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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23:37:53

만비즈

파일:만비즈 시리아 2.jpg
내전 이전의 도시. 거대한 지붕으로 덮힌 시장이 인상적이다
파일:시리아 만비즈 1.jpg
내전으로 파괴된 시가지

1. 개요2. 역사
2.1. 아타르가티스 여신의 도시2.2. 중세2.3. 십자군 전쟁2.4. 근현대2.5. 시리아 내전

1. 개요

아랍어 مَنْبِج
쿠르드어 مەنبج
시리아어 ܚܣܝܟܐ
튀르키예어 Münbiç
영어 Manbij

시리아 북부의 도시. 알레포에서 동북쪽으로 35km, 라카에서 서북쪽으로 8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시리아 내전 이전 인구는 약 10만이었다. 시가지는 동북쪽 10km 지점에서 사주르 강과 만나 유프라테스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의 동안에 위치한다. 북쪽 30km 지점에는 튀르키예와의 국경도시인 카라불루스가 나오며, 국경 건너편 튀르키예령에는 고대의 중요한 도시였던 카르케미쉬 유적이 있다. 만비즈 역시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로, 헬레니즘 기에는 아타르가티스 (타르타 / 여신 숭배의 거점으로써 '신성한 도시'란 의미인 히에라폴리스로 불렸다.

중세 시기에는 동로마 제국십자군과 이슬람 세력 간의 접경지로써 수차례 주인이 바뀐 요충지였다. 13세기 몽골 침공 후 버려졌던 도시는 19세기 말에 재건되었고, 아랍 / 튀르크 / 쿠르드 / 체르케스 / 아르메니아계 등 다민족이 거주하였다. 2010년대 시리아 내전기에는 반군을 거쳐 2014-16년간 다에시의 지배를 받으며 파괴되었고, 이후 쿠르드 주도의 로자바 연방에 소속되었으나 2019년 들어 튀르키예군의 위협이 가해지자 러시아 군과 시리아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만비즈는 불안한 평화 속에서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2. 역사

파일:시리아 만비즈 2.jpg
기원전 340년경 만부그 왕이던 아브야티의 동전

고대 아람인들의 도시로 세워졌다. 당시 지명인 만부그는 아람어로 샘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1] 고대 만부그는 동북쪽 20km 유프라테스 동안의 텔 아흐마르 유적을 수도로 한 아람계 비트 아디니 왕국에 속하였다. 기원전 856년 비트 아디니를 정복한 아시리아 국왕 샬마네세르 3세는 만부그를 리타 아슈르라 개칭하고 왕궁을 세웠다. 기원전 820년경 유프라테스 서안의 시리아 지역은 아시리아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한세기 후인 기원전 738년 티글라트 필라세르 3세에 의해 재차 아시리아 령이 되었다. 한편 그 무렵부터 만부그는 알레포의 수호신 하다드의 아내이자 북부 시리아의 풍요의 여신인 아타르가티스 (타르타)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바빌로니아를 지나 아케메네스 왕조 말엽 만부그에는 아람계 사제왕이 다스리는 제후국이 있었다. 그중 아브야티, 압드 하다드 왕이 이름이 전한다. 헬레니즘 시기에도 아타르가티스 숭배는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 서부 일대에 만연하였다.

2.1. 아타르가티스 여신의 도시

셀레우코스 왕조 시절 만부그는 양대 수도였던 안티오크와 셀레우키아를 잇는 주요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로마 시대에 라틴어로 '시리아의 여신'이란 의미인 데아 시리아 혹은 데아수라로 불린 아타르가티스의 숭배에 대해 상세한 기록[2]을 남긴 2세기의 작가 사모사타의 리키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전 앞에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어 매년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올라가 장식했으며, 남자 형상의 청동 / 목조 조각상을 제물로 바친 후 집단 난교를 행하였다. 또한 신전에는 3백명의 사제들이 있었으며, 그 중정에는 신성하다 여졌고 동시에 제물로 쓰인 동물들이 살았다. 한편 동물들 중에서는 제단을 두르고 있는 연못의 물고기들은 종종 인어 형상으로 묘사되기도 한 아타르가티스 화신으로 여겨져 사제들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신성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후일 아브라함을 불태우려던 장작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샨르우르파 (에데사)의 유일신 계열 설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3]

수백년간 성지로 내려온 만부그의 아타르가티스 신전은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에 나서던 크라수스에 의해 습격되어 약탈당하였다. 신의 분노에 의한 것인지 후자는 카르헤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로마 당국은 이전 왕조들처럼 만부그에서 여신의 형상을 담은 아람계 동전의 주조를 허락하였다. 한편 아시리아 시기 난피기 혹은 나피구라 불리던 도시는 그리스어로는 밤비케 (Βαμβυκη) 혹은 '신성한 도시'란 의미인 이에라폴리스 (Ιεράπολις)라 불렸다.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이는 다시 히에라폴리스 (Hierapolis)로 변환되었고, 공식적인 지명은 히에라폴리스 밤비케였다. 팍스 로마나 시기 종교 도시이자 교통 거점으로 번영하던 만부그는 340년경 신설된 에우프라텐시스 주의 주도가 되었다.

2.2. 중세

3세기 이후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만부그의 아타르가티스 신앙은 박해에 직면하였고, 도시 자체도 사산 제국과의 전쟁으로 교통로가 막히며 점차 쇠퇴하였다. 363년 사산 제국 원정에 나선 율리아누스 황제가 당도했을 당시 만부그는 폐허가 된 신전을 품은 쇠락한 도시였고, 에우프라텐시스 주도는 서쪽 80km 아프린 협곡의 키로스로 이전되었다. 540년 시리아 대부분을 일시 점령한 사산 제국의 호스로 1세는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만부그 역시 배상금을 받은 후에야 반환하였다. 이후 2세기 이상 방치되었던 도시는 8세기 말엽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재건되었고, 아랍어 지명인 만비즈로 불리게 되었다. 바그다드에서 인근 라카로 천도하며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던 하룬은 수도와 국경 도시 마라쉬의 중간 지점인 만비즈를 변경주인 알 아와심 (앗 투구르)의 주도로 삼아 옛 유적을 재활용해 성채를 세우는 등 군사 기지화하였다.

10세기 들어 압바스 조가 붕괴하자 반격에 나선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 2세는 962년 7월 만비즈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동쪽 관문을 상실한 알레포는 향후 2세기간 동로마-십자군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세력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1022년 아랍계 미르다스 왕조의 아미르 살리흐가 만비즈를 점령, 라흐바 및 발리스와 함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3년 후 파티마 왕조로부터 알레포를 점령하고 북부 시리아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다만 1060년대 미르다스 조가 내분을 겪으며 쇠퇴하자,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남하하여 만비즈를 재점령하였다. 주민들을 학살하고 일대를 약탈한 동로마 군은 보급품 부족으로 알레포 정복을 시도하지 않고 회군하였다. 1071년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하며 동로마 조가 쇠퇴하고 레반트 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자, 1086년 셀주크 제국의 술탄 말리크샤에 의해 알레포와 함께 점령되었다.

2.3. 십자군 전쟁

12세기 십자군 전쟁 전반기에 만비즈는 하란과 함께 에데사 백국과 접경한 이슬람권의 최전선이었고, 자지라 지역 대부분을 석권하던 아르투크 왕조에 복속하였다. 숙부 일 가지에 이어 지하드 군주로 자리매김하던 알레포 & 마르딘의 아미르 발라크 (벨레크)는 1124년 십자군에 포위된 티레의 구원에 착수하였다. 그때 만비즈 총독 하산 알 발라바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발라크의 사촌인 마야파리킨 총독 티무르타쉬가 출정해 도시를 점령하고 하산을 구금하였다. 하지만 하산의 동생 이사는 시타델에서 계속 항전하며 에데사 백작 조슬랭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발라크는 친정하여 조슬랭의 원군을 격퇴하고 시타델 포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던 1124년 5월 6일, 성채를 정찰 중이던 발라크는 수비대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 리처드 1세 이로써 홀로 남겨진 티레는 십자군에 함락되었고, 발라크 사후 티무르타쉬가 알레포를 포기하며 아르투크 왕조는 마르딘 일대로 축소된다.

이로써 복위한 만비즈 영주 하산은 십자군과 동맹하였고[4], 1127년 가을 조슬랭과 함께 알레포 포위에 나선다. 이에 같은해 모술의 아타베그로 등극한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원군을 파병해 구원한 후, 이듬해 알레포에 입성하며 발라크에 이은 지하드 군주가 된다. 이후 하산은 장기 조에 복속하였다. 한편 1144년 장기가 에데사를 함락하고 누르 앗 딘이 조슬랭 2세의 회복 시도와 2차 십자군을 격파하며 에데사 백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1151년 봄 누르 앗 딘, 티무르타쉬, 룸 술탄국의 마수드가 각각 아인탑 (가지안테프), 사모사타, 라벤데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7월, 간을 보던 만비즈의 하산이 수도 투르베셀을 공격하자 그 동로마 수비대가 항복하였고, 이로써 에데사 백국은 반세기만에 멸망하였다. 즉, 만비즈의 영주 하산은 아르투크 왕조에서 장기 왕조로의 패권 이양에 계기를 제공하고 첫 십자군 국가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며 십자군 전쟁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것이다.

다만 1152년 누르 앗 딘은 세력이 커지던 하산을 축출하고 만비즈를 점령, 시타델을 보강하고 쿠트브 앗 딘 이날을 영주로 봉하였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그와 대립하던 살라흐 앗 딘은 빠르게 시리아 남부를 장악하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이듬해 알레포-모술 연합군을 격파한 살라흐 앗 딘은 1176년 봄 모술의 사이프 앗 딘을 격파하고 술탄으로 책봉된 후, 여세를 몰아 만비즈를 포위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도시는 점령되었고, 영주 쿠트브 앗 딘의 재물은 압수되었다. 그후 비자아, 아자즈를 점령하며 알레포를 봉쇄하던 그는 마침내 1183년 항복을 얻어내며 시리아-이집트를 통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4년 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패한다. 그후 아이유브 조에 속하던 만비즈는 1259년 말엽 시리아 원정에 나선 훌라구 칸의 몽골군에게 점령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맘루크 왕조가 수복하였지만, 1260년 말엽 몽골군이 습격하여 맘루크 원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파괴하였다.

2.4. 근현대

70년에 걸친 맘루크-몽골 전쟁의 전장이 된 후 버려졌던 도시에는 17-19세기 시리아의 히에로폴리스를 찾아온 유럽인 여행가들이 찾아왔다. 17세기 말만 해도 신전의 조각상 일부와 비잔틴 교회 등이 남아있었으나 19세기에 이르면 신전 벽 일부만이 잔존하였다. 그렇게 5세기간 방치되던 만비즈는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체르케스인 난민들을 정착시키며 재건되었다. 1911년 당시 1천 5백의 주민들은 전부 체르케스 계였다. 이후 아르메니아 대학살 시기인 1915년 가을, 제말 파샤의 주도 하에 1천의 아르메니아 성직 계급 난민들이 피신해왔으나 1916년 초 마스카나로 이주되었다. 그들의 임시 주거지 건설을 위해 그나마 남아있던 옛 유적마저 파괴되었다. 20세기 중엽 만비즈는 십자군 전쟁기처럼 튀르크/아랍계가 혼합된 주민 구성을 보였고, 체르케스계 주민들은 낙쉬반디 수피 종단을 신봉하였다. 또한 쿠르드인들도 일부 유입되었다.

2.5. 시리아 내전

파일:만비즈 시리아 공세.png
만비즈 공세

무슬림이 대다수였음에도 다양한 민족 구성 덕에 만비즈는 알레포 주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 하나였다. 시리아 내전기인 2012년 7월 20일 현지 시리아 반군이 점령한 후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졌으나 2014년 1월 다에시 (ISIL)가 점령하며 고난이 시작되었다. 다에시 지배 하에 만비즈는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 일대에서 약탈한 미술품과 유물들이 거래되는 불명예스러운 역할으 맡았다.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유프라테스 동안의 사린을 수복한 쿠르드계 시리아 민주군이 라카 탈환전의 서막으로 만비즈 공세를 개시하였다. 2016년 6월 8일, 도시를 포위하는데 성공한 시리아 민주군은 8월 12일 마침내 다에시 군을 섬멸하고 만비즈를 수복하였다. 두달 간의 전투로 양측 합쳐 1천 5백의 군인이 전사하였고, 5백여 주민이 살해되었으며 2천여명이 다에시에 의해 납치되었고 주민의 절대 다수인 8만여명이 난민으로 전락하였다. 다만 로자바 당국의 재건 하에 주민들은 점차 고향으로 돌아왔다.

파일:만비즈 시리아.webp
재건 중인 만비즈

현재 만비즈는 로자바, 즉 북시리아 자치 연방 산하 샤흐바 주의 치소로써 만비즈 시의회가 자치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의회는 아랍인 71명, 쿠르드인 43명, 튀르크멘 10명, 체르케스인 8명, 아르메니아과 체첸인 1명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2016-17년 겨울 유프라테스 방패 작전으로 다에시로부터 만비즈 서쪽의 알밥을 점령한 튀르키예군은 2018년 3월 아프린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만비즈 시의회는 시리아 군에게 파병 요청을 하였고, 2019년 1월에는 다에시의 폭탄 테러로 미군을 포함한 19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그리고 2019년 가을, 미군이 철수하자 시리아 동북부로도 진격하여 텔아비야드와 라스 알 아인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에 튀르키예군과 로자바 측의 확전을 방지하고자 러시아 군과 시리아 정부군이 만비즈에 입성하여 튀르키예군 및 시리아 반군과의 경계 지역에 배치되었다. 따라서 만비즈는 여전히 로자바 연방에 속하긴 하지만 그 영향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다.

[1] 지금도 아랍어에서 나-바-아 어근은 샘솟다는 뜻이다. 셈어계에서 아와 가는 거의 같은 문자였기 때문에 아람어의 나-바-가에 장소 접두사인 마 (마스지드, 마드라사와 같은 용법)가 붙어 만부그가 된 것이 아랍어로 만비즈로 정착한 것이다[2] 데 데아 시리아, 그리스어로 쓰여짐[3] 실제로 우르파는 만부그, 아슈켈론과 함께 3대 아타르가티스 성지 중 하나였다.[4] 그와 함께 1134년 만비즈의 로마식 지명에 의거한 히에라폴리스 대주교구가 설치되었으나 만비즈에서 서북쪽으로 90km 떨어진 가지안테프 북쪽의 둘루크에 설치되었기에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도 둘루크에는 동굴 교회 유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