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6-04-09 14:57:41

하란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if 넘어옴1 != null
''''''{{{#!if 넘어옴2 == null
{{{#!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2 != null
, ''''''{{{#!if 넘어옴3 == null
{{{#!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3 != null
, ''''''{{{#!if 넘어옴4 == null
{{{#!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4 != null
, ''''''{{{#!if 넘어옴5 == null
{{{#!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5 != null
, ''''''{{{#!if 넘어옴6 == null
{{{#!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6 != null
, ''''''{{{#!if 넘어옴7 == null
{{{#!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7 != null
, ''''''{{{#!if 넘어옴8 == null
{{{#!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8 != null
, ''''''{{{#!if 넘어옴9 == null
{{{#!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9 != null
, ''''''{{{#!if 넘어옴10 == null
{{{#!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10 != null
, ''''''{{{#!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D7A3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if 설명 == null && 리스트 == null
{{{#!if 설명1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if 설명1 != null
{{{#!html 이 문서는 튀르키예의 도시를 다룹니다. 다른 의미}}}에 대한 내용은 [[하란(동음이의어)]] 문서{{{#!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를}}}{{{#!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하란(동음이의어)#s-|]]번 문단을}}}{{{#!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하란(동음이의어)#|]] 부분을}}}}}}{{{#!if 설명2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를}}}{{{#!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3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를}}}{{{#!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4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를}}}{{{#!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5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를}}}{{{#!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6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를}}}{{{#!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7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를}}}{{{#!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8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를}}}{{{#!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9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를}}}{{{#!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10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를}}}{{{#!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 부분을}}}}}}
#!if 설명 == null
{{{#!if 리스트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if 리스트 != null
{{{#!if 문서명1 != null
 * {{{#!if 설명1 != null
이 문서는 튀르키예의 도시를 다룹니다. 다른 의미: }}}[[하란(동음이의어)]]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하란(동음이의어)#s-|]]번 문단}}}{{{#!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하란(동음이의어)#|]] 부분}}}}}}{{{#!if 문서명2 != null
 * {{{#!if 설명2 != null
: }}}[[]]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3 != null
 * {{{#!if 설명3 != null
: }}}[[]]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4 != null
 * {{{#!if 설명4 != null
: }}}[[]]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5 != null
 * {{{#!if 설명5 != null
: }}}[[]]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6 != null
 * {{{#!if 설명6 != null
: }}}[[]]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7 != null
 * {{{#!if 설명7 != null
: }}}[[]]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8 != null
 * {{{#!if 설명8 != null
: }}}[[]]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9 != null
 * {{{#!if 설명9 != null
: }}}[[]]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10 != null
 * {{{#!if 설명10 != null
: }}}[[]]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 부분}}}}}}

파일:teethn17.jpg
유적지 중앙부의 모스크 터
파일:하란 전통 주택.jpg
하란의 독특한 주거 형태인 원추형 흙집

1. 개요2. 역사
2.1. 아시리아의 마지막 수도2.2. 고전기2.3. 중세
2.3.1. '하란 대학'과 전성기2.3.2. 다신교 신앙의 쇠퇴2.3.3. 누마이르 왕조의 수도2.3.4. 십자군 전쟁2.3.5. 장기 왕조2.3.6. 아이유브 왕조2.3.7. 버려지다 (1272년)
2.4. 근세 ~ 현대
3. 유적
3.1. 성채 (내성)3.2. 성벽 (외성)3.3. 마드라사 (대학)3.4. 전통 가옥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Harran
아랍어 حران‎

튀르키예 동남부 샨르우르파에 위치한 도시. 우르파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으며, 시리아와의 접경 지대로서 인구는 약 9만 6천명이다. 지금은 평범한 곳이지만 과거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주요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번영했으며[1] 유적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대사원, 성채 등의 유적과 함께 일대의 독특한 주거 형태인 벌집 혹은 원뿔 모양의 진흙 집 또한 관광객들의 시선을 자로잡는다. 종교적으로 3-5세기에 걸쳐 자지라, 시리아, 아나톨리아 지역 모두가 기독교화 된 후에도 다신교 신앙을 유지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2]

고대 로마파르티아에 대패한 카르헤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칸나이 전투아라우시오 전투에 이은 로마 역사상 3번째 패배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기, 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왕조, 로마 제국,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함단 왕조, 누마이르 왕조 (수도로 기능), 우카일 왕조, 장기 왕조, 아이유브 왕조에 걸쳐 3천년 넘게 번영하던 도시는 1271년 몽골 제국 (일 칸국)에 의해 파괴되었고 한동안 군사적 목적만을 지닌 폐허로 유지되다가 19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도시화되었다.

2. 역사

파일:Harran-P1070659-Large-0016.jpg 파일:harran-7th-nov-002.jpg
하란 유적을 두른 성벽 (좌측)과 성채의 성탑 (우측)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하와가 정착했던 곳으로 전해질 만큼 매우 오래전부터 도시가 있었다. (약 기원전 9000년 무렵) 막 셈족[3]이 정착하기 시작한 기원전 3000년경의 기록에도 우르인들이 진출한 상업, 종교적 중심지였다고 적혀있다. 기원전 2400년경 에블라 석판에 따르면 당시 하란의 군주는 여왕인 주갈룸이었고, 주민들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달의 신이자 주요 거래 도시 우르의 수호신인 난나를 섬겼다. 주변 세력과 외교적 관계를 맺을 때 난나의 셈어식 표현인 씬(𒂗𒍪)을 걸고 하는 표현이 관용구로 정착되었을 정도. 하란 지역의 달의 신 신앙은 헬레니즘-로마-기독교 전파 시대를 거쳐 이슬람 정복기까지 이어진다. 고대 수메르어로 도시는 여정, 대상 (상인 행렬), 교차로란 뜻인 '하라누'라 불렸다. 아람어, 히브리어로는 현재와 같은 '하란'으로 불렸다.

구약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신의 계시를 받고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하란에서 머물렀으며 그의 부친인 테라가 이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아브라함의 손자, 이사악의 아들인 야곱은 지금도 도시 서쪽에 남아있는 야곱의 샘에서 아내 라헬을 만났다. 야곱이 형에게서 장자의 권리를 훔친 후 20년간 숨어 지낸 곳도 하란이다. 하란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조인 열두 아들을 낳고 키웠다.[4] 이처럼 하란은 구약성경에 빈번히 등장하는 도시로서 셈족 (아랍, 유대)과 아브라함계 종교 (유대, 기독교, 이슬람)의 성지이다. 이스탄불톱카프 궁전에 소장된 모세의 지팡이와 아브라함의 유품도 본래 하란에 있었다. 다만 상술했듯 중세 초기까지 도시의 주된 신은 달의 신 난나 (셈어 발음은 "신")였다. 시내 중심부에는 기원전 2천년 경에 난나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에훌훌 (환희) 신전이 있었다.[5]

설립되고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 에훌훌 대신전에서는 도시국가 마리아모리인 계열의 야만 부족과의 평화 협상이 맺어졌다. 아브하람 ~ 야곱의 시대 이후로도 이름처럼 여러 무역로가 교차한 하란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주요 문화, 무역, 종교 거점으로써 번영했다. 다만 기원전 19세기에는 풍부한 물산을 탐낸 반유목 부족들이 하란 인근을 점령하기도 했다. 기원전 19세기 초에는 아시리아 (앗수르)의 샴시아다드 1세가 무역로 확보를 위해 하란을 정복했다. 기원전 18세기 말엽 아시리아가 쇠퇴한 후 하란은 다시 독립 국가가 되었고, 마리의 지므리-림 문서에 따르면 당시 하란의 군주는 아스디-타킴이었다. 기원전 16세기 하란은 인근의 우르파와 함께 미탄니 제국령이 되었고, 기원전 14세기에 도시를 정복한 히타이트 제국수필룰리우마 1세는 하란의 난나 신을 언급하며 미탄니 군주 샷티와자와 협정을 맺었다.

2.1. 아시리아의 마지막 수도

기원전 13세기부터 일대는 아다드니아리 1세의 정복으로 다시 아시리아 령이 되었으나 여러 차례 아람인 부족들 및 얌하드 (알레포)와 경쟁하다가 기원전 12세기 들어서야 지배를 확립했다. 앗수르어로 도시는 '후지리나'로 불렀다. 아시리아 지배기에 하란은 요새화되었고, 앗수르에 이은 제2의 도시로써 중시되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하란은 앗수르와 함께 군주에게의 조공이 면제된 몇 안되는 도시였다. 기원전 9-8세기 하란은 아시리아의 군사령관인 투르타누의 치소로써 여러 군사 원정의 후방 거점이 되었다. 하란은 또한 달의 신 성지로 명성이 높았기에 아시리아 군주들은 신탁과 예언으로 유명한 에훌훌 대신전을 사제들의 축복과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다. 사제들은 도시의 유력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시리아 국왕 중 샬마네세르 3세와 아슈르바니팔은 각각 에훌훌 신전의 증축을 후원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슈르니라리 5세가 아르파드 군주 마티일루와 에훌훌 신전에서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670년대 하란의 사제들은 에사르하돈 왕의 이집트 정복을 정확히 예언했다. 다만 그의 이집트 원정 도중 하란 인근 마을의 여성 사제가 빛의 신 누스쿠의 계시를 받았다며 고위 관리 사시가 아시리아의 새 왕이 된다는 예언을 했고, 이것이 바빌론 등지로 퍼지며 사시 반란이 발생했다가 에사르하돈의 귀환 후 진압되었다. 이렇듯 아시리아 제국 내에서 하란과 에훌훌 신전의 영향력은 지대했고, 당시 서아시아의 주요 종교 성지 중 하나였다. 기원전 612년 수도 니네베메디아-칼데아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왕세자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잔존 병력과 함께 하란으로 향해 (에훌훌 사제들이 주관한) 대관식과 함께 새 수도로 삼고 농성했다. 이로써 아시리아의 종교 도시이던 하란은 그 마지막 수도가 되었다.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 네코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청했는데, 미처 후자가 군대를 모으기 전인 기원전 610년 말에 메디아 국왕 키악사레스와 칼데아 국왕 나보폴라사르가 하란을 포위해 이듬해 함락했다. 메디아 군대는 아시리아 왕실의 후원을 받던 에훌훌 신전을 파괴했다. 이번에도 잔당과 도주한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가나안의 메기도에서 마침내 출정한 네코 2세와 합류, 기원전 609년 하란 탈환을 시도했지만 메디아-칼데아 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하란은 칼데아 (신바빌로니아)령이 되었다.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에훌훌 신전은 기원전 556년, 난나 (달의 신)를 모시는 하란의 여사제 아다드굽피의 아들로 바빌론의 왕이 된 나보니두스에 의해 재건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더 나아가 마르두크 대신 난나를 바빌론의 주신으로 섬기다가 여론의 반발을 샀고,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2. 고전기

파일:하란 성채.jpg 파일:43237822ccc80c51ccfcf46bec4400c2.jpg
유적 동남쪽의 성채 유적 (하란 칼레시) 유적 중앙부의 신전-모스크 유적

기원전 539년에 개시된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 하란은 안정을 누렸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일대를 정복한 후 기원전 312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기 도시에는 많은 그리스 인들이 정착해 헬라화가 이루어졌고, 그리스어로 도시는 카라히 (Κάῤῥαι)로 불렸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쇠퇴하던 기원전 132년, 아랍계 아브가리드 가문이 인근 우르파 (에데사)에 오스로에네 왕국을 세웠고 하란도 그 일부가 되었다. 오스로에네는 대부분의 시기 파르티아 제국의 제후국이었고 고대 베두인들은 주로 달을 신성시 했기에 하란의 달의 신 숭배를 후원했다. 기원전 60년 들어 로마 공화국유프라테스 강 서안을 정복하며 하란은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국경 요새 도시가 되었고, 여러번 주인이 바뀌며 자립성을 유지했다.

기원전 53년에는 로마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도시 근처에서 벌어진 카르헤 전투에서 파르티아의 장군 수레나스에 패배했다. 이후 크라수스는 하란 성에 피신했다가 병사들의 위협으로 파르티아와 협상에 나섰는데, 그중에 살해되었다. 이후 로마는 백 년 넘게 파르티아에 수세적인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서기 162-166년 루키우스 베루스가 이끄는 로마 제국군이 도시를 점령했고, 라틴어로는 카라이 (Carrhae) 혹은 카라룸 (Carrharum)으로 불렸다. 195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카라이에 식민도시 (콜로니아) 지위를 주었고, 요새화했다. 217년에는 카라칼라 황제가 파르티아 원정을 이끌기 위해 에데사에서 카라이의 달의 신 (씬) 성지에서 예배를 올리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던 도중 암살되었다. 뒤이은 니시비스 전투도 파르티아의 우세로 귀결되었다.

238-240년 사산 제국아르다시르 1세니시비스, 하트라와 함께 카라이를 점령했으나 곧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재점령했다. 296년에는 갈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아르메니아 연합군이 카라이 ~ 칼리니쿰 (라카) 사이에서 사산 제국의 나르세스 1세에게 패했다. 한편 3세기 들어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전역이 기독교화됨과 함께 인근 에데사가 기독교를 적극 수용하여 대주교구가 된 것에 비해 카라이는 여전히 메소포타미아 신화 기반 달의 신을 섬기는 다신교 주류 도시로 남았고, '이교도 그리스인의 도시'란 뜻에서 헬레노폴리스 (Ἑλληνόπολις)로도 불렸다.[6] 361년 카라이에 주교가 처음 임명되었으나 그는 임지로 향하길 거부하고 대신 에데사에 거주했다. 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 '배교자'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일색의 에데사 대신 카라이로 향해 원정에 대한 신탁을 구했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셈계 씬 대신 라틴계 달의 신인 루나 신전을 방문했고,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에도 원정을 강행했다가 사망했다. 카라이는 로마 제국에서 율리아누스의 죽음을 시 차원에서 애도를 선포한 유일한 도시였다. 한편 기원후 들어 달의 신 씬의 독점적 지위는 약화되었고 (씬의 배우자) 바트-닉칼[7], 개들의 신 (네르갈), 타르아타 (아타르가티스), 가들라트 (아랍계 신), 샤마시 (태양신) 등도 숭배되며 씬은 그중 가장 중요한 신으로 남았다. 다신교도들은 교회 당국과 지방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신앙의 자유를 유지했고, 기독교도 주민들과 별개의 구역에서 거주했다. 5세기의 기독교 신학자 테오도레투스는 카라이를 '다신교의 가시가 가득한' 야만적인 곳이라 묘사했다. 449년 에페소 공의회 당시 카라이의 주교 스테파노스는 다신교도을 눈감아 주는 대신 뇌물을 받는다고 고발되었다.

한편 4세기 들어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주요 전장이 니시비스, 아미다 쪽으로 이동하며 카라이의 성벽은 방치되었다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보수했다. 549년 도시를 점령한 사산 제국의 호스로 1세는 에데사 등 다른 로마령 도시들과 달리 기독교가 아닌 '옛 종교'의 거점이란 이유로 조공을 면해주었다. 590년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카라이 주교 스테파노스에게 현지 다신교도들을 개종시키라 명했다. 이에 대부분의 다신교도가 거부했고, (기독교도인척 하는 다신교도라 고발된) 총독 아킨디노스를 포함한 다수가 처형되었다. 그후 아킨디노스를 고발한 서기 이야리오스 (혹은 호노리오스)가 새 총독이 되었다. 마우리키우스의 박해에도 카라이는 다신교 중심 도시로 남았고, 604년 동로마의 내분을 틈타 사산 제국의 호스로 2세가 정복한 후 에데사와 달리 우대를 받으며 안정을 누렸다.

2.3. 중세

625년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일대를 재정복한 후 얼마 안되어 638년 가을, 이야드 이븐 가늠 이븐 주하이르 알 피흐리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이 카라이를 포위하자 다신교도 주민들이 앞장서 협상하여 항복을 이끌어냈다. 이야드는 동로마 당국이 파괴했던 씬 신전 재건을 허가했고, 도시는 다시 셈계 지명인 하란으로 불리게 되며 디야르 무다르 지역의 중심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차 피트나 시기인 657년에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하란 주민들에게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에 맞서기 위한 병력 파견을 요구했지만 주민들은 무아위야를 지지하며 거부했다. 이에 알리가 보복으로 도시를 함락하고 학살을 자행했다는 설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우마이야 왕조 들어 하란은 자지라 지방의 무역 도시로써 번성했고, 성벽이 둘러졌으며 천국의 사원'이라 불린 마스지드(모스크)도 세워졌다.

2.3.1. '하란 대학'과 전성기

파일:2024 하란.jpg
2020년 경에 복원된 하란 모스크-마드라사 유적 일대

717년에는 칼리파 우마르 2세알렉산드리아 등 제국 각지의 학자들을 초청해 하란에 첫 무슬림 대학인 마드라사를 건설했고, 이로써 하란은 이슬람 황금기의 토대가 되는 학문적 중심으로 변모했다. 일신교 전통이 약한 하란의 분위기 속에서 마드라사에서는 시리아어와 그리스어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신학, 법학, 의학, 수학, 천문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 연구되었다. 따라서 하란 마드라사 (مدرسة حران)는 모로코의 알 카라위인 대학교,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 모스크에 앞선 최초의 대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744년에는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자지라 총독 시절 거점이던 하란을 수도로 삼아 패망하는 750년까지 유지함으로써 하란은 아시리아 제국에 이어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수도로 기능하는 역사적 우연을 겪는다. 하란 천도는 시리아의 예멘계 바누 칼브의 분노를 야기했다.

3차 피트나 시에 하란은 마르완 2세가 대 자브 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압바스 왕조에 항복한다. 비록 압바스 왕조는 이라크에 새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하지만 하란은 여전히 인근의 에데사, 니시비스와 함께 그리스 학문을 이슬람 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칼리파 알 만수르가 자지라 지역 도시들의 성벽 파괴를 지시했을 때에 하란은 예외였고,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도시에서 발리크 강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세워 새 식수원을 마련해 주었다. 압바스 시기 하란은 여전히 기독교와 이슬람 외에 다신교, 사비아교 (모세 숭배)[8], 만다야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사마리아교, 별과 행정 등의 자연 숭배 (애니미즘), 여러 종교가 혼재하는 중동 종교의 총본산이었고 다신교와 신플라톤주의가 결합하기도 했다. 다신교도 주민들은 자신들을 바빌론의 후예로 여기며 자긍심을 느꼈다.

2.3.2. 다신교 신앙의 쇠퇴

다만 시간이 갈 수록 일부 주민들이 다신교 전통을 섞은 형태의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러던 830년, 동로마 원정에 나선 칼리파 알 마문은 하란을 경유하며 다신교 중심지라는 말에 도시를 파괴하려 했다. 우선 알 마문은 다신교도 주민들에게 아브라함계 종교 (유대/이슬람/가독교) 중 하나인지 물어봤는데, 해당 사항이 없던 그들은 쿠란에서 '성서의 백성' (아흘 알-키탑)으로 묘사되나 정확히 실체가 없는 사비아교도라 주장했다. 이에 알 마문이 종교의 사도가 누구인지 묻자 헬레니즘기 전설 속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 답했다.[9] 다행히 갈길 바빴던 알 마문은 이를 믿고 떠났는데, 보수적 무슬림 학자들은 그들이 사비아교도가 아닌 우상 숭배자라 비판하며 보호받는 집단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 아브라함계 종교로의 개종이 소폭 늘었다.

933년에는 칼리파 알 카히르가 하란의 다신교도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명령했으나 이듬해 방문한 학자는 여전히 공공 장소의 신전에서 다신교 의식이 행해진다고 기록했다. 한편 10세기 들어 하란에는 상당수의 시아파 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특히 945년경 열두이맘파에서 급진화되어 분리된 알라위파 지도자 아부 압둘라 알 후사인 알 카시비가 바그다드 밖의 첫 알라위 (누사이리) 선교에 서공한 곳이 하란이었다. 다만 962년경 알레포 함단 왕조의 군주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동로마 제국의 공격으로 하란이 파괴되자 그곳의 시아파 주민 전체를 알레포로 이주시켰다. 다만 인근 농촌의 시아파 인구는 혼란기를 틈타 계속해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던 990년, 반세기 이전 자지라로 이주한 베두인 부족인 누마이르 왕조가 하란을 수도로 건국되며 도시는 다시 수도가 되었다.

2.3.3. 누마이르 왕조의 수도

파일:하란성1.jpg
파일:하란성2.jpg
동로마 시기에 세워져 누마이르 왕조기에 보강된 하란 성채

한동안의 안정 후 1032-33년의 겨울에 하란 인근에서는 알라위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다신교 신전이 파괴되어 누마이르 왕조의 궁전이 되었다고도 한다. 1038년에는 시리아에서 북상한 파티마 왕조가 하란을 점령했고, 누마이르 왕조는 파티마 조에 복속하여 디야르 무다르를 통치했다.[10] 1059년 누마이르 군주 마니 빈 샤비브는 동로마 시기에 세워진 성채를 대대적으로 재건, 강화했다. 1060년에는 미래의 압바스 칼리파가 되는 알 무크타디가 하란의 누마이르 궁정에 망명하기도 했다. 파티마 제국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유지되던 누마이르 왕조는 1081년, 신흥 강자인 셀주크 제국의 시아파 베두인 제후국인 우카일 왕조에게 하란을 내주며 멸망했다.[11] 1083년에는 하란의 한발리파 카디 (법관) 아부 잘라바와 누마이르 왕족[12]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도시를 장악하고 어린 왕자 알리 이븐 왓타브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그해 말 우카일 군주 무슬림 빈 쿠라이쉬가 진압한 후 아부 잘라바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백여 명의 주동자를 처형했다. 13세기의 관료 겸 학자 이즈 앗 딘 무함마드 이븐 샷다드에 따르면 우카일 왕조가 임명한 누마이르 왕조의 굴람 (맘루크) 출신의 하란 총독 야흐야 이븐 앗 샤티르가 최종적으로 다신교 신전을 파괴했다 한다. (1081-83년) 야흐야는 10여년 후 우카일 왕조가 멸망하고 일대가 셀주크 술탄의 직할령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총독으로 재임했다.[13] 12세기 들어 셀주크 제국이 분열되자 하란은 카르부카 (케르부가)와 지키르미쉬 (제케르미슈) 부자를 시작으로 사실상 자립한 모술 아타베그 (섭정 총독)들의 지배를 받았는데, 북쪽 에데사 백국에 접한 거의 최서단 영토라 통제력이 약했기에 태수 카라자가 자치했다.

2.3.4.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시기에 하란은 십자군/이슬람 세력의 경계였다. 특히 십자군 국가들 중 1098년 유프라테스 중상류 지역에 세워진 에데사 백국은 수도 에데사 (우르파)에서 불과 40km 떨어진 하란을 점령하려 했다. 그러던 1102년 하란의 튀르크인 태수 카라자가 민중 봉기로 축출되고 봉기를 주도했던 튀르크인 장교 이스파한의 무함마드가 집권했다. 다만 후자 역시 민심을 잃었고, 1104년 초엽 카라자의 부하였던 튀르크인 장교 자왈리가 그를 암살한 후 집권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5월에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안티오키아 공국보에몽과 연합하여 3천의 십자군으로 하란을 공격했다. 함락이 임박해지자 둘 왕공은 도시의 지배권을 대립하며 공격이 지연되었는데, 마침 에데사 공격을 위해 라스알아인에 주둔 중이던 모술의 지키르미쉬와 마르딘 기반 아르투크 왕조의 소크만이 1만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다툼을 멈춘 보에몽과 보두앵은 전자가 언덕에서 기다리고, 후자가 적을 유인해 오기로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무슬림 연합군이 생각보다 약하다고 판단한 보두앵이 전략대로 이행하지 않고 철수하는 튀르크 기병대를 추격했다가 반격을 당해 격파되었고, 보에몽이 나서 에데사 대주교 베네닉트를 구출했으나 하란 수비대까지 가세하자 결국 철수했다. 하란 전투의 결과 다수의 십자군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포로 중에는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와 그의 부관이자 미래의 백작 조슬랭 1세가 있었다.[14] 지키르미쉬가 보두앵 2세를 가로채자 그와의 동맹을 파기한 소크만은 전리품으로 취득한 십자군 갑옷을 부하들에게 입혀 6월에 십자군 요새들을 무혈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고 10월에는 레몽 드 생 질이 포위한 트리폴리 구원을 준비했으나 도중 사망했다. 지키르미쉬는 단독으로 에데사를 공격했다가 보에몽에 격퇴되었다.

한편 에데사 백국의 섭정이 된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는 8월에 지키르미쉬를 공격해 그의 딸을 사로잡았다. 이에 지키르미쉬는 보두앵 2세와의 포로 교환 혹은 1만 5천 디나르의 몸값을 제안했는데, 탕크레드는 섭정직 유지를 위해 돈을 택했다. 11월에는 보에몽은 (동로마의 해상 봉쇄를 피하기 위해 죽은척 하며) 더 많은 십자군을 모으려 본국인 이탈리아로 향했고, 탕크레드는 안티오크 섭정이 되며 부관 리샤르에게 에데사를 맡겼다. 이에 1105년 지키르미쉬는 다시 에데사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이듬해 하란 태수 자왈리가 그를 죽이고 모술의 아타베그가 되었다. 모술 주민들은 지키르미쉬의 의형제 이마드 앗 딘 장기를 지지했고, 룸 셀주크 군대까지 불러들였으나 자왈리는 알레포 군대와 연합해 격파했다. 이때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전사한다. 그동안 하란은 계속해서 모술 령으로 남았다.
1108년,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가 마우두드를 모술 총독에 봉하자 축출된 자왈리는 보두앵 2세를 석방하고 동맹하여 알레포의 아타베그 리드완 및 안티오크의 탕크레드에 맞선다. 뒤이은 투르베셀 (텔바시르) 전투에서 알레포-안티오크 연합군과 하란-에데사 연합군이 격돌해 전자가 승리한다. 패전 후 자왈리는 무함마드 타파르의 사면을 받아 파르스의 아타베그가 되었고 하란은 모술의 아타베그 마우두드 휘하에 놓였다. 1110년 마우두드는 에데사를 포위, 함락하지 못했지만 큰 피해를 입혔다. 1111년에는 투르베셀 포위 실패 후 하란을 거쳐 안티오크로 진격, 샤이자르 전투를 벌인다. 1113년 산나브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마우두드가 이듬해 급사한 후 모술의 아타베그가 된 아크순쿠르 알 보르소키는 재차 에데사를 포위하나 동맹이던 (소크만의 동생인)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와 대립하게 되어 실패한다.

알 보르소키는 이후 십자군에 대한 공세를 삼갔고, 1118년 알레포를 장악한 일 가지가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후 무슬림의 새 영웅으로 대두했다. 이미 1117년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에게서 알레포와 모술 모두의 아타베그로 임명되었던 일 가지는 1121년 알 보르소키가 재차 모술에 봉해진 후로도 하란을 계속 영유했다. 1122년 11월 일 가지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본토인 마르딘과 마야파리킨, 조카들 중 쉴레이만과 누르 앗 딘 발라크가 각각 알레포와 하란을 계승했다.[15] 이미 그 직전 에데사 백작 조슬랭 1세를 사로잡는 등 두각을 드러냈던 발라크는 이듬해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가 되어 있던 보두앵 2세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고, 뒤이어 알레포까지 접수한다. 말라티아 인근 하르푸트 (엘라즈)에 감금되어 있던 보두앵 2세는 실패한 탈출 시도 후 하란으로 옮겨 감금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조슬랭 1세를 만비즈에서 다시 격파한 일 가지는 반군이 장악한 도시 내의 성채를 포위하던 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1124년 5월) 뒤이어 계승한 아들 티무르타쉬는 영토 할양과 8만 디나르의 몸값을 대가로 보두앵 2세를 석방했고[16], 예정되었던 구원이 무산되자 시리아 해안의 마지막 무슬림 도시이던 티레가 십자군에 항복했다. 얼마 후 티무르타쉬는 마르딘의 본토로 돌아갔고, 1125년 2월 모술의 알 보르소키가 알레포까지 접수하며 하란도 그에게 영속되었다. 십자군에 맞서던 알 보르소키는 1126년 11월 암살되었고, 계승한 아들 마수드마저 1127년 7월에 암살되었다. 이에 마수드의 어린 아들 알프 아르슬란이 계승하고,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 하에서 활약하던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모술의 아타베그로 임명되었다. 1128년 1월 장기는 알레포까지 장악하며 장기 왕조를 세운다.

2.3.5. 장기 왕조

파일:-igp3269-1-1000x600.jpg
파일:하란성 3.jpg
하란 성채의 성탑

반세기 가량 이어진 장기 왕조의 지배 하에서 하란은 안정을 누렸다. 1139년 7월에 에데사를 견제하며 하란에 주둔하던 장기는 다마스쿠스의 내분을 틈타 그곳을 장악하기 위해 남하했다. 1140년 4월에도 장기는 하란에 머물며 십자군을 견제했다. 1144년 12월 장기는 마침내 에데사를 함락했고, 이로써 하란은 반세기간 이어진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1146년 장기의 사후 계승한 아들 누르 앗 딘 마흐무드는 1157년 8월 시리아 대지진으로 하란에서 땅이 갈라져 고대 유적이 솟아오르는 등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자 성벽을 복구하고 다시 요새화했다.[17] 비록 십자군에 정복된 적은 없었지만 왕래가 잦았기에 하란 성채에는 십자군 건축의 영향을 받은 예배당이 있었다. 한편 12세기 내내 우르파 (에데사)가 대도시로 유지되며 많은 수로와 우물을 개설하자 상대적으로 하류인 하란 일대는 더욱 메마르게 되었다.

누르 앗 딘의 지배 하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비아교' 신자 (사실상 달의 신을 믿는 다신교도)들은 더 인적이 드문 동쪽의 마르딘, 모술 일대로 이주했다. 이들은 랄리쉬의 쿠르드 인들과 통혼하며 야지디교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 야지디인의 조상이 되었다.[18] 12세기 후반 무렵 하란은 (소수의 기독교도 외에는) 무슬림 위주의 도시가 되어 있었고, 대학으로 평가될 정도로 번성하던 하란의 마드라사 역시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다만 하란은 여전히 유서 깊은 위대한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대의 현지인 지리가 함마드 알 하라니는 하란이 노아대홍수 후 처음으로 세워진 도시라 기록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아들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알레포에서 계승했고,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대부분은 이집트의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가 정복했다. 하란은 알레포 기반 장기 왕조 령으로 남았다.

2.3.6. 아이유브 왕조

그러던 1181년 12월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요절하자 신자르 태수이던 그의 사촌인 장기 2세가 계승했다. (1182년 5월) 권력 공백기에 알레포를 맡았던 장군 쿠크부리 (쾨크뵈리)는 하란 태수가 되었다. 다만 뒤이어 북상한 살라딘은 11월에 하란과 에데사를 점령해 알레포를 고립시켰고, 마침내 1183년에 장기 2세가 항복하자 라카 ~ 신자르의 아미르로 봉해주었다. 한편 살라딘에 복속하여 하란 태수 직을 유지한 쿠크부리 1185년 4월 주군의 모술 포위를 도왔다. (장기의 손자인) 모술의 아미르 이즈 앗 딘 마수드의 구원 요청에 일디귀즈 왕조가 살라딘의 동맹인 아흘라트를 공격하자 살라딘은 구원을 위해 진군하던 중 하란에서 와병했고, 유서를 작성할 정도로 와병했으나 완치된 후 철수했다.[19] 1186년 모술의 마수드는 살라딘에 복속했고, 이로써 자지라 전역이 아이유브 왕조 하에 놓였다.

자지라 평정 후 살라딘은 자신의 와병 시에도 충성을 다한 쿠크부리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하란 외에도 에데사, 삼사트를 영지로 하사하고 매부로 삼았다.[20] 1187년 하틴 전투예루살렘 탈환전, 1189-91년 아크레 공방전 등에서 살라딘의 부관으로 활약한 쿠크부리는 1190년 아르빌 태수이던 동생 자인 앗 딘 유수프가 사망하자 그를 계승했다. 동시에 쿠크부리가 반환한 하란, 에데사, 삼사트 영지는 살라딘의 동생이자 하마 총독이던 타키 앗 딘 우마르 (알 무자파르)에게 주어졌다. 1191년 우마르는 일디귀즈령 만지케르트 (말라즈기르트) 원정 중 사망했고, 아들 알 만수르 무함마드가 계승했다. 1193년 3월 살라딘이 사망한 후 장남 알 아흐달이 다마스쿠스, 차남 알 아지즈가 이집트, 삼남 앗 자히르가 알레포를 계승할 때에 막내 아들 키드르가 알 아흐달의 대리로 하란을 통치하게 되었다.

다만 이어진 아이유브 내전을 틈타 복속을 철회한 모술의 장기 왕조가 하란을 점령했다. 그러던 1200년 1월, 마르딘 원정에 나선 (미래의 술탄) 알 카밀은 비록 장기 왕조의 아미르 누르 앗 딘 아르슬란샤[21]의 방해로 도시를 얻지는 못했지만 아르슬란샤 역시 마르딘을 노리며 아르투크 왕조와 대립하던 틈에 하란을 점령했다. 1201년 5월 아르슬란샤는 에데사와 하란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창궐해 철수했다. 1202년 3월, 아이유브 왕족들 간의 휴전이 체결되며 2년 전에 폐위된 전 이집트 술탄 알 만수르 나시룻딘 무함마드는 우르파 영지로 은퇴했다.[22] 이후 술탄 알 아딜은 장남 알 카밀을 이집트, 차남 알 무아잠 이사를 다마스쿠스, 삼남 알 아슈라프 무사를 하란, 사남 알 무자파르 가지를 마야파리킨에 봉했다. 무사는 룸 술탄 카이카우스 1세의 남진에 대처, 알레포를 복속시켰고 5차 십자군 격퇴에 일조했다.
1229년 다마스쿠스를 장악한 무사는 1235년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에데사와 하란을 점령하자 가을에 알 카밀과 함께 나아가 수복했다. 1237년 무사가 사망한 후 두 동생 알 무자파르 가지,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각각 자지라와 다마스쿠스를 계승했다. 1238년부터 호라즘 제국의 잔당인 콰레즈미야는 알 카밀의 아들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아이유브 내전에 참전했다.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아이유브는 1239년 룸 셀주크가 사모사타를 점령하자 콰레즈미야에게 하란을 비롯한 디야르 무다르 지역을 영지로 주어 완충지로 삼았다. 콰레즈미야는 1244년 십자군을 몰아내고 예루살렘까지 점령했다. 같은해 가을 라 포르비에 전투 후 콰레즈미야는 갈릴리 지역 약탈 후 하란으로 돌아갔다. 혼란을 일으키던 콰레즈미야는 1246년에 축출되었고, 아이유브의 아들 투란 샤가 자지라의 질서를 회복했다.

2.3.7. 버려지다 (1272년)

파일:하란 중세.jpg
13세기 몽골의 파괴 이전 하란의 모습
파일:Harran_3.jpg
오스만 시기에 보수된 마드라사 유적

1259년 가을, 몽골 제국훌라구 칸이 디야르 무다르 지역을 휩쓸며 하란에 당도하자 아이유브 왕조의 태수는 항복했다. 비록 별개의 장군이 지휘하는 성채의 수비대는 저항했지만, 성탑들 중 하나가 무너지자 항복했다. 따라서 하란은 마야파리킨, 알레포와 같은 파괴를 면했고 인근에 몽골 군영이 세워지기도 했다. 다만 훌라구 칸이 돌연 철수하고 남은 몽골군이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퇴하며 시리아 정복이 무산되었고, 하란은 서쪽으로 80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변의 비레직 (알 비라)와 마주한 국경 도시가 되었다. 1261년 말엽 ~ 1262년 봄에는 아이유브 혈통을 주장하는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가 도시를 장악하기도 했다.[23] 1271년 8월 사마가르가 이끄는 몽골-셀주크 연합군이 시리아로 남하하자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북상했고, 이에 연합군은 철수했다.

11월 알레포에 당도한 바이바르스는 심복 알라 앗 딘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 베두인 부족장 이사 이븐 무한나를 각각 하란과 에데사로 보내 보복 공격에 나섰다. 12월 1일, 타이바르스가 하란에 당도했을 때에 도시는 이미 친맘루크 베두인들의 약탈로 주민들이 대부분 흩어진 상태였고 60여명에 불과한 몽골 수비대는 항복했다. 다만 샤흐나 (총독)는 술탄 본인에게만 항복하겠다며 성탑 중 하나에서 농성했고, 타이바르스는 공격하는 대신 철수했다. 그후 일 칸국아바카 칸은 맘루크 왕조와의 완충적 무인 지대 설정을 지시했다. 이에 1272년 4월 (혹은 1271년) 몽골 당국은 주민들을 마르딘으로 소개시켰고 성문을 막은 채로 떠났다.[24] 혹은 수자원 부족으로 인해 인구를 부양할 수 없자 이동시킨 것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가라이 (카르헤) 교구 산하 기독교 공동체도 소멸하여 명목상 교구로만 남는다.

2.4. 근세 ~ 현대

파일:19세기말 하란.jpg
1900년경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방문했을 무렵의 하란 성채

1272년 이후 하란은 5세기 이상 폐허로 남았고, 1260년 즈음 하란 부근에서 태어나 시리아에서 활약한 이슬람 원리주의 사상가 이븐 타이미야의 출신지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그나마 1330년대 일 칸국이 붕괴된 후 맘루크 왕조가 디야르 무다르를 접수하며 하란 성채는 보수되었고 군대 주둔지로써 아미르가 파견되었다. 다만 도시 자체는 계속해서 폐허로 남았고, 시가지는 진흙과 모래로 메워졌다. 교역로도 북쪽의 에데사나 남쪽의 라카를 지나게 되었다. 한편 베두인들은 여전히 왕래하며 성채 주변에 오늘날과 같은 원뿔형 가옥을 지어 생활했고, 폐허 속에서도 모스크 유적만큼은 종교적 상징성 덕에 파묻히지 않게 관리되었다. 1516년 일대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는 하란 마드라사 건물을 보수했고, 시가지 남부의 성채 주변에 작은 모스크를 세웠다.

오스만 시기 하란은 면 단위인 나히야의 치소가 되었으나 결국 도시화되지 못하고 다시 버려졌다. 이후 누마이르 왕가의 후예인 니므르 부족 등 베두인들이 잠깐 거처하는 임시 거주지로만 활용되었다. 그러다 19세기 초엽 하란은 다시 반영구 거주지가 되었고, 주민들은 해충이 많은 여름에만 성밖 천막에 살았다. 20세기 중반 기준 하란은 1백여 아랍계 반정주민이 사는 마을이었고, 중세 시기의 수로도 버러진 터라 유일한 식수원은 서쪽 1.5km 거리에 있는 야곱의 우물이었다. 성내의 여섯 우물에서는 염도 높은 물만 나와 가축에게만 쓰였다.[25] 그러다 1970년대 관개 수로가 정비되고 현대 농업 기술이 적용되며 하란은 다시 도시화되었고, 2000년에는 유적이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활성화되던 도시는 2010년대 시리아 내전으로 국경간 무역이 사라지며 주민들이 타 도시[26]로 일하러 떠나는 등 타격을 입었다.

3. 유적

입장료 없고 정비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초기 중세 유적을 느끼기 좋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성채와 모스크-마드라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되며 과거와 같은 날것 그대로의 폐허를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3.1. 성채 (내성)

파일:57348-76280.jpg

터키어 Harran Kalesi
영어 Harran Citadel / Castle

본래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달의 신, 씬 (sin)을 모신 신전이 있었으나 382년, 기독교 외의 신앙을 금지시킨 로마 제국에게 우상 숭배 혐의로 파괴된 후 그 자리에 세워진 성채라 전한다. 다만 고고학 발굴 결과는 모스크 (마드라사) 유적을 신전의 위치로 비정한다. 최소 동로마 제국기부터 있었고, 11세기 파티마 왕조의 속국이던 누마이르 왕조가 현재의 규모로 증축했다. 누마이르 왕조 시기에는 동시에 왕궁이었고, 3층 규모에 150개의 방이 있었다. 궁전은 현무암과 석회암으로 세워졌고, 1032년과 1059년에 요새화되어 궁전보다는 성채 성격이 강해졌다. 1114-15년의 지진으로 절반 가량이 붕괴했으나 곧 복구되었다. 장기 왕조 역시 1157년의 지진 후 성채를 복구했다.

현재의 유적은 대부분 아이유브 왕조기인 1196년에 술탄 알 아딜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주요 시리아 도시들처럼 아이유브 왕조 시기 성채와 도시에는 각각 다른 지방관이 부임했고, 도시가 함락된 후에도 성채는 종종 계속해서 저항했다. 1272년 도시가 버려진 후에도 성채는 군사 요충지였고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도 군대를 주둔시켰다. 비록 16세기 이후 완전히 버려졌지만 17세기의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가 방금 만든 것처럼 건재하다고 기록할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다만 점차 인근 주민들이 건축 자재로 쓰기 위해 석재를 빼가고 자연적인 풍파로 성채는 원래 모습을 잃어갔고, 2012-14년에 비슷한 석재를 이용해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3.2. 성벽 (외성)

파일:Turkey_0575_1536x1024.jpg
알레포문

하란의 성벽은 4km에 달하고 6개의 문이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1세기, 누마이르 왕조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6개의 문 중에서 알렘포 문이 가장 크다. 다만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남아있는 부분도 서부와 북부 정도이다.

3.3. 마드라사 (대학)

파일:하란 모스크.jpg
파일:하란 마드라사.jpg
정비되기 전과 후의 비교 사진

이슬람의 종합 대학인 마드라사가 있던 곳으로, 8세기 ~ 10세기 혹은 12세기까지 운영되었다. 연구에 기여했던 다신교도들이 대부분 사라지며 마드라사는 쇠퇴했고, 12세기 들어 버려진 후에는 모스크 위주로 유지되었다. 16세기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보수하고 잠시나마 다시 연구 목적을 회복했다는 말도 있으나 증거는 없다. 2020년을 전후로 정비가 이루어져 상당 부분이 복원되었다.

3.4. 전통 가옥

파일:urfa-020508n-123.jpg

성채 주변에는 벌집 모양 흙집 (Beehive House)들이 많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을 사용하여 원뿔 (벌집) 모양으로 지붕을 높게 쌓아 올린 구조는 뜨거운 여름철에는 태양열을 차단하고 실내의 시원한 공기를 유지하고, 겨울에는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설계이다.

원뿔 형태의 지붕은 더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 밖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여 실내 환기를 돕는다. 또한 나무가 귀한 지역의 특성상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과 짚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전통 주택으로, 현존하는 집들은 대부분 19-20세기에 세웠지만 건축 양식 자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절부터 이어져왔다 한다.


[1] 도시명인 하란도 '교차로'를 의미한다.[2]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의 시조 격인 이븐 타이미야의 고향이기도 한 것은 아이러니[3] 아랍인, 히브리인의 공통 조상[4] 다만 막내 베냐민은 베들레헴(에브랏)에서 태어났다.[5] 일각에서는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평지에 위치한 하란의 주민들에게 태양은 자연적 적수였기에 달을 섬기게 된 것이라 한다. 다만 태양의 신 샤마시 역시 신전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빛의 신 누스쿠 역시 숭배되었다. 도시가 둥근 형태인 것도 달의 형상을 본뜬 것이라는 설이 있다[6] 헬라인이라는 민족명은 이 무렵부터 다신교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헬라인이 원래 의미인 그리스인이라는 뜻을 되찾는 것은 그리스 독립 전쟁 시기 쯤이었다.[7] 고대에는 닌갈[8] 사실 사비아교가 정확히 어떤 종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슬람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란과 바그다드 인근 사비아인들은 10세기까지 두무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을 매년 치렀다고 하기에, 사비아교가 메소포타미아 다신교였다는 설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하늘의 행성들을 유일신의 대리자들로 숭배하였다고 하기에 신플라톤주의영지주의 계열 종교였다는 설도 있다. 해당 시기의 만다야교 역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사비아교로 자칭했기 때문에 정체 파악에 더 난항이 있다.[9] 헤르메스가 이집트 신화 속 토트와 결합한 형태[10] 다만 1056-59년을 제외하고는 바그다드의 칼리파를 인정함[11] 다만 그 잔당은 12세기 초까지 나즘 앗 딘 성채에서 세력을 유지함[12] 이븐 우타이르 혹은 이븐 아티야[13] 1086년 말리크샤가 인정함[14] 그리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보에몽 1세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다만 또 곧 배신한다..[15] 혹은 발라크에게 명목상으로만 하란을 주고 1123년 발라크가 직접 하란을 점령했다고도 함[16] 다만 실제 납부액은 2만 디나르였고, 영토 할양은 보두앵 2세가 명목상 공작인 보에몽 2세가 동의해야 한다며 둘러대다 결국 이행되지 않는다[17] 이때 샤이자르에서도 성벽이 무너져 문키드 왕가가 몰살되었다[18] 하란 다신교 의식의 일부가 지금도 야지디교 내에 남아있다 한다[19] 고립된 아흘라트는 일디귀즈 왕조에 복속함[20] 또한 누이 앗 시트 라비아 하툰과 결혼시켰다[21] 이즈 앗 딘 마수드의 아들[22] 살라딘의 장남 알 아흐달은 사모사타, 사루즈 영지를 대가로 은퇴했다[23] 본래 혼란기를 틈타 알레포를 장악했다가 비레직을 거쳐 하란을 거점으로 삼았다. 다만 몽골군에 포위된 모술의 구원에 나섰다가 일 칸국군에 대패한 후 바이바르스에게 망명한다[24] 혹은 건축 자재를 징발하기 위해 약탈한 후 불을 질렀다 함[25] 유적에서 나온 질산염이 토양에 스며든 결과라 여겨짐[26] 샨르우르파, 가지안테프, 아드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