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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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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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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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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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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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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ᆞ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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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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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주 천위 황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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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화 저우샤오단 마싱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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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제5대 제6대
황융성 류싱위안 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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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춘화 리시 황쿤밍 }}}}}}}}}}}}}}}
<colcolor=#ffff00> 중화인민공화국 3대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
[ruby(赵, ruby=Zhào)][ruby(紫, ruby=Zǐ)][ruby(阳, ruby=yáng)](趙紫陽, 조자양) | Zhao Ziyang
파일:external/img.epochtimes.com/501172331868.jpg
본명 자오슈예(赵修业/趙修業, Zhào Xiūyè)
출생 1919년 10월 17일
중화민국 허난성 화현
사망 2005년 1월 17일 (향년 85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국적
[[중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없음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민족 한족
총리
재임기간
3대 1980년 9월 10일 ~ 1987년 11월 24일
당총서기
재임기간
직무대리 1987년 1월 16일 ~ 1987년 11월 1일
2대 1987년 11월 1일 ~ 1989년 6월 24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3.1. 덩샤오핑 집권 이후3.2. 천안문 사태3.3. 실각 이후
4. 평가5. 기타6. 주요 경력

[clearfix]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3세대 정치인이다. 덩샤오핑후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되었고, 총리에 올랐으나, 천안문 6.4 항쟁시에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 야인으로 지냈다.[1]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9년 10월 17일, 허난성 안양시 화현[滑縣] 출생. 중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씨우예([ruby(修, ruby=xiū)][ruby(業, ruby=yè)]: 수업)였다. 소학교를 다니다가 1932년 공청단에 가입, 후베이성 우한에 있는 우창고급중학에 다니다가 이름을 쯔양으로 개명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귀향하여 반일청년들을 모아 통속학사를 조직하였다.

1938년 2월,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 허난성, 허베이성 변구의 지방당료로 일하다가 산둥성에 배치되었으며 류보청-덩샤오핑이 지휘하던 129사단에 가담하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하고 곧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자오쯔양은 공산군이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 개혁 담당을 맡아 공산당이 농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자오쯔양의 상관인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토지 개혁 전문가"로 공개적으로 칭찬할 정도였고, 덩샤오핑 사단의 핵심 인물이 된다.

공산당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자오쯔양은 군직을 나와 광둥성에 배치, 예젠잉 밑에서 화남국 비서장 및 농촌공작부장, 부서기,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을 맡아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며 1955년 화남분국이 폐지되자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처 서기에 임명된다. 1959년 대약진운동 시기에 숨겨진 재산 찾아내기 운동 등을 벌여 농민들이 숨겨놓은 식량과 재산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탈하여 정부에 조달했는데, 결과적으로 광동성에서 수백만의 인명을 아사시키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 자오쯔양은 좀 더 실용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거나 1960년, 상무서기로 승진, 광둥성 제1서기인 타오주와 함께 온건정책을 지지하였다. 1961년 2월, 광둥성 2기 당대회에서 당중앙에서 제시된 농업 60조, 공업 70조에 찬성하면서 농업과 경공업 발전을 주장했다. 1962년, 광둥성 제2서기 겸 비서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64년 광둥성 군구 정치위원, 당중앙 중남국 서기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65년 4월, 타오주가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상경하게 되자 자오쯔양은 일약 46세의 나이로 광둥성 제1서기로 승진했다.[2] 당시 그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당서기였다. 당서기 재임 시절 기술개혁을 주장하면서 생산성 향상에 노력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실용적 스탠스로 인해 주자파로 지목되어 모든 공직에서 해임당했고, 1967년 10월 16일, 8만명의 군중 앞에서 처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후 내몽골 57간부학교로 하방되어 고생하다가 1971년 4월에 감호조치에서 해제되어 내몽골자치구 서기 겸 내몽골자치구 혁명위원회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9.13 사건 이후 극좌파들의 힘이 위축되면서 1972년 1월, 광둥성 서기 겸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돌아오게 된다. 1973년 덩샤오핑 이후 10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74년 4월, 광둥성 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겸 광저우군구 정치위원이 되었다. 광저우 군구 사령원 쉬스유와 함께 린뱌오의 잔여세력 공격에 참여하였고 1975년 11월, 덩샤오핑의 추천으로 쓰촨성 제1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에 임명된다. 1976년 1월에는 청두군구 제1정치위원을 겸하였다. 제1서기 재임 시절 사천성의 농업 개혁에 착수했다. 이때 발표된 것이 사천성 12조다. 그가 당 서기로 부임한 이후 사천성은 풍년이 들어서 "밥을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아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어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79년 자오쯔양의 후견인인 덩샤오핑화궈펑을 실각시키고 대권을 장악하자, 자오쯔양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1979년에는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추산하기 위한 조사 사업을 실시했는데, 이때 나온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해당 조사의 결과는 은폐되었다.[3] 이후 후야오방은 공식 사망자를 1,800만명으로 발표하고 유고슬라비아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2,000만명 이상이 확실히 죽었다고 언급했다.

3.1. 덩샤오핑 집권 이후

사천성 제1서기 시절 세운 공을 바탕으로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1977년 8월, 11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79년 9월, 11기 5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0년 2월, 11기 6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및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1980년 8월, 전인대 5기 3차 회의에서, 당정의 지도 분리를 이유로 화궈펑이 국무원 총리에서 하야하자 후임 국무원 총리로 선출되어 1987년까지 재임하였다.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재선, 1987년 1월 15일 ~ 16일 사이에 개최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후야오방이 1986년 중국 학생 시위를 지나치게 관대하게 처리했다고 조리돌림을 당한 후 실각당하자 대리 총서기에 선출되었으며,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낙점받은 그는 당내 지위 제고를 위해 중군위 제1부주석에도 선출되었다. 총서기 재임 시절 안정성장보단 고도성장에 방점을 두고 매우 과감한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때문에 천윈, 리펑 등 보수파의 불만을 샀으며 1988년에 닥쳐온 불황과 인플레이션 때문에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1989년에 이르러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는 천안문 사태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자오쯔양 체제가 위기에 처하자 1988년 5월부터 덩샤오핑은 침묵을 깨고 "우리는 개혁과 대외개방을 견지해야 하고, 권력을 중앙이 회수하려 해서는 안되며, 지방에 내려주어야 한다."라고 발언하며 자오쯔양을 지원사격하였으나, 민심이 지나치게 악화되자 1988년 5월 15일부터 17일 사이에 열린 13기 10차 정치국 회의에서 가격개혁의 2년 연기 및 물가안정 집중이 결정되었고 1988년 9월, 중앙공작회의에서 자오쯔양은 경미한 인플레이션이 생산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한 과거의 주장 때문에 극심한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경제정책에 있어 천윈이 지지하던 리펑이 실권을 잡고, 자오쯔양이 지도하던 중앙재경소조가 폐지되어 자오쯔양은 경제개혁에 대한 정책결정권을 상실한다. 이렇게 자오쯔양의 위치가 불안해진 가운데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다.

3.2. 천안문 사태

파일:external/imgs.ntdtv.com/p6384002a229564480.jpg
천안문 사태 때의 모습. 그리고 옆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훗날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 영상(무자막)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중 집회가 장기화되고, 당국과 학생시위대간의 대화가 무산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을 결정한다.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직접 천안문 광장에 나가 군중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당시 자오쯔양은 5월 19일 베이징에 계엄이 선포되기 직전까지 덩샤오핑과 당 지도부와의 상무회의에게 지속적으로 계엄선언을 반대하고 시위대와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5월 17일 기습적으로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개최된 비공식 상무회의에서 계엄선포가 결정되었고, 더이상 공산당 원로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해 시위대가 개죽음당할 것으로 보아 독단적으로 시위대를 만나고 즉석연설도 하며 유혈사태는 막고자 노력했다.

훗날 나온 그의 회고록 '국가의 죄수'에 따르면, 자오쯔양은 당시 시위대의 주장에 완전히 동조했다기보다는 현재의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재에서 시위대의 주장을 받아들여 충분히 개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 노선을 전면 부정하진 않지만, 시위대에 대해 폭력적으로 진압하기보다는 본인 권력 인생을 걸고 시위대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을 우선시하려 했고, 시위대의 당시 투쟁 방법이나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된다 하더라도 원로들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점은 당시 시위대 앞에서 한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학생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저도 여러분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당과 정부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길 원해서 단식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려면 대화 채널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문제들은 시간이 더 지나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조속히 이 단식을 끝내야 할 것입니다...”

허나 당시 그의 행보는 당 지도부에게 덩샤오핑의 무력 진압 지시와 상충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한때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도 거론되었던 그는 끝내 덩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5월 27일,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임 총서기로 결정하였다. 천안문을 탱크로 깔아뭉갠 후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되었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자오쯔양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후야오방과 달리 자오쯔양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맹렬하게 맞서 싸웠다. 덩샤오핑은 중앙위원 해직은 무기명 투표로 결정해야 하는 당규를 무시하고, 거수 투표로 정치국 위원 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며 자오쯔양 해임 안건을 상정했다. 당연히 자오쯔양 사임에 몰표가 던져졌지만 자오쯔양은 자신을 해임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런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표를 행사했다. 덩샤오핑과 회의 주재자인 리펑은 이를 무시했다.

1989년 6월 23일부터 6월 24일까지 중국공산당 13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고, 자오쯔양은 총서기에서 확실하게 해임되었으며 정치국은 물론 당중앙위원회에서도 방출되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 중에 자오쯔양 동지가 범한 오류에 대한 보고'가 심의 통과되어 자오쯔양을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킨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고 격렬히 비판하고 "중앙의 업무를 주관한 이후, 4항 기본원칙의 견지와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당 건설과 정신문명 건설, 사상, 정치 공작을 홀시하여 당 사업에 엄중한 손실을 초래했다."라고 조리돌렸으며 가택연금 하에서 조사를 받을 것을 결정했다. 자오쯔양에겐 소조회의에 출석하여 최후변론을 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역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참석자들은 그를 죽어도 회개하지 않으며, 완고하여 바뀌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더욱 비판하였다. 1992년 인민출판사는 중공중앙문헌연구실에서 편집한 '13대이래중요문헌선편(중)' 권을 출판하여 자오쯔양을 반동을 규정한 13기 4중전회 공보를 공식출판함으로 그를 한번 더 부관참시했다.

이후 자오쯔양은 1992년 10월까지 민주화 운동에 개입하여 기밀을 외부에 누설하였는지, 그리고 왜 덩샤오핑에게 개겼는지 2가지 혐의를 조사받았다. 하지만 조사결과는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았으며 자오쯔양의 당적이 박탈되지도 않는 등 후속 처벌도 없었다. 다만 전해지는 바로는 자오쯔양은 30개 혐의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투옥되거나 혁명화당하는 비참한 운명은 면할 수 있었다. 그가 후속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2가지 였는데 첫째는 그의 처벌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과 당의 노선에 거스른 것에 대한 '정치적 단죄'에 해당했으며, 둘째는 뒤에서 언급되지만 장쩌민과 천윈이 보수파 노선을 강화하자 덩샤오핑이 후치리 등 개혁개방파들을 복권하면서 자오쯔양의 복권 카드를 들고나와 장쩌민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에겐 자오쯔양의 정치적 명예를 완전히 말살해선 안됐다.

3.3. 실각 이후

파일:zhaoziyang2.png
은둔생활시 골프장에서 홍콩 기자들에게 촬영된 자오쯔양

실각후 감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감시를 받으며 강요된 은둔생활을 했다. 이런 감시 상태에서, 언론 기관과 접촉하거나 공개 석상에 나오는 것은 금지되었고, 감시원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삶 자체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자오쯔양의 가택연금은 법적으로 내려진 공식처벌이 아니라 원로들의 결정에 따라 당에서 징계를 받은 것이며, 인민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오쯔양은 고위직에서는 해임되었지만, 출당되지 않아서 당원 자격도 유지되었고, 전직 총리로서 받는 연금도 그대로 나왔으며, 전직 고위 관료들이 사는 고급주택이나 운전사 및 관용차도 배정되었다.

총서기시절에도 골프를 좋아해서 1980년대 최초로 중국에서 골프장 건설 허가를 내주었고 실각후에는 친구나 지인과도 만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뒤늦게 배운 골프로 소일했다고 한다. 실제로 골프광이었으며, 공산국가인 중국에서는 부르주아 스포츠로 찍혀 정치인이 공개장소에서 치는 것이 금기시되는 골프 사진이 여러장 남아있다. [4]

다만 자오쯔양의 가택연금 중에서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긴 하다. 1990년 10월, 자오쯔양이 오랜만에 골프를 치기 위해서 외출을 하려 하자 중앙판공청 경호국은 외출 허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이를 막으려 했다. 자오쯔양은 자신이 외출할 수 없는 근거를 가져오라고 항의했고, 경호국이 막무가내로 그의 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자 그럼 버스를 타고 골프장에 가겠다고 정면으로 맞섰다. 당황한 경호국은 장쩌민과 리펑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외출 중이라서 차오스에게 문의하였다. 차오스도 당황하여 경호국이 알아서 하라고 책임을 떠넘겼고, 경호국은 자오쯔양이 차를 타고 나가는 것은 허용했지만 대신 경호국 차량이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자오쯔양은 중일 합작으로 세워진 창평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골프장에서 일본 인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는데, 덕분에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즉시 홍콩 기자들이 달려와 그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 방영하였다. 청두에 출장을 나갔던 장쩌민과 리펑은 분노하였고, 경호국을 크게 비판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서는 심사기간에는 외출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자오쯔양의 외출을 막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론 그가 자유라고 주장했다.

심사가 끝난 이후 요양을 위해 자신이 오랫동안 일했던 광동성에 가려 했으나 중국공산당은 홍콩 총독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이 홍콩의 민주화를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 광동성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막고 대신에 광서성에 보냈다. 광서성에서 돌아온 이후 자오쯔양은 다시 골프를 치러 나가려 했지만 경호국에서 금지했다. 분노한 자오쯔양은 성명을 발표하고 규정에 없는 이런 핍박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자오쯔양은 그외에 서성구 문건가 1번지의 노간부 전용 양펑자다오 당구클럽에 가는 것도 즐겼으나 이것도 금지되었다, 자오쯔양이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또 맞서자 경호국은 1주일에 2번만 가는 것을 허용했으나 자오쯔양이 가기 전에 당구장을 모두 비워버려 그가 어떤 간부와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천윈, 덩샤오핑, 펑전 등이 죽었을때 자오쯔양이 조문을 가려 했지만 이는 모두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소동이 있은 후에 중앙판공청은 6가지 규정을 자오쯔양의 생활 규칙을 내렸는데 이중에서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당직은 박탈되고 대권의 길은 막혔지만, 공산당에서 추방되지 않고 당원 자격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니까 당 차원에서는 "그가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딱히 사법적인 책임을 질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천안문 사태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자기 권한으로 최대한 진압군을 지연시켰고[6], 위로부터 내려진 진압 결정을 듣고 시위현장에 나타나 "곧 진압군이 나타날테니 어서 빨리 집으로 가세요"라고 말했을 뿐이었으니 위법을 저지르거나 무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덩샤오핑 입장에서는 자기가 대권을 물려주려 했던 심복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고 시위대에 더 동정적이었다는 것에 실망과 함께 괘씸죄를 느꼈던 듯 하다.

하지만 천윈의 반격으로 개혁개방이 후퇴하면서 덩샤오핑은 자오쯔양과 함께 개혁개방파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장쩌민은 보수파에 호응하여 정치적 통제와 사상 재교육을 강화하였고 유학생들의 재출국, 자영업자의 입당 등이 금지되는 등 중국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이에 덩샤오핑은 후치리, 옌밍푸, 루이싱원 등 숙청당한 개혁개방파들을 복권하면서 자오쯔양에게도 2차례 천안문 사태에서 정부의 진압을 옹호하고 기존 입장에 대해서 공개 자아비판한다면 총서기 자리를 다시 줄 수도 있다고 협상을 제의했지만 자오쯔양은 천안문 사건에 대한 덩샤오핑의 동란이란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덩샤오핑이 천윈이나 다른 보수파 원로들을 다 찍어누르고 자신을 복권시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거절함으로 자오쯔양의 정계 복귀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가택 연금 기간 동안 회고록을 구술했고, 삼엄한 감시하에 살고 있었으나,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손자의 장난감에 테이프를 숨겨 국외로 반출, 흐루쇼프처럼 국외에서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도 <국가의 죄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연금 상태 중인 2005년 1월 17일, 북경의 한 병원에서 호흡기 및 심혈관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없는 사람 취급은 아니라서 신화통신은 "자오쯔양 동지는 오랫동안 호흡기 계통과 심혈관 계통의 다양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최근 병세가 악화되어 긴급 치료를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어, 1월 17일 베이징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85세다."라고 짤막한 부고를 발표했다.

이후 오랫동안 장의 절차와 장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부부의 유골이 모두 집에서 보관되다가 마침내 2019년 10월에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의식을 거쳐 묘지에 안장됐다.# 2021년 4월에 유족들은 베이징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4. 평가

후야오방 등과 더불어 사실상 좌절된 중국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 중 한 명. 중국 당국은 그의 부음 기사를 통해 "2005년 1월 신화 통신을 통해 "당과 국민 사업에 유익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89년 정치적 풍파 속에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내린 이래 단 한 번도 자오쯔양을 공개 거론한 적이 없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는 이날 자오쯔양 관련 기사에서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10주기에 대해 그 어떤 평가도 내놓지 않았다"며 "침묵 역시 일종의 태도 표명"이라고 전했다.

중국이 이처럼 자오쯔양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그가 천안문 시위대에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덩샤오핑에 의해 쫓겨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국 공산당의 전현직 지도부는 자오쯔양에 대한 재평가나 섣부른 언급이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재평가 더 나아가서는 덩샤오핑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그 때문에 매장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될까봐 허락하지 않다가 2015년 4월 시진핑[7]이 매장을 허락했다. 화장된 유해는 베이징 교회의 한 묘원에 묻혔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무력 진압을 반대하고, 자유화를 촉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는다. 그래서인지 중국공산당에서 언급하기를 꺼리는 인물이지만,[8] 중국 반체제 인사들과 타이완중국국민당, 민진당 그리고 홍콩 민주파 인사들에게는 추앙받는 인물로 그가 죽은 이후부턴 추모제를 열고 묵념도 한다.

아직까지 중국공산당 내에서는 이렇다할 재평가는 없다. 중국 당국에 의해서 검열되고, 특히 중공 인사에 대해서는 당의 방침을 그대로 서술하는 바이두 백과에서도 자오쯔양의 항목에서는 서술 중심이며, 개혁 개방 전반기에 당과 인민에 공헌을 했다고 짤막된 평가가 나올 뿐("在改革开放前期,赵紫阳同志先后担任过中央和国家重要领导职务,为党和人民的事业作出过有益的贡献"[9]), 천안문 항쟁과 관련된 평가는 일체 없다.

하지만 유가족들과 그의 지지자들은 2010년대에도 복권 요구를 하고 있으며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오쯔양이 생전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과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복권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오쯔양이 주장했던 의회 민주주의가 시진핑의 일당 독재 행보와 맞지 않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시각도 있다.

참고로 후야오방은 당대 그리고 역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중에 가장 민주적이고 깨어있고 청렴했던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다만 그 역시 어린 시절 공산당에 참가해 대장정을 거쳤을 정도로 정통 공산주의자였고, 사회주의가 가장 진보한 정치체제라 여기며 공산당의 일당 집정이라는 원칙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각론에서는 더 많은 민주와 실질적 민주를 추구했고 결국 그런 것들을 '부르주아 자유화'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여긴 덩샤오핑의 불만을 샀다. 덩샤오핑은 '부르주아 자유화'를 '정신이 오염된 것'이라 보았고, '정신 오염 제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후야오방은 그런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후야오방이 실각하는 원인이 되었다.

자오쯔양 역시 경제 개혁뿐만 아니라 정치 개혁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총서기로 있으며 중앙위원을 뽑을 때 선거제가 도입되거나 당조와 대구부 폐지 등을 추진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실각했고 결국 그의 정치 제도 개혁 대부분이 좌초됐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자오쯔양 역시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하의 개혁을 추구했으나, 실각한 이후로는 사회주의가 인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서구 의회 민주주의가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제도이며 바람직하고 중국이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위키백과 영어판에서는 그를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중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만에서 전기가 출간되었다.#

5. 기타

딸은 광둥외어외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국방부외사국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예술품경매업체에서 일했다.

6.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무원 총리
파일:중국 국장.svg
2대 3대 4대
화궈펑 자오쯔양
(1980년 9월 10일 ~ 1987년 11월 24일)
리펑


[1] 중국 정부 내에서도 유혈 진압을 극구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베이징 주둔 38 집단군(한국군의 군단에 해당) 사령관인 쉬친셴 중장도 발포 명령을 거부해서 강등 후 5년형을 받았으며, 마지막까지 거주지 제한 조치에 처해진 상태로 별세했다.[2] 한국 공무원으로 치면 40대 중반에 차관급 직책을 맡은 것이다. 그렇지만, 광둥성이 푸젠성과 더불어 중국 경제성장의 핵심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미국캘리포니아 주지사급 자리를 맡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고속승진의 끝판왕이다.[3] 당시 조사원으로 참여했고 이후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을 역임하다가 천안문 사태 도중에 미국으로 망명한 천이쯔는 당시에 나온 숫자가 최소 4,300만, 최대 4,600만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3,000만명 대를 일반적으로 잡고 있던 학계에선 지나치게 높은 숫자라고 무시되었으나 재스퍼 베커는 이 숫자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이후 프랑크 디쾨터가 지방 문서고를 바탕으로 해당 숫자가 맞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디쾨터는 장제스를 옹호하고 중공체제에 대단히 비판적인 학자임을 감안해야 한다.[4] 심지어는 그가 실각할 때도, 그의 과오로 후야오방 장례식에 갔다가 바로 골프장으로 간 것도 거론되었다.[5] 사실상 자오쯔양의 정치적 배경인 광동에 못가게 하는 것이었다. 정작 산동성, 절강성 방문은 허락됐으나 복건성, 해남도 등 광동성 인근 지역은 거절되었다.[6] 이 때문에 "국내사건의 군개입에는 중앙군사위원회보다는 총리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친지웨이 국방장관이 사태 이후 연임하지 못하고 단임으로 끝났다.[7] 이쪽은 덩샤오핑의 개혁을 무위로 돌린 장본인이다. 그래서 자오쯔양의 유해를 매장하는 걸 허락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면도 있다. 마치 중국마오쩌둥주의공산당이 천안문 사태와 관련하여 덩샤오핑 등 당대의 강경파 공산당원들을 비판하는 것과도 비슷하다.[8] 이를 두고 기록말살형이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보자면 기록말살형은 아니다. 아래 당 방침을 그대로 전하는 바이두 백과에서 보면 자오쯔양을 동지(同志)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에서 당원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혁 개방 초기의 공헌은 인정한다. 하지만 천안문 항쟁의 역할에서는 당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북한식의 기록 말살형은 문화대혁명 시기에만 존재했고, 현재는 문혁 시기 마오쩌둥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소련으로 망명 도중 사망임표, 대장정 후 공산당을 배신하고 국민당에 귀순한 장국도, 심지어는 공산당의 숙적 장개석까지도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있다. 입맛에 벗어난 평가는 해외 사이트에서 볼 수 있으나 아무래도 중국인 입장에선 접근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9] 개혁개방 전, 조자양 동지는 당중앙과 국가의 중요 영도 직무를 맡았고, 당과 인민의 사업에 유의미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