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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1:52:21

아흐메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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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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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오스만 제국 제23대 파디샤
아흐메트 3세
احمد ثالث[1] | III. Ahmet
파일:오스만 터키 아흐메트 3세.jpg
출생 1673년 12월 30일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라 옐라예트[2] 하즈오을루 파자르즉
(現 불가리아 도브리치주 도브리치)
사망 1736년 7월 1일 (향년 62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구)
묘소 이스탄불 발리데 하티제 투르한 술탄 영묘
재위기간 오스만 파디샤[3]
1703년 8월 22일 ~ 1730년 10월 1일
서명 파일:아흐메트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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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메흐메트 4세
어머니 귈누슈 술탄 (출신: 베네치아 공화국크레타 - 그리스인)
형제자매 무스타파 2세, 셰자데 셀림, 셰자데 마흐무트, 셰자데 이브라힘,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쉴레이만, 하티제 술탄, 윔미 술탄, 윔뮈귈쉼 술탄, 게브헤르 술탄, 사피예 술탄, 파트마 술탄
배우자 에미네 미흐리샤 카든에펜디 (출신: 프랑스인(?)[4])
라비아 셰르미 카든에펜디 (출신: 불명)
자녀 무스타파 3세, 압뒬하미트 1세, 셰자데 쉴레이만, 셰자데 메흐메트,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이브라힘, 셰자데 누만, 셰자데 셀림, 셰자데 알리, 셰자데 이사, 셰자데 무라트, 셰자데 세이페딘, 셰자데 압뒬메지트, 셰자데 압뒬멜렉, 파트마 술탄, 윔뮈귈쉼 술탄, 에미네 술탄, 라비아 술탄, 하비베 술탄, 제이넵 술탄, 쥐베이데 술탄, 에스마 술탄, 하티제 술탄, 루키예 술탄, 살리하 술탄, 아티케 술탄, 레이한 술탄, 에시메 술탄, 페르다네 술탄, 나지페 술탄, 나일레 술탄, 아이셰 술탄, 에메툴라 술탄, 윔뮈셀레메 술탄, 에미네 술탄, 루키예 술탄, 제이넵 술탄, 사비하 술탄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제국의 안정2.3. 대 러시아 전쟁2.4. 대 베네치아-오스트리아 전쟁2.5. 튤립 시대
2.5.1. 오스만-호타키 전쟁
2.6. 쿠데타와 폐위

[clearfix]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23대 술탄이자 17대 파디샤.

치세 초반은 일련의 전쟁으로 아조프, 몰다비아, 모레아를 얻고 세르비아 - 보스니아 - 왈라키아 일부를 상실하는 등 성공과 좌절을 모두 겪었다.

그러나 군주로서의 능력은 뛰어나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을 체결한 후 튤립 시대로 대표되는 예술 후원과 제한적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며, 12년에 걸친 평화 시대 동안 오스만 제국은 지난 반 세기 간 겪은 내우외환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1723 ~ 30년까지는 사파비 왕조의 쇠망을 틈타 이란 서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식 훈련 도입과 튤립에 대한 사치 등은 예니체리 군부와 여론의 반발로 이어졌고, 군민 합동 봉기에 직면한 아흐메트 3세는 조카 마흐무트 1세에게 양위한 후 톱카프 궁에서 유폐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18세기 오스만 왕조의 중흥을 시작한 인물로 평가된다.

2. 생애

2.1. 즉위 전

메흐메트 4세와 귈누슈 술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에디르네 궁전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쿠란, 하디스, 과학, 역사, 문학, 음악 등을 학습하며 호기심과 총명함을 보였고 독서와 서예에 몰두하였다. 1687년 부황이 폐위된 후 그는 에디르네와 코스탄티니예를 오가며 공부와 서예로 소일하였다. 1695년 제위에 오른 형 무스타파 2세 역시 1703년 8월, 에디르네 사건으로 폐위당하자 아흐메트는 예니체리 군부에 의해 추대되었다.

2.2. 제국의 안정

아흐메트는 기강이 헤이해진 제국을 바로잡고자 1705년 농지 개혁법을 공표하였고, 그로 인해 쉴레이만 1세와 같은 카누니 (입법자) 칭호를 얻게 되었다. 불안하던 정국은 1706년 초룰루 알리 파샤를 그랜드 와지르로 임명하고 1707년 에플루 알리 아가의 모반 음모를 진압하며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2.3. 대 러시아 전쟁

1710년 대북방전쟁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에게 패배한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피신해오자 아흐메트는 그의 의견대로 루스 차르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이로써 시작된 제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1711년 프루트강 전투에서 표트르 1세에게 대패를 안겨주었다. 이로써 체결된 프루트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12년 전 상실한 아조프를 돌려받고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사실 오스만 군은 여세를 몰아 루스 차르국 본토로 진격할 수도 있었으나, 표트르 1세의 요청을 접수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가 변경을 침공했다는 소식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파비 군대는 오스만 주력군이 다가오자 곧장 회군하였다(. 한편 몰다비아 수복 후 오스만 조정은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 대해 기존 공작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그리스인 관료들을 대리로 파견하는 파나리오테스 통치 체계를 수립하였다.

2.4. 대 베네치아-오스트리아 전쟁

자신감을 얻은 아흐메트 3세는 1714년 12월 베네치아 공화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실라다르 다마트 알리 파샤 휘하의 오스만 군대는 수륙 양면으로 진군하여 1715년 여름 모레아를 수복하였다. 동시에 보스니아의 파샤가 베네치아령 달마티아를 공격하였고, 이에 경각심을 느낀 오스트리아카를 6세가 참전하였다. 1716년 여름 오스만 군대의 베네치아령 코르푸 포위는 폭풍으로 실패하였고, 8월 페트로바라딘[5] 전투에서 실라다르 다마트 알리 파샤가 전사하며 전세는 오스트리아-베네치아 측에 기울었다.

2.4.1. 파사로비츠 조약

파일:오스만 제국 1718.png
1718년의 영토

비록 1717년 오스만 해군은 임브로스, 마타판에서 베네치아 해군와 무승부를 거두는 등 분전하였지만 프레베자와 아르타를 상실하였고, 오스트리아아의 사령관 사부아 공자 외젠은 10만 대군과 오스만 제국의 핵심 거점인 벨그라드를 포위하였다. 오스만군은 무려 21만을 동원하여 맞섰고, 한달간 버티며 오스트리아 측에 3만의 손실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지만 너무 큰 규모의 병력 탓에 식량이 빠르게 소진되며 1717년 8월 안전한 철수를 대가로 항복하였다. 이듬해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보스니아-세르비아 북부와 왈라키아 서부를 상실하였고, 이로써 사바-도나우 방어선이 무너지며 발칸 지배력이 위태로워졌다. 모레아의 점령지를 지켜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2.5. 튤립 시대

파일:오스만 아흐메트 3세.jpg
치세 후반부의 아흐메트 3세

전후 그랜드 와지르로 임명된 네브셰히를리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는 전쟁 도중 니슈 재무관을 지내며 제국의 파탄난 재정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는 1730년까지 12년간 장기 재임하며 최대한 전쟁을 피하였다. 예술과 문화에 조예가 깊던 아흐메트 역시 평화 노선에 동의하였기에 이 기조는 지속되었고, 1683년 이후 오랜만의 평화 기간 동안 코스탄티니예는 문화적 번영과 사치의 시기인 튤립 시대를 맞게 되었다. 아흐메트는 예술과 문학을 후원하였고, 코스탄티니예에는 아랍어와 터키어 인쇄소가 설립되었다.[6][7]

문화적 측면 위해 군사 외교적으로 아흐메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였으며 1721년 프랑스 대사관을 정식 설립한 후 군사 교관들을 초청해 포병을 중심으로 제국군의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12년간 이어진 튤립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재정은 증세도 없이 풍족한 흑자 상태로 전환되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지나친 투자와 서민들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튤립에 대한 집착은 조정에 대한 여론 악화로 이어졌다. 특히 전쟁 대신 예술에 국고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사치라 여긴 예니체리는 군사 개혁 실시에 결정적으로 반감을 품게 되었다.

2.5.1. 오스만-호타키 전쟁

파일:오스만 1728년.png
이란 서부를 장악한 1729년의 영토. 수도가 에디르네로 되어 있는 것은 무시하자[8]

1722년 아프간계 호타키 왕조가 사파비 조를 멸하고 이란을 장악하자 혼란을 틈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개입하였다. 1723년 오스만 군은 하마단, 케르만샤자그로스 산맥 일대의 서부 이란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카스피해 연안을 장악한 러시아와 1724년 6월 양국은 쿠로쉬-아라스 강을 따라 이란 분할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호타키 조의 샤 아슈라프가 영토 반환을 요구하며 1726년 봄 오스만-호타키 전쟁이 발발하였다. 오스만 군이 사파비 조의 재건을 명분으로 내걸자 아슈파프는 폐위된 술탄 후세인을 살해하여 여지를 없애버렸고 이스파한을 요새화하였다. 그후 서진한 아슈라프는 호라마바드에서 수적 우위를 믿고 있던 오스만 군을 격파하였다. (1726년 11월 20일) 오스만 진영에 침투한 호타키 선동가들이 같은 순니 신앙을 가졌다며 설득하자 싸울 의지를 꺾은 결과였다.[9] 쿠르드 기병대는 심지어 전열을 이탈하기도 하였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슈라프는 국력 차이를 통감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론 패배할) 더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보다 유리한 입장일 때에 협상에 나섰다. 이에 아흐메트 역시 호응하였고 1727년 10월 하마단 조약이 체결되었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은 타브리즈에서 루리스탄에 이르는 이란 서부 대부분을 넘겨받는 대신 아슈라프를 페르시아의 적법한 샤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729년 가을, 사파비 왕공 타마스프 2세는 나디르 콜리벡 (나디르 샤)와 함께 담간 전투에서 아슈라프를 격파하였고 호타키 조를 아프간으로 축출하고 이란에 사파비 조를 재건하였다. 이듬해인 1730년 봄, 실지 회복에 나선 나디르 콜리벡은 순식간에 나하반드를 점령하였고 반격에 나선 오스만 대군을 말라예르 협곡에서 격파하였다. 그후 하마단, 케르만샤를 점령한 나디르 콜리벡은 8월 12일 타브리즈를 마지막으로 서부 이란을 평정한 후 호라산의 호타키 조와 맞서기 위해 회군하였다.

2.6. 쿠데타와 폐위

튤립 시대의 사치와 이란 전선의 패배는 아흐메트 3세의 입지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군대와 시민들에게 불신을 주었는데 이는 가뜩이나 황제에게 불만이 가득하던 예니체리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1730년 9월 알바니아계 장교 파트로나 할릴 휘하의 17명의 장교들이 군대 및 시민들과 함께 코스탄티니예에서 봉기하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황궁을 접수하였고 아흐메트에게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의 처형과 퇴위를 종용했다. 아흐메트는 더이상 이길 수가 없음을 알고는 그에 수긍하였고, 퇴위하여 새로 술탄으로 추대된 조카 마흐무트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그후 기존에 마흐무트가 유폐되었던 톱카프 궁전의 카페스로 은퇴한 그는 여기서 살다가 1736년에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1] Ahmed-i sâlis[2] Silistra Eyalet, 1593년 설치된 오스만 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1864년 빌라예트 제도가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3]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4] 자네트(Jeannette)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5] 현재 세르비아 노비사드의 행정구역.[6] 오스만에서 인쇄소 자체는 1480년에 세워졌으나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히브리어에 국한되어 왔다.[7] 다만 이 시대에도 쿠란성경의 인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감히 신의 말씀을 찍어낸다는것이 불경스럽다는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셰이휠 이슬람의 해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 성경과 쿠란의 인쇄는 탄지마트 이후에나 자유로워졌다.[8] 중부 유럽 원정을 위해 에디르네에 자주 머물렀던 쉴레이만 대제를 시작으로, 17-18세기 술탄들은 원정 준비 목적 외에도 곧잘 에디르네를 거처로 삼았으니 뭐 크게 틀린 표기는 아니긴 하다.[9] 실제로 오스만 조는 2세기 이상 같은 순니 세력과는 거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애초에 당시 중동 지방 순니의 절대 다수가 오스만 휘하에 있었으니.. 따라서 '이단 페르시아인'에 대한 순니 연합 제안은 정통 순니 교육을 받은 오스만 장교들에게 잘 먹혔고,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