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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2:53:37

9.13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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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256호기의 잔해

九一三事件
(林彪事件)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광저우로 도망치려는 린뱌오3.2. 린뱌오의 도주3.3. 마오쩌둥의 격추 중단 지시3.4. 린뱌오의 죽음과 <연합 함대>의 최후3.5. 사건 조사3.6. 군부 숙청
4. 결과5. 실제 추락 원인은?6. 참고 문헌7.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

1. 개요

"린뱌오에게 감사를! 린뱌오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것에 감사를! 이 일의 시작과 끝을 모두 그 스스로 해결했으니,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린뱌오의 죽음을 위해 건배를!"
1971년 9월 15일, 마오쩌둥의 발언.
1971년 9월 13일 중화인민공화국의 2인자였던 린뱌오가 부인 예췬, 자신의 아들 린리궈 등과 꾸몄던 571 공정이라 불린 마오쩌둥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으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망한 사건. 간단하게 린뱌오 사건이라고도 한다. 주이우(구일오, 九一五) 사건이라고 발음하며 주스산(구십삼, 九十三) 사건이라고 발음하지는 않는다.

2. 배경

1971년 8월 15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을 떠나 후베이성 우한으로 순시를 떠났다. 당시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경계하고 있었으며 인민해방군 우한 군구 정치위원 유풍을 불러 분열주의를 비난했다. 그리고 우한, 창사, 난창, 항저우 등을 순시하며 각성의 당정군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용셩, 공군 총사령관 우파셴, 해군 제1정치위원 리쭤펑, 군총후근부 부장 치우후이쭤 등 린뱌오의 측근들과 린뱌오의 아내 예췬을 마구 비난하며 이들이 지하 활동을 하고 느닷없이 습격을 해 왔으며 서둘러 국가주석이 되려고 당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탈취하려고 했다고 했다. 또한 여산 회의는 두 사령부의 투쟁이었다고 지목했다. 이는 명백히 이들의 배후에 있는 린뱌오를 지목한 일이었다.

한편 남방 순시를 떠난 마오쩌둥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린뱌오, 예췬, 린리궈 등은 허베이성 베이다이허(북대하)의 전용 별장인 중앙요양원 96호에 기거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9월 6일이 되어서야 광저우 군구 공군 참모장 고동주와 해군 제1정치위원 리쭤펑이 마오쩌둥의 발언에 대해 린뱌오에게 보고했다. 마오쩌둥의 발언에 대해 들은 린뱌오, 린리궈, 예췬, 린뱌오의 사조직인 <연합 함대>의 일원이며 공군 사령부 판공실 처장 주우치 등 4명은 6일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 밀담을 나누었으며 린뱌오와 예췬은 9월 7일 새벽까지 계속 회의를 했다.

9월 7일, 린리궈가 행동에 들어가서 571 공정이라고 불리는 쿠데타 계획을 가동하였다. 하지만 린리궈 일행이 결행하지 못하고 탁상공론을 하는 사이에 마오쩌둥의 열차가 갑자기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9월 12일 오후 1시 10분 마오쩌둥의 열차가 풍대에 도착했고 오후 4시 5분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마오쩌둥은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중난하이로 이동하였고 571 공정은 마오쩌둥의 신속한 움직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자세한 것은 571 공정 문서 참조.

3. 전개

3.1. 광저우로 도망치려는 린뱌오

571 공정이 실패로 끝나자 린뱌오와 린리궈, 예췬은 광저우로 달아나기로 하였다. 린뱌오는 우선 광저우에서 황용셩, 우파셴, 리쭤펑, 치우후이쭤 등과 모의하여 광저우에서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후일 중국공산당의 기소장에 적혀 있다.[1] 린뱌오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북대하의 요양원에 딸 린리헝과 린리헝의 약혼자 등을 불러모았다.[2] 예췬은 딸 린리헝에게 "아버지가 일주일 후에 다롄에 갔다가 국경절에는 베이징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발언하며 광저우로 달아나려는 계획을 은폐하고자 했다.

9월 12일 예췬은 난데없이 딸 린리헝의 결혼식을 올리겠다면서 비서와 사무원에게 다과와 술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며 연회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베이징에 있던 우파셴에게 전화하여 축전을 쳐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린리헝이 난데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대해 반대하여 약혼식으로 바꾸어 거행했다. 이것 역시 광저우로 달아나려는 계획을 은폐하려는 연막작전으로 해석된다. 린리헝은 부모의 수상한 행동에 불안해하며 9월 8일에 8341부대에 연락해 유사시에 린뱌오를 보호할 수 있도록 요양소를 지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예췬이 린리헝이 사랑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에 8341부대는 린리헝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요양소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9월 12일, 린리궈는 광저우로 달아나기 위해 군용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1E 비행기[3] 256호를 준비시키고 공군 사령부 처장 유패풍과 함께 북대하 산해관 공항으로 향했다. 린리궈 일행은 오후 9시에 린리헝의 약혼식장에 나타났다. 린리궈는 누나에게 허겁지겁 꽃다발을 건네주고는 어머니 예췬을 데리고 약혼식장을 빠져나와 린뱌오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머니와 남동생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린리헝은 린리궈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린리헝은 사무원을 보내 예췬과 린리궈의 대화 내용을 엿듣게 했는데 이들은 9월 13일 아침 6시에 남쪽으로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듣고 놀란 린리헝은 린뱌오의 경호참모 오문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오문호는 이를 믿지 않고 린뱌오는 다롄으로 가기로 계획이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오문호는 다시 린뱌오를 찾아가서 내일 다롄으로 가는 것이 맞냐고 물었고 예췬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경호부대를 출동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예췬은 엄숙하게 경호부대를 출동시키지 말라고 요구했다.

역시 이상함을 느낀 오문호는 이를 린리헝에게 전달했다. 린리헝은 이를 린뱌오를 경호하던 중앙경위국 8341부대 대기소에 통보하기로 결심하여 오후 9시 50분 8341부대 사령관 장야오츠에게 린리궈와 예췬이 린뱌오를 납치하려 한다고 보고했다.[4]

3.2. 린뱌오의 도주

린리헝의 보고를 받은 8341부대 사령관 장야오츠는 즉각 10시 20분에 베이징의 왕둥싱에게 보고를 올렸고 10시 30분에 저우언라이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인민대회당에서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 관한 정부보고를 논의하는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는데 보고를 받고 즉시 오법헌과 이작붕에게 항공기들의 움직임을 조사할 것을 명령하였고 곧 트라이던트 256호가 산해관 공항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9월 12일 오후 11시 예췬이 구회작의 부인과 통화를 하여 저우언라이가 256호기의 행방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린뱌오에게 알렸다. 린뱌오는 즉각 자신이 거주지를 다롄으로 옮기려 한다고 베이징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1시 22분, 예췬이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전화하여 린뱌오가 온천휴양을 위해 다롄의 별장으로 이동하려고 한다고 알리며 기차보다는 비행기를 쓰고 싶다고 하며 저우언라이의 의심을 풀고자 했다. 저우언라이는 256호기가 산해관 공항에 있는 것을 알고도 예췬에게 비행기가 있냐고 물었다. 예췬은 비행기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고 저우언라이는 이를 수상쩍게 여겼다. 저우언라이는 린뱌오가 도망치려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요하다면 내가 린뱌오 동지를 만나러 북대하로 가겠어요."

하지만 예췬은 잘라 거절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린뱌오는 바쁘니까요."

저우언라이는 날씨가 좋지 않으니 오법헌과 항공여행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후 예췬은 즉각 복도로 뛰쳐나가 수면제를 먹고 자고 있던 린뱌오를 깨운 후 경호참모 오문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차를 준비해요! 어쨌든 서둘러요! 수장을 붙잡으러 오는 녀석이 있어요!"

12일 11시 40분 린뱌오, 예췬, 린리궈, 유패풍, 오문호와 운전사로 구성된 린뱌오 일행은 서류를 모두 불태운 후 도자기, 카메라, 녹음기 등을 챙겨 차를 타고 산해관 공항으로 갔다. 린뱌오가 린리궈에게 소련 이르쿠츠크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고 린리궈는 조금만 날아가면 금방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린뱌오의 차량은 8341부대의 대기소에 도착했다. 예췬이 소리쳤다.
"8341부대는 수장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아. 돌진해!"

린리궈가 운전사의 등에 권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운전사는 하는 수 없이 검문소를 돌파했다. 이때 오문호가 차에서 뛰어내렸는데 린리궈가 오문호에게 권총 2발을 발사하여 오문호의 오른 어깨에 한발이 맞았다. 린뱌오 등은 잠시 후에 산해관 공항에 도착했고 이들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차에서 뛰어내렸다. 예췬이 비행기를 출발시키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린리궈는 권총을 휘둘러댔다. 256호기에 설치된 트랩이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린뱌오 일행은 조종석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기내로 뛰어들어 부조종사나 통신사도 기다리지 않고 표지등도 꺼버린 채 서둘러 이륙했다. 연료도 고작 1톤밖에 채워져 있지 않았다. 비행기 뒤에 8341 부대가 따라붙었으나 256호기는 13일 오전 0시 32분에 이륙에 성공했다. 이륙하면서 비행기 오른쪽 날개가 급유차와 부딪쳐 유도등이 떨어져나갔다.

3.3. 마오쩌둥의 격추 중단 지시

한편 예췬과의 통화를 끝낸 후 저우언라이는 오법헌과 이작붕을 불러 트라이던트기가 자신과 이작붕, 황영승, 오법헌의 공동 승인이 없으면 이륙할 수 없다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작붕이 256호기의 이륙을 독단적으로 승인하는 바람에 상술한 바와 같이 13일 오전 0시 32분에 256호기는 이륙에 성공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정에 린뱌오 일행이 공관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들었고 즉각 오법헌에게 중국의 모든 공항에 비행 통제를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무선으로 불러. 베이징의 서교 공항이든 동교 공항이든 착륙하면 내가, 저우언라이가 마중 나간다고 말하게."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256호기에 무선 연락이 갔지만 256호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오법헌을 감시하기 위해 오법헌이 근무 중인 베이징 서부 비행장에 양더중을 파견하여 그를 감시하게 했고 정치국 위원 겸 베이징 군구 사령관 리더성을 공군 사령부로 파견해 지휘를 맡게 했다. 또 정치국 후보위원 겸 중앙군사위원회 행정소조원 지덩쿠이에게 베이징 군구를 감독하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황영승에게는 자신과 같이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북대하로 가서 린뱌오를 직접 설득하기 위해 2대의 비행기를 대기시킬 것을 명령했다. 혹시 모를 린뱌오 지지자들의 돌발 행동에 대처를 마친 저우언라이는 지덩쿠이 등을 대동하고 마오쩌둥을 찾아가 린뱌오의 도주에 대해 보고했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마오쩌둥은 즉각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우언라이는 안전을 위해 중난하이에서 인민대회당으로 거처를 옮길 것으로 권유했고 이에 마오쩌둥은 장위펑 등을 대동하고 인민대회당 남측 118호실로 거처를 옮겼다.

이윽고 산해관 공항에서 서쪽을 향해 날아가던 256호기는 갑자기 내몽골 자치구 상공에서 북으로 방향을 돌렸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린뱌오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킬지 여부에 대해 물었다. 마오쩌둥은 집무실 안에서 잠시 왔다갔다하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앞길을 가로막을 수는 없지. 비는 내리는 것이고, 과부는 시집을 가는 것이오(天要下雨 천요하우 娘要嫁人 낭요가인). 어찌할 수도 없어요.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게 좋아."[5]

마오쩌둥이 린뱌오 격추를 거부함에 따라 256호기는 13일 오전 1시 50분 몽골 영공에 진입했고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새벽 2시에 마오쩌둥에게 린뱌오의 비행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저우언라이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마오쩌둥이 씹어 뱉었다.
"결국 장궈타오왕밍과 같은 또 한 명의 반역자가 생겼군."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정치국 회의를 위한 고위 간부 소집을 명령했고 오전 3시 30분 저우언라이가 주재하는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마오쩌둥은 참석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정치국원들에게 마오쩌둥이 전날에 수도로 돌아왔으며 린뱌오가 달아났으니 만약에 대비할 것을 통보하였으며 각 군구와 성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3.4. 린뱌오의 죽음과 <연합 함대>의 최후

13일 새벽 2시 40분 베이징 사허 공항에 공군 사령부 판공실 처장 주우치, 공산사령부 판공실 부처장 우신야, 공군 정치부 비서처 부처장 이위신 등 린리궈의 측근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긴급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주장하며 당직 중이던 헬리콥터 조종사 천슈원을 깨워 동북으로 날아가 몽골 망명을 기도했다. 주우치는 천슈원에게 몽골 울란바토르-소련 이르쿠츠크 항로 지도를 보여주며 울란바토르로 향하자고 요구했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천슈원은 기름이 떨어져 착륙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우치는 린뱌오가 이미 울란바토르에 도착했으니 몽골 국경만 넘으면 된다고 천슈원을 다그쳤다. 그러자 천슈원은 헬기가 흔들리는 틈을 타서 몰래 항로를 바꾼 다음에 나침반을 부숴버렸다. 그걸 안 주우치가 따졌으나 천슈원은 나침반은 원래 고장이 나 있었으며 전투기가 추격하는 것을 피하려면 저공비행할 수밖에 없다고 둘러댔다. 결국 헬리콥터는 항로를 바꾸어 베이징 교외의 회유현에 급유를 이유로 착륙했다. 이에 주우치는 즉각 천슈원을 권총으로 사살했고 부조종사 천스인은 덩달아 죽은 척하여 겨우 살 수 있었다. 주우치 등은 맨 처음에 산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소지한 문서를 불태운 후 권총자살을 기도했다. 주우치와 우신야는 죽었으나 이위신은 죽는게 두려워 허공을 향해 권총을 쐈고 쫓아오던 민병들에게 잡혀 체포되었다.

9월 14일 오후 8시 30분 몽골 인민 공화국 외무차관 올턴 빌리가가 울란바토르 주재 중국 대사 허문익을 초치했다. 30분 후인 밤 9시에 외무차관을 찾아간 허문익에게 빌리가는 다음과 같이 정식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 당연히 몽골에 대한 중국 측의 악의는 없었지만 제반 사정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몽골이 보기에 중국 군용기의 영공 침범은 명백한 주권 침해 행위였기 때문.
"13일 오전 2시경에 우리나라 헨티성 운도르한 광구에서 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제트기 한대가 추락했습니다. 조사 결과 추락기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것이었고, 탑승했던 사람들은 9명이고 그중 1명은 여성입니다만 불행히도 모두 사망했습니다. 중국 군용기가 몽골 영공 깊숙이 진입한 데에 대해 나는 정부를 대표로 구두로 항의합니다. 중국 정부가 정식으로 곧 해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허문익은 중국 측에서 현장 검증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후 대사관에 돌아가 베이징과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사정이 나빠 연락을 하지 못하다가 50년대에 설치한 베이징-모스크바 전용선을 살려내[6] 12시 20분이 되어서야 겨우 베이징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256호기가 중국측의 감시망에서 빠져나간지 34시간 째 되던 상황이었고 저우언라이는 린뱌오가 외국에 망명했을 시의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있었다.[7] 이때 린뱌오 일행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외교부장 대리 지펑페이가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추락사라니 절묘한 끝장이군."

당시 저우언라이는 수면제를 먹고 인민대회당 복건실에서 겨우 잠에 든 상황이었는데 긴급보고인지라 저우언라이를 깨워 린뱌오의 죽음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는 즉각 북경실에 있는 마오쩌둥에게 가서 린뱌오의 죽음을 보고했다. 역시 자고 있다가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정보는 확실한가?", "연료가 떨어진 건가?", "공항이라고 착각했나?" 등의 질문을 던져댔다. 정보가 누설되었는지 여부에 대해 전용선을 통해 보고된 것이니 그럴 리 없다고 저우언라이가 확언하자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망치려다가 결국 이렇게 됐군. 린뱌오 사건 처리로는 이상적인 결말이군."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예젠잉이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를 주재할 수 있도록 추천했으며 마오쩌둥은 이를 즉시 승낙했다. 새벽 2시 저우언라이는 외교부에 전화를 걸어 허문익 대사가 일을 잘 처리했다고 감사의 뜻을 전하며 울란바토르의 대사관과 극비 하에 통신상태를 유지하고 허문익 대사에게는 몽골 당국에 항공기가 경로를 벗어나 몽골 영공에 잘못 들어간 것으로 전하라고 훈령을 내리는 한편 사태 발생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3.5. 사건 조사

9월 15일에서 16일에 걸쳐 중국대사 허문익과 3명의 보좌관이 몽골 정부의 허락을 받고 배석한 가운데 운두르한에서 현장검증이 이루어졌다. 허문익은 사고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부분의 시신이 엎어진 채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머리가 시커멓게 불에 타 신원 확인이 힘들었다. 우리는 아홉구의 시신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눕혀놓고 차례대로 번호를 매긴 다음 향후 식별을 위해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후속 조사 결과 린뱌오는 사체 제5호로 판명되었다. 머리에 약간 벗겨진 부분이 남아 있고, 얼굴에 찰과상이 있으며, 뼈가 부러져 튀어나오고, 눈썹은 모두 불에 타고 눈은 검은 구멍만 남은 상태였다. 시체 제8호는 린뱌오의 부인인 예췬이다. (...) 그녀는 비교적 덜 탄 상태로 머리카락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나 왼쪽 부분에 치명상을 입었다. 사체 제2호는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다. 시체가 비교적 크고 얼굴은 화염 속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한 듯 새카맣게 타고 일그러졌다. 사망자의 유품 중에 린리궈의 이름과 002번이 적힌 공군학교 수첩이 발견되었다.

사체의 정확한 판명을 위해 소련 대표부는 몽골과 협의 끝에 린뱌오와 예췬의 머리를 잘라 모스크바에 보내 법의학 검시를 받게 했고 나머지 시신은 사건 현장에 매장했다. 소련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린뱌오가 요양했던 의료기룍을 통해 린뱌오의 두부와 치형 진료 기록 카드와 모스크바로 보내진 머리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2년 1월 17일 소련은 정치국 회의를 통해 대중 관계의 실마리를 끊지 않기 위해 린뱌오의 추락사 소식을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편 몽골 측은 그저 민항기가 실수로 들어갔다고 발뺌할 뿐인 중국측의 태도에 화가 나서 1971년 9월 29일 오후 5시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 공군기가 영공을 침범했다고 발표했다.

9월 18일 중국공산당은 린뱌오의 죽음을 은폐하고 성, 시, 자치구의 당 위원회 상무위원 이상 간부들에게 <린뱌오가 조국을 배반하고 도망친 데 대한 통지>를 극비로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1년 9월 13일, 당황한 나머지 적진으로 도망쳐 당과 조국을 배반하고 스스로 멸망을 택했다. (...) 린뱌오라는 이 자본계급의 야심가, 음모가의 모든 게 밝혀져 파탄되어 버렸다.

중국공산당은 린뱌오가 1970년 당 제9기 중앙위원회 2중전회에서 천보다와 짜고 주석 자리를 노리려다가 폭로되어 달아난 것으로 규정했고 체포 중이던 천보다를 반역 혐의로 수감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 중국 대사관은 항공기가 착륙을 시도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폭발하지도 않았다는 1차 결론을 내리고 이를 보고했으나 저우언라이는 불충분한 설명이라고 여겨 더 자세히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9월 21일, 중국 대사관 이등 서기관 쑨이셴이 베이징으로 급파되어 밤 11시에 저우언라이를 접견했다. 쑨이셴은 3시간 동안 저우언라이에게 보고를 올렸으나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납득되지 않아 공안부장 리전과 베이징 공군사령관 리지타이에게 사고에 대해 기술적으로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연료 부족을 원인으로 지목하였으나 정작 보고에서는 이들이 추락하기 전에 30분 정도 더 비행할 수 있는 연료가 있었고 랜딩기어와 보조날개를 가동하지 않고 착륙을 시도했다는 기이한 점을 포착했다. 어쨌거나 공식적인 원인은 연료 부족으로 규정되었다.

3.6. 군부 숙청

한편 사건이 일어난 당일인 9월 13일 황영승, 이작붕, 구회작 등 린뱌오의 남은 측근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보고가 마오쩌둥에게 올라갔다. 마오쩌둥은 이들이 오래된 동지이니만큼 우선 10일 간 태도를 지켜보고 만약 과오를 인정하면 관대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9월 24일 왕둥싱은 이들이 서류를 불태우는 등 필사적으로 증거인멸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파멸이지. 그자들은 끝까지 저항하는군."

결국 이날 아침 저우언라이가 황영승, 이작붕, 구회작, 오법헌을 인민대회당 복건실로 호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들에게 해직을 통보하고 철저한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격리 심사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한 예젠잉이 지휘하는 군사위원회 특별조사단이 편성되어 주요 군사기관에서의 린뱌오 그룹의 활동을 조사했고 린뱌오 추종자로 의심되는 93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비림정풍 운동이 공군, 해군, 인민해방군 총병참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0월 3일 린뱌오의 측근들로 구성된 당중앙 군사위원회 판사조가 폐지된 대신 실무진을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 군사위원회 판공회의가 수립되었고 린뱌오가 숙청한 군 원로와 간부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당중앙은 저우언라이의 건의에 따라 예젠잉이 군사업무를 주재하도록 했다. 10월 4일 예젠잉은 고위간부회의를 주재하여 원수와 장군들에게 린뱌오가 달아나다 죽었다고 발언했다. 충격을 받은 좌중은 이를 믿지 못하고 침묵에 빠졌는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들었습니까? 대머리 린씨가 죽었습니다! 대머리 린씨가 죽었다!"

이에 회의석상은 환호에 빠졌고 일부 장군들은 너무 기뻐하다가 기절하기까지 했다. 10월 4일, 마오쩌둥은 판공회의의 일원들을 만나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문화대혁명 중에 나이가 많은 장군들 몇 명이 타도되었는데, 모두 린뱌오와 천보다가 한 짓이야. 우리 군대를 잘 정돈하고, 군사 위원회가 중요한 문제를 토론할 때에는 총리도 참가시키게."

이로서 군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발휘했으며 중국 정계의 한 축이었던 린뱌오 그룹은 완전히 숙청되었다.

4. 결과

한편 린뱌오가 이 사건으로 사망한 이후 중국 정계는 장칭이 주도하는 급진파와 저우언라이가 주도하는 온건파의 양강 체제로 개편되었다. 1972년 1월 천이 원수가 사망했는데 마오쩌둥은 그의 장례식에 참가해 그를 높이 평가하는 등 온건파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덩샤오핑 복권도 허락했다. 한동안은 저우언라이가 정부의 실세로 자리매김하여 닉슨-마오쩌둥 회담 등을 주도하고 린뱌오 그룹을 맹렬히 타도했으나 1972년 12월에 마오쩌둥이 반좌파 운동이 너무 갔다고 제지하면서 린뱌오는 사실 극좌주의자가 아니라 극우주의자였다고 평가가 수정(...)되었고 1973년부터 4인방이 권력을 장악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린뱌오의 죽음은 극비에 부쳐졌으나 마오쩌둥의 1971년 국경절 참가 취소[8] 등 불길한 징조와 함께 1971년 10월 중순 즈음에는 당 전체에 알려졌고 인민들도 일본 라디오 등을 통해서 알음알음 소식을 전해듣고 있었다. 당연히 전국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으나 린뱌오가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끝났다. 한동안 중국은 마오쩌둥 주석 어록을 수거해 린뱌오가 쓴 서문을 찢어버리는 작업으로 바빴다. 사람들은 문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주석의 수제자'조차 주석을 믿지 못하는데 누가 주석을 믿을 수 있겠냐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판초프는 린뱌오의 죽음은 마오쩌둥 체제의 파산과 합리성의 상실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평하고 있다.

마오쩌둥 개인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천이의 추도식을 다녀온 후에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달아나지만 않았다면 우리도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적 박탈을 보류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더니 저우언라이에게 자신이 죽으면 당신이 뒤를 맡아야 한다고 발언하여 장칭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1972년 6월, 마오쩌둥은 반다라나이케 스리랑카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이른바 좌파는 실은 반혁명 자체입니다. 막후의 총수 이름은 린뱌오입니다."라고 발언하여 마침내 린뱌오의 실각과 사망에 대해서 인정했다. 1973년 8월 20일, 당중앙은 10차 당대회를 통해 린뱌오 반혁명 집단의 죄상 심사 보고를 승인하여 린뱌오 및 천보다, 예췬, 황영승, 오법헌, 이작붕, 구회작을 당에서 영구제명했다. 1977년 린뱌오는 야심가, 음모가, 반혁명 양면파, 반도, 매국적으로 규정되었다. 1981년의 특별 법정은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암살을 꾀하고 반혁명 쿠데타를 획책했다고 결론짓고 관련자들을 처벌했지만 정작 체포된 주요 장군들에 대해서 이들이 쿠데타에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비행기에 타지 않은 린리헝은 지금도 살아 있고 복권되었기 때문에 가끔 당 행사에 모습을 비추고는 한다.

5. 실제 추락 원인은?

상술한 바와 같이 공식적인 발표는 출발할 때 연료를 1톤만 실은 상태라서 연료 부족으로 중도 추락했다는 것이지만 몇가지 의문점이 있으며[9] 추락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가설이 있다.

* 1. 린뱌오는 왜 원래 계획대로 남쪽으로 가지 않았나? ← 이에 대해서는 저우언라이가 공항을 폐쇄해서 남쪽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광동에서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망명을 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저우언라이가 린뱌오의 외국 망명을 유도했다는 뜻이 된다.

6. 참고 문헌

7.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


[1] 로더릭 맥파커를 비롯한 학자들도 이를 수용했다.[2] 린리헝은 571 공정과 아무런 연관도 없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3] 영국제 3발 제트기로 12년 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춘천에 불시착한 건 2E 모델이다. 이래저래 중국과 엮인 기종인 셈.[4] 이는 린리헝과 예췬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는 추측이 있다. 예췬은 린리헝을 학대했고 린리헝은 예췬이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지만 예췬은 딸이 자살하려 했다는 소식에 죽게 내버려두라고 말할 정도로 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전에도 린리헝은 린뱌오가 주더처럼 정치에서 은퇴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쿠데타나 망명을 기도하려는 린리궈의 주장에 반대해 왔다.[5] 이는 인민해방군 공군의 야간 전투력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을 마오쩌둥이 인식했기 때문에 내린 지시라는 분석도 있다.[6]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2년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7] 린뱌오가 성명을 발표할 경우, 그냥 잠적할 경우, 중국에 도전할 경우 등 4가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대비 중이었다.[8] 결국 마오쩌둥은 1970년 국경절 행사 이후 다신 천안문 연단에 서지 못했다.[9] 소련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추락 직후 폭발과 함께 한동안 화재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아 소련까지 비행할 만한 연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10] 소련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으나 레이더망을 피하고자 저고도로 비행하던 중 고도를 잘못 파악하는 바람에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