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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 |||
출생 | 1360년 경 | ||
오스만국 에디르네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에디르네도 에디르네) | |||
사망 | 1403년 3월 8일 (향년 43세) | ||
티무르 제국 악셰히르 (現 튀르키예 중앙아나톨리아주 콘야도 콘야시 악셰히르구) | |||
묘소 | 부르사 바예지트 1세 모스크 | ||
재위기간 | 오스만 술탄 | ||
1389년 6월 16일 ~ 1402년 7월 2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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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귈치첵 하툰 (출신: 동로마 제국) | ||
형제자매 | 야흐시 베이, 야쿠브 첼레비, 사브즈 베이, 셰자데 이브라힘, 네피세 멜렉 하툰 | ||
후궁 | 술탄 하툰 (출신: 게르미얀 왕조[2]) | ||
데블렛 하툰(출신: 게르미얀 왕조 추정) | |||
하프사 하툰(출신: 아이든 공국[3]) | |||
데스피나 하툰(출신: 세르비아 공국[4]) | |||
자녀 | 셰자데 에르투으룰, 이사 첼레비, 무스타파 첼레비, 무사 첼레비, 셰자데 이브라힘, 셰자데 카슴, 셰자데 유수프, 셰자데 하산, 무사 첼레비, 쉴레이만 첼레비, 셰자데 외메르, 메흐메트 1세, 이르혼두 하늠, ............. 하늠, 파샤 멜렉 하툰, 술탄 파트마 하늠, 오루즈 하늠, 훈디 파트마 하툰, 파트마 하늠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이명 | 뇌제 (Yıldırı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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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술탄국의 제4대 베이이자 2대 술탄.일명 뇌제(雷帝)로 무라트 1세의 아들이자, 메흐메트 1세의 아버지. 바야지드, 베야즈트 등으로도 불린다(Bayezid, Bayazid, Bajazet, Beyazit, Bejazid or Bayazit). 튀르키예어로는 '바예지트'라고 부르며,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한 신속하고 과감한 용병술로, '이을드름(ییلدیرم: 번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Yıldırım)이라 불렸다.[5] 그는 13년간 재위하며 오스만의 영토를 2배로 늘려놓는, 오스만 역사상 전무후무한 속도의 정복을 이루었다. 비록 티무르에게 패배한 후 상당 부분을 날려먹긴 했지만..[6]
흔히 티무르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티무르에 의해 감금당한 일화 때문에 티무르 최대의 라이벌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로 대립한 것은 채 3년도 안되는 기간에 불과하다. 애초에 서로 국경을 접한 것도 앙카라 전투의 3년 전인 1399년에 이르러서이다. 실제로 티무르의 최대 라이벌인 인물은 죽을 때까지 티무르와 가장 많이 대립 했던 인물이자 티무르와 악연이 깊은 인물인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토크타미쉬 칸이었다.
2. 생애
18세기의 묘사
2.1. 어린시절
1354년경 부르사 왕궁에서 무라트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2. 즉위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 직후에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 귀족에게 암살[7] 당할 때 아버지를 수행하던 바예지트 1세는 동행한 이복 동생 야쿱[8]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러냈고, 무라트 1세가 죽은 사실을 몰랐던 야쿱은 아버지의 막사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바예지트에게 살해당했다[9] 야쿱의 동복동생은 이전에 안드로니코스 4세(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5세의 아들)와 손잡고 각자의 아버지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처형되었으므로, 바예지트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2.3. 파죽지세의 정복
즉위 당시 오스만 술탄국 (1389년)
1400년, 즉위 11년차의 영토. 주황색은 앙카라 전투 이후 상실한 영토. 다뉴브 ~ 유프라테스의 판도를 확보하였다.
즉위 후 적극적인 외정에 나서게 되는데, 발칸 방면에서는 세르비아 공국, 보스니아, 왈라키아 공국 등을 속국으로 하면서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아나톨리아(현재의 튀르키예 지역)방면에 세 차례나 출병, 오스만과 함께 룸 술탄국에서 독립해나온 튀르크계 공국들을 대거 병탄했다.
2.3.1. 서부 아나톨리아 정복
1386년에 오스만 술탄국과 싸운바 있던 카라만 후국의 알렛딘은 1차 코소보 전투에서 무라트 1세가 전사한 틈을 타 재차 오스만 영토를 침공하였다. 이에 바예지트는 신속히 아나톨리아로 복귀하였고, 알렛딘은 철수하였다. 그는 이번 기회에 유럽 진출의 발목을 잡는 카라만을 일망타진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가지, 즉 성전사 이념으로 국가를 세운 오스만 술탄국의 특성상 같은 이슬람 토후국들 (그들은 종종 오스만 조에게 유럽 전선에 자원하는 전사들을 무상 제공하였음)에 대한 전쟁은 명분상 불리하였다. 따라서 바예지트는 울레마들로 하여금 이를 합리화시키는 파트와를 내리게 하였고,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예니체리와 세르비아나 동로마와 같은 기독교 제후들을 원정군의 주력으로 삼았다. 한편 1390년 바예지트는 내전을 벌이던 동로마의 요안니스 7세와 마누일 2세를 아나톨리아 내륙에 남은 마지막 동로마령인 필라델피아의 포위에 보조군을 이끌고 참전하게 하였다. 10년 넘게 항전을 이어오던 도시가 그해 함락되며 오스만 조의 아나톨리아 장악력은 더욱 공고해졌다.2.3.1.1. 제1차 카라만 정벌
알렛딘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유일하게 오스만에 맞설 수 있던 시바스의 카디 부르한 앗 딘과 동맹하였다. 1390년 양국 사이의 군소 국가들을 정리한 바예지트는 카라만 조의 수도 콘야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술탄국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후국들이 카디 부르한 앗 딘 하에 연대하여 개입을 시사하자 바예지트는 치세 초반의 무리한 전쟁에 나서는 대신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하는 휴전을 맺고 철수하였다. (1391년) 1년도 안되는 원정으로 바예지트는 아이든, 사루한, 멘테셰, 테케, 하미드, 게르미얀 후국 등 서부 아나톨리아를 평정하고 아크셰히르, 니으데 등을 점령하는 업적을 세웠다. 콘야 포위 후, 바예지트는 자신을 피해 도주한 제후들의 망명을 받아준 잔다르 후국 (카스타모누)으로 진격해 시노페 등을 정복하였다. 그후 부르한 앗 딘이 직접 나서 크르크딜림 전투에서 오스만 군을 저지함으로써 2년에 걸친 바예지트의 아나톨리아 원정은 종료되었다. (1391년 7월)2.3.1.2. 세르비아 평정
코소보 전투 후 바예지트는 전사한 라자르의 딸 올리베라 데스피나와 결혼하였고, 이로써 처남이 된 데스포티스 스테판 라자레비치에게 자치를 보장해주었다. 그럼에도 마케도니아 일대의 서부 세르비아 제후들은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바예지트의 부재기에 루멜리아를 맡은 이이트 베이가 1391년 스코페를 점령한 후에야 잠잠해졌다. 스코페는 오스만 술탄국에 있어 발칸 내륙부의 주요 군사 기지가 되었고, 세르비아는 스테판 라제레비치의 통치 하에 오스만 술탄국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았다. 한편 동로마 해군을 소환해 아나톨리아 원정을 지속하려던 바예지트는 1392년 5월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가 다뉴브를 넘어 침공하자 유럽으로 향하였고 세르비아의 방어에 성공하였다. 동방 원정을 취소한 바예지트는 1393년 친히 아나톨리아 북부의 아마시아를 방문, 그곳에서 현지 튀르크 영주들의 봉신 서약을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2.3.2. 불가리아 원정
1393년 바예지트는 다르다넬스를 건너 마케도니아의 기독교 제후들을 포함한 대군을 편성한 후 장남 쉴레이만 첼레비에게 지휘를 맡겨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를 공격하게 하였다. 사면에서 도시를 포위한 오스만 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학살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터르노보 수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였지만, 3개월의 포위 끝에 차르에베츠 방면 성벽이 무너지자 7월 13일 항복하였다. 니코폴리스에 웅거한 차르 이반 시슈만 대신 방어를 이끈 대주교 에브티미는 직접 오스만 진영으로 향하여 협상을 시도하였다. 쉴레이만은 얌전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지만,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대주교좌인 그리스도 승천 교회는 모스크로 전환되었고 나머지 교회들도 모스크나 목욕탕, 심지어 마구간으로 바뀌었다. 궁전들은 모두 방화되어 파괴되었고, 쉴레이만은 총독을 임명한 후 회군하였다. 그 총독은 반항적인 주민들과 보야르 (귀족)들에게 사면을 약속하며 집결시킨 후 모두 처형하였다. 대주교 에브티미 역시 그들 중에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형 집행이 유보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2.3.3. 동로마 원정과 콘스탄티노플 봉쇄
아나돌루 히사르
한편 바예지트는 오스만 측 볼모였던 마누일 2세가 1391년 부황 요안니스 5세가 사망하자 (자신의 허가도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황제에 즉위한 것에 분노하였다. 칼케돈 근교의 크뤼소폴리스를 기습 점령, 파괴한 바예지트는 1394년 4월 테살로니키를 점령하였다. 이후 그는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많은 성채를 구축하였다. 그중 유명한 것이 1395년에 축조된 아나돌루 히사르.
2.3.4. 왈라키아 원정
1388년 도브루자 전제군주국의 반란 후 현지에 주둔하던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 전투에 차출되어 대부분 철수하였다. 그러자 1390년 왈라키아 공 미르체아 1세가 도브루자를 침공, 데스포티스인 이반코를 축출하고 일대를 왈라키아에 합병하였다. 1392년 오스만 군과 돌아온 이반코는 왈리키아 군을 축출하고 복위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를 평정한 바예지트는 1394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를 포함한 4만 대군과 다뉴브를 건너 왈라키아로 진군하였다. 1만의 병력밖에 없던 미르체아는 게릴라 전으로 맞섰고, 10월 습지인 로비네에 이르러 분산된 오스만 대군을 습격하였다. 왈라키아 궁수들은 세르비아 제후 마르코 므르냐체비치 등 적장들을 저격하였고, 이로써 오스만 진영이 흐트러지자 왈라키아 군대는 술탄의 막사로 돌격하였다.다만 예니체리의 결사 항전으로 왈라키아 군 역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미르체아는 오스만 군이 조카 블라드 1세를 옹립하여 진군해오자 헝가리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바예지트는 블라드를 통해 왈라키아를 복속시키고 1395년 도브루자를 합병한 후 회군하였다. 다만 1397년 헝가리의 도움으로 블라드를 몰아내고 복위한 미르체아는 그해와 1400년 오스만 군의 다뉴브 도하 시도를 저지하며 왈라키아의 독립을 지켜내었다. 따라서 바예지트의 왈라키아 원정은 일시적인 성공에 그쳤다. 왈라키아는 미르체아가 사망한 후 1417년에야 오스만 술탄국에 완전히 복속한다.
2.3.5. 니코폴리스 전투와 불가리아의 멸망
불가리아를 사실상 멸하고 왈라키아를 복속시켜 전방을 안정시킨 바예지트는, 후자의 원정에서 돌아온 후인 1396년 6월 바예지트는 불가리아의 임시 수도 니코폴리스를 함락, 차르 이반 시슈만을 살해하였다. 이에 동로마와 불가리아 구원을 위해 헝가리 및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십자군이 결성되나, 1396년 9월 25일 다뉴브 강변에서 격파된다(니코폴리스 전투).[10] 승전 이후 불가리아의 마지막 남은 영토인 비딘으로 진군한 메흐메트는 1396년 12월 도시를 함락하였다. 포로가 된 마지막 차르 이반 스라치미르는 이듬해 옥사하였다. 200년을 이어온 불가리아 제2제국의 멸망이었다.
네이버 지식인의 니코폴리스 전투 참고자료
2.3.6. 제2차 카라만 정벌
한편 1394년, 티무르가 아나톨리아의 동맹을 모색하자 알렛딘은 재빨리 그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오스만 술탄국으로부터 구원자로 여겼던 티무르는 인도와 시리아 원정에 전념하며 1400년까지 아나톨리아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렛딘은 에레트나 후국을 침공하였고 격퇴당하였다. 그리고 바예지트가 왈라키아 원정에 나서자 알렛딘은 재차 오스만 영토를 침공, 그 전진기지였던 앙카라를 공격하여 아나톨리아의 베일렐베이 (군사령관) 티무르타쉬 파샤를 사로잡았다.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한 바예지트는, 다시 후방을 때린 카라만에 분노해 아나톨리아로 돌아왔다. (1397년 가을) 서유럽 연합군을 격파해 지중해 전역에 위세를 떨친 바예지트는 이번에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격, 알렛딘의2.3.6.1. 동부 아나톨리아 정복
콘야 함락 이후 바예지트는 삼순, 카니크 등 아나톨리아 북부를 정복하였고 카디 부르한 앗 딘이 사망하자 그의 영토 (에레트나 후국)까지 손쉽게 장악하였다. (1398년) 그에 멈추지 않은 바예지트는 1399년 맘루크 술탄 바르쿠크의 사망 및 어린 파라즈로의 계승을 틈타 맘루크령 말라티야를 점령하였고, 에미르 무타하르탄이 다스리던 에르진잔 역시 점령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술탄국의 영토는 처음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접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는 다뉴브에 닿았으니, 11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강역을 얼추 확보한 것이었다.2.4. 티무르와 앙카라 회전
이렇듯 유럽 세력과 아시아 세력 모두에게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가던 바예지트 1세이나, 그에게 무릎을 꿇은 아나톨리아 지방의 군주들은 마침 동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오던 티무르를 의지하게 된다. 동부 아나톨리아 정복과 함께 오스만 술탄국은 티무르 제국과도 접경하게 되었는데, 패주한 에미르 무타하르탄이 티무르 측에 망명하였다. 티무르는 정복한 투르크계 공국들을 모조리 재건하라는 요구를 하고, 격분한 바예지트 1세는 이를 거절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11] 또한 티무르의 이라크 정복을 피해 바예지트 측에 망명한 잘라이르 왕조의 술탄 아흐마드와 카라 코윤루의 카라 유수프에 대한 티무르의 송환 요구를 바예지트가 거절하며 대립은 격화되었다.2.4.1. 티무르의 동부 아나톨리아 침공
1399년 말,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1400년 초까지 조지아를 원정한 후 아제르바이잔 목초지에서 여름을 보냈다. 1400년 8월 티무르는 동부 아나톨리아 원정에 나서 에르진잔을 점령, 무흐타르탄에게 돌려주었고 목적지인 시바스로 진군하였다. 그곳에 주둔하던 바예지트의 장남 쉴레이만은 티무르가 다가오자 도주하였고, 18일간의 포위 끝에 시바스는 점령되었다. (1400년 9월 7일) 4천여 명의 아르메니아인 수비대는 티무르가 피를 흘리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자 그 말을 믿고 티무르에게 항복하였는데, 티무르는 바예지트에게 경고하는 뜻에서 항복한 수비대를 그대로 생매장시켜버렸다.2.4.2. 바예지트의 반격
1400년 11월 ~ 1401년 3월까지 시리아를 유린한 티무르는 마치 사마르칸트로 회군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에 잘라이르 조의 술탄 아흐마드가 망명지를 떠나 바그다드로 돌아왔는데, 그러자 티무르는 갑자기 남하하여 모술을 점령하였고 로스탐 휘하 2만 대군을 바그다드로 보내었다. 술탄 아흐마드는 재차 도주하였고 그의 부관 파라즈가 바그다드를 수비하였다. 1401년 6월 초 시작된 포위는 파라즈의 분전과 함께 한달 가량 지속되었고, 티무르 군대는 작열하는 이라크 태양 아래 일사병으로 큰 사상자를 내었다. 7월 9일 도시가 함락되자 티무르는 병사들에게 각각 2인 이상의 주민 수급을 가져오게 하였고, 이로써 바그다드의 주민들 중 9만이 학살당한 후 120개의 해골탑이 세워졌다. 그후 티무르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월동하였다.전쟁은 우리의 습성이요, 전투는 우리의 목표고, 종교를 위한 분투는 우리의 임무이다!
ㅡ 바예지트, 티무르의 망명자 송환 요구에 대한 답변
ㅡ 바예지트, 티무르의 망명자 송환 요구에 대한 답변
한편 그동안 바예지트는 동진하여 시바스와 에르진잔 등 실지를 수복하였고, 후자에선 무타하르탄의 처자식을 사로잡아 인질로 부르사에 보내었다. 티무르는 바예지트에게 재차 술탄 아흐마드와 카라 유수프의 축출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고, 둘은 서로를 모욕하는 내용의 편지를 긴 시간에 걸쳐서 주고받으면서 분노를 쌓아가게 된다.
2.4.3. 앙카라 전투
1402년 4월 초엽 아제르바이잔의 월동지를 떠난 티무르는 도중 조지아를 공격한 후 케마, 에르진잔을 점령하며 바예지트를 도발하였다. 이번에 결판을 내기로 한 바예지트는 병력을 총집결시켜 성공을 목전에 두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마저 과감히 포기한 후, 부르사에 대군을 결집시켰다. 그후 바예지트는 동진하여 앙카라에 당도하였다. 참모들은 바예지트에게 중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이자 언덕에 위치하여 방어 및 감시에 요긴한 앙카라에서 티무르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예지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티무르의 우월한 기병대가 기병전에 유리한 아나톨리아 평원에 진입하기 전에 (그리고 자신의 영토를 더 유린하기 전에) 동부의 산지에서 먼저 요격하기로 하였고, 앙카라에 소수의 수비대를 남겨둔 후 진군하였다.시바스로 향한 바예지트는 토카트에서 티무르의 분견대와 조우하였다. 하지만 교전 도중 바예지트는 티무르의 본대가 남쪽 카이세리로 우회하여 앙카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허를 찔린 바예지트는 전속력으로 회군하였고, 여름 더위 속에 수천명의 사상자를 속출하면서 7월 27일 저녁 앙카라 동북쪽 외곽에 당도하였다. 티무르는 이미 강의 물줄기를 돌려 오스만 측의 수자원을 박탈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앙카라를 포위하고 보급을 위해 상당수의 병력을 인근 약탈에 투입한 티무르 측에 대해 27일 당일 공격했다면 그나마 지친 오스만 군에도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바예지트는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공격을 결심하며 티무르 군이 재규합할 시간을 주었고, 행군으로 지친 오스만 군대는 수자원의 부재로 인해 갈증이 격화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402년 7월 28일, 둘은 드디어 앙카라에서 격돌하게 되는데[14], 바예지트 1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분전하나 튀르크인 병사들의 배신이 속출하면서 전선이 붕괴, 결국 패배하게 된다(앙카라 전투). 바예지트 1세는 퇴각중에 낙마하면서, 결국 포로가 된다.
2.5. 패배와 죽음
포로로 잡힐 당시를 묘사한 그림. 그림과 다르게 실제로는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정 반대로 바예지트가 40대 초반의 장년이었고 티무르가 70대를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티무르가 그를 가두어 두고 온갖 학대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15], 정중하게 대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예지트 1세가 이 패배와 구금으로 인한 울화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티무르의 성격으로 보든, 기록으로 보든 특별히 학대하지는 않았다는 게 현재의 통설이다. 학대했다는 기록은 선전물 성격이 짙은 튀르크 쪽의 기록에만 보이는 반면 역사학자들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료들에서는 일국의 군주답게 정중하게 대우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30세였던 세르비아 출신의 황후 올리베라 데스피나[16] 도 앙카라 전투 당시 바예지트와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잔치 때마다 불려나와 발가벗은 채 와인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세르비아의 초기 기록에서만 보이는데다 문제는 저 세르비아 기록에는 얼마 후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되어 있는데 비해, 실제로는 바예지트 1세가 사망한 이후 바로 풀려나서 세르비아로 돌아가 언니랑 남동생네를 왔다갔다하다가 1444년 72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너무 확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뉴스라는 게 정설이다. 바예지트가 티무르에게 엄청나게 학대받았다고 과장해서 기록한 튀르크 쪽 기록에도 이에 관련된 기록은 전혀 안 보인다는 점도 저 에피소드를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만든다. 하여간 현재는 세르비아의 극렬 민족주의자와 젊고 아름다운 일국의 황후가 알몸으로 술을 따른다는 묘사에서 에로틱한 망상을 하는 부류 외에는 이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예지트 사망 때까지 티무르 진영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이유도 아내로서 남편을 보살필 수 있도록 티무르가 배려 했다는 설이 통설이다.
중앙일보 분수대 올리베라 공주
세르비아 위키에 나온 올리베라 데스피나
연회때마다 올리베라 데스피나 황후가 불려나와 나체로 티무르를 시중들었다는 세르비아 측 가짜 뉴스에 따라 그려진 상상도. 새장 속에 갇혀있는 건 바예지트 1세다.
그는 이듬해 8월, 에스키셰히르의 감옥에서 죽었다.[17]
바예지트 1세 사후, 그가 복속시켰던 발칸 반도 주변은 제후들이 이반하기 시작했고, 아나톨리아 지역 또한 티무르에 의해 기존 제후들이 부활하게 된다. 오스만 술탄국의 영토는 티무르에 의해 네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약 10여 년 간 혼란기를 겪게 되나, 넷째아들인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3.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영국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탬벌레인 대왕에서는 바자제스(Bajazeth)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동맹국의 왕들과 함께 탬벌레인을 공격하지만 아내 자비나와 함께 포로로 잡혀 발판이 되는 굴욕을 겪다가 탬벌레인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할 때 쯤 자비나와 함게 철창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살한다.티무르 사용 설명서에서는 주인공의 영향으로 티무르의 서방 원정이 원역사보다 8년 땅겨진 1394년에 개시되며 그 영향에 휩쓸린다. 정확한 행보를 보면 초반에는 무라트가 죽고 즉위했다 언급만 되다 티무르의 서방 원정 개시 직전 십자군 결성 소식에 놀라는 게 첫 등장이었는데 그렇게 놀라는 와중에도 순식간에 대비 태세를 명하고 무려 13만이 몰려온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 짜증나는 요소로 볼 정도로 능력과 패기 모두 겸비한 정복자의 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십자군만 신경쓰다 동방에서 온 자신보다 더 뛰어난 티무르와 주인공을 간과했고 뒤늦게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앙카라로 뛰어오지만 대포와 기병용 권총이라는 오버테크놀로지를 장착한 티무르군과 주인공의 무쌍으로 예니체리와 시파히마저 썰려나가며 주인공에게 포로로 잡힌다. 이후 원역사에서는 설화에 그친 새장에 갇히는 것이 실제로 코끼리 우리에 갇히게 되는 것으로 구현된데다 동로마로 인수인계되며 원역사보다 더 굴욕적인 처지가 된다.
3.1. 징기스칸 4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한다. 오리지널에도 등장하지만 등장시기가 너무 늦고,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파워업키트 추가 시나리오. 오리지널에서는 가공 장수 얼굴이었지만, 파워업키트에서는 전용 얼굴을 준비하여 대접이 좋아졌다.능력치는 정치69, 전투88, 지모76의 A급 인재. 다만 시작 시점이 서기 1370년이라 나이는 11세. 국왕은 부왕 무라트 1세로, 무라트 1세 역시 뛰어난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 근데 워낙 티무르가 캐사기라서 혼자 대적하기는 역부족. 부하 장수들과의 합동 작전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워낙 오스만의 입지조건이 나쁜 데다가 특산품 중 말이 없어서 초반에 기병을 쓰지 못한다.[18] 다행히 투석기는 쓸 수 있어서 공성전이 조금 편하다.
컴퓨터가 잡은 오스만은 티무르와 대적하기도 전에 동로마 제국과 맘루크 왕조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망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때 둘 중 한쪽의 장수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데 충성도가 낮아서 간첩으로 영입하기가 수월하다. 그래도 유저가 잡고 초반에 비잔틴을 밀면 양면전선을 피하고 문화 발전도 쉬우니, 시작하자마자 바예지트 1세나 부왕 무라트 1세로 경보병 1부대, 투석기 4부대를 편성해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기회를 봐서 다마스쿠스도 밀면 맘루크와의 전선을 좁힐 수 있다. 맘루크를 밀고 난 뒤에는 유럽이나 중앙아시아 중에서 한 곳을 먼저 밀고 나머지를 밀면 된다.
이 시나리오에선 다른 장수들이 이론적으로는 혼자 티무르를 잡기 어렵지만, 이 게임 특성상 컴퓨터가 잡은 나라의 국왕은 절대로 야전에 나서지 않고 장기판의 왕처럼 수도에 짱박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야전에서 티무르와 격돌할 일은 없다. 티무르와 붙을 때쯤 되면 유저의 오스만이 워낙 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공성전에 돌입하면 화포병으로 지휘관인 1번부대를 점사하거나 궁전을 부수면 그만이다..
3.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티무르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 브리핑의 삽화에서 노인으로 보이는 외모로 나온 인물이 바로 바예지트 1세로 여기서도 실제보다 노인의 외모으로 나온 것은 패전 후 티무르에 의해 감금된 상황이 그려진 회화에서 바예지트 1세의 모습을 노인으로 잘못 묘사한 것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존 역사와 다르게 티무르의 라이벌로 묘사되었다.
[1] Bâyezid-i evvel[2] 게르미얀 왕조의 군주 쉴레이만 샤 베이의 딸.[3] 아이든 공국의 군주 이사 베이의 딸.[4] 세르비아 공국의 군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딸.[5] 신경질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고도 한다.[6] 그럼에도 영토 손실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고, 바예지트의 정복지 중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서남부 아나톨리아, 중동부 아나톨리아는 최소 19세기까지 지속적인 오스만령으로 남았다.[7] 분명치 않다. 전해지는 사료마다 이야기가 다양해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투 이후 전장을 둘러보다 암살당했다는 이야기, 전투 이후 저녁에 자신을 알현하기를 요청한 포로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 전투 당시 바예지트는 좌익을. 야쿱은 우익을 지휘했다.[9] 이 시점에 대해서는 전투 직후 흥분이 가시기 전이라는 설도 있고, 전투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스만조에서 형제 살해의 전통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10] 예전에는 헝가리,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십자군과 이에 맞상대한 오스만 및 세르비아 종속군 양측 공히 10만여... 에 달한다고 했지만, 요즘엔 그냥 '양측 다 2만 이하 아냐?' 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11] 여기에 티무르는, 오스만이 아니라 자신이 아나톨리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룸 술탄국이 몽골의 침입에 굴복하여 몽골의 신하가 되었었는데, 오스만은 그 룸 술탄국에서 나온 나라이니 몽골계인 자신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해야 맞다고 주장한 것. 하지만 바예지트의 입장에서는, 동쪽에서 힘 꽤나 쓴다는 듣보잡이 피땀 흘려 얻은 영토를 다 토해내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인 행세를 하겠다고 나선 꼴이었다.[12] 티무르에 의해 폐허가 된 시바스는 이후 1408년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재건된다.[13] 1399년 12월 마누일 2세가 수도를 떠나 서유럽에 원조를 청하러 향했을 만큼 상황은 오스만 측에 유리하였다.[14] 이 때의 양측 병력이 얼마인지는 뚜렷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티무르 측이 10~14만, 바예지트 1세 측이 8~10만 사이로 추정.[15] 아래 그림에도 있듯이 새장 속에 갇혀서 조롱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6] 본명은 마리아 올리베라 라자레비치로 바예지트와의 결혼후 데스피나 하툰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데스피나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17] 그 죽음에 대해서는 화병설, 또한 실의 속에서 자살하였다는 설과, 티무르 살해설 등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화병설이 대세다.[18] 오스만 베이국의 창건자 오스만 1세 당시의 오스만군은 기병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온통 기병뿐이라 문제였다. 즉 여러 유목민 부족들이 오스만의 아래로 모여들었고 그것이 초창기의 오스만 베이국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점차 보병의 필요성이 생기자 예니체리가 편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