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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085년~1146년 |
재위 | 1127년~1146년 |
1. 개요
عماد الدین زنگیImad al-Din Zengi
장기 왕조의 창시자.
십자군 전쟁 시기에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이슬람 군주이다. 본래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모술의 아타베그(총독)에 임명되었으나, 알레포까지 접수하면서 강력한 독자세력을 형성하였다. 이후 십자군 국가들 중 에데사 백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십자군에 맞선 항쟁을 주도한 최초의 이슬람 군주가 되어 명성을 얻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난 것도 장기의 에데사 정복에 그리스도교 세계가 큰 충격과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말년에는 자신의 노예에게 암살당하는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이 뒤를 이어 장기 왕조의 통치자로 집권하면서 오늘날 이라크 북부 및 시리아 지역의 지배권을 굳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그 휘하에서 이집트 지역을 지배하던 살라흐 앗 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 후 십자군 국가 인근의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십자군 국가 중 가장 강력했던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켜 성지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2. 생애
2.1. 유년기
1085년,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고위관료였던 아크 순쿠르 알 하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크 순쿠르는 본래 말리크샤 1세의 휘하의 맘루크였으나 수차례 공로를 쌓은 끝에 높은 관직을 얻고 알레포의 아타베그에 임명된 인물이었다.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하자 셀주크 투르크에서는 그 후계를 두고 내분이 일어나 아들 바르키야루크와 아우 투투쉬가 서로 대립하였다. 아크 순쿠르는 당시에 바르키야루크를 지지하였으나 1094년, 투투쉬가 알레포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한 후 아크 순쿠르를 처형하고 말았다. 당시 10세의 소년에 불과했던 장기는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 장기를 거두어 준 사람이 바로 모술의 아타베그인 카르부가였다.[1] 카르부가는 아크 순쿠르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겨진 어린 장기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 그를 마치 친아들처럼 양육했다. 카르부가의 슬하에서 장기는 영지를 할당받았으며 일찍이 15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카르부가를 따라 종군하여 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2.2.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
1122년,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운 장기는 그 보상으로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바스라의 총독에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와시트를 봉토로 받아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영지를 직접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1123년, 메소포타미아 하류에 위치한 마즈야드 왕조가 바그다드를 침공하자, 장기는 바그다드의 통치자이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알 무스타르시드를 도와 이를 격퇴하였다. 이와 같은 활약상으로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의 관심을 얻은 장기는 한동한 술탄의 궁정에 체류하면서 총애를 얻었다. 장기는 술탄의 알선으로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여 큰 재산을 물려받은 후 다시 바스라와 와지트의 총독으로 돌아왔다.
1125년,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가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장기는 술탄을 도와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다.
1127년, 공로를 인정받은 장기는 마침내 모술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1128) 장기는 아르투크 왕조의 지배를 받던 알레포까지 공격하였다. 당시 알레포는 십자군에게 포위당해 있었는데, 장기는 이들을 격파하고 알레포를 접수함으로써 마침내 모술과 알레포 두 지역의 아타베그가 되었다.
이 시점부터 장기는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강자이자 십자군 국가 최대의 숙적으로 부상했다. 장기가 거느린 세력은 그동안 십자군 국가들이 상대해왔던 도시 단위로 자잘하게 분열된 이슬람 세력들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2.3. 다마스쿠스 공략과 실패
1130년, 장기는 부리 왕조의 통치를 받고 있던 다마스쿠스를 넘보기 시작했다. 다마스쿠스는 부유한 대도시인데다가 시리아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었기에 장기로서는 눈독을 들일만한 땅이었다. 부리 왕조를 침공한 장기는 부리의 아들과 동생을 포로로 잡은 후 하마를 빼앗았고 뒤이어 홈스를 포위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채 돌아갔다. 포로로 잡혀 모술로 끌려간 부리의 아들과 동생은 5만 다니르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다마스쿠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1131년,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죽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났다. 이듬해(1132) 장기는 그 틈을 노려 바그다드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는 군사를 매복시킨 채 장기를 기다렸고, 결국 장기는 크게 패하여 티그리스 강으로 달아났다. 이때 티크리트의 영주인 아이유브가 내준 나룻배 덕분에 장기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바로 이 사건이 인연이 되어 훗날 아이유브는 장기에게 의탁하게 되는데, 그 아이유브의 아들이 바로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었다.
1133년,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는 여세를 몰아 장기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술을 공격했으나, 이번에는 도리어 장기가 칼리프의 군대를 포위해버렸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결국 패퇴한채 돌아갔다.[2]
1135년, 다마스쿠스 내에서는 영주인 부리가 죽은 후[3] 그 아들들인 이스마일과 마흐무드 등에 의해 후계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4] 이스마일은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장기에게 다마스쿠스를 바치려 하였으나 일이 들통나자 어머니 주무르드에게 살해당하였고 그 지위는 동생 마흐무드가 계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는 다마스쿠스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 이를 포위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흐무드 또한 싸움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아우인 바흐람샤를 인질로 보내 장기와 화친하였다. 장기는 알레포로 돌아가던 길에 부리 왕조가 통치하던 홈스를 포위했으나, 마흐무드는 유능한 장군인 무인 앗 딘 우누르를 보내 장기를 막았다.
2.4. 십자군 및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
1137년, 장기는 또다시 홈스를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무인 앗 딘 우누르가 이를 잘 방어해냈다. 다마스쿠스는 장기를 막기 위해 급기야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결국 장기는 예루살렘의 왕 풀크와 바린에서 맞붙어 이를 크게 물리쳤다. 패배한 풀크는 바린 요새에 갇힌채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동로마 제국 황제인 요안니스 2세가 남하할 기미가 보이자 장기는 급히 풀크와 화친을 맺어야했다. 장기는 풀크에게 거금을 쥐어주며 풀어주는 댓가로 바린 요새를 자신의 수중에 넣었다.한편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점령하여 제국령으로 편입하였다. 요안니스 황제는 압도적인 병력차 덕분에 큰 피를 흘리지 않고 안티오키아를 접수하였으나,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을 비롯한 해당 지역의 라틴 귀족들로부터 땅을 넘겨받자면 그들에게 새로운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요안니스 2세는 시리아 북부의 땅을 점령하기로 마음먹곤 마침내 장기의 세력권 인근에 위치한 샤이자르를 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138년 4월 28일~5월 21일에 걸쳐 요안니스 황제는 샤이자르를 포위공격하였으나 샤이자르 방어군의 완강한 저항, 안티오키아의 레몽을 비롯한 십자군들의 태업[5] 등의 악재에 부딪혔다. 게다가 이때 장기가 샤이자르에 구원병을 보내 그 근교까지 도달했다. 결국 요안니스 황제는 샤이자르의 에미르와 협상하여 화친을 맺고 이름뿐인 승리에 만족한 채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샤이자르 공방전)
그해 5월 말에 장기는 다마스쿠스와 협정을 맺고 죽은 부리의 아내인 주무르드와 결혼하였다. 장기는 지참금으로 수차례 빼앗으려다가 실패했던 홈스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는 한 발 더 나아가 주무르드의 아들이자 다마스쿠스의 에미르인 마흐무드로부터 다마스쿠스의 통치권까지 물려받으려 했으나 주무르드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듬해 1139년 7월, 마흐무드가 의문의 암살을 당하자 장기는 살인자를 처벌한다는 구실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다. 그러나 앞서 수차례 홈스에서 장기를 막아냈던 무인 앗 딘 우누르가 죽은 마흐무드의 대리자로서 다마스쿠스의 섭정이 되어 있었다. 다마스쿠스의 실권을 장악한 우누르는 장기의 입성을 거부하고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장기는 다마스쿠스 인근의 요충지인 바알베크를 점령하였으나 그 사이에 우누르는 한 술 더 떠서 다마스쿠스를 예루살람 왕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렸다.
1140년 4월,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왕국의 밀착을 두려워한 장기는 결국 철군해버리고 말았다. 그해에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의 연합군은 장기의 요새인 바니아스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처럼 장기의 다마스쿠스 정복의 야욕은 또다시 좌절되었고, 예루살렘 국왕 풀크는 장기에게 당했던 수모를 제법 만회할 수 있었다.
1144년, 예루살렘 국왕 풀크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등이 죽은 후 십자군 국가들의 방어선이 느슨해지자 장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데사 백국을 공격하였다. 에데사 백국은 장기의 공격을 받은 지 불과 넉 달 만인 12월 26일에 항복하였고, 백국의 군주 조슬랭 2세는 달아나버렸다. 십자군 국가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멸망했다는 소식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었고, 이를 계기로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장기의 에데사 정복은 반대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장기의 인기 또한 높아졌다. 이슬람 세계는 더 이상 십자군 국가를 무적의 존재로 보지 않게 되었고, 또한 이슬람 세력이 단결할 수만 있다면 이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5. 최후
에데사 정복이라는 일생일대의 승리를 거둔 후에도 장기는 본거지인 모술로 돌아가지 못했다. 새로 얻은 영토를 편제하고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기운을 제압하느라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던 듯하다. 그 후 2년 동안 장기는 이슬람 세계에서 당할 자가 없는 권력자가 되었고, 그 공식 직함 또한 일개 아타베그가 아닌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1145년, 장기는 다마스쿠스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에 바알베크로 가서 또다시 다마스쿠스를 포위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에데사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장기는 다시 에데사로 돌아가 이를 진압해야 했다.
1146년 9월 14일, 장기는 유프라테스 강 인근의 자바르 성을 공격하던 중 숙영지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날 밤에 장기는 술에 취한 채 잠을 잤는데, 장기가 거느리던 노예 몇 명이 막사로 들어와 장기가 먹다 남긴 술을 마셨다. 그런데 마침 잠에서 깬 장기가 그 광경을 보고는 노예들을 호되게 질책하고 다시 잠들었다. 장기의 엄격한 성격을 잘 알던 노예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마침내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때 장기에게 마지막으로 칼침을 놓은 노예가 바로 프랑크족 출신 환관 야란카쉬였다고 전한다. 장기를 암살한 노예들은 모두 장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자바르 성으로 달아나버렸다.
경보가 울려서 부하들이 뒤늦게 막사로 들이닥쳤을 때 장기는 이미 큰 상처를 입고 죽어가던 참이었다. 부하들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고 울부짖었으나 장기는 이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기의 사후는 실로 비참해서 그가 죽자마자 그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아들과 심복들은 유산을 챙기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죽은 장기의 시신을 거의 방치해두었다. 그의 시신은 사핀 들판에 가매장되었고, 한참 후에야 아들들이 돔을 갖춘 제대로 된 무덤을 세웠다.
장기가 죽은 후 장기 왕조는 그 아들들에 의하여 분열되어 큰 위기에 처했으나, 장기의 아들들 중 가장 유능했던 누르 앗 딘(누레딘)에 의해 안정을 되찾았다.
3. 평가
이마드 앗 딘 장기가 건설한 장기 왕조는 활발한 정복전쟁을 통해 분열되어 있던 중동의 무슬림 세력을 어느 정도 결집시키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고 에데사 백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그동안 십자군 국가들이 이슬람 국가들에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형세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장기가 급사함에 따라 장기 왕조는 다시 분열의 위기에 처했으나 그 세력은 장기의 둘째 아들 누르 앗 딘(누레딘)에 의해 안정을 되찾았고, 누르 앗 딘 사후에는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이를 흡수하여 이집트 및 시리아와 이라크를 잇는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살라흐 앗 딘은 그 힘을 바탕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생애를 십자군 국가와 맞서싸운 무슬림 군주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조명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장기는 사실 십자군 국가들가의 투쟁보다도 다마스쿠스의 정복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이슬람 세계의 야심가이자 정복군주였을 뿐, 종교적인 목적으로 십자군과의 전쟁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한편 장기는 생전에 굉장히 엄격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장기 휘하의 군사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두려워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한 밤중에 장기가 몸소 진영을 순시하던 중 보초를 서다가 꾸벅꾸벅 졸던 병사 한 사람을 발견하자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잠이 깬 병사는 눈 앞에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던 장기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다분히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평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결국은 그런 성품 때문에 그 자신도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아들로서 장기의 정복사업을 계승한 누르 앗 딘이 관대한 성품으로 유명했음과는 대조적이다.
4. 창작물에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여러모로 삼국지연의의 장비를 패러디한 인물로 등장한다. 명장이긴 하지만 술을 좋아하고 거친 성격에 부하들에게도 엄격했고, 특히 진중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최후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에 걸맞게 생김새도 대중적인 장비의 이미지처럼 뾰족하고 거친 수염이 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작중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 인물상이 심히 왜곡되었다. 그가 일평생 다마스쿠스를 끈질기게 노렸던 면은 부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슬람권을 통일하여 십자군으로부터 '과거사 청산'을 얻어내려는 투사처럼 묘사했다.[1]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안티오키아를 포위하여 십자군을 위기에 몰아넣었으나 패퇴당한 바로 그 인물이다.[2] 이후 알 무스타르시드는 1135년에 셀주크 왕조의 포로가 되었다가 2개월 만에 암살당한다.[3] 1131년, 부리는 아사신들에게 습격받아 큰 부상을 입었다. 이듬해(1132) 부리는 말을 탔다가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바람에 곧 죽고 말았다.[4] 장남 이스마일은 아버지인 부리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다마스쿠스의 에미르가 되었으나, 민심을 얻지 못한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5] 그들로서는 졸지에 동로마 황제에게 살던 땅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장기의 세력권과 밀착한 샤이자르로 이주해야 할 위기에 처해있었으니 영 싸울 맛이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