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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20:33:54

티크리트

파일:사담 후세인 궁전.jpg
현재는 주 지사의 관저인 사담 후세인의 대통령궁
파일:الكنيسة_الخضراء_احدى_اقدم_الكنائس_السريانية_في_العالم_تقع_وسط_مدينة_تكريت_تم_تفجيرها_يوم_الخميس_25-9-2014.jpg
서기 700년에 지어진 시리아 교회인 아오다마 대성당 유적

아랍어 تكريت
시리아어 ܬܓܪܝܬ
영어 Tikrit

1. 개요

이라크 중북부의 도시. 수도 바그다드와 제2의 도시 모술 사이의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해 있다. 주변 도시로는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사마라가 있다. 살라딘 주의 주도로, 인구는 16만명이다. 주의 이름답게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 유수프의 고향이다.[1] 이라크의 대통령 사담 후세인 역시 이곳 출신으로, 자신과 살라딘을 연관시키며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티크리트는 후세인 정권의 지지 기반이었고 당시 지어진 대통령궁이 남아있다. 과거 시리아 정교회의 중심이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였으나 11세기부터 박해로 점차 사라졌다. 21세기 들어 이라크 전쟁과 2014년 7월 ~ 2015년 3월까지 약 7개월간 ISIS의 강점을 겪은 도시는 복구가 진행중이다.

2. 역사

파일:مسجد_ومزار_الأربعين_وسط_مدينة_تكريت_العراقية_يضم_رفاة_اربعين_شهيداً_من_شهداء_الفتح_الاسلامي_للمدينة.jpg
11세기에 세워진 아르바인 모스크. 이슬람 정복 당시 전사한 40인의 사하바들이 안장되어 있다. 주요 인물로 아마르 빈 준다브 알 가파리, 하산 빈 알리의 증손녀이자 신학자인 시트 나피사 등이 있다. 1262년까지는 마드라사 (대학) 기능도 했다. 하지만 2014년 다에시에 의해 영묘와 묘원 일대가 폭파되는 등 훼손되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티크리트는 아시리아 시대에 세워진 유서깊은 도시이다. 사산 제국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를 거쳐 6세기부터 단성론인 시리아 정교회가 융성하였다. 주민들은 대부분 아랍계 기독교도들인 이야드 부족이었다. 640년 이슬람 제국군이 도시를 포위하였는데, 페르시아의 지배를 거부하던 그들은 동족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슬람 정복 후에도 티크리트는 여전히 기독교 도시였고, 기독교 아랍어 문학이 발달하였다. 8세기 말엽 티크리트 대주교 쿠리아코스는 시리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에 오르기도 하였다. 10세기 부와이 왕조 하의 바그다드에서 고전의 아랍어 번역에 주력했던 야흐야 이븐 아디 역시 티크리트 출신 기독교도였다. 그는 알 파라비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9세기 이후부터 이라크 중부의 기독교도들은 무슬림 총독들의 압력으로 모술과 신자르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소극적 박해는 11세기 우카일 왕조를 멸한 셀주크 튀르크 시대에 이르러 적극적 박해로 변모하였다. 1089년에는 녹색 교회로 알려졌던 아오다마 대성당이 튀르크인 총독에 의해 약탈당하였다. 비록 1112년 후임 총독에 의해 대성당이 복구되었지만 이미 신자르로 도피한 성직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마르 마타이 수도원을 세워 현재까지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마프리아노 (대주교) 역시 1156년 모술로 이전되었다. 한때 아사신 계열의 쉬아 이스마일파가 도시를 장악하였다가 셀주크 군에게 축출되기도 하였고, 쿠르드계 영주 아이유브는 패주하던 이마드 앗 딘 장기를 구출해 주기도 하였다.

1258년, 몽골군이 도시를 포위하였을 때에 티크리트는 저항한 대가로 파괴되었다. 기독교도들은 아오다마 대성당으로 피신하였지만 바그다드의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달리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학살당하였다. 이후 재건되었지만 14세기 말엽 도시를 정복한 티무르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인종 청소를 감행하였다. 이로써 약 천년간 이어지던 기독교도 공동체는 괴멸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기독교도들도 17세기 사파비 제국의 박해로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기에 티크리트는 약 5천명의 작은 도시였고, 대다수의 수니 무슬림과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였다.[2] 1917년 영국군이 점령, 후에 이라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바트당의 쿠데타로 집권하게 된 사담 후세인은 고향인 티크리트를 개발하여 주요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사담 후세인의 고향이어서 이라크 전쟁 당시 격렬한 저항을 예상하였지만,예상과 달리 미군은 별 저항 없이 티크리트를 점령하였다. (2003년 4월) 그해 12월에는 티크리트 근교의 앗 다우르에 숨어있던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며 전쟁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티크리트에서는 점령군에 대한 게릴라가 이어졌다. 2005년, 도시는 쉬아 계열의 이라크 정부에게 인도되었지만 혼란은 여전하였다. 2014년 6월, ISIS는 격렬한 전투 끝에 이라크 정부군을 축출하고 티크리트를 점령하였다. 이후 그들은 포로로 잡힌 이라크 공군 사관생도들 중 시아파 신도 1566명을 처형하였고 9월에는 서기 700년에 지어진 아오다마 대성당 유적을 폭파,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2015년 3월, 마침내 이라크 정부군은 티크리트 탈환에 나서 그달 31일에 작전을 완료하였다. 이후 복구 공사가 진행 중이다.


[1] 다만 그는 출생 직후 부친 아이유브가 장기를 주군으로 택하며 가족과 함께 시리아로 이주하게 된다.[2] 유대인들은 1940년대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60년대에는 단 두 가구만이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