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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2:48:50

마르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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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14대 칼리파
مروان بن محمد بن مروان بن الحكم |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 이븐 알 하캄
제호 한국어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 이븐 알 하캄
아랍어 مروان بن محمد بن مروان بن الحكم
영어 Marwan ibn Muhammad ibn Marwan ibn al-Hakam
출생 691년
사망 750년 8월 6일 (향년 58~59세)
존호 칼리파
재위 기간 744년 12월 4일 ~ 750년 8월 6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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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이라크 시리아 마르완.jpg
마르완 2세의 디르함 은화

우마이야 왕조의 제14대이자 마지막 칼리파.

2. 생애

691년경 시리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우마이야 왕조 제4대 칼리파 마르완 1세의 아들 무하마드 이븐 마르완이었고, 어머니는 노예 출신의 첩 자이납의 딸 움 마르완이었다. 732/733년에 우마이야 왕조 제10대 칼리파 히샴에 의해 아르메니아의 군사령관으로 부임했고, 민정총독으로 사이드 알 하라시가 부임했다. 하지만 735년 사이드가 백내장에 걸려 사임했고, 지난날 아르메니아 군 사령관이었던 마슬라마 이븐 압둘 말리크가 민정 총독으로 부임했다. 마르완은 아르메니아에서 활개치고 있었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인 마미코니아인들을 제압하여 시리아로 강제 추방하고, 봉급을 3년간 받지 못했던 병사들에게 10만 다르힘을 나눠줬다.

735~736년에 마르완은 흑해 동부 조지아 일대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고, 이란계 알란인들의 손에 있었던 3개의 요새를 공략한 후 알란인들의 군주였던 투마네 샤와 평화협약을 맺었다. 737년 아르메니아 기병대를 증원받은 마르완은 코카서스 산악지대로 진군해 사흐르 알-사칼리바에서 튀르크계 하자르 연합군을 격파하고 카프카스 산맥 너머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하자르의 수도인 사만다르를 함락시킨 이후에는 더 이상 원정을 벌이지 않았다.

743년 2월 6일 칼리파 히샴이 붕어한 후 새 칼리파가 된 왈리드 2세가 향락을 일삼는 바람에 제국의 민심이 요동치고 반우마이야 반란의 기운이 각지에서 퍼져나가자, 마르완은 《하디스》의 권위자로서 수많은 이의 존경을 받던 사이드 알 하라시에게 소요를 진압하고 왈리드 2세의 권위를 드높여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사이드는 분쟁에 참여하는 걸 자제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마르완은 어쩔 수 없이 사태의 향방을 지켜보기로 했다.

744년 7월 17일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정변이 발발하여 암군 왈리드 2세가 피살당하고 야지드 3세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마르완은 이 쿠데타 소식을 듣자 야지라로 이동한 뒤 시해당한 칼리파 왈리드 2세의 원수를 갚겠다며 반야지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마르완의 반란군 내에 있었던 예멘인들은 시리아인들과 맞서기 싫어 밤중에 진영을 떠났다. 그러다가 야지드 3세로부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야지라 등 3개 주의 총독직을 한꺼번에 주겠다는 제안이 담긴 편지를 받자, 마르완은 마음을 바꿔 신제 야지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하란에 주둔했던 마르완은 야지드 3세가 10월 4일에 붕어하고, 동생인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가 새 칼리파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르완은 이브라힘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고, 24,000명의 현지군과 7,000명의 아랍군을 집결시킨채 그들에게 봉급을 준 뒤 폐주 왈리드 2세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바이아')하도록 했다. 이후 일부 병력을 본진에 남겨둔 뒤 시리아로 진격했다. 칼리파 이브라힘은 홈스를 포위하고 있었던 군대를 철수시킨 뒤 선제 야지드 3세의 두 아들에게 마르완의 반란 토벌을 맡겼으나, 알레포 인근에서 패배했다. 이후 홈스인 등 더 많은 이들이 마르완의 반란에 가담하자, 이브라힘은 가용한 모든 병력을 모아 명장 술라이만 이븐 히샴에게 맡기고 마르완을 토벌하도록 했다.

양군은 744년 11월 1일, 누르 알 자르 강 맞은 편에 있는 발베크에서 맞붙었다.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으나 어느 쪽도 우세를 잡지 못했다. 이때 마르완은 3,000명의 기병과 함께 일꾼들을 산으로 보냈다. 노동자들은 숲을 벌목하고 누르 알 자르 강 위에 다리를 건설했다. 이후 기병대가 다리를 건너 여전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술라이만의 진영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전의를 상실한 술라이만군은 와해되었고, 홈스인들은 자신들을 학살한 술라이만 이븐 히샴을 잡기 위해 맹렬히 추격했다. 술라이만 등은 서둘러 전장을 떠나 수도 다마스쿠스로 달아난 뒤 칼리파 이브라힘에게 완패 소식을 전했다.

이브라힘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도망치기로 마음먹고, 마차에 보석을 가득 실은채 다마스쿠스를 떠났다. 그러면서 궁전 지하 감옥에 갇혀있는 폐주 왈리드 2세의 아들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이브라힘이 도망친 후, 마르완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뒤 칼리파로 즉위했다. 12월 4일, 이브라힘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려 했으나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자 모든 걸 포기하고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마르완 2세에게 항복했다. 마르완 2세는 찬탈자로서의 오명을 조금이라도 불식시키기 위해 이브라힘을 살려주기로 하고 라카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곧 라카에서 도주했고, 마르완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추격대를 보냈다. 745년 1월 25일, 이브라힘은 대 자브 운하 기슭에서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피살당했다.

이리하여 칼리파로서 입지를 굳힌 뒤, 마르완 2세는 제국 각지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먼저 야지드 3세와 이브라힘을 상대로 반란을 일삼았고, 처음에는 자신과 힘을 합쳤지만 곧 등을 돌려버린 홈스를 공격하여 10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후 술라이만 이븐 히샴이 이끄는 반란군 역시 격파했다. 이에 술라이만은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쿠파와 모술을 공략한 알 다하크 이븐 카이스 알 샤이바니가 이끄는 카와리즈파와 합류했다. 마르완 2세는 이들을 진압하러 출전하여 카프르 투사에서 맞붙었다. 첫 번째 전투는 승패를 내지 못한 채 끝났지만, 그 와중에 알 다하크가 전사했다. 마르완 2세는 카와리즈파가 지도자의 사망으로 흔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며 전장에 "사면의 깃발"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카와리즈파는 끝까지 싸우기로 다짐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알 카이바리를 선출했다.

카와리즈파는 새 지도자의 지도 아래 우마이야군을 향해 결사적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적진에 침입하여 칼리파 마르완 2세의 천막을 무너뜨렸고, 마르완은 급히 달아났다. 카이바리는 다 이겼다고 판단한채 칼리파의 카펫에 앉았다. 그러나 튀르크계 하자르와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마르완 2세의 우마이야군 병사들은 본진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전열을 재정비한 뒤, 마르완 2세의 아들 압둘라의 지휘하에 우마이야군 본진을 약탈 중이던 카와리즈파 반란군을 몰아붙였다. 압둘라는 카와리즈파와 싸우는 자에겐 자유를 주겠다고 외쳤으며, 진영에 남겨졌던 3~4,000명의 노예가 이에 응해 카와리즈파를 향해 사력을 다해 항전했다. 이로 인해 카와리즈파는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도주했고, 알 카이바리는 전사했다. 전장에서 12km 떨어진 지점까지 도망쳤던 마르완 2세는 뒤늦게 승리 소식을 접하자 군대에 돌아와서 자기 없이도 용맹하게 싸운 장병들을 칭송했다.

그러나 카와리즈파는 계속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샤라반 이븐 압둘 아지즈를 새 지휘관으로 세웠다. 술라이만 이븐 히샴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샤라반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그러면서 지역 주민들의 지원에 의존할 수 있는 모술로 후퇴하라고 조언했다. 카와리즈파는 이 조언에 따라 모술로 이동했고, 마르완 2세는 모술로 진군해 6개월간 포위 공격을 퍼부었다. 그 후 야지드 이븐 우마르가 이끄는 분견대가 쿠파를 공략하고 모술로 와서 마르완 2세와 합세하자, 카와리즈파는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몰살당하리라고 판단한 후, 어둠이 깔린 틈을 타 모든 재산을 버려둔 채 모술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된 모술 주민들은 마르완 2세에게 항복하며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고, 마르완 2세는 기꺼이 받아줬다.

샤라반은 모술을 탈출한 뒤 샤라수르로 이동했다가 하마단으로 후퇴했다. 이후 술라이만 이븐 히샴과 병력을 나누어 각기 움직였으나 747년 봄 추격대에게 각개격파되었다. 술라이만은 체포된 후 호라산이나 하란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고, 이후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샤라반은 오만이나 시지스탄으로 도피한 후 역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카와리즈파의 반란을 완전히 토벌한 마르완 2세는 이제 누구도 우마이야 왕조를 위협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수도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집트에서 그에 대항하는 반란이 발발했다.

사실 이집트는 초기엔 마르완 2세의 집권을 용인했다. 콥트교 신자이자 이집트 총독이었던 하프스 이븐 알 왈리드는 칼리파 히샴의 붕어 이후, 칼리파가 등극할 때마다 다른 지역에서 반란이 속출한 것과는 달리 역대 칼리파들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이라크의 반란 진압에 나서야 했던 마르완 2세는 하프스가 다른 마음을 먹고 반란을 일으킬 걸 우려해 745년 하프스를 폐위시키고 하산 이븐 아티야를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하프스는 해임을 침착하게 받아들였지만, 콥트교 신자가 주류였던 이집트군은 반발했다. 결국 하산 이븐 아티야는 그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달아났다. 마르완 2세는 당시 이라크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기에 이집트에 병력을 따로 보낼 겨를이 없어서 하프스의 재집권을 용인했다. 하지만 반란 진압 후에는 이집트의 반란을 토벌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집트로 진격했으나 쉽사리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지역에서 반란이 빗발쳤다. 747년 호라산에서 라마단 기간(5월 16일 ~ 6월 14일) 동안 수많은 군중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결한 틈을 타. 아부 알 아바스, 아부 무슬림 등이 시아파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호라산을 지배했던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가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당시 85세의 고령인데다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748년 11월 9일 라이에서 사망했다. 나스르의 사후, 호라산의 우마이야군은 와해되었고, 아바스 반란군은 호라산 전역을 장악했다. 그 후 반란군은 749년 봄까지 이란을 석권한 뒤 이라크로 진격하여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749년 11월 28일 쿠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반란군은 아부 알 아바스를 새 칼리파로 선출했다.

이집트에서 콥트 반란군을 상대로 고전하던 마르완 2세는 동방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듣자 군대를 돌려 이라크로 향했다. 750년 1월 25일, 티그리스 강 북부 지류인 대 자브 강변에서 아부 무슬림이 이끄는 아바스 반란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300여 명에 달하는 우마이야 왕족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마르완 2세는 수도 다마스쿠스로 피신했지만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로 피신한 뒤 파이윰 오아시스를 근거지로 저항했지만 750년 8월 6일 아바스군에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마르완 2세의 수급은 이라크의 쿠파로 옮겨져서 공개 효수되었다. 그의 아들 압둘라는 동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 지역으로 피신해 저항을 이어갔지만 몇 달 만에 전사했다.

아바스 왕조 초대 칼리파 아부 알 아바스와 제2대 칼리파 알 만수르는 후환을 없애는 차원에서 우마이야 왕조 구성원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명군 우마르 2세의 왕릉을 제외한 모든 우마이야 칼리파들의 왕릉을 파괴했다. 다만 칼리파 히샴의 손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탈출에 성공해 이베리아 반도의 알안달루스로 피신한 뒤 756년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