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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09 17:35:25

키질 아르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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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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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술탄
키질 아르슬란
قزل ارسلان
본명 무자파르 알딘 키질 아르슬란 우트만
مظفر الدین قزل ارسلان عثمان ‎
출생 미상
사망 1191년 9월
재위 셀주크 제국 술탄
1190년 ~ 11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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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부모 아버지 일디귀즈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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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술탄.

2. 생애

아란과 아제르바이잔의 아미르이자 셀주크 제국의 권신인 일디귀즈의 아들이다. 117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지위를 승계받은 형 무함마드 자한 팔라반에 의해 이스파한과 티브리스 등 서부 이란 일대의 통치를 맡았다. 그러던 1186년 팔라반이 사망했을 때, 팔라반의 네 아들들이 아제르바이잔과 아란, 하마단 등지를 물려받았지만 지위는 그에게 넘어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팔라반의 아내 이나츠 카툰은 아들 쿠틀루 이난츠 무함마드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받게 하기 위해 아르슬란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언제까지나 허수아비 노릇할 수는 없다고 여긴 토그릴 3세가 가세하면서, 양자간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 무렵 이란 동부의 케르만 부 셀주크 제국오우즈의 침공으로 붕괴되고 무함마드 이븐 바흐람샤가 도주하면서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이란 서부로 한정되었지만, 그들은 이에 신경쓰지 않고 최고 권력을 향한 경쟁에 몰두했다.

1186년 10월, 토그릴은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 등 왕공들의 지원에 힘입어 맘루크와 마라가, 젠잔 에미르들의 지원을 받은 키질 아르슬란을 수도 하마단에서 몰아냈다. 키질 아르슬란은 북부 산악지대로 도주한 뒤, 11월 7일 아잠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후 바그다드에 사절을 보내 셀주크 술탄의 커져가는 힘을 경고하며 칼리파에 복속하는 대가로 원군을 청했다. 칼리파 알 나시르는 그와 토그릴 중 누구의 편을 들 지 고심한 끝에 그를 택하기로 하고 와지르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토그릴 토벌 임무를 맡겼다. 유누스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하마단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1188년 5월 5일, 토그릴의 군대와 다이마르그에서에서 마주치자 곧바로 공격했다. 그러나 족장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술탄 진영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칼리파 군은 패배했고, 유누스는 사로잡혔다.

하지만 알 나시르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이라크 전역에서 긁어모은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1188년 7월 재차 출진했다. 이때 토그릴 3세는 휘하의 주요 아미르들 중 아이바와 오자다 등을 처형했다. 이 행위에 부하들은 동요했고, 앞서 전향했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토그릴 진영을 떠나 키질 아르슬란 편에 가담했다. 키질 아르슬란은 1년만에 아잠으로 귀환하였고, 이번에는 칼리파 군대도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했다.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하마단을 점령했고, 토그릴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추대했다.

토그릴 3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잠을 포기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했다. 그는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한 뒤 살라흐 앗 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은 안티오크 공국 원정 도중 군대가 지쳐 후퇴하던 터라 여유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알 나시르는 여세를 몰아 티크리트에 대한 지배권을 수복했다. 토그릴 3세는 마지막 시도로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특히 알 나시르에겐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사절단을 바그다드로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 사과하게 하고, 이븐 유누스를 죽인 것에 용서를 구했으며, 칼리파의 명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카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 둘 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1190년 10월 토그릴 3세는 킵차크 성채에서 2년간 포위 공격을 견딘 끝에 키질 아르슬란에게 항복했고,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알 나시르의 동의하에 술탄 산자르를 폐위하고 형수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자신을 술탄으로 선포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을 거머쥐는 듯했으나, 1191년 8월 이나츠 카툰에게 독살당했다. 이후 아부 바크르, 오즈베그, 쿠틀루그 이난즈, 아미르 아미란 등 팔라반의 자식들이 권력을 놓고 정쟁을 벌였고, 토그릴 3세 역시 감옥에서 풀려난 뒤 술탄에 복위하기 위해 정쟁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