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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02 11:17:14

사하바

파일:무함마드와 사하바.jpg
무함마드와 제자들

1. 개요2. 목록
2.1. 무하지룬2.2. 안사르2.3. 기타

1. 개요

아랍어 الصحابة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따른 초기 무슬림들. 단수형에서 남성형은 써하비, 여성형은 써하비야이다. 박해를 받던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로서, 이슬람권에선 엄청난 존경을 받는 집단이다. 종교적으로 사하바들은 무함마드의 언행 (하디스)과 관행 (순나)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동시에 이들은 무함마드 사후 정통 칼리파 시대 움마 (공동체)의 주축이 되었고 그 후로도 후손들 (타비운) 역시 우마이야 왕조에서 중용되며 7세기 중동사를 만들어갔다. 사하바, 타비운에 이은 타비 알 타비인에선 수니 이슬람의 4대 법학파가 시작되기도 하였다.[1]

한편 사하바들도 그 수가 상당히 많아 세부적으로 분류된다. 먼저 610년대 메카에서 개종하고 무함마드의 메디나 피신 (히즈라)에 함께한 무하지룬 (مهاجر)이 있다. 정통 칼리파들과 무함마드의 직계 가족들이 주를 이룬다. 다음으로 히즈라 후 620년대 메디나에서 개종, 무하지룬과 함께 메카에 맞선 안사르가 있다. 그외에 바드르 전투에 동참한 바드리윤, 620년대 중에 개종한 이들 등의 분류 가 있으나 잘 쓰이지 않는다.[2] 족벌 정치를 행한 3대 칼리파 우스만 전까지는 무하지룬과 안사르가 절대적 주도권을 지녔고, 그에 속하지 않은 사하바였던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심한 견제에 시달렸다.

2. 목록

인지도가 있는 사하바들의 목록. 전체 사하바는 3151명에 달한다.

2.1. 무하지룬

초창기 이슬람 공동체의 구성원들.[3] 볼드체는 무함마드가 천국이 약속된 10인으로 언급한 이들 (العشرة المبشرون بالجنة)

2.2. 안사르

헤지라 전후로 개종한 야스리브 (메디나) 사람들. '조력자들'. 볼드체 : 정통 칼리파 시대 7인 자문단 (원로원) 멤버

2.3. 기타

바드르 전투부터 630년까지 개종한 이들 / 기존 사하바 자녀들

[1] 이러한 사하바, 타비운, 타비 알 타비인을 포함해 살라프, 즉 선조들이라 칭한다. 한발리파와하비즘의 원류인 살라피야 사상 (살라프파)에서 본보기로 삼는 이들이다[2] 이러한 세 계층?의 분류는 일본 에도 막부의 신반다이묘, 후다이다이묘, 도자마다이묘 체제와 비교되기도 한다[3] 이름대로 히즈라를 행한 사람들이지만 일부는 그 전에 순교하여 참여하지 못하기도 함[4] 카디자의 친구. 두번째 무슬리마,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의 부인[5] 무함마드의 양자. 1차 동로마 원정 중 무으타 전투에서 전사[6] 5번째 무슬림. 자신이 속한 기파리 부족을 개종시켜 메디나로 합류. 시아파의 4대 사하바 중 한명이며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에게 재산 축적을 반대하고 그 부를 빈민들에게 공통 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종의 공산주의 사상의 원류로 여겨지기도 한다.[7] 8명의 초기 (남성) 개종자 중 한명. 아부 바크르가 지목한 6인의 슈라 위원 중 한명, 654년 사망해 암만에 매장됨[8] 바드르 전투 당시 유일하게 말 가지고 있던 사람. 후에 이집트, 키프로스 정복 참가. 알리에 충성, 시아파의 4대 사하바 중 한명[9] 640년 이집트 원정 시에 홀로 바빌론 성벽 기어올라가 성문 여는 등 활약. 이븐 주바이르의 부친, 1차 피트나 당시 암살됨[10] 17번째로 입교. 주바이르의 부인, 이븐 주바이르의 모친. 무함마드와의 낙타 일화. 야르무크 전투에서 활약, 칼리파 야지드 1세에 반대. 692년 사망[11] 무함마드의 비서. 메디나의 그의 거처 건립, 무함마드의 모든 전투 종군. 다마스쿠스 총독위 제안 거절하고 일반 병사로 종군, 무아위야 1세 대에 쿠파 총독 지내다 671년 사망.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의 주관 하에 메디나 매장됨, 천국 보장된 10인 중 마지막.[12] 우후드 전투에서 75군데 상처 입으면서도 무함마드를 온몸으로 보호, 1차 피트나의 낙타 전투 당시 같은 편이던 마르완 이븐 알 하캄의 화살에 맞은 것이 덧나 사망[13] 우마르 시대 이슬람 제국군 총사령관. 638년 아라비아 반도의 대기근 시에 메디나에 4천 마리 낙타를 통한 식량 보내 극복 결정적 역할, 우마르의 금전 답례 거부. 이듬해 암와스 역병에도 에메사 본영에 머물다 감염되어 사망[14] 아부 바크르의 초대로 입교한 초기 8인 중 한명. (총 40여명 전도함) 쿠라이쉬 세력의 박해를 피해 앗 사파 언덕 동쪽의 골목에 위치한 그의 집을 이슬람 모임의 장으로 제공. 첫 '다르 알 이슬람'[15]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이복형제[16] 첫 무슬리마 순교자[17] 첫 무슬림 순교자[18] 첫 마스지드 (모스크)를 지음. 시아파의 4대 사하바 중 한명[19] 흑인 노예 출신, 첫 무앗진[20] 에티오피아인 노예 출신, 무함마드의 유년기 양육 맡음. 자이드 이븐 하리스와 결혼, 우사마 낳음. 우후드 전투 당시 병사들에게 물을 떠다주고 간호하다가 패주병 발생하자 그중 1인에게 다가가 물레방아와 칼을 바꾸고 다른 여자들과 전투 나섰다가 화살 맞기도. 무함마드는 그녀를 누이라 부르며 존경, 자주 방문하며 친근감 보임[21] 바드르 전투에서 아부 자흘 살해. 쿠파의 카디, 우스만과 대립하다 숙청됨[22] 무함마드의 대 메디나 특사로 부족장들 개종시킴, 우후드 전투에서 기수로서 의무 다하다 전사[23] 무함마드의 숙부, 쿠라이쉬 부족의 박해에 분노해 개종. 메디나의 방어 맡아 바드르 전투에서 우트바 이븐 라비아 살해. 하지만 우후드 전투에서 우트바의 딸의 사주를 받은 에티오피아 인의 공격으로 전사[24] 부친과 함께 개종, 우후드 전투 당시 참전하려 했으나 무함마드가 어리다며 저지. 이라크, 이집트 원정 동참 후 주바이르, 아부 아이유브와 후자에 정착. 1차 피트나 당시 중립, 누이 하프사의 아이샤 진영 가담 막음. 2차 피트나 때 후세인에게 메카 남을 것을 설득하나 실패. 2630구의 하디스 전수하고 693년 사망[25] 아랍계 금발 페르시인, 동로마 노예였다가 탈출. 메카에서 이슬람 개종, 히즈라 동참 실패. 이후 탈출, 추격자들에게 메카의 재산 넘겨주고 메디나 당도해 무함마드 감탄. 우마르 시대에 종종 예배 인도[26] 초기 움마의 몇 안되는 하피즈 중 한명. 무함마드의 허가 하에 남녀 혼성 회중 이끄는 이맘 역할, 바드르 전투 참전 제약하면서도 샤히다 (순교자) 칭호 받음. 우마르 시대에 하인에게 암살당함[27] 무함마드의 외사촌. 우후드 전투의 부상이 후에 재발해 사망[28] 칼리드 이븐 왈리드의 사촌, 압둘라의 부인. 그의 사후 무함마드와 재혼. 파티마 양육[29] 남편 쿠나이스 이븐 후다이파 사후 무함마드와 재혼. 하디스 전달, 후에 우스만의 쿠란 단일화 때에 그녀의 필사본 취함[30] 남편 앗 사크란 사후 무함마드와 재혼, 집안 살림 맡음[31] 메디나 카즈라즈 부족 사이다 가문의 족장, 아카바 서약 주도. 행동파, 무함마드 사후 안사르들이 칼리파 추대 시도하나 무하지룬의 반발로 무사됨. 이후 시리아에 살다가 암살됨[32] 메디나 카즈라즈 부족 낫자르 가문의 족장. 아카바 서약 주도, 사후 무함마드가 낫자르 가문 지도자 등극[33] 메디나 아우스 부족장. 우후드 전투 때에 무함마드 지키다 중상 입음, 배신한 쿠라이자 부족 처형 지시 후 사망[34] 부친에 이은 메디나 아우스 부족장. 628년 무라흐 부족 공격하나 패배, 무함마드 사후 사끼파 회의에서 안사르 중 제일 먼저 아부 바크르에 충성 서약하며 안사르와 무하지룬 간의 무력 충돌 방지함. 633년 이라크 원정 중 전사[35] 메디나 카즈라즈 부족장. 무함마드와 애매한 관계 유지, 위선자라 욕먹다가 620년대 말에야 충성함[36] 바드르 전투에서 활약. 아부 우바이다의 시리아 원정 보좌, 라타키아 함락 주도. 초대 팔레스타인 총독, 이집트의 바빌론 항복 유도. 무아위야와 키프로스 정복, 사후 예루살렘 안장됨[37] 히즈라 직전 개종, 아부 우바이다와 의형제. 624년 유대인 지도자 카압 이븐 알 아슈라프 암살 주도, 우후드 전투 때 무함마드 지킴. 나디르 부족 추방 감독, 카이바르 공격 참가. 630년 무함마드의 메카 행군 당시 그의 낙타 고삐 잡음, 메디나 총독 맡음. 이후 칼리파 우스만의 조언자로 이집트 인들의 메디나 봉기 시에 정책 바꿀 것 제안하나 거절됨. 우스만 사후 알리에 충성 거부, 은거하다 663년 사망[38] 우후드 전투 당시 부친이 오인 사살됨, 그럼에도 동료들 용서하고 피값 거부. 무함마드 지시로 무나피쿤 (위선자들) 감시, 칸다크 전투 당시 쿠라이쉬 측에 사절로 파견되어 적군 교란. 칼리파 우마르 대에 니하완드 전투 당시 부사령관, 사령관 앗 누만 전사 숨기고 전투 지휘해 승리. 이후 아르메니아 원정, 쿠파-크테시포 (알 마다인) 총독 지냄. 당나귀 탄채로 빵 먹으며 등장해 신선한 충격 선사, 656년 사망[39] 무함마드의 서기. 아부 바크르의 7인 자문단 중 한명, 우스만 시대의 쿠란 단일화 작업 주도[40] 첫 이슬람 시인, 여러 나쉬드 지어 아랍인 개종 주도. 무함마드가 감사 의미로 전용 민바르와 이집트 총독이 선물해준 기독교도 노예 선물. 후자 해방, 이슬람 개종하자 결혼.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와 중국까지 선교 여행[41] 하디스 전수, 아부 바크르에 충성 서약 거부. 쿠란 집필 참여, 알리 지지. 낙타 전투 때에 1천의 안사르 지휘, 시핀 전투에서 전사[42] 무함마드의 서기. 사후 25인의 하피즈 (쿠란 완전 암송) 중 한명, 아부 바크르의 7인 자문단의 일원[43] 2차 아카바 서약 때에 개종, 첫 예멘 총독 봉해짐. 무함마드, 직접 배웅하며 애매한 문제 대한 이즈티하드 (개인의 이성적 판단) 권한 부여. 무함마드 왈, 학자들을 이끌고 천국으로 향할 자. 뛰어난 학자였으나 689년 암와스 역병으로 36세에 요절[44] 카즈라즈 부족의 유력자. 아카바 서약 동참, 유대인 지도자 알 유사이르 암살 주도. 동로마와의 무으타 전투에서 전사[45] 7번째로 많은 1170구의 하디스 전수. 메디나에 계속 머뭄, 2차 피트나 당시 우마이야 정벌군에 맞서다 사망[46] 무함마드 사후 알리부터 5대 이맘 무함마드까지 충성. 697년 우마이야 조의 대장군 핫자즈 이븐 유수프에 암살됨[47] 첫 페르시아인 무슬림.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거쳐 노예에서 해방해준 무함마드를 따라 이슬람 개종. 칸다크 전투 당시 참호 계책 내어 승리 기여. 시아파의 4대 사하바 중 한명[48] 히즈라 직후 무함마드의 낙타가 그의 집 앞에 멈춤.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의 2인분 식사만 준비, 무함마드가 이웃들 모두 초대했음에도 모두 배불리 먹는 기적 발현. 무함마드가 메디나 사원 부지 위해 고아들이 소유하던 토지 구매 시에 자금 대줌. 무아위야 1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 중 병사, 유언대로 반격 후 최전방인 성벽 아래에 묻힘. 1453년 후 오스만 측이 에윱 술탄 사원 세움[49] 본래 유대교 랍비. 토라에서 기존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완성할 선지자의 출현 부분에 집중, 히즈라 직후 무함마드 앞에 나아가 샤하다하며 개종. 기존 이름이던 알 후사인 대신 압둘라 이름 하사받음. 생전에 무함마드로부터 천국을 보장받은 첫번째 사하바. 후에 시리아 원정 참여한 후 663년 메디나에서 고령의 나이로 사망[50] 히즈라 직후 자신의 집을 예배소로 내어줌. 무함마드의 원정 17차례 동행, 우마이야 궁정에 있다가 카르발라 참극에 충격을 받아 은거[51] 카이바라 전투 등 무함마드의 원정 15차례 동행, 우마르의 파티마 겁박 목격. 라이 총독 지낸 후 쿠파에서 사망[52] 아라비아 반도 대한 토지 조사 및 세금 징수 맡음, 알리 지지. 아부 바크르 즉위 시에 알리가 바이아 (충성 서약) 행한 후에야 뒤따름, 알리 대에 바스라 총독 지냄[53] 불과 10세에 이슬람 입교, 의부 줄루스의 회개 일화로 유명. 칼리파 우마르 시대에 홈스 총독 지냄[54] 무함마드의 칼잡이. 우후드 전투에서 그를 호위, 힌드 빈트 우트바 살려줌. 632년 야마마 전투에서 전사[55] 히즈라 직후 개종한 두 메디나 여인 중 한명. 간호사와 자선가로 활동, 전투 중 부상자 돌봄. 바레인 대학교에선 간호 분야의 우수 학생 매년 선발해 그녀의 이름 붙여진 상 수여함[56] 히즈라 직후 개종한 두 메디나 여인 중 한명, 여성들에게 이슬람 전파.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 나선 무슬리마로 우후드 전투에서 무함마드 보호, 야마마 전투 참전. 첫 남편과 얻은 두 아들들 모두 순교[57] 누사이바의 아들. 스스로 선지자라 칭한 무사일리마에 대한 무함마드의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고문당해 순교[58] 신혼 당일 목욕 제계도 하지 못하고 우후드 전투 참전, 아부 수피안 죽이려 들다가 살해됨. 무함마드가 애통해 하며 천사들이 씻겨준다 말해 목욕 제계의 왕 (가실 알 말리카)로 불리게 됨. 그의 아들 압둘라는 2차 피트나 때 메카 주민들과 우마이야 조에 맞섬[59]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하려는 쿠라이쉬 부족의 계략으로 포로가 되어 (라히얀 부족이 개종 원한다고 속여 10명의 선교단 파견케함) 메카에서 십자가형 당함[60] 히즈라 직후 모친이 10세인 그를 무함마드에 의탁. 사하바들 중 가장 장수하여 712년 바스라에서 103세로 사망[61] 아부 바크르의 장남, 시디끼 가문의 시조. 부친과 달리 메카 편에서 싸움, 바드르 전투 때에 마주치나 다른 길로 감. 우후드 전투 때에 부친에게 결투 신청, 아부 바크르가 응하려 했으나 무함마드가 저지. 630년 개종, 야마마 전투에서 적장 전사시킴. 야르무크 전투 당시 동로마측 결투자들 전사시키며 사기 진작시킴, 보스라 점령. 1차 피트나 당시 알리 편에서 낙타 전투 참가, 675년 사망[62] 무함마드의 동년배 숙부, 압바스 왕가의 시조. 무슬림 보호해 주었으나 히즈라 참가 안하고 630년에야 개종. 아부 바크르 지지 거부, 알리 지지.[63] 압바스의 아들, 하디스 전수. 알리 지지, 후세인에게 쿠파 향하지 말 것을 조언하나 설득 실패[64] 카디자의 조카이자 무함마드의 사위.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 편이었으나 628년 포로가 된 후 아내 자이납의 설득으로 개종[65] 무함마드의 양자 자이드의 아들. 부친의 복수로 동로마령 요르단 원정, 정통 칼리파 시대의 첫 군사 원정[66] 이집트 정복 참가 후 정착, 칼리파 우스만과 우마이야 왕조 지지. 668년 이집트 총독 부임, 이프리키야 원정 추진[67] 고아 출신, 아부 다르바의 남편. 어린시절 남성들과 사원에서 공부했고 후에 다마스쿠스에서 하디스와 피크 (법학) 교사가 되어 사원의 남성 구역에서 강의함.[68] 바드르 전투에서 부친을 죽인 함자가 우후드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간을 꺼내 씹음, 무아위야 1세의 모친. 동생 아부 후다이파는 초창기 무슬림. 630년 다른 메카인들과 이슬람 개종, 야르무크 전투에서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