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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황하를 시찰한 마오쩌둥 |
1. 개요
대약진 운동 시기 치수사업에 대해 다룬 문서.2. 배경
황하는 칭하이성 쿤룬 산맥에서 발원하여 칭하이성, 쓰촨성, 간쑤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산시성, 섬서성, 허난성, 산둥성의 9개성 및 구를 지나 보하이만으로 유입되는 5,464km에 달하는 강으로, 중국에서는 양쯔강 다음으로 길며 세계 5위에 달하는 긴 강이다. 황하는 상류에서 끌어온 막대한 양의 토사를 주변 농토에 뿌려줘 황하 유역을 비옥하게 만들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황하 문명을 잉태해 오늘날의 중국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오랜 세월 중국의 중심지로서 제역할을 다했다.그러나 황하는 예로부터 '사나운 강'으로도 유명했다. 선사시대 때부터 한족들이 황하 중류의 온대림을 농경기 개척 및 토목공사를 위해 모조리 밀어버리면서 엄청난 양의 토사가 황하로 유출되면서, 황하는 1㎥당 0.4~3.4g 정도의 진흙이 함유된 흙탕물로 변모해 이미 수천년 전부터 식수로 쓸 수 없을 지경으로 전락했다. 또한 가뭄 때는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홍수가 나면 쉽게 넘치며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제방과 댐이 쉽게 붕괴되기 일쑤여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양산했다. 수천년 중국 역사 동안 기록된 범람 및 제방 파괴 횟수만도 1,500회 이상이며 그나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범람 주기가 더욱 빨라졌다.[1] 이로 인해 강줄기 변화도 총 26회에 이르며 심하면 수년에 한번 씩 황하의 흐름이 바뀌어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역대 중국 지도자들은 이 사나운 강을 잠재우기 위해 수천년간 제방 및 둑을 쌓거나 수로를 파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제방이나 둑, 또는 댐을 쌓아도 엄청난 양의 토사가 밀려와 이를 메워버리기 일쑤여서 별 다른 효과가 없었고 홍수가 갈수록 잦아지다보니 인명 및 재산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중국인들은 불가능한 일을 표현할 때 "황하의 물이 맑아진다" 같은 표현을 쓸 정도로 체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위인이 등장하면 황하가 맑게 흐를 것이다" 라는 속담을 쓰며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해 저 사나운 강을 잠재우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본인이 농민의 아들이었고 농민을 포섭해 공산 혁명을 성사시켰던 마오쩌둥은 황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그는 종종 황하를 시찰했고 초기 선전 포스터는 그가 바위 위에 앉아 황하를 굽어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을 담았다. 1952년 황하를 시찰한 마오쩌둥은 측근들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황하 공사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그후 1952년 상반기 수리(水利) 전문가들은 황하 지류를 탐사한 후 황하 지류 저수지의 통제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에 효과가 적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와 동시에, 연료 공업부 수력발전건설총국은 황하의 주요 간류에 대형 수력 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왕화운 황허 위원회 주임과 장철쟁 수력발전건설초국 부국장, 소련 전문가 그리코로비치 등은 거대 댐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고, 일각에서는 대형 저수지를 건설해 물줄기의 기세를 약화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고 건설 비용이 워낙 막대해서 계획은 차일파일 미뤄졌다.
그러던 1957년 소련과 갈등을 빚은 마오쩌둥은 소련에 대한 강한 경쟁 의식을 품었고 15년 안에 미국을 추월하겠다는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에 맞서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후 그는 수억명에 달하는 인력을 총동원해 대약진 운동에 투입시켰다. 특히 황하를 대상으로 한 치수사업은 대약진 운동의 초창기부터 집행되었다. 마오쩌둥은 황하 물길을 돌려서 건조한 중국 북부 지방에 흩어져 있는 피폐한 촌락들의 빈약한 표토에 물을 넣게 하고 아열대 남부 지역에서 거대한 제방과 저수지를 갖춰 홍수를 방제할 수 있다면 곡물 수확량이 급증해 수억 중국인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이리하여 1957년 중순부터 "선조들이 수천년 걸려 이룩한 것을 단 몇달만에 해낼 수 있다"는 중앙 정부의 선전하에 치수사업이 개시되었다.
3. 경과
3.1. 싼먼샤 댐 공사
중국 허난성 끝에 위치한 도시 싼먼샤(三門峽(삼문협))는 근처에 황하 하류가 흐르는데 세 개의 협곡이 그 주변에 있어서 '삼문협'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너비 120m의 강 양쪽 기슭은 험준한 단애이고, 북안에서 돌출된 런먼섬(人門島)이라 불리는 반도(半島)와 션먼섬(神門島), 구이먼섬(鬼門島)의 두 섬에 의해 강물이 3분되어 급류를 이루기 때문에, 예로부터 강의 범람이 잦았고 수운에 큰 어려움을 겪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1935년 국민정부 황하 수리위원회 위원장 겸 엔지니어인 이의지(李儀祉)는 노르웨이의 수리 엔지니어 엔리손과 함께 황하 지류를 조사한 후 싼먼샤, 빠리후퉁(八里胡同), 샤오랑디(小浪底)[2]에 대한 탐사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 지역에 댐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은 샨먼샤 일대를 점령한 후 이곳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안건을 검토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국민정부는 미국인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황하 고문단을 조직, 싼먼샤를 답사했다. 미국인 전문가들은 싼먼샤를 답사한 후 이곳에 댐을 건설하면 동관 상부의 농경지에 너무 많은 손실을 입게 되니 샨먼샤에서 100km 떨어진 빠리후퉁에 댐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으며, 그나마도 이 댐의 목적을 홍수를 막는데 국한하고 발전용 전기를 생산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았다. 국민정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하면서 더이상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1950년 7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수력부장 장함영(張含英)은 장광두(張光斗), 풍경란(馮景蘭) 및 소련 전문가 부코프 등을 대동하여 싼먼샤 일대를 탐사한 후 이곳에 댐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황하 간류에 큰 댐을 건설하는 건 매우 어려우며 국가의 경제 상황과 기술 조건이 이룰 충족시킬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아서, 댐 건설 연구는 잠정적으로 중지되었다.
1952년 5월, 왕화운 황하위원회 주임과 장철쟁 수력발전건설총국 부국장, 소련 전문가 그리코로비치 등은 싼먼샤를 탐사한 후 댐을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싼먼샤 댐을 건설하자고 주장했으며 빠리후퉁에도 충사수고(沖沙水庫)를 건설해 이곳의 협곡 지형을 이용해 모래를 씻겨 내려가게 해 관중 평원의 침수를 피하게 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파리후퉁에 충사수고를 건설하는것은 매우 어렵다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고, 싼먼샤 댐 건설시 주요 침수지역이 될 산시성에서는 싼먼샤 댐 건설로 인한침수 피해를 감당할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1952년 하반기, 황하위원회는 타지역에 비해 홍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망산(邙山)에 댐을 건설하는 것을 연구했고 그해 10월 왕화운 황하위원회 책임자는 황하 시찰을 나간 마오쩌둥에게 망산 댐 건설 계획을 보고했다. 이는 그들이 싼먼샤 댐 건설을 사실상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53년 2월, 왕화운은 싼먼샤 댐 건설은 10억 위안 이상을 투자해야 하고 15만 명을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반면 효과는 미지수라는 비관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중앙 정부에 제출했다. 이후 수력부는 홍수방지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려면 건설비용이 5억원을 초과해서는 안되며 이주 인원이 5만명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이렇게 싼먼샤 댐 건설 계획은 백지화되는듯 했다.
그러던 1954년 1월, 소련 발전소부는 레닌그라드 수력설계 분원 전문가를 위주로 한 소련 전문가 종합팀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의 황하 치수사업 게획 수립과 개발을 지원했다. 이때 소련 전문가들은 두달 간 현지를 탐사한 후 싼먼샤가 보기드문 좋은 댐 건설 부지라고 칭찬했고 이곳에 댐을 건설하더라도 침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장담했다.이에 1954년 4월 수리부는 황하 계획위원회를 설립하고 소련 전문가들의 추천에 따라 싼먼샤 댐 건설을 황하 치수사업 1기 중점 공사로 선정했다. 또한 그들은 싼먼샤 저수지의 최고 수위는 350m, 총 면적을 360억 세제곱미터로 확정했다.
1955년 7월 30일, 전국인민대회 제1기 2차 회의에서, '황하 수해근절과 황하의 수리를 위한 종합계획 개발에 관한 결의'가 통과됨으로서 싼먼샤 공사의 결정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소련 레닌그라드 수력발전소 전문가들이 설계를 위탁받고 싼먼샤 댐 설계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국무원 부총리 덩쯔후이(邓子恢)는 전국 인민대표대회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우리 국민들은 고대부터 황하를 잘 다스리고 이용하길 희망했다. 그들의 이상은 오늘처럼 민주적인 마오쩌둥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있다. 싼먼샤댐이 완성되면 여러분과 온 국민이 수천년 동안 꿈꾸던 황하 하류를 다스리고 "황하가 푸른"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싼먼샤 댐의 건설 목표는 단순히 황하의 홍수를 저지하고 수질을 개선하는 데만 국한되지 않았고 수력발전소를 세워 전력을 생산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샨먼샤에 건설될 댐의 수용량은 1949년 중국 전체의 발전소 용량과 동등한 수준이었다. 중앙 정부는 싼먼샤 댐 수력 발전소에서 만들어낸 전기를 통해 공산주의의 이상사회에 발을 들여놓길 기대했다. 이후 1957년 4월 댐 건설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개시되었고 수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이때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황옌페이의 셋째 아들이자 간쑤성 수리청장, 동북 수리총국 고문을 지낸 바 있던 칭화대 교수 황안리(黄万里)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토론회에서 소련 전문가가 내놓은 계획을 칭찬하는 저우언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당신들은 성인이 나오면 황하가 맑아진다고 하지만, 나는 황하가 맑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황하가 맑으면 공이 아니라 죄악이다. 황하 토사량은 세계 1위지만 황하가 만든 육지도 세계 1위다."
이후 황안리는 소련 및 중국 전문가들과 7일간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싼먼샤 댐 건설 지지자들은 황하 하류의 불안정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360m 높이의 댐을 건설하고 홍수를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황안리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싼먼샤 댐이 건설되면 황하 퉁관 이상 유역은 침적되고 계속 상류로 범람할 뿐만 아니라 광대한 토지를 침수시킬 수 있다. 싼먼샤 이하 하천에 토사가 퇴적되는 것을 동의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싼먼샤 이상 하천이 토사로 침전되는 것에 동의하는가? "황하청(黄河清)"은 허상적인 정치사상일 뿐이며 과학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 강물이 반드시 흙모래를 섞는 자연법칙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은 진흙투성이보다 강하기 때문에 강바닥을 심하게 씻어내릴 것이며, 그 결과 강바닥이 필연적으로 붕괴되고 맑은 물 역시 다시 탁한 물로 변할 것이다."
1956년 5월, 황안리는 황하위원회에 '황하 싼먼샤 저수지 현행 계획 방법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다. 이 글은 <중국 수리> 1957년 8호에 간행되었고 <싼먼샤 수리 중추 토론회 자료집>에 기술되었다. 이 의견서는 소련 전문가들의 계획을 전면적으로 부정했고 덩쯔후이 부총리의 보고는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1957년 6월 19일 칭화대 교보에 '화총소어(花丛小语)를 발표해 싼먼샤 댐 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헛소리는 뭔가?"
이후 인민일보는 "이 헛소리는 뭔가"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해 황안리의 주장을 우경주의에 치우쳤다고 맹비난했고, 황안리는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그는 우파 교수로 지목되어 비투회에 끌려갔고 강제로 노동 교화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갈릴레이는 감옥에 들어갔지만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아무튼 싼먼샤 댐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1958년 12월에 황하의 물길이 막혔다. 수만 명이 투입된 이 공사에서 600만 제곱미터 정도의 흙이 옮겨졌고 1960년 9월 싼먼샤 저수지에서 처음으로 물을 저장했으며 1961년 4월 댐의 주요 시설이 준공되었다. 그리고 1962년 2월, 14만 킬로와트 터빈 건설이 완료되어 가동을 개시했다. 원래 설계에서는 여러 배출구와 관을 통해 축적된 퇴적물이 댐을 통해 빠져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일 내에 프로젝트를 완수하려고 서두르면서, 이 배출구들이 강화 콘크리트로 막혀버렸다.
그 결과 1960년 가동을 개시한 이래 1년 반 동안 15억 3천만 톤에 달하는 토사가 쌓였고 퇴적물이 상류로 움직이기 시작해 수위가 높아지고 시안의 공업 중심지가 침수될 조짐을 보였다. 게다가 위하 하류 양안의 농경지가 침수되고 토지 염화칼슘이 녹아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국무원은 홍수를 막기 위해 싼먼샤 댐을 사용하는 방식을 "물을 저장하여 모래는 막는" 것에서 "홍수를 막고 모래를 배수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갑문을 활짝 열어 토사를 배수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14만 킬로와트 터빈은 무용지물이 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저우언라이도 1961년경에 황하가 실어나르는 토사의 양이 두배가 되었다며 실패를 인정했고 정저우 서쪽의 일부 구간은 황하의 물이 95%까지 진흙으로 이뤄져 있었다.
몇년 후 싼먼샤 일대는 토사로 막혀버려서 외국인들의 댐 방문이 금지되었다. 이후 중공은 1969년 6월부터 2차 개축을 실시해 18호 시공도로의 기초 구멍을 파내고 1~5호기의 수구고도를 300m에서 287m로 낮추었고, 1973년 10월 이후에는 배관을 깨끗이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 결과 토사가 점차 빠지면서 물이 다시 맑아졌고 1978년 말에야 비로소 5개 발전기 전부를 설치해 수력발전을 정상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03년 8월 27일부터 10월까지 발생한 대홍수를 초래해 수십명이 사망하고 515만 명의 인구가 이재민으로 전락했으며 경제 손실은 23억 위안에 달해 세간의 비난을 받았고, 댐 건설로 인한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 문제로 인해 싼먼샤 일대 생태계가 파괴되어 많은 폐단을 초래해 중국 내에선 아예 댐을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산시성, 허난성, 쓰촨성 3성의 전력의 다수를 공급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3성 정부는 댐을 유지하자는 입장이다.
3.2. 인타오 공사
타오강
1954년 5월 간쑤성 제1서기, 간쑤성 정치협상회의 주석 겸 성군구 정치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장중량(张仲良)은 1958년 초 마오쩌둥의 의향에 맞춰 대대적인 관개 공사를 개시했다. 그는 간쑤성의 노동력의 70%에 가까운 340만 명의 농민을 동원해 관개 공사에 투입해 여러 보와 저수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만족해하지 않는 중앙 정부의 기대에 충족하기 위해 대담한 계획을 구상했다.
1958년 6월, 장중량은 이른바 '인타오 공사(引洮工程)'를 개시한다. 이 공사의 목적은 간쑤성 동부에만 흐르는 타오강에 수로를 파서 강줄기를 간쑤성 중부와 서부 지역에까지 미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주덴 협곡에서 칭양까지 900km에 달하는 수로가 파여졌고 그 사이의 산맥에 10만 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되어 수로 개척 공사를 벌였다. 만약 이 공사가 성공한다면 깨끗한 식수가 간쑤성 전역에 공급될 수 있어 중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간쑤성이 번영할 계기가 될 터였다.
중앙 정부 역시 이 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1958년 9월 주더는 인타오 공사를 집행하는 장중량에게 붓글씨로 문장을 써서 보내줌으로서 그를 격려했다.
"타오강을 산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자연을 변형시키는 간쑤 인민의 선구적 과업이다."
그러나 공사는 처음부터 여러 문제에 시달렸다. 토양 침식은 자주 산사태를 야기해 저수지가 토사로 막혔고 강물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공사에 동원된 마을 주민들은 빈약한 곡물 식단을 보충하기 위해 풀뿌리를 캐러 다니고 추운 겨울에 피난처를 얻기 위해 산에 동굴을 파야 했다.
그렇게 공사를 집행한 지 3년이 되었으나 별다른 진척이 없자, 결국 1961년 여름 공사는 중단되었고 1962년 3월 공사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관개 토지 총면적은 0헥타르, 국가가 이 공사에 투입한 비용은 1억 500만 위안, 노동 일수는 60만 일에 달했으며 공사 절정기에는 16만 명이 공사에 투입되어 그중 2400명이 사고사하거나 아사 및 병사했다. 이후 간쑤성은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간의 대기근 동안 굶어죽은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로 손꼽혔고, 장중량은 책임을 지고 1962년에 간쑤성 제3비서로 좌천되었다.
3.3. 십삼릉수고 공사
명십삼릉(明十三陵)은 베이징 북쪽 약 40km 지점에 있는 창평구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나라 시대의 능묘다. 명 3대 황제 영락제부터 마지막 황제 숭정제까지 13명의 황제와 23명의 황후, 2명의 태자, 30여 명의 비빈 등이 묻힌 곳으로,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고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근처에 대규모의 저수지를 건설해 베이징 시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고 농업용 토지에 물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려 했다.
1958년 1월, 인민해방군 돌격대가 능 근처 계곡을 흐르는 강을 댐으로 막는 저수지 공사를 시작했다. 수도의 기관과 공장에서 인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작업이 불철주야로 진행되었고 언론과 라디오는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공사 진척 상황을 보도했다. 이 공사엔 수만명의 지원자들이 참여했는데, 심지어 외국 외교관들도 이 공사에 함께했다. 작업은 밤낮으로 진행되었고 밤에는 횃불과 랜턴, 휴대용 석유램프에 의지해 공사를 지속했다.
이 공사엔 기계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공사장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삽과 곡괭이, 그리고 잡석들을 화차에 실어 담기 위한 바구니와 장대가 주어졌다. 화차는 댐까지 왕복 운행을 했고 잡석들은 댐에서 자갈로 갈렸다. 1958년 5월 25일 마오쩌둥이 군중 앞에 나타나 사진가들 앞에서 흙이 담긴 들통이 양 끝에 매달린 대나무 장대를 어깨에 걸친 채 포즈를 취했다. 이에 힘을 얻은 간부들은 노동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정작 마오쩌둥은 한 시간 반동안 땅을 판 뒤 "이렇게 조금밖에 안됐는데도 벌써 땀이 비오는듯 흐르는군."이라고 말하고는 자신은 쉬러 가면서 측근들더러 대신 일하게 했다.
작업자들은 열 명 단위의 작업반으로 구성되었고, 작업반의 십장이 10명 단위 작업반에 보고하면, 그곳의 십장은 다시 다음 단위의 십장에게 보고했다. 모든 참여자들은 <3년간 힘들게 일하면 1만년간 행복하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는 막사나 농가에서 잤다. 특히 공사장 근처 주민들은 몇달 동안 온종일 고된 일을 하고 때로는 조금도 쉴 틈이 없이 밤새도록 일해야 했다.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비바람과 눈, 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명십삼릉 저수지 공사는 1958년 1월에 시작해 겨우 3개월 만인 1958년 4월에 완공되었다. 총 저수량은 8100만 세제곱 미터에 달했고 구산과 한포산 사이에 세워진 댐은 길이 627m, 높이 29m, 하단폭 179m, 상단폭 7.5m에 달했다. 그러나 공사를 너무 서둘러 수행하다 보니 저수지에 누수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토양 응고 전문가가 초청되어 이 문제 해결에 착수했지만 애당초 공사를 너무 서둘렀기에 벌어진 일이라서 그들도 뾰족한 수를 쓰지 못했다. 결국 저수지는 3년뒤 물이 말라 버리면서 버려졌다.
그러다가 1984년 연경현의 백하보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오는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십삼릉 수고의 수면은 넓어지고 수질도 개선되었다. 또한 저수지에 중일합작으로 구룡 유락원을 건설해 관광객들을 초빙했다. 현재 명십삼릉 수고는 가뭄대비 및 식수 공급 역할을 차질없이 수행하는 한편 관광지로서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3.4. 기타
아열대 일부 지역에서는 1957년부터 일찌감치 치수사업을 개시해 여러 저수지와 댐을 건설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각 성의 지도부들을 닥달해 더 큰 성과를 요구했다. 1958년 1월 초, 셰푸즈는 너무 많은 농민들이 농한기에 자신들의 집단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굼벵이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1월 15일 <인민일보>는 원난성을 치수사업 운동에서 성과가 가장 나쁜 지역이라고 소개했다.이에 셰푸즈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원난성 인력의 최대절반까지 운동에 참여해야 하며 마을 주민들은 하루 열시간까지, 필요하다면 밤새도록 일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작업 기피자들은 처벌하고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성되어야 하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간부들은 해임 조치할 것이라고 엄포했다. 1월 19일, 인민일보는 고작 며칠 전에 성과 부진 지역으로 지목받은 원난성이 이제는 전체 인력의 3분의 1인 250만명이 흙을 나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셰푸즈는 원난성이 3년안으로 완전히 관개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혹사당했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간부들이 휘두르는 칼에 찔렸다. 불만에 대해 솔직하게 조사팀에게 직고한 자들은 반동분자, 방해공작원으로 규탄되었다. 이렇듯 심한 혹사가 벌어지다보니 많은 이들이 병사했고 1958년 2월 첫 아사자가 보고되었으며 6월에 부종이 퍼져 아사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의료진은 차마 이것이 굶주림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하지 못하고 전염병이라고 거짓말하며 향생제를 처방했다.
수많은 사체들이 거적떼기에 덮여 도랑과 연못으로 던져졌다. 마오쩌둥 본인도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1958년 장쑤성의 관개 사업에 관한 장웨이청의 보고를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즈푸는 300억 세제곱킬로미터의 흙을 옮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그러면 3만명이 사망할 것이다. 쩡시성은 200억 세제곱킬로킬로미터의 흙을 옮길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2만명이 사망할 것이다. 장웨이청은 6억 세제곱킬로미터만을 약속했는데 그러면 아마도 안 죽을 것이다."
4. 결과
관개공사는 1959년 대기근이 도래했을 때에도 지속되어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1959년 호우로 허베이성이 물에 잠겼는데 그동안 건설한 저수지와 보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허난성, 산둥성, 안후이성, 장쑤성 등 중국 각지에서 홍수로 인해 모든 것이 물에 잠겼고 사람들은 야위었다. 하지만 1959년 중국 각지의 1년 평균강우량은 700mm 정도로 그렇게 큰 수치가 아니었으나 토법고로에 연료를 보태기 위해 나무를 마구 베는 바람에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으로 변하고 보와 저수지들이 물을 제대로 막지 못해 홍수가 너무 쉽게 발생했다. 심지어 어떤 곳은 300mm의 강우량으로 재난이 닥쳤다. 주민들은 관개공사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고 후야오방은 사태를 조사한 후 한탄했다."일부 간부들은 정직하고 교훈을 배워가고 있으나 일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부는 자연재해라고만 우긴다."
그후 찾아온 가뭄에서, 전통적인 논밭은 4~5일간 물을 머금었지만 관개공사를 거친 논밭에선 72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관개공사로 건설한댐이 토사로 막히면서 두배의 용수가 필요했다. 토양 침식량은 50% 증가했고 펌프나 저수지도 작동하지 않았다. 후베이성에선 1957년에 200만여 헥타르의 물이 공급되었으나 관개공사를 진행한 후인 1961년엔 고작 100만 헥타르에만 물이 공급되었다. 반면 관개공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경작지는 2만 헥타르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렇게 애써 건설했던 댐들이 부실공사로 인해 무너졌다. 허난성에서 특히 심해서 1980년까지 허난성에서만 2976개의 댐이 무너지고 1975년 8월 태풍 때 댐이 붕괴되면서 23만 명이 사망했다.
이렇듯 대약진 운동 시기 중앙 정부가 집행한 치수사업은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개중에는 나중에 제역할을 한 시설도 있었지만, 이는 마오쩌둥 사후 추가 공사를 통해 제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던 것이었고 마오쩌둥 시기엔 그러지 못했다. 이러한 참상은 15년안에 영국을 추월하겠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마오쩌둥과 독재자에게 영합한 관료들이 합작하여 초래한 결과였다.
5. 참고 문헌
-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열린 책들.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민음사.
- 싼먼샤 댐 사업 생태 영향 및 평가, 곽교우 외 1인, 환경경학학보.
- 싼먼샤 댐 공사를 페기하자, 샹화룽 외 1인, 난징 수리과학연구원.
6. 외부 링크
- 중문 위키피디아 싼먼샤 댐 문서
- 영문 위키피디아 싼먼샤 댐 문서
- 바이두백과 싼먼샤 댐 문서
- 바이두백과 인타오 공사 문서
- 황하를 맑게 만들지 못한 죄:실패로 끝난 싼먼샤 댐
- 인타오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의 회고
- 사상 최악의 참사
[1] 당나라 말기에는 10년에 한번씩 제방이 무너졌으나 북송 시기엔 3.3년마다 한번꼴로 무너졌고 청나라 시기인 17세기엔 1.89년에 한번 꼴로 무너졌다.[2] 2001년에 댐이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