세와 협력하였고 아이딘이 눈엣가시였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구호 기사단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344년, 팔레네 전투에서 십자군은 우무르 베이의 군대를 격파했고, 십자군은 스미르나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1345년 1월 17일 우무르 베이의 기습으로 예배 중이던 십자군들이 학살당했고, 십자군의 수뇌부들도 대거 사망하고 스미르나도 다시 뺏기는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이에 교황은 1345년 11월 다시금 십자군을 파병하였고, 1346년 아이딘군을 격파한 십자군은 스미르나의 일부를 재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5년간 스미르나 십자군과 아이딘 왕조는 도시를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우무르 베이는 1348년 십자군과의 해전에서 대패하였고, 그 역시 스미르나를 공성하던 중 직접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1351년에 이르러 휴전이 맺어지면서 스미르나는 기독교도들의 영토로 굳어지게 되었다. 스미르나는 1402년 티무르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기 전까지 기독교도들의 도시로 남아있었다.2.4. 멸망
스미르나 십자군 이후 아이딘은 옛 영광을 잃어버리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만고만한 세력으로 전락한 아이딘은 1390년 오스만 술탄국에게 정복당하였고,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잠시 독립하였다가 1425년 완전히 오스만 술탄국에게 정복당하게 되었다.[1] 표제어가 아이딘으로 되어있으나 Aydın이다. 즉 아이든이 맞는 발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