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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0:38:54

아르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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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에르빌 성
아랍어 قلعة أربيل
영어 Erbil Citadel
프랑스어 Citadelle d’Erbil
국가·위치
[[이라크|]][[틀:국기|]][[틀:국기|]] 에르빌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437
등재연도 2014년
등재기준 (ⅳ)[1] }}}

파일:The_Great_Mosque,_Jan_2008.jpg
도시의 핵심부에 위치한 시타델

1. 개요2. 교통3. 역사
3.1. 고대3.2. 중세3.3. 현대
4. 한국과의 관계

[clearfix]

1. 개요

아랍어 أربيل
쿠르드어 ھەولێر
시리아어 ܐܪܒܝܠ [2]
영어 Erbil / Irbil / Hewler

2019년 방문기

이라크 북부 에르빌 주의 주도이자 쿠르디스탄 자치국의 수도. 인근의 대도시 모술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져 있으며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대 자브와 소 자브 강 사이의 평야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대부분 쿠르드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아랍인, 칼데아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이란인 등도 거주한다. 따라서 종교 분포도 다수인 수니파 이슬람 외에 각종 동방 기독교 공동체와 야지디, 만다야교 등으로 다양하다. 1차 대전 후의 혼란을 피해 1933년 키프로스, 이어 1940년 미국으로 망명했던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총대주교좌가 2015년 이곳으로 돌아왔다.

중동판 아크로폴리스로 볼 수 있는 시타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인간이 거주한 도시로 201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같은 해 아르빌은 아랍 관광 수도로 선정되었다.

2. 교통

시내 서북쪽에 아르빌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 90여 km 떨어진 키르쿠크를 통해 바그다드와 철도로 통한다.

3. 역사

파일:external/www.norcalblogs.com/mosul34.jpg
아르빌의 시타델

쿠르드사람이 만든 아르빌의 전반적인 역사

3.1.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에 아르빌은 고대 셈계 언어로 '4개의 신'이란 뜻인 아르빌루로 불렸고[3] 아카드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이미 기원전 5천년 경부터 주거지가 생겨났고, 기원전 2150년, 도시는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린 구티족에게 정복되었고 기원전 2050년부터는 아시리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비록 기원전 2040년경에는 우르 제3왕조의 아마르 신에게 함락되었지만 수복된 이후로 수도인 앗수르, 바빌론과 함께 아시리아의 핵심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의 수호신인 이슈타르는 아시리아의 주요 신 중 하나였다. 아르빌루는 아시리아가 자그로스 산맥 넘어 동쪽으로 원정할 때 그 거점이 되어 주었는데, 아슈르바니팔 대왕은 엘람 원정 동안 머문 예시가 있다. 기원전 605년,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린 메디아의 퀴악세르스는 니네베 함락을 도와준 이란계 사르가트 부족을 이 일대로 이주시켰다. 기원전 547년, 아케메네스 제국키루스 대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정복한 후 그곳에 앗수라 사트라프를 설치하였다. 아르빌루는 그 치소가 되었다.

기원전 331년, 아르빌에서 서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평원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운명을 가른 가우가멜라 전투가 벌어졌다. 마케도니아 군에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이후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엑바타나 (하마단)로 향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 도시는 그리스식 명칭인 아르벨라로 불렸다. 셀레우코스 왕조파르티아 제국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여러 토착 왕국들이 세워졌는데, 그중엔 아시리아인들이 아르벨라를 수도로 건국한 아디아베네 왕국이 있었다. 1세기 경 그곳의 왕모(王母)이던 헬레나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그녀의 아들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싸우기도 하였다. 파르티아의 왕릉이 위치했을만큼 그와 밀접한 관계였던 아디아베네 왕국은 트라야누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시에 아르벨라가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117년)

이후로도 로마군은 195년과 216년에 아르벨라를 점령하였고 이때 파르티아 왕릉군이 도굴되었다. 이후 약화된 파르티아는 사산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104년 주교구가 설치되며 세를 불리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4세기 무렵 아시리아 인들 사이에서 다수가 되었다. 그러자 조로아스터교 국가인 사산 제국에 의해 340년을 시작으로 박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아시리아 인들은 그리스도교 제국인 로마 진영에 가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기독교도인 총독은 순교자가 되었다. (358년) 이후 니시비스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학교를 세우자 그 영향으로 521년, 아르벨라에도 학교가 세워졌다.

3.2. 중세

그렇게 200여년이 흐른 후, 아르벨라는 이슬람 제국군에게 정복되었다. 이때부터 아랍/쿠르드 계열의 무슬림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그럼에도 8세기 무렵 아르빌을 중심으로 인근 지방에 5개의 주교구가 추가적으로 설치되는 등 기독교 세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메소포타미의 토착 다신교 역시 10세기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10세기 말엽 아바스 왕조가 분열되며 무주공산의 시대가 도래하자 아르빌은 쿠르드 족의 한 일파인 하다바니 부족이 세습적으로 지배하였다. 하다바니는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부족이기도 하다. 그러던 12세기, 도시는 장기 왕조의 영토가 되었고 튀르크인 총독이 통치하였는데 세습되며 베그테긴 왕조로 불리게 되었다. 12세기 말엽, 그 통치자였던 무자파르 앗 딘은 자발적으로 아이유브 왕조에 복속하였고 그 대가로 살라흐 앗 딘의 매부가 되었다.

평화를 누리던 아르빌은 13세기 초엽 쿠르드인 역사가 이븐 알 무스타우피가 활동하는 등 문화적으로 번영하였다. 1233년 아르빌은 세력을 회복한 아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으나 곧바로 1237년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도시 대부분이 약탈당했으나 시타델은 함락되지 않았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아르빌의 튀르크 총독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쿠르드 군대는 저항하였고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이듬해 아르빌은 함락되었다. 훌라구는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를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몽골군과 함께 유입된 시리아 정교회의 교회가 세워졌다. 한편 이때 상류층 무슬림들은 시리아로 망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몽골을 피해 맘루크 왕조로 망명하여 다마스쿠스의 카디 (재판관)을 역임한 이븐 할리칸이 있다.

한편 그리스도교도들의 중흥기는 14세기 초엽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 기존 이슬람 국가들을 능가하는 탄압 정책을 펴며 종식되었다. 이에 아시리아 인들은 시타델로 피신하였는데 1310년 총독의 요구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쿠르드 인들과의 충돌이 벌어졌고, 7월 1일 튀르크계 대주교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선택한 기독교도 수천명이 학살되었다. 남은 아시리아 거주민들은 1397년 티무르에게 도시가 함락될 때에 학살을 겪었다. 수난을 겪던 아시리아 인들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오스만 지도부는 사파비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시타델을 요새화하였다. 1743년, 아르빌은 60여년의 포위 끝에 나디르 샤에게 함락당하였다. 1862년에는 쿠드르 인 귀족이 아르빌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3.3. 현대

20세기 초엽, 1차 대전 당시 아시리아 인들과 아르메니아 인들은 영국의 도움으로 오스만 군대를 축출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약속과 달리 위임통치를 하며 자치권을 제한하였고 이후 이라크에 소속되었다. 1970년, 사담 후세인의 허가 하에 아르빌은 쿠르디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걸프전으로 후세인 정권이 흔들리자 쿠르디스탄의 자치권은 증대되었는데, 이에 두 파벌이 생겨 내전을 벌였다. 1996년 쿠르디스탄 민주당 (KDP)가 이라크 정부의 도움으로 아르빌을 점령하자 쿠르디스탄 애국 연합(PUK)은 쿠르디스탄 제2의 도시인 술라이마니야에 따로 정부를 차렸다.

2003년 10월,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고 아르빌에는 미군이 주둔하였고 이후 2004년과 2005년에 테러가 일어나 각각 110명과 60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다만 그후로는 안정을 찾았고 2007년부터 '인간이 가장 오래 연속적으로 산 도시'라는 기록을 지키기 위해 1가구만 제외하고 시타델의 8백여가구를 소개시키고 복원에 착수하였다. 2010년대 들어 ISIS가 발흥하자 피난민들이 몰리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해결되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면서 상당히 안전한 편에 속하는 도시가 되었다. 시내에는 쿠르디스탄 국기를 자주 내걸며, 꽤 번화한 도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재 보통 이라크로 여행간다고 하면, 주로 아르빌로 간다. 한국에서는 이라크 전체를 여행으로 잘 가지 않는 편이지만[4], Erbil로 유튜브로 검색해보면 꽤 많은 여행기를 볼 수 있다.

이미 수년 전 부터 안정화된 시기에 접어들자, 건축 붐에 들어섰으며 경제도 부흥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도시로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쿠르디스탄 독립 등을 고려하여 한 국가의 수도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한국군 평화유지군이 잠깐 주둔한 바 있다. 원래 한국군이 주둔하려고 하던 곳은 키르쿠크였지만 최대한 교전지역을 피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의도[5]에 따라 여기로 변경된 것이며, 주둔 기간동안 지뢰제거와 기반시설 재건 등 현지인 친화 정책을 중점으로 활동해 현지인의 84%가 철수를 반대했을 정도로 이라크 파병부대 중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부대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을 무조건 비난하던 조선일보는 키르쿠크가 안전하다느니 기자가 직접 가봐서 취재했다고 사진을 찍고 노무현 정권이 과장한다라고 기사를 냈다가 한겨레에게 키르쿠크는 위험지역인데 터무니없는 기사라고 비난당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은 이 점에서 제대로 파악했다.2004년 자이툰 부대가 아르빌에 주둔해 사회기반 시설 건설 및 자이툰 병원을 통한 주민 의료 지원과 자이툰 교육대를 개설해 지역 주민들의 기술 습득을 돕는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2008년 건설, 의료장비와 병원, 교육대 시설들을 쿠르드 지방정부에 양도하고 철수했다. 이런 인연에 힘입어 2016년 8월부로 주이라크 한국 대사관 분관이 이 지역에 설치되었다.

[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아르벨[3] 현대 아랍어로도 4는 아르바아[4] 정확히는 여행금지국가이다.[5]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에 대해 역사의 오류는 맞으나 불가피한 선택이었단 입장을 밝혔는데, 미 행정부가 이라크를 손 본 뒤엔 북한을 공격하겠단 입장을 보임에 따라 이를 무마하고자 했던 의도도 있었다. 한편 이라크 파병을 대가로 한 북핵 해결을 미 행정부가 무시한 점에 있어선 기존의 악의 축을 바꾸지 않던 미 행정부의 폭주가 큰 이유지만, 전투지원과 동떨어졌던 파병부대의 행보도 이유였을 것이란 추측이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