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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 알 라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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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
هَارُون ٱلرَشِيد
파일:220px-Harun_al-Rashid_by_Khalil_Gibran.pn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아부 자파르 하룬 이븐 무함마드 알 마흐디
أَبُو جَعْفَر هَارُون ٱبْنِ مُحَمَّد ٱلْمَهْدِيّ
출생 763년 3월 17일/766년 2월
아바스 왕조 테헤란
사망 809년 3월 24일 (향년 43/46세)
아바스 왕조 호라산
재위 기간 아바스 칼리파
786년 9월 14일 ~ 809년 3월 24일 (23년)
전임자 알 하디
후임자 알 아민
별명 알 라시드(هَارُون: 정의로운 자)
부모 아버지 : 알 마흐디
어머니 : 알 카이주란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칼리파 즉위 이전의 생애2.2.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
2.2.1. 훌륭한 내치2.2.2. 잦은 반란2.2.3. 대외 정책2.2.4. 바르마크 가문 숙청
2.3. 사망
3. 아라비안 나이트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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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왕조 제5대 칼리파. 아들 알 마문과 함께 아바스 왕조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 생애

2.1. 칼리파 즉위 이전의 생애

766년 2월 16일 아바스 왕조의 이란 총독부가 자리잡은 레이(오늘날 이란 테헤란주 샤흐레레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아바스 왕조 3대 칼리파 무함마드 알 마흐디이고, 어머니는 비스하 인근에서 베두인 족에 잡혀 메카 인근 노예 시장에 팔렸다가 알 마흐디에게 구매된 알 카이주룬이다. 알 카이주룬은 775년 알 마흐디가 칼리파가 된 후 정식으로 아내가 되었다. 그는 야히야 이븐 칼리드를 포함한 우수한 가정교사들로부터 쿠란하디스 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수사학, 음학, 시 등을 공부했다. 또한 검술, 궁술, 전쟁 기술 등 무인으로서 갖춰야 할 능력도 숙달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야히야의 아들 파드힐, 자파르, 무사 및 무함마드와 친구로 지냈다.

780~782년 아버지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대 10만 명을 지휘했다. 아나톨리아를 관통하여 보스포러스 해협까지 진군했지만, 동로마 제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고 보급이 끊기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동로마 장군 타차테스가 항복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당시 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하여 제국을 통치하던 이리니 황태후와 협상해 향후 3년간 매년 7만 디나르를 바치고 칼리파에 경의를 표하는 협약을 맺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그는 전리품을 옮기기 위해 2만 마리의 노새를 고용했고, 바그다드에 돌아왔을 때 검의 가격은 1디르함, 말의 가격은 동로마 1 디나르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 공적으로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아바스 제국의 서쪽 영토를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알 마흐디는 당초 장남 알 하디를 후계자로 정했지만, 아내 알 카이주란과 재상 야히야 이븐 칼리드가 차남인 그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강력히 권하자 마음을 바꿨다. 이후 알 하디가 동생을 위해 후계자 지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알 하디가 반란군 토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요르단으로 갔으나 785년 7월 24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슬람 문헌에는 그의 첩 하시나가 또다른 애첩을 질투해 그녀를 독살하려고 독을 넣은 배가 담긴 접시를 가로채서 배를 먹었다가 독살당했다는 설,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는 설이 제시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죽음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알 하디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곧바로 바그다드로 향하여 20일 만에 도착하여 칼리파로 선임되었다.

그는 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알 하디는 그를 배제하고 자신의 아들 자파르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하룬과 하룬의 측근을 따르지 않던 군부의 여러 장성이 그의 계획에 찬성했다. 그러나 카라주룬과 야히야 이븐 칼리드는 지지자들과 함께 이에 결사 반대했다. 그는 "일개 신하가 칼리파 승계에 간섭한다"라며 야히야 를 투옥했지만, 카이주룬의 강한 권고가 있던 데다 하룬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저버릴까 두려워서 하룬을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 후 어머니 카이주란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제국을 통치하던 알 하디는 786년 9월 14일 1년 3개월만에 돌연 사망했다. 알 타바리는 위궤양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부친의 첩이 독살했다는 이야기를 저서에 실었다. 카이주룬이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해 버린 아들에 분노해 노예 중 하나에게 밤에 그의 침실로 잠입해 베개로 목을 졸라 죽이게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후 하룬이 신하들의 추대로 칼리파에 등극했다.

2.2.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

2.2.1. 훌륭한 내치

하룬은 즉위 직후 바그다드 대모스크에서 금요일 기도를 주관한 뒤 관리들과 평신도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즉위 당일에 이란 노예 마라질에게서 맏아들 아브드 알라를 낳았는데, 그는 이것을 좋은 징조로 해석했다. 이후 알 하디 시대의 고관들과 총독들을 대거 축출하고 야히야 이븐 칼리드 등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교체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초기에는 어머니 카이주란과 야히야 이븐 칼리드에 의해 억제되었고, 전반적인 통치는 어머니 카이주란이 주도했다.

788년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 야히야가 타바리스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녀는 즉시 5만에 달하는 토벌대를 야히야 이븐 칼리드에게 맡겨 진압하게 했다. 하지만 같은 무슬림끼리 피를 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야히야 이븐 칼리드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반란을 일으킨 행위를 사면해줄 테니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알리의 후손 야히야는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파악하고 항복한 뒤 바그다드로 후송되어 한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5개월 후 긴급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789년 어머니 카이주란이 사망하면서 비로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그는 내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툴 히크마(지혜의 집)을 세우고 학자들을 그곳에 배속시켜서 국정에 관한 조언을 하게 했으며, 법학가, 시인, 수학자, 과학자, 음악가 등 다방면의 뛰어난 인물들을 궁정에 들였다. 특히 이슬람 세계의 화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븐 하이얀이 이 시기에 하룬의 궁정에서 활약했다. 또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데모스테네스, 피타고라스, 갈레노스 등 고대의 현인들이 집필한 저서들을 번역했으며, 인도로부터 인도 숫자와 0의 개념, 아유르베다 의학 등을 수입하고 중국으로부터 연금술과 종이, 비단, 도자기 기술을 습득했다. 이렇듯 그의 통치 아래 예술과 문화가 융성하고 유능한 관리들이 국정을 잘 이끌면서, 아바스 왕조의 국력은 갈수록 강력해졌고 바그다드는 당대에 가장 화려한 도시로 번영했다.

796년, 하룬은 유프라테스 강 중류 지대의 라카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그는 바그다드를 딱 한 번 방문했다. 라카는 동로마 제국 국경과 근접해서 동로마군이 쳐들어올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바그다드와 접하고 발리크 강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훌륭한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풍부한 농경지를 보유했고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발발할 수 있는 반란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다시 호라산의 수도인 레이 시로 이동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했다.

그는 제국 전체의 관리를 위해 스승이자 오랜 동료인 야히야 이븐 칼리드에게 의지했고, 야히야와 아들들을 비롯한 바르마크 가문 인사들은 그가 맡긴 임무를 17년간 충실하게 수행했다. 또한 각 도시에는 자체 법 집행기관이 세워져 질서를 유지했고, 도박, 고리대금, 술 판매와 같은 불법 행위를 단속하는 기관도 수립되었다.

2.2.2. 잦은 반란

그러나 그의 치세는 잦은 반란으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789년 모로코에서 시아파가 현지 베르베르인들을 포섭하여 이드리스 왕조을 건국해 아바스 왕조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며, 예멘에서는 795년 주민들이 아바스 왕조의 총독 무함마드 알 바르바디에 대항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804년까지 이어졌다. 이집트에서는 하르타마 벤 아히야가 지휘하는 이프리키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행정에서 몇 차례 실책이 벌어지는 바람에 분노한 주민들이 788년과 794~795년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현재 튀니지에 해당하는 이프리키야 역시 끊임없는 소요에 시달렸고, 하룬은 직접 통치로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해 800년 이브라힘 이븐 알 아그라브를 이프리키야의 세습 에미르로 세워서 자체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이브라힘과 후손들은 아글라브 왕조를 세우고 아바스 왕조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도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시리아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이들이 아바스 왕조에 대항하여 수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가 796년 파드힐 이븐 야히야에게 완전히 진압되었다. 카와리즈파 역시 데이람, 케르만, 파르스, 시스탄, 호라산에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반란이 잦은 데엔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민중의 불만, 카와리즈파시아파 등 반체제 종교 집단의 준동, 비아랍인이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감 등 여러 요인이 있었다. 하룬은 이에 대응하여 반란군을 가차없이 진압하고 시아파 7대 이맘인 무사 이븐 자파르를 바그다드 지하 감옥에 수감한 뒤 독살했다.

2.2.3. 대외 정책

하룬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하드를 종종 선포해 아나톨리아에 대한 약탈 원정을 보냈다. 802년 이리니 여제를 몰아내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니키포로스 1세가 그동안 바치던 조공을 더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803년에 친히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을 크게 격파하고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805년 니키포로스 1세가 또다시 평화 조약을 파기하자, 그는 크게 분노하여 14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806년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1세는 조공을 다시 바치겠으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고, 당시 호라산 일대에 쳐들어온 투르크족을 물리쳐야 했던 하룬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무력 충돌을 벌이면서,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 황제에 오른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와 동맹을 맺고 코끼리를 보내줬다. 카롤루스는 코끼리를 보고 감명 받은 나머지 자신의 수의에 코끼리 무늬를 넣을 것을 명했다고 한다. 또한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 무역 관계를 맺었다. 당나라 측 기록에서는 그를 '아룬'[1]이라고 지칭하며 서쪽에서 위세를 떨치는 강력한 군주로 묘사했다.

2.2.4. 바르마크 가문 숙청

야히야 이븐 칼리드가 무함마드 알 마흐디 치세에 재상으로 선임된 이래, 바르마크 가문은 아바스 왕조 밑에서 여러 고관과 총독을 배출하며 여러 칼리파의 통치를 도왔다. 하룬 역시 그들을 우대했는데, 특히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자파르 이븐 야히야는 '술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국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803년, 하룬은 바르마크 가문에 대한 총애를 거뒀다.

이슬람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고관 야히야 이븐 칼리드는 노년에 접어들자 은퇴를 결심하고 하룬에게 두 아들 파드힐, 자파르와 함께 메카로 은퇴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룬은 거절하면서 두 아들 중 누가 그의 뒤를 이을 지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야히야는 맏이였던 파드힐을 선택했지만, 하룬은 자파르가 선택되는 걸 선호했기에 내심 불만을 품었다.

이때 라카의 에미르가 야히야와 그의 가족이 무신론자라고 고발하는 서신을 보냈다. 하룬은 즉위 이래로 무신론자들을 강하게 탄압하는 정책을 밀어붙인 바 있었기에, 이 고발을 접하자 바르마크 가문에 대한 불신을 품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과거 788년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 야히야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이래 다마스쿠스 감옥에 갇혀 있던 반란군을 자파르가 하룬에게 알리지 않고 석방해버려서 의심을 더욱 샀다.

한편, 그에게는 형 알 하디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걸 막아줬던 아바사라는 누이가 있었다. 하룬은 누이를 자파르 이븐 야히야와 결혼시켰지만, 부부관계를 맺는 걸 용인하지 않고 평생 순결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아비사가 곧 임신하자, 라시드는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 이븐 칼둔 등 후대 학자들은 알 타바리가 제시한 일화 중 아바사와 자파르의 일은 사실 무근이라고 간주하며, 그가 바르마크 가문의 권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권력을 온전히 장악하기 위해 숙청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803년, 하룬은 바르마크 가문 일원들과 함께 메카로 순행했다. 그 후 이라크로 돌아오자마자 자파르를 연회장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뒤 곧바로 목을 베어 바그다드로 보냈고, 야히야 이븐 칼리드와 파드힐 무사, 무함마드 등 세 아들을 마저 체포했다. 하룬은 야히야가 보는 앞에서 모든 바르마크 일원들을 죽였고, 야히야는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40여 년간 강력한 권세를 누리며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거듭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명문가는 한 순간에 몰락했다.

2.3. 사망

808년, 라피 이븐 알 레이트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사마르칸트에서 시작하여 호라산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호라산으로 진군했으나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다가 809년 3월 중순 투스의 사나바드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병에 걸렸고, 호라산의 여름 별궁 다르 알 이마라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정실 아내 주바이다에게서 알 아민을 낳았고, 첩 마라질에게서 알 마문을 낳았다. 마라질은 알 마문을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알 마문은 주바이다의 양자가 되어 알 아민과 함께 성장했다. 나이순으로는 알 마문이 맏아들이었지만, 첩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차남 알 아민이 787년 4월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799년 알 마문이 알 아민의 뒤를 이을 두 번째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또다른 아들인 알 카심이 세번째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하룬이 사망하자 사전에 정한 대로 알 아민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지만, 알 아민이 자신의 아들 무사를 후계자로 선포하자 호라산 총독을 맡았던 알 마문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4차 피트나가 발발했다.

3. 아라비안 나이트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왕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서도 공명정대하고 자비로우면서도 놀기 좋아하는 유쾌한 군주로 나오지만 주로 수행원 마스루르와 같이 나오는 당시 재상이였던 자파르[2]를 갈구는 일이 매우 잦다. 보통 갈구는 게 아니라 뭔 일만 터지면 "헐퀴, 이게 무슨 일임? 너님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음? 이거 빨랑 해결하지 못하면 너님은 물론 가족들도 다 몰살임."이라서 자파르가 언제나 고생한다. 그리고 자파르는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해 자포자기하는 순간 갑자기 해결책이 나타나 일을 해결하는 식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위에 나온대로 아바스 칼리프 조의 초반 전성기를 이끌어 온 바르마크 가문을 완전히 박살내는 등, 그는 절대로 선량하고 너그럽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신앙심이 깊고 문화 발전에 힘쓰긴 했지만 아바스 조의 유지에 필요하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대표적인 예.
어느날 하룬 알 라쉬드의 궁정에서 어떤 학자가 낙타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한 페르시아인 대신이 그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불평했다. 그 말을 들은 알 라쉬드는 불현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를 집과 궁전까지 태워다 주고 그대에게 영광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낙타다. 만약 당장 낙타가 죽는다면, 너희 페르시아인들이 가장 먼저 맛보게 되는 것은 낙타 가죽 채찍 맛이다."[3]

이 일화를 해석하면 아랍인의 상징인 낙타에 대해 페르시아인들이 불평하면서 아랍에 대한 불평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우리는 원한다면 뭐든지 줄 수 있지만, 가져갈 수도 있다고 역시 간접적으로 답해준 것이다. 나름 자신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던 말.

한편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닌 실제 일화 중에선 사치를 경고하는 뜻을 가진 이야기도 있다. 요리사이기도 한 형제 이브라힘(Ibrahim Al-Mahdi)이 대접한 생선요리를 먹다가 그 요리가 향신료로 맛을 낸 생선의 를 발라다가 생선 모양으로 꾸며서 만든 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라시드는 이브라힘에게 지나친 사치와 낭비를 꾸짖고 하인에게 시켜 바깥으로 가져가서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대접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4. 여담

문명 5에서 아라비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도라에몽 극장판노비타의 도라비안나이트에도 등장한다. 성우는 하즈미 준 / 이주승.

THE SANDMAN에서도 등장. 아라비안 나이트 속에서 묘사된 그대로인 휘황찬란하고 마법과 신비가 넘치는 바그다드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의 도시도 쇠락하고 멸망할 것을 예감하고 번민하다 꿈의 주인을 소환하여, 그에게 바그다드의 영화가 영원히 지속되고 사람들의 입에 영원히 오르내릴 것을 조건으로 도시를 통째로 넘긴다. 그 결과로 바그다드는 우리가 아는 '현실적인' 10세기 압바스 왕조의 수도의 모습으로 바뀌고 현대에 와서는 걸프전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아라비안 나이트 속 신비로운 불야성 바그다드는 꿈의 수집품이 되어 인류가 끝날 때까지 영원히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다는 이야기...[4]

[1]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訶論(하론/가론)'으로 기록되어 있다. #1, #2[2] 실존인물로 명재상이라 불렸지만 어째서인지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는 악당 자파으로 등장한다.[3] 당시에 페르시아는 아랍에게 정복된 지 겨우 150년 정도 밖에 안 되었을 때라, 정식 이슬람권이라기보다도 정복지로 취급되었다. 지금도 뭐 이란은 페르시아부심으로 가면서 '아랍권'과는 달리 가고 있다.[4] 초반부부터 꿈의 수집품 트렁크 속에 병 속에 든 도시가 보이는데 이것이 복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