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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 |||
출생 | 1761년 12월 24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 |||
사망 | 1808년 7월 28일 (향년 46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 |||
묘소 | 이스탄불 랄렐리 모스크 무스타파 3세 영묘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2] | ||
1789년 4월 7일 ~ 1807년 5월 2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무스타파 3세 | |
어머니 | 미흐리샤 술탄 (출신: 조지아) | ||
형제자매 | 셰자데 메흐메트, 하티제 술탄, 샤 술탄, 파트마술탄, 베이한 술탄, 파트마 술탄, 히베툴라 술탄 | ||
배우자 | 네피자르 바쉬카든에펜디 (출신: 불명) | ||
아피타브 바쉬카든에펜디 (출신: 불명) | |||
휘스뉘마흐 카든에펜디 (출신: 불명) | |||
누리솀스 카든에펜디 (출신: 불명) | |||
미흐리반 하늠 (출신: 이집트) | |||
자녀 | 없음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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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제28대 술탄이자 22대 파디샤.서구화 정책인 '니자므 제디드'를 시행했지만 예니체리의 쿠데타로 폐기되었다. 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예니체리의 반발로 폐위당해 살해된 비운의 인물이다. 하지만 군사 개혁의 일환으로 창설한 니자므 제디드 보병대는 이후로도 꾸준히 개혁되어 탄지마트 개혁 때 새로운 보병대로 재탄생했다는 의의가 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761년 무스타파 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스만 제국 황실은 1725년에 태어난 압뒬하미트 1세 이후로 후계를 이을 아들이 줄곧 없었기 때문에 셀림 3세는 어린 시절부터 각별하게 키워졌다. 셀림 3세는 황자 시절부터 시인, 예술가 황제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가져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계획을 수립했다.2.2. 즉위와 종전
1790년, 발칸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반란으로 전쟁 의지를 잃기 시작하였다. 그에 더하여 발칸의 말라리아 창궐로 수천의 장병들이 희생되었고, 전선에 있던 요제프 2세마저 감염되어 같은 해 2월 회군 도중 사망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의 지휘 하에 1790년 12월 도나우강의 이즈마일 성채를 함락하고 진격을 지속한 러시아 제국군은 1791년 7월 9일 마친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대파하였다. 다만 러시아 역시 프로이센 왕국의 개입 위협에 1791년 7월 31일 휴전을 맺었고, 코스탄티니예 정복을 목전에 두었다고 여기던 수보로프는 오차코프 학살을 빌미로 핀란드로 전임되었다.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새로운 수장 레오폴트 2세 역시 프로이센 왕국의 위협과 프랑스 혁명 전쟁의 전개에 대비하기 위해 협상을 거친 끝에 8월 4일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 오스만 제국에게 벨그라드와 왈라키아 공국을 돌려주고 후자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르소바와 보스니아의 몇몇 국경 마을만을 할양받는 지극히 관대한 조건으로 전쟁에서 물러났다. 1791년 8월 필니츠 선언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 왕정 유지 원조와 함께 전자는 오스만, 후자는 저지대 방면 팽창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한편 1792년 1월 9일 체결된 이아시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승인하고 예디산(오데사, 오차코프)을 할양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오스만 국경은 남 부크 강에서 드네스트르 강으로 이전되었다.
시스토바-이아시 조약으로 한때 (1788-92년) 고토를 회복했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 측에게 버림받고 다시 도나우강 이북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 후 세르비아인들은 국가 회복에 있어 대신 러시아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또한 전후 오스만 조정은 세르비아의 수조권을 현지인들에게 맡겼다. 한편 군제개혁으로 오스만 군에서 소외되던 예니체리들은 스메데레보 산작 (세르비아)에 분풀이하며 수조권을 빼앗으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150여 세르비아 원로(크느조비)들이 살해되었다. 이로써 촉발된 1804년의 세르비아 봉기는 결국 사실상 독립적인 세르비아 공국의 성립의 발판이 되었다.
2.3. 근대화 정책
셀림 3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중인 1789년에 왕위에 올랐다. 삼촌 압뒬하미트 1세의 뒤를 이어 파디샤가 된 그는 개혁위원회를 세우고 서구화 정책인 니자므 제디드를 추진했다. 개혁에는 토지, 행정, 조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부문은 군사였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인 예니체리는 결혼과 세습이 가능하게 된 이후 오스만 제국 말기부터 부패하여 혈연을 중심으로 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셀림 3세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군사 개혁에 역점을 두어 군사 교육을 유럽식 교육으로 개편하는 한편, 개혁의 이름을 딴 니자므 제디드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예니체리를 대체하고자 했다.예니체리들은 이 정책에 당연히 반발했으며, 예니체리뿐만 아니라 신학자들과 보수 세력들도 개혁에 반발했다. 하지만 셀림 3세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니자므 제디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때 프랑스군과 벌어진 전투에서 일부 활약하기도 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결국 피라미드 전투에서 프랑스에 크게 패배했다. 군사 개혁의 결실을 맺기엔 너무 일렀던 셈이다.
2.4. 문화적 업적
셀림 3세는 세계사에서 개혁군주이자 시와 음악의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데데 에펜디, 함파르숨 가보법을 창조한 바바 함파르숨 등 당대의 유망한 오스만 제국 음악가들을 후원했다. 유럽 문화에도 관심을 가져,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프랑스 화가이자 건축가인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을 궁정에 초대하여 유럽의 건축 문화와 판화를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니예에 남기도록 했고, 유럽의 오페라 극단을 콘스탄티니예로 초빙하여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으로 오페라를 상영했다. 셀림 3세가 유럽의 예술에 관심을 보인 것이 서구화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 정책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셀림 3세 본인도 시인이자 음악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샤흐자데(황태자)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으며, 오스만 전통 악기인 네이와 탄부르를 능숙하게 연주했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14개의 마카암(멜로디 타입)을 만들고 64개의 곡을 작곡했다. 그중 3개의 곡은 오늘날에도 터키 고전 음악으로 연주되고 있다.
《일하미》라는 필명으로 많은 시를 창작했으며, 시인들을 궁정에 초대하여 친분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의 4대 시인 중 한 명인 세이 갈립은 특히 셀림 3세와 친한 사이여서 셀림 3세의 개혁을 찬양하는 시도 썼다.
2.5. 몰락
이전에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개혁을 막기 위해서 파디샤에게 하극상까지 벌이던 예니체리가 이 개혁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예니체리들은 1805년 에디르네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1807년 셀림 3세를 폐위시키고 투옥시킨 다음 무스타파 4세를 옹립하여 셀림 3세의 개혁은 중단됐다.1808년 루스추크에서 개혁파인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셀림 3세를 복위시키고자 했다. 예니체리는 개혁파가 코스탄티니예로 진군하기 전에 셀림 3세를 암살했다. 셀림 3세는 그렇게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후 개혁파는 코스탄티니예를 장악하여 무스타파 4세를 폐위시키고 마흐무트 2세를 옹립했다.
3. 대중매체에서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 등장한다. 작중에서는 능력치가 꽤 좋다.[3]랑펠로 에서, 엘바섬 탈출 이외의 모든 시나리오에 오스만 제국의 군주로 등장한다. 기병 적성이라서 기병으로 등장하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최약체 군주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4]
[1] Selim-i sâlis[2]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3] 게임 중에서 오스만은 초중반에는 유럽식 전열 보병이 아예 없거나 일단은 전열보병 역할이지만 능력치가 현격하게 딸린 징집병과 능력치 자체는 괜찮지만 역할이 한정 된 예니체리들만 굴리다 후반 개혁을 마쳐야 설정상 유럽식 군제 개혁을 통해 양성된 신부대 니잠 시리즈가 나온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니잠 시리즈는 동시대 다른 일반 유럽 전열보병에 비해 능력치가 꽤 높다.[4] 군주/사령관은 예비병(reserve)을 끊임없이 보충받아 우주방어하는 유닛인데 기병은 예비병을 보충받을 수 없다. 포병은 포를 포기하고 보병으로 돌아가면 보충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