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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0:15:29

사고전서

사고전서
四庫全書
파일:사고전서0.jpg

1. 개요2. 편찬 과정3. 편찬 목적4. 판본5. 사고전서의 수난사
5.1. 소실본 및 훼손5.2. 보존본 소장 현황
6. 사고전서 보완작업7. 한국과 사고전서8. 기타

1. 개요

사고전서 四庫全書

중국 역사에서 자료와 서적들을 모아서 만든 유서(類書)이며, 역사상 최대의 총서이며,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방대한 총서로 꼽힌다.

2. 편찬 과정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이뤄졌다.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는 책부원귀, 태평광기, 태평어람, 문원영화 등 대규모 유서 4종(이른바 송사대서)이 나오기도 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 영락제의 명령으로 방대한 영락대전이 편찬되었다.[1]

청나라도 이런 전통을 이어 강희제강희자전, 옹정제 때 고금도서집성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고금도서집성이 방대하긴 하나 전문을 다 싣지 않고 일부만 인용함에 아쉬움을 느끼고 아예 책과 자료의 전문을 통째로 싣는 총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이다.

건륭제는 즉위 초반인 1741년부터 이미 이런 구상을 시작해 서적과 자료의 수집을 시작했고 1772년에는 유서를 교정하고자 각 지방관에게 자료의 전문을 수집해 오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인 1773년에 모아진 자료와 서적에 해제를 붙이고 사고전서관을 설치한 후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1782년에 사고전서 전체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최종적으로 편찬완료된 사고전서는 전체를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가지 분류형태(사부,四部,)로 분류되어 3503부 7만 9377권[2]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 되었다. 이것을 편찬하는 데 동원된 학자들만 해도 무려 1만 4백여 명에 달했으며 필사에 동원된 인원은 4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력동원 규모면에서도 엄청났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 정도의 전문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저작물을 완성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3. 편찬 목적

편찬목적은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국가차원에서 소실되거나 실전될 우려가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모아서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사고전서는 중국역사상 수많은 문헌들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사고전서의 편찬이 청대 학문을 융성케 하는 데에는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소위 문자의 옥으로 불리는 강희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의 광범위한 사상탄압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사상 전개와 교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건륭제는 귀중한 자료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분량의 서적들을 수집하게 했으며 이 서적들 중 반청주의적이거나 청나라를 비판할 소지가 있다고 여겨진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하여 곧바로 소각처리하였다.

근본적인 원인은 청나라라는 국가가 만주족, 즉 이민족의 중원 통일로 성립된 국가라는 점에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이민족의 지배란 수치스러웠고, 당연히 한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집단적인 반발은 당연히 청 왕조에게는 심각한 국가적 위협이었고, 놔두지 못할 일이었다. 반(反)만주족 사상과 기운을 탄압하기 위해 사고전서 편찬 과정에서 목판 2800여 종이 파괴되고 책 수만 권이 소각처리되었으며 책 400여 종은 문구를 부분수정하거나 전면수정했다.

4. 판본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사고전서는 귀중한 문헌인 만큼 보존을 위해 정본 7부와 부본 1부로 총 8부를 만들었다.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처럼 정본 7부는 중국 각지에 분산 소장되었다.

보관을 위해 따로 서고를 만들었는데 뛰어난 서고로 유명했던 닝보의 천일각을 본따 서고를 만들고 운영했으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서고 앞에 인공 연못을 축조하고 서고 뒤편에는 보호를 위한 인공산까지 축조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5. 사고전서의 수난사

이런 사고전서는 격동의 중국사 가운데서 이런저런 수난을 당했다.

5.1. 소실본 및 훼손

5.2. 보존본 소장 현황

6. 사고전서 보완작업

청 왕조에 대하여 비판적 또는 위협적인 서적으로 분류되어 의도적으로 왜곡·파기되거나 편찬과정 당시 수집이 누락된 서적들이 많으므로 사고전서를 보완하고자 하는 총서 발간 작업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통일적인 계획에 의한 작업이 아니고 중국 및 대만의 여러 출판사에 의해 기획·출판되었으므로 중복되는 서적도 많다. 사부총간과 같이 더 나은 선본(善本)을 찾아 영인(影印) 출판하거나, 사부비요와 같이 취진방송체(聚珍倣宋体)로 재편집하여 출판한 경우도 있다.

7. 한국과 사고전서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의 조선은 학구열이 엄청났던 정조 치세였다. 정조는 사고전서를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애를 썼다. 이에 정조 치세 후반기부터는 매년 청나라에 보내는 사신들마다 특명이 사고전서를 들여오는 것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분량이 너무 방대한데다가[4] 7부 밖에 인쇄하지 않아서 조선이 이를 들어오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들여오려고 애썼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형수(1749-1824)나 유득공(1748-1802)의 기록들에서 정조가 사고전서를 얼마나 들여오고자 노력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서형수의 문집에 의하면 서형수가 179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조는 서형수에게 주자서와 더불어 사고전서의 구입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서형수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으나 사고전서는 들여오지 못했다. 정조의 사망 직후인 1801년에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득공은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에 깊게 관여한 학자 기윤[5]을 만나서 주자서 구입에 대해 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기윤을 통해서 사고전서의 구입을 타진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끝내 사고전서의 도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고금도서집성을 얻는 데 성공해 규장각에 비치하는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게된 시점은 1980년대 대만에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본의 영인본을 내놓으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한국학계에서도 사고전서는 매우 중요하다. 방대한 중국의 문헌 가운데서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퍼즐들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워낙 내용이 방대한 탓에 한국에선 아직도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

정조와 당대 지식인들이 사고전서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사고전서 내에 조선 학자들의 문집이 수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179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윤을 만난 서호수는 사고전서에 화담 서경덕의 화담집이 수록되었다는 보고를 정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기로는 화담집은 수록되지 않았다. 단지 사고전서총목이나 천경당서목에 서경덕의 화담집에 대한 해제와 인용이 나와 있는 걸로 보면 수록후보에는 올랐다가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6] 서경덕 외에도 고려의 김구용, 조선의 권근, 정인지, 서거정, 이이, 임백령, 신광한 등에 대한 소개나 문집의 해제가 나와있기도 하다.

사고전서에는 한국인이 저술한 서적은 수록되지 못했으나, 대신 한국에 관련된 자료나, 서적들은 꽤 흥미로운 것들이 있다. 고려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온 서긍이 집필한 고려도경이 수록되었으며,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대까지의 역사를 집필한 조선사략도 수록되었는데 비교적 고려말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또한 작자를 알 수 없고, 단지 명나라 때 어떤 사람이 집필한 듯 보이는 조선지라는 책도 수록되었는데 조선의 풍속, 지리, 제도 등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고조선부터 근세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 관련 자료가 많아 사료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는 고대사학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으나 전산화조차 버거울 정도로 너무 방대하다.

8. 기타

중국이 아닌 외국인의 저술도 의외로 여럿 들어있다. 서광계가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7][8]이 사고전서에 들어 있으며,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Aleni, 중국명 애유략,艾儒略 1582∼1649)의 인문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9]라는 서적이 들어 있을 정도. 건륭제는 천주교가 유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취지로 전례 문제 이래 천주교 포교를 금한 강희, 옹정 황제들의 유훈을 이어가면서도 북경에 상주하며 자금성을 드나드는 최측근 천주교 선교사들을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이들이 불법적으로 천주교를 전파하는 소소한 비리(?)에 대해서도 황제의 은혜로 후하게 덮어줬는데, 그 덕인지 사고전서 프로젝트에서 이들의 저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10],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사고전서존목총서(四庫全書存目叢書)와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에,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중국명 남회인,南懷仁,,,)의 《교요서론(敎要序論)》 은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에 편입되어 있다.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 해제(解題)까지 작성되어 사고전서에 수록된 것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한다.]


[1] 영락대전은 정본과 부본 2부가 있었는데 정본은 명 멸망기에 유실되었고 부본은 청대에도 남아 사고전서 편찬에 활용되었지만, 제2차 아편전쟁 때 상당량이 산일되어 지금은 일부분만 남아 있다. 그나마 남은 부분인 『참적(站赤)』에 마르코 폴로원나라를 떠나 일한국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고 기록된 세 명의 일한국 사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원나라에 갔다는 근거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2] 권 : 현재의 장/챕터. 한 권이 다수의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3]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출판[4] 뒤에서 설명하듯, 현대에 들어와서조차도 전산화가 버거울 정도의 무지막지한 분량을 자랑한다. 당대에 조선이 이를 들여오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5] 본명은 기윤이나 자인 효람을 붙여 기효람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30대 초반에 진사가 되어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건륭제는 그를 국사에 능한 명신이라기보다는 그냥 공부 잘하고 글 맛깔나게 잘 쓰는 너드로만 여겼다고 하며, 그래서 건륭 연간은 물론 가경 연간에도 고위 관료로 등용되면서도 군기처 등 요직에는 진출하지 못했다.[6] 조선시대 서경덕의 《화담집》이 집부(集部)의 별집존목(別集存目)에 수록되었다. 즉 내용은 싣지 않고, 해제만 기록해 놓은 셈이다.[7] 이 책은 로마의 예수회 대학 콜레지오 로마노의 교수 클라비우스가 쓴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의 주해서 『Euclidis Elementorum libri XV』(전15권) 중 전반부 여섯 권을 한문으로 번역한 책으로, 마테오 리치가 구술하고 서광계(徐光啓)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자부(子部) 천문연산법류(天文演算法類) 산서지속(算書之屬)[9] 사부(史部) 지리류(地理類) 외기지속(外紀之屬)[10] 천주교 서적이라 사고전서에 실리지 못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