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2:14:13

무아위야 2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thumbnail.svg.png
보편 칼리파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8000, #008000 20%, #008000 80%, #00800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정통 칼리파
초대 제2대 제3대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제4대 제5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하산 이븐 알리1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우마이야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야지드 1세 마르완 1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아브드 알 말리크 왈리드 1세 술라이만 우마르 2세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지드 2세 히샴 왈리드 2세 야지드 3세
제13대 제14대
마르완 2세
아바스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알 만수르 알 마흐디 알 하디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알 아민 알 마문 알 무타심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알 와시크 알 무타와킬 알 문타시르 알 무스타인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알 무타즈 알 무흐타디 알 무타미드 알 무타디드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알 무크타피 알 카히르 알 라디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알 무타키 알 무스탁피 알 무티 알 타이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알 카디르 알 카임 알 무크타디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알 라시드 알 묵타피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알 무스타디 알 나시르 알 자히르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알 무스타심 알 하킴 1세 알 무스탁피 1세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알 하킴 2세
제45대 제44대2 제46대 제45대2
알 무스타심 알 무타와킬 1세 알 와시크 2세 알 무스타심
제44대3 제47대 제48대 제49대
알 무스타인
제50대 제51대 제52대 제53대
알 카임 알 무타와킬 2세 알 무스탐식
제54대 제53대2 제54대2
알 무타와킬 3세 알 무스탐식 알 무타와킬 3세
오스만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셀림 1세 셀림 2세 무라트 3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오스만 2세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무라트 4세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마흐무트 1세 오스만 3세 무스타파 3세 압뒬하미트 1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셀림 3세 무스타파 4세 마흐무트 2세 압뒬메지트 1세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압뒬아지즈 무라트 5세 압뒬하미트 2세 메흐메트 5세
제29대 제30대
메흐메트 6세 압뒬메지트 2세 }}}
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우마이야 왕조 제3대 칼리파
무아위야 2세
معاوية بن يزيد
<colbgcolor=#C0C0C0><colcolor=#FFF,#FFF> 이름 무아위야 이븐 야지드
معاوية بن يزيد
출생 664년
빌라드 알 샴
사망 684년 (향년 20세)
우마이야 왕조 다마스쿠스
재위 기간 우마이야 칼리파
683년 11월 ~ 684년 2월 (3개월)
전임자 야지드 1세
후임자 마르완 1세
부모 아버지 : 야지드 1세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3. 평가

[clearfix]

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3대 칼리파. 2차 피트나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재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2. 생애

661년 3월 28일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우마이야 왕조 제2대 칼리파 야지드 1세바누 칼브의 부족장 하산 빈 말리크의 누이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출생일은 친조부 무아위야 1세가 칼리파로 선포된 날이었다. 무아위야 1세는 이를 비범하게 여기고 자신의 이름을 손자에게 붙여줬다. 683년 11월 11일 아버지 야지드 1세가 사망하자, 하산 빈 말리크의 지지를 받고 칼리파에 올랐다. 그는 그때까지 궁정에서 살았을 뿐 외부 세계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은 그가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산에게 의존하기만 할 거라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는 달리 통치를 원만하게 수행했다. 먼저 메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븐 주바이르와의 전쟁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는 메디나와 메카에서의 전쟁은 광기와 신성모독이며, 특히 카바를 불태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메카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알사쿠니[1]에게 철군령을 내렸다. 내전이 한시바삐 끝나기를 바랐던 무슬림들은 이에 기뻐했다.

이후 이븐 주바이르에게 사절을 보내 "내겐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그대가 뒤를 이어 칼리파가 되어라."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바이르는 그가 아직 어려서 나중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거부하고 내전을 재개해 이집트 남부와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사절을 보내 두 사람이 동시에 퇴위하고 슈라에 새 칼리프 선출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거절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알다하크 이븐 카이스 알 피흐리에게 국정을 맡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지 개혁 법안을 내었다. 첫째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사형제 폐지, 셋째는 모든 무슬림의 자카트(자선금) 납부 의무화였다. 기득권 계층은 이에 큰 위협을 느끼고, 그가 684년 2월에 사망한 직후에 모두 폐지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확실한데, 황달이나 전염병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죽기 전에 퇴위했다는 설도 제기되나 불확실하다. 하산 빈 말리크는 무아위야 2세 사후 야지드 1세의 차남 칼리드를 지지했지만, 겨우 10대에 불과한 아이가 이븐 주바이르를 당해낼 리 없다고 여긴 원로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던 중 이라크에서 이븐 주바이르에게 축출되어 다마스쿠스로 피신한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원로원 마르완 빈 알 하캄을 지지하기로 했다.

마르완은 주바이르에게 귀순하려 했지만, 지야드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고 자비야에서 우마이야 지지자들을 결집하여 회동을 열었다. 하산은 이 자리에서도 칼리드를 지지했지만, 시리아 원로들은 이븐 주바이르와 내통한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젊은이를 따를 수는 없다며 반대하였다. 40일 간의 회의 끝에 결국 경험이 많은 마르완이 마르완 1세로서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다만 하산의 입장도 반영하여 마르완의 후계자는 칼리드, 다시 그 후계자는 아므르 빈 사이드로 정해졌고 바누 칼브는 여러 경제/정치적 특권을 보장받았다.

3. 평가

무아위야 2세는 후대의 우마르 2세[2]와 함께, 우마이야 왕조의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다. (다만 후자의 개혁안은 후대 아바스 왕조에 의하여 어느 정도 실현되었으나, 전자의 경우는 그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 앞서 야지드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븐 주바이르에게 힘을 합쳐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2] 라쉬둔 우마르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