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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의 전경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페트라 |
영어 | Petra | |
아랍어 | البتراء | |
프랑스어 | Petra | |
국가·위치 | 요르단 마안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5년 | |
등재기준 | (i)[1], (iii)[2], (vi)[3] | |
지정번호 | 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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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트라(Petra, '바위') 또는 알바트라(البتراء, Al-Batrā)는 요르단 서남부에 존재한 고대 도시 혹은 해당 고대 도시의 유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산악 도시로 붉은 사암(沙岩) 산을 깎고 내부를 파서 그대로 건축물을 만들었기에 동굴과 흡사한 특이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외관도 부조처럼 정밀하게 조각하여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이명은 장미의 도시인데 붉은 장밋빛 사암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페트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고전 그리스어)로 '바위'(Πέτρα)라는 뜻[4]으로, 원래 나바테아인들이 불렀던 도시 이름은 레켐(Rekem)이었지만 로마 제국의 정복 이후 그리스인들이 붙인 페트라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면서 오늘날에도 페트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요르단에서 쓰이는 아랍어(현대 표준 아랍어)로는 P 발음과 E 발음이 없고 앞에 정관사 '알'이 붙어 '알바트라'(البتراء, Al-Batrā)가 된다.
대중적으로는 위 사진에 등장하는 '알카즈네'(الخزنة, '보물')가 페트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유명한 탓에 위 건물 하나만 페트라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해당 지역에 존재하는 몇 가지의 유적군을 가리킨다.
나바테아인들의 영역은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에도 걸쳐 있었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알 울라에 소재한 마다인 살레 유적과 같은 나바테아인들이 남긴 페트라와 유사한 양식의 유적군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폐쇄적인 관광 정책 등의 이유로 페트라에 비해 인지도가 훨씬 떨어진다.
2. 역사
2.1. 고대의 전성기
엄청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기원전 7000년 즈음에 이미 농부들이 페트라 북부 인근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고 기원전 1400년 경부터 도시가 세워졌다. 페트라는 주위를 둘러싼 산악 지형 덕에 물을 저장하는 게 용이했다. 그 덕분에 사막 지방의 오아시스 도시로서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의 교차점 역할을 맡아 중개무역과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등으로 번영을 누렸다.특히 페트라를 현대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놓 은 사람들은 유목민 출신인 나바테아인들이다. 원래 나바테아인들은 무리지어 아라비아 사막을 돌아다니는 유목민 부족에 불과했는데 여기에 정착해서 화려한 도시를 세웠다.
전성기에는 극장, 목욕탕, 상수도 시설까지 갖춘 당대 최첨단을 달리던 도시였고 기독교 성경에는 구약 출애굽기(탈출기)에서 모세가 여길 통과해 가나안으로 나갔다는 기록도 있다.[5] 페트라는 아랍-시리아 지방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한 대도시였다. 하지만 이렇게 번성했던 페트라도 로마 제국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좁은 협곡을 무기삼아 로마군에게 몇 번이나 저항하였으나 로마군이 수도관을 부수는 결정타를 가하면서 기원전 63년에 항복했다.
기원전 9년 ~ 40년에 나바테아 왕으로 재위했던 아레타스 4세는 갈릴리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의 장인이었는데 헤로데 안티파스가 자신의 딸을 버리고 제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이에 분노해 갈릴리를 침공했다가 로마의 중재로 물러나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다마스쿠스에서 개심하고 예수에 대해 전파하자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의 의뢰를 받고 부하를 보내 바울로를 잡으려고 하기도 했다.[6] 특히 페트라 유적의 대표인 알 카즈네가 바로 아레타스 4세의 영묘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 속주 시절의 페트라 복원도 |
페트라가 망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로마 제국이 동방의 사산 왕조와 시시건건 충돌하면서 페트라 일대가 황폐화된 탓이 컸다. 게다가 팔미라라는 강력한 경쟁 도시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상인들이 죄다 페트라를 버리고 팔미라 쪽 교역로로 가버렸다. 그나마 나바테아인들의 종교 중심지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기존의 성세에 비하면 훨씬 쇠락한 모습이었다.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된 이후에도 페트라는 갈수록 망해 갔다. 363년에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크게 파괴됐고 500년대에 또 지진이 나는 바람에 폐허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6세기까지는 사람이 그래도 꽤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6세기 이후 주교좌마저도 아레오폴리스로 옮겨가 버리면서 사람들한테 잊힌 도시가 되어 버렸다. 오죽 인지도가 없어졌으면 이슬람 정복자들이 인근 일대를 정복하는 와중에 남긴 기록에도 아무 언급이 없을 정도다. 그나마 십자군들이 페트라 근처에 요새를 세우긴 했는데 그마저도 얼마 못 가 쫒겨났고 바이바르스가 호기심에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 들를 정도로 도시가 아니라 유적 폐허에 가까워졌다.
2.2. 재발견과 발굴
당시 모습[8] |
당시 유럽인들은 그림으로 그려진 이 모습에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존 상태가 엄청나게 좋기 때문이라서 이게 2천년이 넘었다는 걸 못 믿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보존 상태가 좋은 건 주변에 험난한 산들이 바람과 온갖 기후를 막아준 것도 컸고 여길 차지한 무슬림들도 정작 사람 얼굴 같은 것만 우상화를 막는다고 부수고 다른 건 건드리지 않았기에 상태가 매우 좋은 채로 보존되었다. 더불어 사람이 살기에는 꽤 불편한 곳이라서 여기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 어려운 점도 한몫을 했다. 그렇다고 아예 사람이 살지 않은 건 아니라서 베두인들이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가고 있긴 했다.
현재도 이 건물들 중 일부는 가이드 및 낙타나 말을 태워주는 일이 직업인 베두인들이 집으로 쓰고 있다. 유적지 보호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나 500명이 넘는 이들이 대대로 아득한 옛날부터 살아와 이들은 요르단 정부의 허락을 맡고 특별히 거주가 허락되는데 이들을 무턱대고 내쫓았다가는 당연히 반발하기 때문이다. 대신 건물 내부는 개조나 리모델링이 엄격하게 금지되기 때문에 이들이 사는 집은 아득한 옛날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창문이나 문에 한정하여 새롭게 바꾸는 것이 인정된다고 한다. 당연히 건물을 빌려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집을 팔 순 없다.
이렇게 화려하고 독특한 외양 덕분에 요르단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로 꼽히며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더불어 2007년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에도 올랐는데 아랍 여러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많이 지지했다고 한다.
아직도 모래와 온갖 흙 속에 파묻혀진 건물은 엄청나며 1926년에 발굴, 복원하여 100년이 되어가지만 고작 20%도 발굴이 안 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에도 고대 로마와 같은 모자이크 그림이 세세하게 남은 건물이 발굴되었다. 아랍과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동을 거친 무역로로서 중요한 거점이며 물이 풍부하고 큰 도시문명인지라 엄청난 무역 중간지로 전성기를 누렸기에 곳곳에 발굴된 건물을 봐도 집, 극장, 온갖 숙박 시설, 신전, 학교 등으로 파악된 건물이 엄청 많다. 이 곳은 인구가 적게는 2만 이상, 많게는 5만 이상이 산 곳으로 추정되는데 발굴할 때마다 나온 건물들의 규모를 보면 5만 이상이 전성기 때 살아갔으리라 추측된다. 사막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크고 넓은 도시였다.
2000년대 초반에는 알 카즈네 지하를 발굴하니 50대 이상 나이로 죽은 현지인 무덤까지 발견되었으며 온갖 유품과 여러 장식까지 발굴되었다. 더불어 곳곳에 없어졌다고 알려진 온갖 건물 외부에 새긴 얼굴도 연이어 땅 속에 묻혀진 게 발굴되었다. 2007년에 정수일 교수가 KBS 1TV 취재로 가 본 적도 있다.
이렇듯 요르단의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기실 요르단은 다른 고대 로마풍 유적지 제라쉬를 비롯하여 온갖 고대 유적지도 꽤 많은 국가라서 페트라만 보고 가면 아쉽다. 덤으로 튀르키예, 이스라엘과 더불어 고대 기독교 유적지들이 엄청나게 넘치는 곳이라 성지순례하러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기독교도 관광객이 많다.
3. 상세
3.1. 알 카즈네
'알 카즈네'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보물'을 의미한다. 아마 유적 2층에 깎아 놓은 사암 항아리 조각 장식을 보고 보물창고인 것으로 착각하고 이런 이름을 붙인 걸로 추정된다. 의외로 '알 카즈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19세기 초 정도다.
보물창고라는 오해를 샀던 탓에 가장 도굴꾼들이 왔다갔다한 건물이기도 하다. 특히 모세를 뒤쫒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홍해에서 큰 타격을 입은 뒤 임시로 마법을 부려 이 건물을 만들고 나중에 찾아가기 위해 그 안에 보물들을 쟁여 놨다는 소문이 퍼져 버렸다. 그래서 이 곳을 '카즈네 엘 파로운', 즉 파라오의 보물창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입구 2층 기단에 조각된 석조 항아리 안에 보물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베두인 도굴꾼들이 아예 항아리 장식들을 작살내기까지 했다.
파사드의 크기는 폭 24.9m, 높이 38.77m에 달한다. 원래 파사드에 있는 왼쪽에서 3번째 기둥은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되어 상당 부분이 사라졌는데 요르단 정부에서 1960년대에 복원했다.
정교한 외부 장식과 조각으로 유명하다. 알 카즈네는 하나의 거대한 사암 절벽을 통째로 깎아만든 유적인데 곳곳에 사후세계와 관련된 인물들의 조각 장식이 새겨져 있다. 맨 위에는 영혼을 인도하는 독수리 4마리, 그 아래에는 도끼를 들고 춤추는 아마존 여전사들이 새겨져 있다. 입구 양 옆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형상이 새겨졌다. 신화 속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사후 신이 되어 승천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무덤 주인도 그들처럼 죽어서 하늘로 승천하기를 바랐던 나바테아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알 카즈네의 단면도 |
알 카즈네의 내부 모습 |
3.2. 앗 데이르
앗 데이르의 외양과 내부 메인 챔버 |
폭 50m, 높이 45m 정도 되는 상당히 큼직한 건물로[11], 알 카즈네처럼 전형적인 나바테아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물이다. 알 카즈네와 생긴게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알 카즈네처럼 건물의 2층에는 부서진 페디먼트들이 3개 연달아 깎여 있고 맨 위에는 거대한 항아리가 조각되어 있다. 다만 그 조각품의 질이 아무래도 알 카즈네에 비해서는 한 수 뒤떨어지고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앗 데이르는 영묘나 무덤이 아니라 나바테아 국왕 오보다스 1세를 위한 기념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앞에는 군중들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광장이 있다. 원래는 열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금은 죄다 부서졌다고 한다.
알 카즈네처럼 여기도 내부 공간이 특별히 화려하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메인 챔버는 11.5m X 10m 크기로 꽤나 거대하며 창문이 없어서 8m 높이의 거대한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 만이 유일한 광원이다. 1217년 경에는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 이 곳에 살기도 했다. 벽면에는 거대한 벽감 하나가 파여 있는데 아마 종교제례용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벽 측면에는 2개의 벤치가 놓여 있다.
페트라 분지에서 앗 데이르로 가려면 무려 800개에 달하는 꼬불꼬불하고 좁은 계단을 따라 40분 동안이나 헥헥대며 올라가야 해서, 이 곳을 한 번 방문하고 나면 체력 소모가 크다.
3.3. 대신전
대신전은 북동 - 남서쪽을 잇는 축을 따라 정렬된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의 단지다. 페트라의 열주 거리 남쪽 끝에 위치해있는데 열주 거리에서 17m 너비 계단을 약 8m 정도 올라가면 '프로필라에움'이 나온다. 프로필라에움에서 6m 정도 계단을 올라가면 하부 기단[12]으로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2m 더 올라가면 상부 기단이 나온다. 이 상부 기단에 거대한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하부 기단과 상부 기단을 연결하는 거대한 계단의 동쪽과 서쪽에는 2개의 반원형 엑세드라[13]가 놓여 있다. 상부 기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대신전 건물 자체는 페트라의 붉은 사암과 대조를 주기 위해 붉은색, 노란색, 흰색의 색색가지 기둥들로 지었다. 대신전 정면의 파사드에는 20m 높이의 거대한 기둥 4개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대신전 내부에는 600석 규모의 반원형 석조 좌석들이 깔려 있었고 금박과 유색 치장벽토로 치장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아예 돌무더기에 불과했지만 1900년대부터 서서히 발굴이 이뤄졌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볼만한 유물들 중에는 코끼리 머리가 장식된 기둥 주두가 있으며 아폴론, 아레스, 아프로디테 같은 고대 그리스 신들을 조각한 석회암 판넬, 램프, 동전, 유리, 세라믹 조각상 등 자잘한 유물들도 몇 점 출토됐다. 특히 단검을 든 채로 숭배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물의 형상을 벽에다가 얕은 부조로 새겨 놓은 게 발견됐는데 이걸 보고 이 곳이 아마 숭배 의식을 치르던 대신전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것이다.
3.4. 날개 달린 사자들의 신전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져서 돌기둥 몇 개 있는 폐허에 불과하지만 전성기에는 꽤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사원의 입구는 길이 85m에 이르는 거대한 이중 열주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9.5m에 달하던 현관 양쪽에는 거대한 기둥 2개가 버티고 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 어둡고 좁은 방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원 남서쪽에는 미술작업장, 금속 세공장, 곡물 가공소 같은 실무적인 작업소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쪽에는 신전에 물을 공급하는 거대한 배수로가 있었다.
'날개 달린 사자들의 신전'이라는 이름은 유적에서 날개 달린 사자 형상의 기둥 주두 장식들이 발견됐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3.5. 카스르 알 빈트
아랍인들이 이 건물을 부르는 풀네임은 '카스르 알 빈트 피라운'인데 그 뜻은 '파라오의 딸의 궁전'이다. 토착 설화에 따르면 파라오에게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혼기가 차자 전국에서 구혼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공주는 자신의 궁전에 물을 공급하는데 성공한 남자를 제 신랑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인근의 언덕에서 물을 끌어온 2명 빼고 다 실패했다. 공주는 물 공급에 성공한 2명의 구혼자들 중 자신의 성공을 알라에게 돌린 더 겸손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카스르 알 빈트가 정확히 어떤 신을 숭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북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설계된 신전들은 보통 나바테아의 전통신 '두샤라'를 섬기던 신전들이었는데 카스르 알 빈트 역시 북향으로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아마 두샤라를 섬기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이 정설이긴 하지만 신전 내부의 제단에 그리스어가 쓰여있는 걸 감안하면 두샤라뿐만 아니라 제우스나 아프로디테 같은 그리스 신들도 섬겼을 가능성도 있다.
카스르 알 빈트는 마름돌로 쌓은 기단 위에 지어졌다.[14] 정사각형 모양의 대신전 본관 자체도 마름돌로 지었다. 27개의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전은 크게 현관, 대기실, 신방 이렇게 3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현관은 코린토스식 기둥 4개로 장식되어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고 주두만이 남아있다. 내부에는 금박과 레바논산 삼나무, 회반죽 따위로 장식했다고 한다.
3.6. 아론의 무덤
토라에는 아론이 죽자 호르 산에 장사지냈다고 적혀 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호르 산이 페트라 근처에 있는 산 '제벨 하룬'[15]이라고 여기고 성스러운 곳으로 숭배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도들도 유대인들의 해석을 받아들여 여기를 아론의 무덤으로 믿고 고대부터 순례했다. 현지 무슬림들도 여기가 아론이 매장된 장소가 맞다고 여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시나이 반도 다른 곳에 아론의 무덤이 있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정설은 아론의 무덤이 여기가 맞다는 쪽이다.
아론의 무덤은 페트라 인근에서도 가장 높은 해발 1,3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 지어진 건물은 14세기 맘루크 왕조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다. 영묘 자체는 방 하나짜리 작은 건물에 조그마한 안뜰이 딸려 있고 영묘 위에는 작은 흰색 돔이 올라갔다. 영묘의 현관 위에는 건물이 마지막으로 개축된 연도, 1320년이 적혀있다.
영묘 내부에는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라브와 아론의 무덤이 있다. 무덤 위는 일부러 초록색 천으로 덮어 놨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성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 요르단 정부는 이 곳을 모스크로 지정해 놨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유대인들의 기도와 예배가 금지된다. 2019년 8월에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토라를 들고 이 곳에서 춤을 추는 영상을 찍어 공유하자 격분한 요르단 정부가 영상을 내리고 카메라와 토라 경전 따위를 압수했을 정도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요르단 정부는 아론의 무덤에 가기 위해서는 한동안 방문 허가를 받도록 강제하기까지 했는데 제한 조치가 오래 가지는 않았고 그해 12월에 허가 없이도 갈 수 없는 걸로 다시 바뀌었다.
3.7. 기타 건축물
극장 | 정원 |
한때 페트라 시내 중심부에는 물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정원과 수영장이 있었다. 페트라가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도시라는 걸 생각하면 여기까지 물을 끌어오는 데 성공한 당시 나바테아인들의 수로 기술력을 짐작 가능하다.
이 정원은 65m X 85m 짜리의 거대한 테라스 위에 지어졌다. 정원 내부에는 작은 산책로와 개울들이 있었고 16m 짜리 암벽을 깎아 이를 따라 물이 계단식으로 철철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정원 뒤쪽에는 43m X 23m, 깊이 2.5m짜리 규모의 상당히 큰 수영장이 하나 있었다. 무려 2000입방미터 이상의 물을 담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수영장 중앙에는 사암 받침대가 하나 있어 그 위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정자는 진붉은색, 주황색, 밝은 푸른색 등으로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 비잔틴 교회 |
동로마 제국 시절에 지어진 교회들이 여럿 존재하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건 바로 '비잔틴 교회'다. 5세기 후반에 건설되어 7세기 초에 화재로 전소하기 전까지 쭉 페트라의 종교 중심지이자 정교회 성당으로 사용됐다. 한때는 페트라 주교좌가 여기 있었을 정도로 중요했던 성당이다. 특히 정교한 모자이크 바닥화로 유명하다. 게다가 동로마 시절 페트라의 생활상을 담은 140여 개의 파피루스들이 발견돼서 더 유명해졌다.
이 외에도 페트라에는 여러 개의 교회 건물들이 남아있는데 하나는 '붉은 교회'라고도 불리는 산등성이 교회고 나머지 하나는 '블루 채플'이다. 산등성이 교회는 페트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로 3세기 경에 페트라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세워졌다. '블루 채플'은 4개의 아름다운 이집트산 푸른색 화강암 기둥들이 남아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5~6세기 쯤에 지어졌고 고대 나바테아와 동로마 정교의 절묘한 융합을 상징하는 건물로 꼽힌다.
도로테오스의 집 | 열주 거리 |
이 열주 거리는 페트라의 최고 시가지이자 북적거리는 장소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세종대로 같은 곳이었던 셈이다. 양 옆에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당연히 모두 사라졌다. 기원전 106년에 폭 6m로 널찍하게 재건됐고 그 이래로 페트라의 가장 중심 도로로 기능했다. 양 옆에 기둥 열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서 '열주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3.8. 페트라 왕릉
3.8.1. 궁전 무덤
궁전 무덤의 외양과 내부 묘실 |
왕릉의 전면부, 즉 파사드는 3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폭 49m, 높이 46m의 거대한 절벽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는데 개중 가장 높은 3층의 왼쪽 상부는 절벽 높이를 넘어가기 때문에 그쪽은 바위를 판 게 아니라 아예 기둥을 세우고 따로 축조를 해놨다. '궁전 무덤'에는 4개의 입구가 뚫려 있는데 이를 통해서 각각 다른 묘실들로 들어갈 수 있다. 4개의 입구 중에 중간 쪽에 있는 2개의 입구가 훨씬 폭이 넓어서 아마 이 쪽이 왕과 왕후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된다.
무덤 파사드의 2층에는 18개의 기둥들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2층의 기둥들은 1층의 기둥들에 새겨져 있는 그런 장식들이 없어서 훨씬 단순한 모습이다. 기둥들 사이에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직사각형의 벽감이 뚫려 있는데 아마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무덤 파사드의 3층은 절벽에 파놓았다기보다는 그 위로 확장해서 세워놓은 부분이 더 많아서 대부분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자연히 무너져 파괴됐다.
무덤 내부의 묘실들은 모두 모습이 다르다. 묘실의 벽면에는 바위의 자연적인 패턴을 따라 벽감이 파여있다. 벽감에는 쌍쌍의 기둥들이 양 옆에 장식되어 있거나 단순하게 선으로 테두리만 그어서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도 묘실 간에 이동할 수 있는 통로들이 있어서 4개의 묘실들이 모두 연결된 구조라고 한다.
3.8.2. 항아리 무덤
항아리 무덤의 외양과 내부 묘실 |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도를 박해할 때 페트라의 기독교도들이 로마 신들을 섬기기를 거부해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아 아마 이전부터 페트라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 343년에는 페트라에 독자적인 주교구가 설치되어 주교 공의회에 참석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페트라는 이 일대의 기독교 중심지였다. 447년에 한 주교가 항아리 무덤 바닥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제단을 세우고 성당으로 개조해 써먹었다.
무덤 내부에는 3개의 거대한 후진이 벽감처럼 파여 있는데 이건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성당으로 개조할 때 기독교도들이 새로 판 것이다. 내부의 거대한 대형 홀의 면적은 18.5m X 17m다. 그 엄청난 규모를 생각해 보면 여기는 확실히 왕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기한 점은 춘분, 하지, 추분, 동지의 일몰 때 석양빛이 정확하게 무덤 내벽 정중앙까지 들어와 내부를 비춘다는 점이다.
무덤 앞쪽에는 양쪽에 열주들이 늘어선 깊은 안뜰이 있다. 안뜰 양쪽에는 안쪽으로 파인 채 기둥으로 장식된 입구들이 있어서 그 안으로 따로 들어갈 수도 있다. 열주가 조각된 측벽 위에는 5개의 벽감들이 파여 있는데 아마 신하나 귀족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3.8.3. 기타 무덤들
실크 무덤 | 코린토스 무덤 |
'실크 무덤'은 무덤 파사드가 새겨진 암벽의 아름다운 무늬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마치 비단 휘장이 드리워진 것처럼 아름답고 다양한 색상의 암석줄무늬가 있어서 '실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외관에 분홍색, 흰색, 그리고 노란색 등 다양한 줄무늬들이 층층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심하게 훼손당한 비운의 무덤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아름다운 암석 줄무늬도 원래 가리고 있던 파사드 부분이 다 닳아 없어지면서 외부로 노출된 것이다.
코린토스 무덤도 실크 무덤 못지않게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데 안타깝게도 페트라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무덤들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서기 50년 즈음 말리코스 2세 재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디자인은 알 카즈네와 거의 비슷해서 알 카즈네의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온 게 아닌가 싶은 수준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세로 비율이 작아서 알 카즈네에 비해 미적인 감각은 떨어진다. '코린토스'라는 이름은 파사드에 새겨진 기둥이 코린토스 양식이어서 붙었다.
로마 병사의 무덤 | 오벨리스크 무덤 |
오벨리스크 무덤이라는 이름은 맨 꼭대기에 있는 4개의 오벨리스크에서 따 왔다. 이집트, 그리스, 인도, 나바테아 건축 양식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는 모습이다.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되었고 당시에는 5명의 사람들이 묻혔다. 정면의 폭은 15.98m, 높이는 12.3m로 상당히 크다. 페트라에서도 몇 안 되는 다층 무덤들 중 하나다. 1층은 도리아식 기둥들이 새겨진 파사드다. 1층 내부에는 무덤 순례객들을 위한 대기실과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돌을 깎아만든 3개의 벤치가 있다. 외부의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으로 갈 수 있는데 2층 안에는 유골함이 안치되어 있던 벽감들이 파여 있다.
이 외에도 무덤들은 넘쳐난다. 페트라의 로마 총독이자 페트라에 묻히길 원했던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의 무덤[16], 큰 내부 홀을 가지고 있는 '투르카마니야 무덤', 페트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이자 여러 왕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네크로폴리스', 나바테아의 재상을 위해 지어진 작은 무덤 '운에이슈 무덤', 마치 르네상스 건축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르네상스 무덤', 베두인들이 잠시 들어와 살았던 '알-하비스 무덤' 등 페트라 곳곳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널려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사실 여기가 진짜 유명한 이유는 1989년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편인 '최후의 성전'의 촬영지로 쓰였기 때문이다. 작중에서는 성배가 보관된 성전으로 등장해서 마지막 장면의 무대가 되었다. 여기서 존스 부자와 마커스 교수가 말을 타고 협곡에서 빠져나와 석양을 향해 달려가는 매우 인상 깊은 라스트 신을 연출했다.[17]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당시 국왕인 후세인 1세가 촬영에 엄청나게 협조했다고 회고했다. 스필버그가 유대인인지라 행여나 이슬람 과격파가 테러할까 봐 군대를 동원하여 호위까지 해 주었고 심지어 베두인 출신으로 기마술이 뛰어난 군인들을 스턴트맨으로 지원까지 해 주었을 정도다. 그렇게 촬영된 알 카즈네 장면을 보고 왕이 부탁하기를..."알 카즈네 부분을 재촬영해 줄 순 없겠소?"
워낙 크게 도움받았던 터라 스필버그는 이 부분을 여러 버전으로 재촬영하였고 결국 왕이 개봉판 라스트 신을 보고 매우 만족해하면서 기뻐했으며 촬영이 끝나자 왕이 제작진들에게 최고급 만찬까지 크게 베풀었다고 한다.
주변 기념품 가게에선 인디아나 존스 관련 기념품들도 판다. 더불어 지금까지도 요르단 티브이로 이 영화가 한 달에 한 번은 꼭 방영된다. 영화 덕에 관광객들이 넘처나게 됐으니 요르단 입장에선 정말 고마울 듯하다.
더불어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나 낙타나 마차를 모는 사람들은 대대로 여기 주변에서 살던 유목민들, 즉 베두인들이다. 영화 개봉 이후 유명해지면서 관광지로 개발되자 요르단 정부는 여길 국영화하는 대신 그곳에서 대대로 살던 유목민들에게 장사할 권리를 주었다.
4.2. 그 외 대중매체
-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도 등장하였다. 여기에서는 고대 프라임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매트릭스를 감춰둔 곳으로 등장한다. 매트릭스의 힘으로 샘 윗위키와 옵티머스 프라임을 되살리게 되니 완전히 인디아나 존스의 패러디다.[18] 여기서도 나온 탓에 이젠 인디아나 존스 3 말고도 여기 지역 티브이에선 이 영화도 자주 방영해 준다.
- 미생(드라마)의 마지막회에서도 등장한다. 오상식(이성민)과 장그래(임시완)가 페트라의 알 카즈네 앞에서 재회했다. 원작인 미생(웹툰) 후기2를 보면 윤태호 작가가 고증하고자 방문했다.
- 웹소설 도시야월기담 Chapter. 4의 주요 무대로도 나온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5와 문명 6에서 게임상에서 딱 하나만 지을 수 있는 세계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특히 문명 5의 페트라는 사막 조건만 맞으면 압도적으로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불가사의로 꼽힌다.
- 몬타나 존스 24화에서도 등장한다.
5. 페트라 여행 팁
별빛 아래 촛불이 밝혀진 페트라 |
페트라 매표소와 관광 안내소가 있는 곳 주변에 모벤픽 리조트를 비롯한 호텔들과 식당이 있으며 페트라 내부에도 레스토랑과 간단한 식료품을 파는 곳들이 있으나 차로 10분 거리 정도에 있는 와디 무사의 호텔과 식당들보다 너무 비싸거나 평가가 좋지 못해서 일반적으로 여행객들은 와디 무사에서 묵으면서 물이나 간단한 간식거리 같은 여행 준비물을 사 간다. 요르단 국가 차원에서 열성을 다하는 관광산업에서 정점을 찍는 곳이 페트라이며 여행객들도 그만큼 몰려오는 곳이므로 와디 무사의 숙소는 풍부하고 은행이나 웨스턴 유니온 같은 편의 시설도 그럭저럭 갖춰져 있다.
와디 무사에서 페트라 입구까지는 1디나르 내외의 돈을 내고 택시를 타거나 숙소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페트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므로 걸어서 갈 수도 있으나 도로 상태가 걷기 썩 좋지 않으며 페트라는 체력이 많이 요구되는 여행지란 점에서 비추천이다.
페트라는 세계에서도 입장료가 비싼 여행지 중 하나다. 현재 1일권이 50 요르단 디나르로 약 85,000원이고 숙박업과 같은 여행 산업을 진흥하게 하고자 2일권 55JD=약 95,000원, 3일권 60JD=100,500원으로 오래 있을수록 싸지긴 하지만 3일권을 산다고 해도 하루치 입장료가 30,000원이 넘는다. 유적 보호라는 명분은 좋지만 일반 관광객에게는 그야말로 폭리다. 학생 할인 따위는 없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이스라엘 여행사들이 페트라만 당일치기로 방문하고 다시 출국하는 투어를 제공하고 관광객들이 이를 절찬리에 이용해 버린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관광지로 페트라가 소개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때마다 요르단 행정부와 사람들은 불같이 화냈다. 당시에는 훨씬 싼 값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묶어서 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론리 플래닛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자치 행정부 편에서는 엄연한 요르단 여행지인 페트라를 소개하곤 했지만 자국 관광산업에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요르단 당국은 당일치기 관광객들에게는 입장료로 90JD(한화 약 150,000원), 즉 요르단을 통해 머무는 사흘치보다도 훨씬 더 비싸게 팍팍 올려 받게 되면서 이스라엘 여행사들은 요르단으로 이득을 보기 어려워졌다. 이래서 당일치기로 가면 더 엄청나게 비싸지면서 당일치기 여행은 정말 돈많은 부유층이나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젠 이스라엘 여행 책자에서도 페트라 소개는 그리 많이 하지 않는다. 소개해 봐야 값이 당일치기로 훨씬 비싸니 그걸로 가 볼 사람도 줄었다.
이것은 입국사증에 찍힌 날짜와 페트라 방문 날짜가 같은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여부를 판단하므로 페트라 방문 시 여권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한데 그러려면 요르단 국적을 따거나 현지 대학교를 다녀야 한다. 현지인들은 5,000원도 안 되는 돈을 내고 입장한다.[19]
페트라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고 페트라를 본격으로 관광하려면 알 카즈네까지 연결되는 협곡 길인 시크(السيق)의 입구까지 가야 하는데 거리가 꽤 멀다. 중간에 기대치를 높여 주는 볼거리가 있긴 하지만 길은 비포장 돌투성이라 험하고 그늘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이 문제다.
유적을 보호하고자 차량 진입이 금지됐으므로 걸어서 가거나 티켓에 포함된 마차를 타거나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이동할 수 있지만 페트라의 모든 동물 교통수단은 기본으로 바가지가 심하고 승차감은 매우 좋지 않다. 마차는 그 자체의 요금을 내지 않는다고 해도 강제인 팁의 액수가 상당하다. 걸어서 간다면 넉넉잡아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협곡을 지나다 보면 갑자기 보이는 '알 카즈네' |
여행 가이드북에서 추천되는 루트로는 희생 제단까지 등정하는 루트, 그림자로 인해 정오 이전에 가야하는 알 카즈네를 위에서 전망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루트, 수도원까지 쭉 길을 따라 올라가는 루트 등이 있다. 어떤 루트는 전문 가이드가 필요할 정도로 난도가 높으나 상기한 루트는 길이 조금 험하고 힘들고 목마르고 다리 아프고 지나다니는 당나귀와 분변 때문에 짜증이 돋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비 없이도 전부 완주할 수 있다.
페트라는 기본적으로 사막 지형에 바위산이 더해진 형태라서 덥고 건조하며 그늘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꽤나 큰 규모의 이곳을 돌아보려면 상대적으로 햇살이 덜한 아침에 일정을 시작해야 이롭고 편안한 복장과 햇빛을 가릴 모자와 선크림과 충분한 물 지참은 필수다.
알 카즈네에서 수도원 입구까지 혹은 수도원까지 올라가는 길 등에는 낙타나 말이나 당나귀를 타기를 권유하는 마부들이 꽤 있다. 혼자 걷고 있으면 백프로 다가와서 말이나 당나귀를 가깝게 몰고 와서 강요에 가깝게 압박해대는 때도 있을 정도다. 물론 바가지는 기본이고 흥정도 아주 어려운 데다 생각보다 몸이 그렇게 편하지도 않고 동물 복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때가 잦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 당나귀들은 맞아 가면서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운명이기 때문에 최소한 탈 때만큼은 괴롭히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 주자. 가격은 현지인 시세로는 2~4(5,000~6,000원)디나르 정도인데 관광객들에겐 10 디나르+ 팁까지 달라고 한다. 5 디나르 정도면 흥정에 성공한 거니까 타협하자.
막상 가 보면 화려한 외양과 달리 속은 텅텅 비어서 안에도 뭔가 있을까하고 들어갔다간 실망하기 일쑤다.[20] 그러나 저 외양만으로도 와서 볼 만한 매력이 충분하다. 무엇보다 밤에는 유적을 보호하고자 전기 시설이 별로 없기에 촛불이나 횃불을 켜서 관람하게 하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인공 불빛이 거의 없어서 밤하늘에 엄청난 별이 가득 보인다.
6. 홍수 문제
페트라가 위험하다는 우려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유는 바로 홍수 문제다. 1963년에는 홍수로 22명이나 목숨을 잃은 적도 있다. 평균 강수량은 고작 10밀리미터 수준이지만 종종 비가 엄청 오면 홍수로 곳곳이 물에 잠긴다. 사막 지역의 와디는 몇 년에서 몇십 년에 한 번 상류에 비가 왔다 하면 갑자기 엄청난 탁류가 그야말로 해일처럼 몰려온다. 게다가 페트라는 협곡 가운데 위치해서 물이 빠져나갈 곳 없이 그대로 페트라가 있는 분지로 쏟아져 들어올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이렇게 홍수가 나는데도 어찌하여 2천년 가까이나 페트라는 무사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거듭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건축학자들은 댐과 저수지를 만들어 나바테아인들이 홍수를 대비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건축학자들은 댐과 저수지, 수도관 흔적을 찾기도 했고 이에 따라 요르단 정부와 국제 고고학계도 페트라의 무수한 귀중한 건축유적들을 지키고자 과거 나바테아인들이 지은 댐이나 저수지 시설을 복원하려고 나서고 있다.
발굴과 연구를 통하여 고대 시대부터 사막지대임에도 페트라는 2킬로미터나 되는 와디 무사에 있는 샘이나 여러 자연적 물을 머나먼 인공 물길, 즉 수도관을 연결하여 식수와 생활수로 쓰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4] 어원이 같은 단어로 페트롤륨(석유), 사도 베드로 등이 있다.[5] 전승에는 모세의 형인 아론이 죽어 묻힌 곳이 이곳에 있는 호르 산 (Mount Hor)이다[6] 고린토후서 11:32-33[7] 현존하는 페트라의 유적은 로마의 영향권에 있을 때의 것으로, 건축 양식이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에 아람 지방의 고유한 스타일이 들어가 독특하다.[8] 알 카즈네의 왼쪽에서 3번째 기둥이 상당 부분 없어진걸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둥은 1960년대에 요르단 정부에서 복원해 놨다.[9] 이 사람은 아부심벨 대신전을 유럽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10] 어디까지나 유럽인으로서 처음으로 발견한 것 뿐이지 세상에 아예 잊혀져 있던 걸 찾아낸 건 전혀 아니다. 아랍인과 유목민들은 쭉 페트라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인지를 하고 있었다. 부르크하르트는 그저 로마 제국 이래 페트라를 까맣게 잊고 있던 유럽에게 페트라의 존재를 다시 알린 거에 불과하다.[11] 그 높이가 무려 10층 건물만 하다.[12] 테메노스라고도 부른다.[13] 반원형의 벤치 비슷하게 생긴 구조물. 주로 재판관석이나 사회석, 관중석 등으로 썼다.[14] 마름돌들로 지은 석조 건축물이 특히 시간의 풍화와 훼손에 더 약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2000년의 세월을 버텼다는 게 대단한 일이다.[15] 제벨 하룬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룬의 산', 즉 아론의 산이라는 뜻이다.[16] 이 무덤은 페트라에서 유일하게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무덤이다.[17] 인디아나 존스 레고 게임에서는 헨리 존스가 말을 이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18] 심지어 윗윗키 역의 샤이아 라보프는 1년 전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4에도 나왔다.[19] 실제로 거주증이 있는 경우 입장료는 1디나르를 받고 있다. 페트라 여행[20] 전설에 따르면 아득한 옛날에도 이 안에 보물이 가득하다고 소문이 나서 고생 끝에 온 이들이 안으로 들어가서 꼼꼼하게 다 파보고 찾아봐도 보물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겉을 우상숭배라고 하여 얼굴 빼고는 안 건드렸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 참고로 카즈네란 말 자체가 베두인 말로 보물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