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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0:09:03

토법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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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법고로
土法高爐
파일:external/www.epochtimes.com/902021207551734.jpg
중국어:
土法炼钢
土法煉鋼
영어:
Backyard Furnace
Chinese Backyard Furnace
참고 링크: 위키백과 한글 / 영어 / 중국어

1. 개요2. 상세3. 문제점
3.1. 엉망진창인 제철 과정3.2. 할당량 통제와 주객전도3.3. 낮은 열효율과 산림 파괴
4. 결과

[clearfix]

1. 개요

토법고로란 "전통적인 기술(土法)로 만든 고로(高爐; 키 큰 용광로)" 라는 뜻이다.[1] 한국에서 토법고로라고 하면 '마오쩌둥이 중국의 재래식 용광로를 이용해 중국 각지에서 강철을 대량 생산하려 했던 정책' 또는 '그때 쓰인 용광로'를 말한다.

중국 본토에서 이 정책은 토법연강(土法炼钢 / 土法煉鋼 ; Tǔ fǎ liàn gāng)[2]이라고 부르며, 그때 쓰인 재래식 용광로는 토로(土炉 ; Tǔ lú)라고 부른다.

2. 상세

토법고로는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서 "전통적인 기술로 만든 작은 괴철로에서 농민들이 강철을 직접 생산하자"는 명목으로 중국 전역에 설치 및 가동되었으며, 대약진 운동이 진행될 당시 중국인 수천만 명이 굶어죽게 되는 대기근이 발생하는 것에 제사해 운동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건국 이후 여러 부문에서 소련을 본뜨는 정책을 폈고 마오쩌둥도 "짧은 기간에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의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개발 계획을 실시했으나 니키타 흐루쇼프가 취임하고 소련에서 서방과의 화해를 추진하는 등 개량주의적 변화가 일자 1950년대 후반 무렵 소련과 관계가 틀어졌다.

결국 제대로 된 우방이 남지 않게 되자 다급해진 마오쩌둥은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최대한 빨리 발전시킨다는 미명 하에 중공업 생산력을 늘리려 했고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이오시프 스탈린5개년 계획을 따라서 국가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시행된 정책이 바로 이 '토법고로' 정책이었는데 문제는 소련과의 차이점은 소련은 제철소등 산업기반이 있는 상태로 속도를 강조 및 닥달하여 달성한 것이지만 토법고로 정책은 이러한 제철소 기반이 부족한 상태와 전문적인 방식이 아닌 상태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마오쩌둥이 중일전쟁 기간 동안 홍군에 있으면서 전통적인 용광로를 사용하여 일본군89식 척탄통을 다수 복제해 냈던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집집마다 뒷마당에 토법고로를 설치하여 제철을 맡기면 거대한 제철 시설 없이도 강철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대약진 운동으로 인민공사를 설치할 때 이 토법고로를 같이 설치하여 인민들에게 운용하도록 시켰고 토법고로를 통한 철생산을 활성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3. 문제점

3.1. 엉망진창인 제철 과정

그러나 당연하게도 당시 농민들은 강철 생산 기술은커녕 열처리단조가 뭔지조차 몰랐다. 제대로 교육받은 전문기술대학 졸업생들을 데려와도 이론과 현실의 벽 앞에서 애로 사항이 넘쳐날 텐데, 대장간 불길 근처에도 안 가본 농민들에게 철광석도 지급도 안 한채 집기를 비롯한 철이 들어간 제품들을 녹여서 다짜고짜 강철을 만들라 시켰으니 당연히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전통 방식으로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장장이같은 야금 전문가들이 불순물을 걸러내고[3] 석탄[4]풀무를 이용해 철을 환원시킨 후[5] 철을 두드려탄소를 일정량 제거하고[6] 담금질[7]을 비롯한 열처리까지 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조차 가장 기본적인 틀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며 더욱 자세한 디테일이나 응용 과정은 수도 없이 많다. 이 점이 매우 까다로워 예부터 도제나 가업을 통해 물려받은 전문가[8]들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강철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근대의 대장장이는 현대의 박사-기능장에 해당하는 최고급 인력이었으며, 대장장이가 있어야 무기를 비롯한 호신무기도 만들수 있었기에 평민 신분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다. 강철을 만드는 작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는 단순 노동이 아니었다. 특히나 강철은 철 안의 특정 원소가 0.1%, 민감한 불순물이라면 단 0.001%만 차이 나도 저질이냐 고품질이냐가 결정되기도 하는 아주 민감한 제품이다. 그런 고품질의 강철을 하루에 수천만 톤 이상도 생산해내는 현대적인 제철 기술은 그야말로 인류가 철을 생산한 이래 수천 년간을 쌓아온 야금 기술의 집대성인 것이다.[9] 그러한 제철 산업을 국가 주도로 제대로 육성하긴 커녕 비전문 인력들에게 떠맡긴 토법고로 정책은 그 시작부터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된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우습게도 중국은 이미 이천년도 넘는 세월 전부터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나가는 제철 기술을 보유한 나라 중 하나였다. 액체 상태인 철의 탄소 함유량을 조절하여 강철을 만들어내는 초강법을 비롯해 용광로, 복동식 풀무, 고온환원법, 코크스 이용 등 각종 야금술의 혁신이 탄생한 게 시황제가 통치하던 진나라였고, 그 이후 위-촉-오 삼국시대로 넘어가 침탄법, 백련강 등 각종 제련 기술이 도입되었으며 심지어 이 당시 제갈량의 연구 하에 천연가스[10][11]로 철을 제련한다는 오버 테크놀로지까지 실현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으며 통일 중국 왕조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기를 위해 대장장이 육성에 힘쓰며 그 수도 폭발적으로 늘린 국가였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이런 야금제철강국에서 오히려 시대를 2천년 역행하는 막장 정책을 내놓았으니, 저승에서 시황제와 제갈량이 후손들을 보고 통곡할 노릇이다.

사실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서도 이 토법고로를 소규모로 운용하기는 했으나 이는 기존의 향촌 대장장이들이 나서서 토법고로를 운영하게 했기에 그럭저럭 쓸만한 놈들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걸 보고 '하면 된다'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규모를 확대했다. 인민 물량으로 서구의 기계 물량을 따라잡겠다는 정책이었다면 투입되는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야금술 교육이라도 시켰어야 했지만 그런 것도 없이 생 농민들에게 토법고로만 던져주고 운영해 생산하라고 시켰다. 야금술이 뭐고 단조가 뭐고 열처리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녹여서 굳히면 철광석이 강철이 된다"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투입된 것이다. 여기에 앞서 언급된 마오쩌둥이 중일전쟁 도중 전통 용광로를 운용해본 경험도 독이 되었는데, 마오쩌둥이 홍군에 있던 당시 용광로에 들어간 철들은 굴러다니던 고철이나 철광석 원광이 아니라 일본군의 교통망을 파괴하기 위해서 절단한 철도의 레일이나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들이었다.[12] 이미 정제된 강철로 만들어진 것을 다시 녹여서 무기로 만든 것인데, 하나만 알고 열은 모르던 마오는 여기서 전통 용광로면 다 된다고 논리적인 비약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생초보인 농민들을 억지로 굴려 고철과 철광석을 녹여내서 만든 결과물은 이라고 할 수 없는 폐품급 철이었다. 철광석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거나 탄소의 양을 적당히 빼내는 등의 과정을 거치기는커녕 오히려 조악하게 만들어진 토법고로 내부의 흙까지 쇳물에 흘러들어가[13] 불순물까지 알차게 추가하는 막장 공정을 거친 결과, 토법고로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철이 쉽게 깨지는 주철이었으며 심지어 그 주철에 온갖 불순물들이 그득그득 담긴 품질이 최악인 철, 이른바 똥철들만 한가득 생산되었다.

이 똥철은 탄소 함유량이 3 ~ 5%를 찍는[14] 막장 주철로, 모래보다 푸석푸석하고 유리보다 쉽게 깨져서 농기구나 병장기는커녕 수저 하나 만드는 데도 못 써먹는다. 철에 대한 막연한 인식만 있는 사람들은 '명색이 철인데 아무리 저질이라도 써먹을 방법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불순물이 심하게 섞인 철은 상상 이상으로 무르고 약하다. 저런 똥철은 철이 단단하다는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쓰레기로, 그냥 맨손으로 살짝만 힘을 줘도 과자처럼 부서진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구글에 'Pig iron'[15]이라고 검색해보자. 무슨 썩은 마들렌이나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마냥 금방이라도 파사삭 바스러질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똑'하고 부러져버리면 양반이고, 심한 경우는 그냥 손에 가볍게 쥐기만 해도 모래처럼 부스러지기도 한다. 차라리 암석이나 나무로 농기구를 만드는 것이 더 나은 수준이다.

덕분에 만들어진 산물 중 40%는 그나마 쓸 수 있는 강철이지만 60%는 다시 재처리하지 않으면 사용 자체가 불가능한 폐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철은 원래 없던 불순물까지 잔뜩 섞인 상태라,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도 철광석에서 바로 철을 제련해내는 것보다도 복잡하다. 섞여 있는 불순물들이 철에 전부 녹아들어서, 철광석에서 바로 제련된 강철과 달리 불순물 제거 과정에 특수 공정[16]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도의 불순물 제거과정을 거쳐도, 몇몇 원소는 화학적인 성질로 인해 제거가 되지 않는다.[17] 결국 토법고로 같은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 오만가지 불순물이 뒤섞인 철이 고품질의 철로 재탄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중국의 전통 방식으로 철을 제련해 온 향토 대장장이들과 중국의 철강 전문가들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확신이 강력하고 고집이 강한 마오쩌둥의 성격상 이러한 항의나 충고들은 그냥 묵살되었고, 기술자들이나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라도 입을 열면 반동분자 혹은 미제에 찌든 제국주의자, 극우 부르주아 등 다양한 타이틀을 얻은 뒤 머리가 사라지니까. 다시 말하지만 전통 방식으로 철을 제련하던 대장장이들도 얄짤없이 서구물 먹었다고 비판을 받은 것이다.[18]
국가기획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생산한 전체 철강 중 1/5만이 1등급 품질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은 품질이 2등급이나 3등급이었고 20% 이상은 완전한 불량품으로 분류되었다. 허난성에서는 공장에서 제조된 아예 모든 철강이 3등급이거나 불량품이었다. 철강 생산 거대 기업들이 대량으로 내놓은 질 낮은 자재들은 관련 산업들의 전 범위에 파멸적인 연쇄 효과를 일으켰다. 안산에 있는 거대 철강 복합 기업체 '안강'에서 1957년에 생산된 선로는 평균 1등급이었으나 1960년이 되자 안전 기준에 맞는 철강이 1/3 이하로 떨어졌다. 선로의 품질이 떨어지자 철도망의 여러 부문이 도저히 열차를 감당할 수 없어 폐쇄되었으며 몇몇 구간들은 아예 철도가 붕괴되었다.

불량 레일과 마찬가지로 불량 철들은 일상의 물건들을 위험천만할 정도로 약화시켰고 질 낮은 소비재는 중국 사회주의 문화의 표상이 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시계가 아무 때나 알람 소리를 울렸고, 금속 대야는 표면에 금이 간 채로 팔렸으며, 우한에서는 지퍼가 걸리고 부엌칼이 휘어지며 농기구의 날이 자루째 뚝뚝 부러져버렸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불량품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웃고 부정했다.

"반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가 거부한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득이다."

그렇지만 반품 문화는 군수산업도 치명적으로 부패시켰다. 허룽 원수의 절박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선 병사들의 돌격소총이 발사되지가 않고, 선양시에서 생산된 제트 전투기들이 제대로 날지를 못했으며, 908호 공장에서는 10만 개 이상의 방독면들이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심지어 핵무기 개발 총책임자 녜룽전 원수조차도 핵개발에 사용된 무선 기기와 계측기의 극악한 품질에 대해 불평했는데, 기기 안쪽에 먼지 입자가 새들어가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중국이 15년 안으로 영국추월하리라"고 큰소리쳤던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베이징은 우방국들로부터 아낌없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크레인, 대형 트럭, 발전기, 모터펌프, 압축기, 수확기, 콤바인 등 모든 것이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이앙기와 파종기는 429대에서 2,241대, 트랙터는 67대에서 2,657대, 대형 트럭은 212대에서 19,860대로 급증했다.

(중략) 1961년 루산 총회에서 중남부 지역 서기 리이칭은 당 지도자들에게 "모범 성 허난성에서 농기구 14만 톤이 불길 속에 던져졌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손실과 방치로 파괴된 것을 합산하면, 총계는 전체 농기구의 최소 1/3에서 절반까지 이른다. 산둥성에서는 대약진 운동 1년 만에 전체 농기구의 1/3이 쓸모없어졌다. 광둥성에서는 1961년에 이르자 전체 필수 장비의 40%가 사라졌는데, 이는 장비 340만 개가 손실되었다는 뜻이다. 남은 것 중 1/3은 부서진 것이었다. 허베이성에서 물레방아 숫자가 절반으로 주는 동안 손수레도 50% 감소했다. 저장성에서는 전체 수도 펌프의 절반, 전체 파종기의 절반 이상, 그리고 전체 탈곡기의 1/3이 복구불능으로 파손되었다.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그 결과, 토법고로로 1958년도의 산업생산량은 전년도에 비해 무려 55%나 폭증시키며 수치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똥철들이 제대로 만든 강철을 대신해 공업에 투입되자 불량품을 대량으로 양산했고 중국의 공업체계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3.2. 할당량 통제와 주객전도

사실 토법고로에서 똥철을 수없이 양산했다고는 해도 어쨌건 40% 정도는 써먹을 수는 있는 수준의 똥철이 나왔기 때문에 만약 토법고로가 정상적인 제철 작업만을 수행했다면 최소한 안하느니보다는 나은 수준의 정책이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안 쓰는 고철들을 일부라도 쓸 수 있는 철로 다시 만든 것이니, 못해도 최소 환경 개선 정도의 결과는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토법고로에 들어간 원료는 철광과 고철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토법고로가 설치되면서 윗선에서는 매달 강철 얼마씩을 만들라고 할당량을 정해줬고, 못 채운 마을은 배급 감소를 비롯한 여러 불이익이 가해졌다. 뿐만 아니라 기록적 목표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했다는 주장들은 당 모임에서 언급되고 강력한 선전 기구에 의해 대대적으로 유포되면서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 불이익이라는 것이 식량 배급의 감축으로, 농업을 죄다 집단화하여 사식의 개념이 폐지된 대약진 운동 당시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불이익이었다. 반면 목표를 달성하거나 더 높게 잡았을 때의 이익이라곤 그저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라는 말로만 칭찬받고, 포상으로 식량을 추가로 받지도 못 할 정도로 밥도 안 나오는 영예가 전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례 없는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이 목표치는 터무니없이 높게 잡혔다.

이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할당량을 채워 식량 배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국가에 이바지한다는 허황된 명예를 얻기 위해 토법고로를 미친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금속으로 보이는 것은 눈에 띄는 족족 주웠고, 결국 바닥에 굴러다니는 고철이 끝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들은 멀쩡한 각종 농기구와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까지 토법고로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들 각종 농기구와 농기계들은 대부분 동유럽이나 소련을 비롯한 외국에서 비싼 값에 수입해온 물건들로, 당연히 양질의 강철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인민공사가 설립되자, 개인들이 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며 집에서 쓰던 식기구들도 토법고로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모자라면 양철 지붕까지 뜯어냈다. 비료 생산 공장에서 필요한 연료나 전기를 모조리 토법고로에 퍼붓는가 하면, 곡식 운반용 화차까지 고철 화물용으로 넘겨서 안 그래도 모자란 식량이 현지에서 타지로 조달되지 못한 채로 부패해서 버려진 사례도 있었다.

즉,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고위층에서 무턱대고 할당량만 과도하게 부여해준 덕분계속 보여주기식으로 안 만드니만 못한 똥철을 양산한 것이다. 이 계획으로 강철을 생산하려 한 이유가 '생산된 강철로 농기구 등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애당초 목적이 농기구 같은 것들을 만들기 위함인데, 원자재인 강철 생산량을 늘리겠답시고 멀쩡한 고품질 완제품을 녹여서 저질 똥철로 윤회시키는, 비효율을 넘어 마이너스 효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 당시의 일화들을 보면 참혹한 결과에 비해 사람들이 싱글벙글하게 작업해서 황당한 것들이 많은데, 부녀자들이 생산증산에 도모한답시고 기쁜 마음으로 머리카락을 잘라내서 그 머리카락을 연료로 쓰게 한다거나 하는 일화들도 있을 정도였다.[19] 토법고로에 대한 이러한 허황된 열풍이 들이닥치자, 방금 막 공장에서 출고된 고품질의 신형 농기구마저 토법고로에 들어가서 똥철로 다운그레이드 되는 막장 행정이, 하는 사람도 시키는 사람도 아무 위화감을 못 느낀 채 국가 단위로 벌어지고 만다.

3.3. 낮은 열효율과 산림 파괴

만약 토법고로가 철저한 대장장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고 고철만을 제련하는, 즉 100%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었다. 토법고로의 효율은 제철소의 고로에 비해 효율이 한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토법고로는 크기도 작고 단순한 흙 벽돌로 쌓은 용광로다. 단열처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크기가 커다란 고로보다 열 에너지를 대기에 쉽게 빼앗기고, 체계화된 제철소와 달리 열의 재사용을 위한 시스템도 없었다. 따라서 같은 양의 철광석을 투입하여 강철을 생산할 때 거기에 필요한 연료의 양이 멀쩡한 용광로에 비해 훨씬 많았다.[20] 고로의 온도 유지를 위해선 막대한 양의 연료를 퍼넣어야 하는 막장 시설이었기에 멀쩡한 제철소 하나를 굴릴 연료로 토법고로를 한 자릿수로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괴철로가 전국적으로 장기적으로 운용되었으니 당연히 토법고로가 제철을 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연료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농민들은 토법고로를 온전히 돌리기 위해 코크스가 아니라 인근 산천의 나무란 나무들을 모두 벌목해 땔감으로 썼으며, 그래도 모자라자 과수원의 과수들까지 싸그리 벌목해 땔감으로 썼다. 이렇게 토법고로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자 산림이 씨가 마르기 시작했고 이렇게 생겨난 민둥산들은 비가 오면 토사가 씻겨 나가 산사태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계단식 논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고 흘러간 토사는 저수지로 유입되어 이를 메워버리면서 농업 용수가 부족해져 결국 농업까지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웃기게도 이 정책이 시행된 시기 토법고로에 모든 연료가 투입되어 버려, 정작 우한에 있는 대규모 근대식 제철소[21] 대규모 제철소에 불을 피울 다량의 연료가 모조리 토법고로에 처박히는 바람에 가동이 중지되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할당량으로 토법고로에서 나온 강철만 인정했고 여기에서 나온 강철은 인정을 안 했기 때문에 강제로 빈둥빈둥 놀아버리며 가동은커녕 직원도 제대로 출근하지 않는 주객전도가 펼쳐졌다.

더 나아가 대약진 운동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 당시 심경밀식과 제사해운동과 농경집단화라는 탁상행정까지 곁들여져 9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은 해야 되는 추수는 안 하고 모두 고철 찾으랴 땔감 찾으랴 돌아다녀야 해서 논밭의 작물들을 그냥 썩혀버렸다. 가뜩이나 효율이 떨어진 수확마저 토법고로의 열풍에 휩쓸려 등한시되고, 파괴당한 산림은 자연재해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농업도 공업도 모두 초토화되었으며 자연재해는 곱절이 되어 되돌아오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한편 농업의 초토화는 식량 부족 사태를 유발하여 농민들이 토법고로에 더욱 매달리는 악순환이 되기도 했다. 토법고로에서 철을 적게 생산하면 농민들에게 식량을 더 적게 배급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농업을 모조리 집단화하여 사식의 개념이 폐지되고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난 대약진 운동 당시에 식량 배급을 줄이겠다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불이익이었다. 결국 농민들은 농사까지 내팽개치고 토법고로에 매달리게 되었는데, 당연하지만 이 여파로 멀쩡했던 논에서도 농사가 제대로 안되면서 식량 부족 사태를 더 심각하게 유발하게 되었다.

4. 결과

여러 증언에 의하면 마오쩌둥과 그 측근들은 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959년 1월에 전통 철제법을 사용하는 공장을 시찰하면서 고급 철제는 안정적인 연료를 사용하는 대규모 공장에서나 생산이 가능하고, 토법고로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민대중의 열의를 식힐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하지는 않았고, 어물쩍거리다가 그 뒤에 조용히 중단시킨다.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나 멀쩡한 트랙터들을 녹일 정도로 막장으로 가던 계획을 당장 중단시키지 못한 끝에 농기구 부족으로 농사에 차질이 생긴것도 모자라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대약진 운동 기간 굶어 죽은 사람들은 3천만~5천만 명으로 추정된다. 결국 마오쩌둥도 그 끔찍한 결과를 보고서는 늦게나마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그나마 중국의 인구가 워낙 많고 그 당시 출산율이 높아서[22] 이런 엄청난 인구 손실을 감당할 수 있었다.[23]

심지어는 주소련 중국대사관에서도 이런 정신나간 짓거리를 벌이는 통에, 주소련 중국대사관에서 고로를 만들고 불을 피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소련에서 "쟤네들이 혹시 무슨 기밀문서라도 소각하는 거 아니냐"며 난리가 났다. 대사관에서 기밀문서를 소각한다는 것은, 전쟁이 발발하면 적국에 기밀이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어서 보통 선전포고 직전에 하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소결렬과 중국과 소련의 영토분쟁 및 서로서로 공산주의 종주국이라며 신경전에 가까운 외교로 인해 소련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지라, 중국과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상식적인 판단과 함께 소련은 난리가 났으나, 비상식적인 전후사정을 전해듣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의 산업화 정책도 무식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농업 분야에서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이 행해졌지, 적어도 제철 같은 중공업 산업에서 중국같은 뻘짓은 안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기엔 지도자들의 성향 차이도 한몫 했는데, 고집불통인 마오쩌둥과 달리, 이오시프 스탈린은 비록 비슷한 고집불통이긴 해도 자기가 모르는 분야 한정으로는 전문가의 주장을 수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24] 물론 스탈린은 그런 고인력들의 주장을 수용해준 후에 필요가 없어지면 숙청하는 경우도 많기는 했다만 마오쩌둥 수준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 토법고로에 대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했는지 덩샤오핑이 이후 개혁개방을 할때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서 포스코에 버금가는 제철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속언이 이토록 알맞는 문서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마오쩌둥이 철강과 중공업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멀쩡한 농기계가 쓰레기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멀쩡한 산이 민둥산이 돼서 일어날 재해도 없었을 것이요, 그만큼 달러가 낭비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토법고로가 잘한 일은 오직 하나, 마오쩌둥의 실각에 일조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권력욕에 불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다시 돌아왔고 공업과 농업에 이어 이번에는 문화부문에까지 기어코 손을 대고 말았다.

관련 작품으로는 옌롄커의 소설인 <사서(四書)>가 대표적이다. 토법고로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또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인 인생은 토법고로를 포함한 마오의 전반적인 실책을 다루는 작품으로 참고하면 좋다.[25]


[1] '전통적인 기술'이라는 뜻의 토법(土法)은 한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단어이며 우리말샘에서야 겨우 북한어라는 언급이 나온다. 반면 고로(高爐)는 현대식의 거대한 산업용 용광로를 가리킬 때 등에 잘 쓰인다.[2] "전통적인 방법으로 강철을 제련한다"[3] 보통 철광석을 갈거나 빻아서 가루로 만든 뒤, 물에 넣거나 체로 걸러서 흙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 이를 선광(選鑛)이라고 하며 현대의 전통 일본도 제조 공정에서도 쓸 정도로 전통적으로 중요한 기법이다. 당연하지만 이 간단해보이는 작업도 전문가의 노하우가 없으면 제대로 하기 힘들다.[4] 같은 석탄이라도 무연탄의 경우 바로 써도 되지만, 역청탄이나 갈탄의 경우 화력이 낮고 특히 황이 섞여 들어가 슬래그(찌꺼기)가 많이 나와 강철을 만드는데는 부적합하다. 이 경우 석탄을 추가적으로 가공해서 코크스를 만들어 쓰거나, 아니면 대체재로 목재를 적당히 태워 가공한 결과물인 숯 즉 목탄을 써야 한다. 후술하겠지만 토법고로에서는 목탄을 주로 사용했다.[5] 현대 산업에서는 목탄과 풀무 대신 코크스와 액체 산소를 쓰지만, 기본 원리는 전통 방식이나 현대 방식이나 거의 같다.[6] 산화철을 철로 환원시키기 위해 석탄을 쓰는 과정에서 철 내 탄소 비율이 너무 높아지면 철이 깨진다. 이 때 철을 외부에서 강하게 두드려서 철 표면의 탄소를 이산화탄소로 산화시켜 탄소 비율을 낮추고 연성을 높이는 것이다. 표면에서 날아간 탄소는 내부 확산에 의해 낮아진 농도로 평형을 맞춘다. 그렇다고 탄소를 너무 많이 제거하면 연철이라는 철이 되는데, 이러면 깨지지는 않지만 철이 청동기처럼 쉽게 구부러지며 강도가 떨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탄소를 너무 적게 제거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주철 또는 선철이라는 철이 되는데, 이러면 철이 쉽게 깨진다. 따라서 이 중간 지점이 되도록 탄소 비율이 "적당한" 철을 만들어야 하는데, 바로 이 "적당한" 철을 강철이라고 부르며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좋은 철로 여긴다. 참고로 이러한 철의 분류법은 대략적으로 이렇다는 것이고, 현대 제철 산업에서는 제조법, 용도, 불순물의 비율 등에 따라 철을 수천가지 종류로 분류한다.[7] 담금질이란 철을 충분히 가열하여 결정구조가 변하는 지점 이상으로 온도가 올라가게 한 후, 물이나 기름 등에 담가 급격하게 냉각시켜 금속의 내부 구조를 바꾸는 일을 말한다. 말 그대로 '어디에 담그기 때문에' 담금질인 것. 주로 금속의 내부 구조를 바꾸어 강도와 경도를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하며, 제철에서는 핵심적인 공정으로 여겨진다. 고품질을 원할 경우 물 대신 기름 또는 소금물을 쓰기도 하는데, 물의 경우 끓는점이 낮아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로 인해 열전도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토법고로에서는 기름은커녕 대부분 물을 썼다.[8] 호미 열풍으로 크게 주목받은 우리나라 전통 대장간 장인들도 최소 50년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들이다.[9] 그렇게 중요한 만큼 철을 만들기 위한 과정 또한 인류에게 큰 발전을 안겨주었다. 현대적인 화학 공학이 연금술에서 시작되었듯이 현대적인 재료 공학은 제철 기술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10] 사족으로 제갈량은 천연가스를 이용하여 철을 제련하는 것 뿐만 아니라 천연 가스로 염정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고안하여 소금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기도 했다.[11] 단순히 연료를 천연가스로 쓴 것이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나무나 풀을 태워서 나오는 불은 1000°C를 못넘겨서 철의 녹는점(1538°C)에 크게 못미치기 때문에 고품질 철 생산에 어려움이 있다. 반면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테인을 태워서 나오는 불은 1400°C까지 상승하기 때문에 고품질 철 생산이 용이하다.[12]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철도 레일은 중요한 운송수단인데다, 수십~수백 톤에 달하는 기차가 지나가는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하므로 그 국가에서 대량생산 할 수 있는 강철 중에서도 엄선된 최고의 강철로 제작된다. 무기 역시 전쟁터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고급 강재를 사용한다. 당연히 이런 고급 강철은 이미 제련이 다 끝나있는 상태이므로 고의적으로 불순물을 때려 박는 수준이 아닌 이상 그냥 녹여서 재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다.[13] 이를 방지하려면 내부에 진흙을 발라서 고로를 먼저 구워야한다. 내부를 도자기처럼 만들어 고온에도 견딜 수 있게하는 것이다. 단단하게 구워진 진흙은 세라믹이 되어 비산물이 떨어지지 않는다.[14] '겨우 3 ~ 5%로 그 호들갑을 떤다고?'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산업용으로 쓰이는 철의 탄소량은 대부분 2%를 넘기지 않는다. 탄소 함량이 3 ~ 5%면 주조에 사용하는 주철 수준의 탄소 함량이라 제조업용이 아닌 강철을 만들기 위한 주조용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해 이걸 본격적인 제조업에 투입하는 건 못할 짓이다. 거기에 저 조악한 토법고로에서 나온 주철은 탄소뿐만 아니라 각종 미확인 불순물들 또한 잔뜩 들어갔기 때문에 주조에 쓰더라도 불순물 제거 과정이 극도로 복잡해서 주철로도 쓰기 힘들 수준이었다.[15] '선철(銑鐵)'이라는 뜻으로, 단조를 하기 전의 철을 말한다. 현대에는 강철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만 사용되며, 그 자체로는 사용하기가 불가능한 똥철로 여겨진다.[16] 산화 및 환원 분위기 하에서 불순물의 슬래그 포집, 페로망간이나 페로실리콘과 같은 다양한 부원료의 투입, LH나 VTD와 같은 진공정련 기법이 사용된다.[17] 이러한 원소들은 철에 비해 산화서열이 높은 원소들인데, 특히 구리, 주석과 같은 원소들은 철과 함께 널리 사용되어 특히 문제가 된다.[18] 중국의 전근대적인 야금술은 세계 최초로 초강법, 용광로, 가단주철, 효율 좋은 복동식 풀무, 주철 제조법을 발명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근대화된 제련법을 잘 모르더라도 기술자들은 뭐가 잘 되어가고 뭐가 잘못되어가는 것인지 한 눈에 알았을 것이다.[19] 얼핏보면 미담같지만, 관련 지식이 있다면 공정을 방해하는 사보타주 수준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머리카락을 구성하는 케라틴 단백질은 을 상당량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황을 제거해야 하는 일반적인 공정에 오히려 독이 된다. 조금만 제철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머리카락을 연료로 쓰는 것을 말렸어야 하는데, 아무도 이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의 토법고로가 엉망진창으로 운영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20] 현대 대형 제철소의 경우 용광로 높이만 건물 몇 층에 달한다.[21] 청나라 말기의 중신 장지동이 건설한 유서깊은 제철소로, 일본도 탐을 내어 21개조 요구에서 경영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던 곳이다.[22] 대약진 운동 이후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 당시에 중국의 연 출생아 수는 2,100만~2,800만 명에 출산율은 5명대를 기록했고, 2010년대에는 연 1,600만 선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출산율은 1.5~1.6명대로 떨어졌다.[23] 19세기 초 벌어진 아일랜드 대기근의 경우 기근 이전 800만이었던 인구가 기근 이후 300만으로 줄었는데 21세기 초까지도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24]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패전 위기에 몰리자 주코프 같은 전문가의 주장을 수용해 위기를 넘긴 것처럼, 스탈린은 적어도 전문가의 말은 들었다. 또한 5개년 계획을 실행할 때 제철, 기계 등 중공업 분야에서 사상적으로 대립 관계이지만 공업 분야에서 크게 앞서 있는 미국으로부터 공장 설계도, 기술자 및 경영자 훈련 등을 지원받았다. 하필이면 농업 쪽에서 좆문가를 고른 탓에 소련 패망 때까지 짐이 되었을 뿐이었다.[25] 영화 내에서 촌장은, 인민을 갈아 생산한 그 똥철로 대만을 정복하고 부강해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이 와중에 주인공 푸궤이의 아들 요우칭은 밤새 용광로에서 일한 후 지쳐 학교 담장에 기대어 쪽잠을 자다가, 애먼 교통사고에 휘말려 요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