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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14 13:47:41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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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르 우마이야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히샴 1세 알 하캄 1세 아브드 알 라흐만 2세 무함마드 1세 알 문디르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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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드 야햐 이븐 알리 이븐 함무드 알 무탈리
우마이야 히샴 3세 }}}}}}}}}}}}

후우마이야 왕조 초대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عبد الرحمن الداخل
<nopad> 파일:Abdul_al_Rahman_I.jpg
<colbgcolor=#005534><colcolor=#FFF,#FFF> 이름 아브드 알 라흐만 이븐 무아위야 이븐 히샴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마르완
출생 731년 3월 7일
우마이야 왕조 팔미라
사망 788년 9월 30일 (향년 57세)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
재위 기간 후우마이야 아미르
756년 5월 15일 ~ 788년 9월 30일 (32년)
후임자 히샴 1세
부모 아버지 : 무아위야 이븐 히스함
어머니 : 히스함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후우마이야 왕조의 개창자.

별명은 쿠라이시의 . 한 때 그의 영토였던 스페인에서는 압데라만(Abderraman)이라고 부른다. 우마이야 왕조의 제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로, 731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히샴의 아들 무아위야와 베르베르족 출신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2. 생애

상당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는데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족들을 모두 학살했을 때[1] 간신히 혼자서만 살아남아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다 . 이에 대해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수영해서 빠져나왔다고도 한다. 베르베르족의 도움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인 모로코에 도착했다. 다만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까지는 아니고 몇 사람 더 생존해 있었다. 같이 다마스쿠스를 탈출했으나 도중에 헤어져버린 누이들과 그의 아들 술레이만 등으로, 이들이 알 안달루스에 도착하자 감격한 알 라흐만은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했다고 한다.[2]

당시 스페인의 우마이야 추종세력의 도움으로 아바스 칼리파 휘하에 있던 스페인 총독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코르도바에 정착하여 756년 우마이야조를 다시 세웠다. 건국 과정도 상당히 드라마틱했는데, 불과 300명의 우마이야 지지자들과 함께 수천명 혹은 수만명의 총독 군대와 싸워 연전연승했다. 전투시에는 늘 선두에서 지휘했고, 무력이 강했기에 적들을 여럿 베어 넘겼다고 한다. 또한 총독 유수프 알 피흐리에게 여러차례 사면을 베풀었으나 그가 끝내 저항을 지속하자 붙잡은 후 처형시켰다. 이러한 정복에 있어 아브드 알 라흐만은 우마이야 왕조의 왕자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상태였으므로, 이베리아 반도 내 무슬림들은 그의 통치를 쉽게 받아들였다.

또한 라흐만은 유능한 군주였는데 이전 우마이야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고, 기독교인과 유대인들 등 타 종교와 민족에게도 어느 정도 선정을 펼쳤으며 훌륭한 통치를 했다. 나중에는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과 아바스 왕조가 각각 쳐들어왔고 둘이 손을 잡기도 했지만 둘 다 격퇴하여 나라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원래는 언젠가 바그다드로 돌아가 찬탈자이자 가족들을 죽인 아바스 왕조에 복수하고 칼리파 자리를 되찾는 것이 꿈이었지만, 자기 나라를 다스리기에도 바쁘고, 전 중동을 집어 삼킨 아바스 왕조와 스페인 하나 뿐이었던 알 라흐만의 힘의 차이가 워낙 커서 헛된 꿈일 뿐이었다. 그는 평생 시리아를 그리워하며 안달루스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지 비무슬림들을 존중하고 농업을 위한 관개 수로를 정비하며 선정을 펼쳤다.
루사파 궁의 한복판에 있는 야자수
야자수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에서 태어났다네
나는 나무에게 말했다. '멀리 유배되었다니, 나와 같구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졌네
너도 네가 이방인이 땅에서 자라났구나
그리고 나 역시, 너처럼 고향에서 멀리 있다.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고향을 그리워 하며 지은 시

오히려 763년 아바스 칼리파조의 이프리키야 총독 알 알라 이븐 무기쓰가 안달루스 서남부의 베자를 장악하고 도전해왔다. 수세에 몰린 아브드 알 라흐만은 수도 코르도바까지 포기하고 카르모나 요새에서 항전했다. 알 알라는 카르모나를 포위했고, 2개월간의 포위 끝에 성내의 식량이 고갈되었다. 이에 아브드 알 라흐만은 최후의 수단으로 700명의 결사대를 편성해 포위를 뚫어보기로 했다. 성문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칼집을 화염에 던진 그는 아사하느니 전사하자고 외치며 나아가 방심하던 포위군을 공격했다. 불의의 기습에 적군은 와해되었고, 알 알라는 전사했다. 극적으로 승리한 아브드 알 라흐만은 아바스군 장교들의 수급을 소금에 절여 메카 순례객들 편에 바그다드로 보냈다.

781년에는 압바스 왕조에 충성하며 버티던 사라고사의 후사인이 항복하며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후우마이야 왕조 하에 통합되었다. 정권이 안정되자 아브드 알 라흐만은 786년부터 쿠르투바 대사원 (메스키타)의 건설에 착수했고, 이듬해 중심 건물을 완공했다. 또한 시리아에 대한 미련이 좀 가셨는지 거처 역시 다마스쿠스의 궁전을 양식과 이름 모두 모방하여 세운 코르도바 북쪽 외곽의 루파사 궁전 대신 코르도바 시가지 남부의 옛 서고트 왕궁이자 우마이야 왕조 시설 총독 관저인 알카사르로 옮겼다.

32년간 통치하던 그가 788년에 사망하자 제위를 이은 건 아들인 히샴 1세였다.

3. 여담

야사에 의하면 쿠라이시의 매라는 별명은 놀랍게도 필생의 라이벌이자 서로 못 죽여서 안달[3]이었던 아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가 지어 준 별명이었다. 쿠라이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일족, 초대 정통 칼리프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의 우마이야 가문과 아바스 왕조의 아바스 가문을 모두 포함하는 무슬림 최상위 혈통의 일족을 말한다. 어느 날 정원에서 쉬고 있던 알 만수르가 주위의 신하들에게
"쿠라이시의 매는 과연 누구일까?"
라고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신하들 중 한 명이 당연히 알 만수르 자신을 말하는 줄 알고
"당연히 칼리파인 당신 아니십니까?"
하고 되묻자 알 만수르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 난 아니야."
라고 대답했다. 신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쿠라이시 출신의 여러 영걸들 이름을 차례로 말하자 전부 고개를 내젓더니
"쿠라이시의 매라고 불릴 인물은 아브드 알 라흐만 한 사람 뿐이다. 휘하에 병사 한 명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오로지 믿을 것은 자신의 용기와 지혜 하나만으로 무수한 강적들을 물리치고, 기독교도 침략자들로부터 국경을 지켜내며, 수많은 반란을 진압하여 마침내 대제국[4]을 건설했다. 쿠라이시의 매라는 이름은 이 사람 아니고는 불릴 자격이 없다."
라고 말했다.
[1] 우마이야 왕족들을 연회에 초대한 후,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매복한 군사를 풀어 몰살했다.[2] 다만 문제는 술레이만을 너무 늦게 발견했는데 술레이만과 다시 만났을 때 알 라흐만은 이미 새장가를 가고 자식까지 보고 후계자 선정까지 해둔 뒤였다. 때문에 술레만은 알 라흐만 사후 동생과 왕위 다툼 하다 쫓겨나고 그 동생이 죽은 후 다시 돌아와 반란 일으켰다 죽는 좋지 못한 삶을 보냈다.[3] 실제로 알 만수르는 여러 번 암살자들을 보내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를 죽이려고 했다.[4] 하지만 당시 알 라흐만의 영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2/3 정도로 대제국은 아니었다. 그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알 만수르 사후 781년에 사라고사 및 바르셀로나 일대를 복속시킨 때였다. 물론 이베리아 반도도 한반도의 2.5배가 넘어 상당히 큰 편인데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국가를 건국해서 불과 2년만에 그 반도의 2/3을 정복한 것은 상당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