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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7대 술탄 무함마드 1세 타파르 محمد اول تاپار | ||||
본명 | 아부 슈자 기야트 알 둔야 왈딘 무함마드 이븐 말리크샤 ابو شجاع غیث الدنیا و الدین محمد بن ملک شاه | |||
출생 | 1082년 1월 21일 | |||
페르시아 이스파한 | ||||
사망 | 1118년 (향년 35~36세) |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재위 | 셀주크 제국 술탄 | |||
1105년 ~ 111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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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가와르 카툰 | |||
쿠틀루그 카툰 | ||||
니스탄다르 자한 카툰 | ||||
자녀 | 마흐무드 2세 | |||
기야스 앗 딘 마수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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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샤 | ||||
파트마 카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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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7대 술탄. 타파르는 투르크어로 "얻는 자, 발견하는 자"를 의미한다.2. 생애
1082년 1월 2일 셀주크 제국 3대 술탄 말리크샤 1세와 첩실인 타지 알딘 카툰 사파리야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친형제로 아흐마드 산자르가 있었다. 1095년 이복 형제 마흐무드 1세와 삼촌 투투쉬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술탄으로서 입지를 다진 바르키야루크는 그를 간자 지방 영주로 임명하고 아흐마드 한자르를 호라산의 대리 통치자로 삼았다. 그러던 1098년 또는 1099년, 지난날 투투쉬 토벌전에서 공을 세운 무아위드 알 물크는 바르키야루크에게 해임된 뒤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귀순한 뒤 재상에 선임되었다. 무함마드는 무야위드 알 물크의 설득을 받아들여 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호라산의 아흐마드 산자르도 호응하면서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al-Sulṭān al-Mu'aẓẓam(우월한 술탄)라는 칭호를 바쳤다. 또한 자지라와 이라크의 공국들도 타파르에게 귀순했으며, 바그다드는 바르키야루크와 무함마드 1세 지지자들간의 투쟁으로 인해 8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하지만 군사적 재능이 떨어졌던 무함마드 타파르는 다수의 신하들이 배신한 상황에서도 이란에서 분전하는 바르키야루크에게 연이어 패배했고 전세는 바르키야루크 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그러나 바르키야루크 역시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한 뒤 병사들의 경작지로 사용해 그들의 원성을 샀으며, 오랜 세월 배척당하던 시아파를 군대에 배속시켰다가 시아파를 추종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1104년, 전쟁에 지치고 병마에 시달리던 바르키야루크는 무함마드에 비해 훨씬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와 타협했다. 무함마드 타파르는 디야르바키르, 아제르바이잔, 알 자지라 지역에서 술탄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릴수 있게 되었으며, 아흐마드 산자르는 호라산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바르키야루크는 이스파한을 포함한 이란 일대와 바그다드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1105년, 바르키야루크가 이스파한으로 가던 중 보루제르드에서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즉시 바그다드로 진격해 입성한 후 칼리파 알 무스타지르로부터 술탄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바르키야루크를 추종하던 신하 대부분이 귀순했고, 아버지 바르키야루크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던 말리크샤 2세는 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1] 그리하여 단독 술탄이 된 그는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아들 아흐마드 알 물크를 재상으로 기용해 내치를 다지는 한편,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군사 활동을 개시했다.
1106년, 무함마드는 샤디즈의 이스마일파 요새를 공략하고 이란 북부의 바반트 왕조 통치자 샤흐리야르 4세에게 이스마일파에 대항하는 원정에 참여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샤흐리야르 4세는 서신의 어투가 너무 오만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무함마드는 아미르 차비르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샤흐리야르 4세를 체포하려 했으나, 샤흐리야르와 그의 아들 카린 3세 휘하 군대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이후 샤흐리야르 4세는 무함마드에게 지난날 술탄에게 맞섰던 것을 사과하고 아들 알리를 인질로 보냈다. 무함마드는 알리의 잘생긴 용모와 당당한 태도에 반해 자신의 딸 파트마 카툰과 결혼하라고 제안했지만, 알리는 바반트 왕조의 후계자인 카린 3세 만이 그런 영예를 누릴 수 있다며 거절했다. 이에 무함마드는 샤흐리야르 4세에게 카린 3세와 파트마 카툰의 결혼을 제안했고, 샤흐리야르 4세가 이에 동의하면서 양자간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
1108년, 무함마드는 재상 아흐마드와 함께 이라크에 준둥하던 베두인 세력인 바누 마즈야드를 공격해 그 지도자인 사다카를 패사시켰다. 1111년 2월,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지하드를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날로 거세지더니 알레포의 카디 이븐 알 카샤브가 주도한 금요일의 지하드 요구 시위가 바그다드에 동로마 사절의 도착과 동시에 폭동으로 변하여 대사원에 위치한 민바르(설교단)와 칼리파의 옥좌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그해 말엽 셀주크 군대가 파견되었으나 혼란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당초 십자군 국가들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던 무함마드는 이대로 가다간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지하드를 선포하여 민심을 가라앉히고 모술 총독에게 알레포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술 총독은 알레포 에미르와 갈등을 벌이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다가 본거지로 돌아갔다.
1115년, 무함마드 1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중앙 시리아로 진군해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트리폴리의 프랑크 군주들과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연합군에 맞섰다.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시리아 토후들의 비협조로 인해 보급이 끊기고 십자군의 거센 반격이 이어지자 결국 실패했다. 그는 이에 질려버려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그 후 셀주크 제국은 두 번 다시 십자군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한편 1109년 아사신을 멸하기 위해 재상 아흐마드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1118년, 무함마드가 35 ~ 36세의 나이로 바그다드에서 사망했다. 사후 아들 마흐무드 2세가 술탄에 올랐고 다른 아들들인 기야스 앗 딘 마수드가 파르스와 이스파한, 토그릴 2세는 카즈빈을 상속받았으며, 아흐마드 산자르는 호라산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이후 이들간의 내전이 격화되면서, 셀주크 제국의 혼란상은 가중되었다.
[1] 정황상 타파르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