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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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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로마 공화국 시대 속주3. 로마 제국 원수정 시대 속주4. 고대 로마 후기/중세 초기의 지방행정 체제
4.1. 동방 대관구
4.1.1. 동방 관구4.1.2. 폰투스 관구4.1.3. 아시아 관구4.1.4. 트라키아 관구4.1.5. 아이깁투스(이집트) 관구
4.2. 일리리쿰 대관구
4.2.1. 일리리쿰 관구4.2.2. 다키아 관구4.2.3. 마케도니아 관구
4.3. 이탈리아 대관구
4.3.1. 이탈리아 관구4.3.2. 아노나리아(북부) 관구4.3.3. 수부르비카리아(중남부) 관구4.3.4. 아프리카 관구4.3.5. 일리리쿰 관구
4.4. 갈리아 대관구
4.4.1. 갈리아 관구4.4.2. 비엔네시스 / 셉템 프로빙키아(7개 주) 관구4.4.3. 히스파니아 관구4.4.4. 브리타니아 관구
5. 동로마 시대 속주6. 관련 문서

1. 개요

속주()란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주를 말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주로 고대 로마를 대상으로 쓰인다.[1] 그러나 정벌이나 전쟁을 통해 합병하거나 간섭 및 관할하며 속했던 여러 지역들 또한 속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대 로마에서 속주(라틴어: Provincia[2])는 296년 사두 정치 체제 이전까지 본국 이탈리아 바깥의 가장 큰 행정 단위를 말한다. provincia란 원래 영토적 의미와 무관하게 정무관의 임무 혹은 활동 범위를 뜻했으며, 로마가 최초로 점령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 서부는 그런 의미에서 행정관의 처리 대상이었다. 그러나 후에 이는 이탈리아 밖의 로마 지배 지역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도 provincia는 라틴계 국가인 이탈리아,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기초행정구역의 명칭이며 캐나다의 행정구역인 province는 provincia의 프랑스어/영어식 변형이다[3]. 또 한국의 행정구역인 나 중국의 을 영어로 번역할 때도 province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도도부현의 영어 표현으로 쓰이는 Prefecture(라틴어: Praefectura[4])도, 사두정치로 황제가 4명으로 늘어나면서 각 황제마다 있어야 할 프라이토리아니의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5])이 종래의 무관적 성격이 점점 사라지다가 급기야 프라이토리아니가 해산되었고, 그 이후로는 이름만 계승했지 사라진 프라이토리아니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졌고[6] 무관적 성격 또한 완전히 사라져 그 '프라이펙투스가 할당된 지역'이라는 의미로 지리적 의미가 더해진 것이 어원이다.[7] 그렇기 때문에, 4두정치기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3형제 동안에는 각 황제들의 담당구역이 지속적으로 변했던 관계로 프라이펙투스의 관할구역인 프라이펙투라(대관구) 또한 거기에 연동되어서 변했었고, 행정구역으로 완전히 고정된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제압하고 다시 한 번 통일한[8] 354년이었다.

속주 휘하의 개별 도시에 대한 내용은 고대 로마/지방행정 문서를 참고할 것.

2. 로마 공화국 시대 속주

3. 로마 제국 원수정 시대 속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RomanEmpire_117_recoloured.svg.png
분홍색 지역이 원로원 속주, 연두색 지역이 황제 속주[9]이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의 속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가 그것이다.

하지만 황제 속주나 원로원 속주 모두 기본적으로는 원로원 계급 출신자 또는 일부 기사[10] 출신들이 총독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며, 제도적으로 구분한 것 외에는 속주간에 차별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황제 속주의 총독은 군대 경력이 있는 예비역 장군들이 맡았고, 원로원 속주 총독은 문관 출신들 또는 정계 은퇴 직전의 정치가들이 맡는 편이었다.

순서는 12시 방향부터 시계방향이며 ♠표시가 있는 속주는 원로원 속주이고 없으면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 황제 직할령)이다.

3.1. 브리타니아 지역

Britannia
오늘날의 영국. 정확히 말하면 잉글랜드웨일스.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가르는 국경선인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남아있다. 로마 속주로 편입된 이후 가난한 속주로 1, 2위를 오갔고, 로마가 410년 로마군을 철수시킬 당시 속주 내 로마 주민들에게 이주를 권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453년간의 로마 통치 기간 동안 서방 속주 중 갈리아, 히스파니아, 벨기카, 게르마니아보다 변방으로 취급받은 동네다. 그래서 5세기 초까지 파견된 총독과 군단장, 관리 모두가 선호하지 않은 속주로 악명을 떨쳤고, 같은 서방 속주민들 사이에서도 변방 중 변방으로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날씨는 게르마니아보다 나쁘고, 북쪽에선 칼레도니아인들과 사소한 분쟁이 툭하면 벌어져 골머리 썩힐 사건도 많은 데다 주민들 수준은 게르마니아 지방 로마 주민들보다 상당히 떨어지고 이해하지 못할 문화적 관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가 파견한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들은 아그리콜라처럼 현지 사정을 빠삭하게 아는 야전사령관이나, 여러 환경 속에서 그 능력을 검증받은 베테랑 장군, 혹은 빡센 훈련과 엄격함으로 악명을 떨친 인사들이 많이 배속됐다.

기원전 55년과 기원전 54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의 일환으로 브리튼 섬을 침공한 이후 로마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윈스턴 처칠이 "대영제국은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침공했을때 부터 시작하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지만,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브리타니아가 바로 속주가 된건 아니고 그 후에 오랜 세월동안 여러차례 정복 끝에 이루어졌다. 브리타니아는 갈리아보다 영토 크기도 훨씬 작고 인구도 적었으며, 로마가 갈리아를 단 8년만에 평정했듯이 마음만 먹으면 브리타니아도 쉽게 정복 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도 브리타니아를 속주 삼기보단 갈리아의 배후 세력 정리 차원에서 정벌한 것이고 그 후에도 반세기 가까이 전쟁을 끌은 것을 보면 로마 입장에서 브리타니아의 중요도는 인근의 갈리아나 게르마니아, 히스파니아 보다도 떨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갈리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기원전 34년 재차 군을 보낼 생각을 했다가 포기했는데, 이후에도 아우구스투스 주도로 기원전 27년과 기원전 25년 브리튼 정복 계획을 수립했으나 그때마다 로마 내부 사정으로 포기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인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지 1년 정도 된 무렵, 브리튼 일대의 드루이드교 문제와 브리튼 내 분쟁이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정복론이 대두하게 된다. 서기 39년 브리튼 일대 켈트족 사이의 분쟁으로 로마의 갈리아 일대까지 재차 불똥이 튀자, 로마 원로원과 군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브리타니아 정복이 논의됐고 이번에는 실제 군사행동까지 벌어진다. 그리하여 서기 40년 당시 황제인 칼리굴라가 직접 갈리아 북부로 로마군 200,000명을 이끌고 가면서 실제 원정 직전까지 그 움직임이 구체화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닷길이 험하고, 물자 수송 문제 및 갈리아 기근 문제 등도 겹쳐, 칼리굴라의 브리타니아 원정 계획은 미뤄지게 된다. 이때 그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군 앞에서 충성맹세를 받고 등대를 건설하고, 조개껍데기를 줍게하는 선에서 흐지부지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에토니우스가 "musculi"라고 적은 것을 재번역 과정에서 조개 껍데기로 했다는 것[11]이 밝혀진 까닭에, 1990년대부터는 로마 제국 차원에서 브리타니아 정복 계획이 진행됐음이 확인됐다. 이때 칼리굴라는 2개 군단[12]을 갈리아에서 편성함과 함께, 브리타니아 정복에 필요한 공성무기 제작, 병참 물자 확보 등을 했다. 하지만 마음 먹고 황제와 로마군 지휘관들이 준비했음에도, 브리타니아 원정 출항 계획은 실패했다. 날씨 사정, 물자 확보, 무기 제작 등으로 실제 계획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리굴라가 이끈 로마군은 갈리아 북부까지 영향을 확대한 브리타니아의 카투벨라니족의 부족장 아드미니우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항복을 받아낸다. 이후 칼리굴라는 현실적인 사정상 로마로 귀환했고, 1년도 못 되어 서기 41년 1월 암살당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복 논의는 일시 중단된다.

하지만 로마는 이 당시 브리타니아 정복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브리타니아의 사정 역시 로마에게는 시한폭탄 같은 문제였다. 따라서 서기 43년, 칼리굴라의 숙부로 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카이사르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집권자 대수로는 5대째 미루던 브리튼 정복 전쟁을 선포한다. 그는 조카 칼리굴라와 함께 대략 서기 39년 겨울부터 약 3년 반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준비한 브리타니아 전쟁을 현실로 옮겼다. 이때 로마의 명분이 된 것은 브리튼 일대의 켈트족들이 정치적 망명 후 로마의 개입을 요청한 일이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은 시작부터 황제 개인의 야망 실현이라는 일부 고대 기록의 주장과 달리, 로마의 준비는 철저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13] 오래전부터 로마 지도층 전체에서 수십년간 정복 필요성을 논의해온 전쟁인 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개인적으로 군사적 승리와 업적에 대한 열망이 큰 점 등을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데, 4개 정규 군단과 그에 버금가는 보조군 2개 군단 정도가 참전한 전쟁이었다. 여기에 더해 서기 43년, 4개 군단이 참전한 원정군의 지휘관 편제 역시 1세기 로마군 내 명장들이 다수 출전했다. 실질적인 로마군 야전사령관으로는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임명되었고, 칼리굴라의 측근으로 칼리굴라의 갈리아 원정 당시부터 직간접적으로 참전한 베스파시아누스 등 당시 로마에서 내로라하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들이 참전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를 떠나, 오늘날의 런던에 당도할 무렵, 황제는 전투 한 번 치루지 않고, 브리타니아의 11개 부족들에게 귀순을 받는 형태로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편입시킨다.

브리타니아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속주가 되었을 당시, 처음에는 오늘날 런던과 잉글랜드 남부 일부만 확보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서기 44년, 제2군단 아우구스타를 이끈 군단장 베스파시아누스을 필두로 한 원정은 엑서터까지 진군해 점령하고, 제9 군단 히스파니아 군단은 이보다 더 북상하는 형식으로 섬 전체를 넓히는 노력을 하면서 확장에 진력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서기 54년 저녁 식사 후 급사한 뒤, 즉위한 네로 치세 아래에서도 로마의 브리타니아 속주 확장 조치는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벌인 조직적인 고리대금 사업, 인신매매, 납치 등의 결과, 부디카의 난이 벌어지게 됐다. 하지만 로마는 퀸투스 베라니우스가 새 총독을 맡아 웨일스 일대를 평정하고, 뒤를 이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60년 모나(현재 앵글시) 섬의 드루이드 성지를 파괴하면서, 61년 부디카 여왕의 저항 등 속에서도 잉글랜드 전역과 웨일스 지방을 자신들의 속주로 만든다. 이후에도 여러 황제들 치세 아래에서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삼부자의 칼레도니아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실패한다. 따라서 서기 410년 로마가 브리튼 섬을 최종 포기하기 전까지 로마가 스코틀랜드까지 차지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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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갈리아 지역

Gallia
서부 게르마니아와 함께 로마의 우주방어 지역 1.[17] 나르보넨시스를 제외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아스테릭스의 주 배경이기도 하다. 밑의 '히스파니아'에 나오듯 히스파니아와 함께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불렸다.[18]

현재의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남부, 스위스 서부, 독일 서남부와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일부까지 포함하는 약 760,000km2에 이르는 라인강 서쪽의 서유럽 대부분, 로마인들과 켈트족들이 말하는 갈리아 일대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이후에도, 로마에 완벽하게 병합된 시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후기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공동통치 시절이라고 한다.

카이사르에게 정복될 당시 백만 명 정도가 노예로 팔려온 역사도 있고, 갈리아가 편입 당시부터 가난해 이 지역 출신들이 이탈리아로 상경해도 본국 안에서 하층민이 되거나, 국경을 오고가는 상인 등이 많았던 역사가 있었다. 더욱이 로마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게르만족들이 분탕치고, 마적과 유랑도적, 탈영병들이 깡패짓을 한다는 소식이 많아 상경한 하층민 이미지가 많았던 속주다. 그러나 이는 수도 로마 출신 엘리트들이 볼 때 느끼는 갈리아 지방 이미지였을 뿐, 갈리아 전체의 이미지까진 아니었다. 왜냐하면 워낙 넓은 지역인 까닭에 남북간의 경제력 편차도 크고, 오늘날 마르세유를 주도로 한 나르보넨시스 쪽은 본국 이탈리아 북부보다 확실히 잘 사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지역 유지들이 원로원 의석을 받았을 정도로 서방 속주 중 나름 잘 나가는 주류 속주이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히스파니아와 달마티아 지방과 함께 로마 정규군 입대 특권을 누리는 혜택과 라틴 시민권을 부여받아 쉽게 로마 시민권을 받는 특혜를 누렸던 동네다.

상술했듯, 히스파니아 일대와 함께 가장 빨리 로마 문화가 주민들 관습에 녹아내려, '갈리아-로마 문화'로 불린 특유의 지역문화가 있었다. 그래서 푸닉 지방(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 일대)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지역색이 강하고, 서기 6세기까지 켈트 방언과 그 억양이 남아 있었을 정도로 이곳 특유의 사투리가 있었다고 한다.[19]

3.3. 서부 게르마니아

Germania
갈리아 지역과 함께 라인강을 주축으로 한 우주방어 지역 2. 다만 게르마니아 서부는 티베리우스 황제 이후에야 국경선화 된다. 이유는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이 아닌 엘베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의 라인강은 도나우강에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엘베강과 도나우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 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 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아그리파가 갈리아 일대의 행정, 군체계를 정비한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갈리아 일대 행정을 손보며 갈리아 편입이 완료되자 로마는 본격적으로 게르마니아 정복을 추진한다. 아우구스투스 본인 스스로 국가 프로젝트이자 가문의 명예를 건 의무로 규정한 까닭에, 그의 남자친족들로 아내의 친아들들이자 자신의 두 양자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를 파견한다. 이때 그는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방계친인척까지 자신과 두 양자가 총책임자로 나선 엘베강과 라인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파견시킨다.이는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당시 갈리아 전역을 담당한 총독도 겸하고 있던 드루수스는 전쟁 개시 전 군사기지들을 완성하고 병참체계를 정비한 뒤,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4차례의 원정을 매년 치룬다. 이때 드루수스는 카이사르나 술라를 연상시키는 전술과 심리전을 통해 연전연승을 거두는데, 그 성과는 대단했다. 특히 그가 로마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타고 북상, 엘베강 근처에 내려 공격한 성과는 로마가 서부 게르마니아를 넘어 게르마니아 중심부까지 진출한 첫 성과가 됐다. 또 그의 명으로 레누스 강(라인 강)과 이셀 호수를 연결해주는 드루수스 운하가 건설되고, 서부 게르마니아 일대에 오늘날 서독일 일대 주요 도시들이 건설되면서 이 일대는 본격적으로 로마 속주로 편입된다. 그러나 4번째 원정 후 귀환 중 도하 과정에서 낙마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죽게 된다.

드루수스 요절 후, 그의 친형 티베리우스가 다누비우스(다뉴브 강) 전선에서 게르마니아 전쟁을 이끄는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이때 그는 차분히 군을 이끌며 상당한 영토를 정복한는데, 티베리우스의 전술은 동생 드루수스처럼 친로마파 부족들과 강화를 맺고 그들을 포섭하는 전술도 있어 드루수스 사후에도 로마의 게르마니아 편입은 빠르게 진행된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노년이었고, 게르마니아 전쟁 개시 직전부터 후계자로 염두에 계획을 세워둔 친구 아그리파, 양자 드루수스가 모두 요절해 티베리우스 소환은 불가피했다. 그래서 그는 속주화 작업이 행정적 절차 및 편입화만 남았다는 판단 아래,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 뒤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네로의 친할아버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는데, 그는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 못지 않게 뛰어난 장군답게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지중해 동부에서 쌓은 외교관, 행정가 경험과 전혀 다른 게르만족과의 의사소통에 그는 큰 어려움을 겪었고, 설상가상 상호 오해로 수년간 쌓아놓은 친로마파 전선까지 균열 기미가 생겨 고민을 안겨준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버리는 등의 소동을 겪게 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실수는 있어도 유능한 아헤노바르부스를 소환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선은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를 시도할 목적으로, 지중해 동부 일대에서 속주총독으로 속주화 작업 전문가로 유명한 바루스를 후임으로 부임시킨다.

바루스는 아헤노바르부스보다 나이가 많고, 지중해 동부 일대에서는 지역 안정화에 적합한 인재였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그는 유능한 행정가가 적임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헤노바르부스는 동방에서 하던 대로 온전히 하지 않으면서, 꽤 유연한 소통으로도 어려움을 겪던 터라 바루스 부임 인사는 인사상의 큰 실책이 되고 만다. 바루스는 십자가형, 마을 전체 초토화 등 악랄한 방법도 적극적으로 했던 총독이라서, 장군임에도 외교관다운 면모가 많은 아헤노바르부스와 달리 게르만족들에게 큰 불만을 산다. 여기에 더해 그는 그 지역의 통치를 맡아 현지 사정과 수확량 등도 깡그리 무시하고 동방에서 하던 대로 했다. 그래서 이러한 바루스의 로마식 행정은 게르만족에게는 꽤 불편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고, 아르미니우스로 대표되는 게르만족 출신 인사들의 반발과 저항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때 바루스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였다.

바루스의 실패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두 양아들, 누나의 맏사위가 수년간 노력한 일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에 빠진다. 로마는 라인강 동쪽의 점령지를 모두 상실했다. 3개 군단은 대군이라 보기는 어려운 병력으로[26] 해당 군단이 소멸했다고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군대에는 바루스를 비롯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료들을 대거 동원했었는데 군대가 소멸하면서 점령지의 통치집단이 증발해 버렸다. 둘째로 해당 전과에 고무된 게르만 족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군단기지를 공격하였고, 3개 군단이 소멸된 직후의 공백으로 인해 그 기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곳이 모두 점령당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점령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에 기인한다. 셋째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인해 병력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배치된 데에 최소한으로 감축한 군단수, 또한 임페리움을 황제가 독점하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으로 인해 세 개 군단의 소멸을 메울 수 있는 병력이 즉시 동원되어질 수가 없었다. 또한 바루스의 실패는 아우구스투스의 고지식한 점령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공화정 당시 로마는 점령지를 동맹시로 두고 부족들이 통치하면 뒤에서 파트리아 역할만 하는 간접통치를 선호하였으며, 공화정 인물이었던 카이사르 또한 점령지의 부족들에게 통치를 맡기되 이들에게 씨족 부여, 원로원 의석 부여, 그리고 전쟁에서 차출시켜 같이 싸우게 하여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로마의 점령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증거로서 카이사르가 내전을 치르면서 갈리아에 있는 모든 주둔군을 철수시켰으나 갈리아 부족들은 갈리아에 로마군이 한 명도 없음에도 불구, 그대로 로마에 복속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군대까지 제공해주었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점령지를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제국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고 이러한 변화된 통치방식은 점령지의 기존 통치집단의 반발을 낳기에 기존 공화정 로마와 같은 빠른 정복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황제들이 시도한 제국주의적 정복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가령 브리타니아 정복 같은 것은 반세기에 가까운 점령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키아 정복은 성공하였으나 이는 트라야누스가 통치집단과 지배 민족을 소멸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으며 파르티아 정복은 군사적으로는 쳐부수는 데 성공하였으나 대규모 반발에 직면하여 점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그 지역은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심하게 자책하긴 하였으나 엘베-도나우 리메스의 구축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았는지 복귀한 티베리우스를 다시 그 지역에 파견하여 재정복을 꾀한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곧 노환으로 인해 죽게 되고 뒤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그의 후임인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에게 그 지역의 정복을 맡긴다.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누나의 외손자인 게르마니쿠스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연승을 거두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하고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서 엘베강을 국경선으로 삼고자 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결국 엘베강과 도나우강에 이르는 리메스의 구축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황제였으며, 그가 확립한 시리아와 도나우 강의 국경선은 수백 년에 걸쳐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3.4. 알프스 산맥 지역

Alpes
이탈리아 북서부와 프랑스 남동부가 맞닿은 알프스 산맥 지역이며, 면적도 가장 작고 주변에 비해 크게 유명한 지역은 많이 없는 편이다.

3.5. 다뉴브 강 유역 중·상류 지역

Danubius

로마의 기병 셔틀 1이자 우주방어 지역 3. 이 지역은 발칸반도 북부와 함께 갈리아처럼 단시간 내 점령한 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조금씩 북상하여 도나우 강으로 경계를 고정화한 것이다.

3.6. 다뉴브 강 유역 중·하류 및 발칸 반도

Haemonia[39]

로마의 기병 셔틀 2이자[40] 우주방어 지역 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컨커러아틸라 캠페인 2번째 장대한 여정에 나오는 로마인 도시는 거의 다 이 곳에 있다.(나이서스-모이시아 수페리오르, 두러스-에피루스, 소피아-모이시아 인페리오르, 테살로니카-마케도니아, 아드리아노플-트라키아)

3.7. 그리스

Hellas
아나톨리아와 함께 로마의 부유한 지역 TOP를 달리는 곳이자 로마의 돈셔틀 1. 원래 이곳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으나 피드나 전투 이후 로마가 이 지역을 꿀꺽해버렸다.

3.8. 타우리카카프카스 (흑해 연안)

Pontus Euxinus, Mare Scythicum Litus
Taurica et Caucasus[59]

로마가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동맹 왕국들은 로마와 매우 밀접한 외교적 관계를 가졌다. 이곳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등, 로마의 시스템은 유지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게다가 일부 지도는 로마의 영역에 이 지역을 포함시킨다.

3.9. 아나톨리아

Anatolia
그리스와 함께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로마의 돈셔틀 2이자 기병 셔틀 3.[65][66] 이들 지방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 초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거나 종속 관계를 맺었고, 제정 시대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 여러 지방 중 처음으로 살아있는 황제가 이 지역 주민들의 요구로 최초로 개인우상화되면서(기원전 29년), 황제우상화 정책이 시작됐다. 또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 이 지역 태생의 그리스혈통 주민들이 로마시민권을 많이 하사받아, 성씨로 클라우디우스를 사용한 이들이 꽤 많이 보이는 것도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다. 이런 이유로 서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등장한 집정관이나 총독 명단 중 노멘(성씨)로 클라우디우스를 사용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열 중 여덞, 아홉명은 거의 대부분 소아시아 태생이나 그리스인들의 후손이다.[67]

고대 그리스 및 중근동 지방과 함께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 높은 선진 문화의 본거지였고, 이 동네에서 유행해 로마로 수출된 스포츠 경기나 유흥문화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배경처럼 사도 베드로, 바울로 등 1세기 사도교부들의 주 무대.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68] 후대의 소위 동로마 암흑기(Byzantine Dark Ages)에는 수도만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유럽의 콘스탄티노플에 두었을 뿐, 소아시아가 로마의 본국, 본토 거의 그 자체였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920년대 불가리아 제1제국시메온 대제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남하했을 정도로 발칸 반도를 석권하고 나서, 스뱌토슬라프 전쟁의 대패로 불가리아의 세가 확 꺾이는 970년 전후까지는 '이 나라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왕국이다!'라고 이 시기의 동로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짓말해도(...) 충분히 속을 만한 정도이다.[69] 7세기 혼란기에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제국 영내에 들어와서 눌러앉은 슬라브인들을 780년대 콘스탄티노스 6세 때 복속시키거나 동화시키면서[70] 발칸 반도를 본격적으로 수복해 나갔을 때까지의 발칸 반도에서의 제국의 판도도 대동소이했다. 그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라벤나 총독령 및 베네치아, 크레타,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이런저런 해상 및 서방 영역 또한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10세기 중반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남부 일부와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해변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상실했다. 참고로 아나톨리아 지역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아나톨리아를 포기하고 4차 십자군으로 잃었던 그리스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1330년대에 전부 오스만 제국에 복속당해 소멸했다.

3.10. 중근동레반트

Oriens et Levans
로마의 밀셔틀 1. 이 역시 대부분의 땅이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파르티아페르시아와 접해있기 때문에 이곳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게르만족의 서진 이전까지 로마가 외부 세력이랑 가장 치고박고 싸운 곳이며 로마나 외부 세력 모두 수차례의 전쟁에서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외교적 밀당으로 평화를 유지한 지방이다. 카르헤 전투에선 크라수스수레나스의 파르티안 궁병에게 농락당하며 대패하였고 크라수스의 전사로 이어졌다. 이는 삼두정치가 무너져버린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도 카르헤 전투의 복수전이 많이 이어졌지만 전투로 이긴 건 없었다. 대표적으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의 파르티아 진격이 있었지만 욕만 잔뜩 먹고 성과가 없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외교적 합의를 통해 카르헤 전투 때 빼앗긴 대장기를 되찾아 오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 외에도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대성공을 거둔듯 보였지만 유지하는 데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알아서 포기하였다. 트라야누스 이후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파르티아를 정벌하고 크테시폰을 점령하였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경우 안토니누스의 역병 때문에 세베루스의 경우 내부의 반란 진압 때문에 파르티아에서 철수하였다. 세베루스의 후임 황제인 카라칼라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고 또한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실패로 끝난 건 물론 자신의 실책 때문에 파르티아에서 마크리누스의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로마에 대해 더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세워지는 원인이 되고 로마의 시리아 지역 국경관리가 더 빡세질 수밖에 없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건국 이후에도 여러 로마 황제들이 정벌에 나섰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세베루스의 경우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를 궤멸시키는 등 일련의 성과는 있었지만 역사가들이 밝혀낸 실상에 의하면 패배 또는 무승부나 다름없었고 잘 해봐야 피로스의 승리였다고 한다. 군인 황제 시대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시대(테트라키아)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파르티아와 페르시아 또한 로마 제국의 동부를 일시적으로 유린하거나 점령하긴 했어도 마찬가지로 점유하진 못했다. 일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초반부에 일시적으로 파르티아가 쳐들어 왔지만 역관광당하였고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파르티아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아르다시르 1세샤푸르 1세가 각각 점령에 성공하였고 특히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기까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또한 명군 샤푸르 2세 또한 아미다 전투를 일으키고 구원나온 율리아누스 황제까지 전사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아나톨리아 및 중근동에 대한 영구적인 점령엔 실패하였다.이와 같은 대치는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로 넘어온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로마와 페르시아 양국에 막대한 국력소모를 가져와 7세기경 이슬람 세력에게 중동 전체를 내주게 되는 원인이 된다.

로마 시대 기준으로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선진지역이었고,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대단했다. 이는 로마와 국경을 마주한 파르티아, 페르시아도 입장이 비슷해 3세기의 위기로 불린 군인황제시대 기간동안 로마와 파르티아/페르시아 간의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충돌이 벌어진 이유가 됐다.

동방 일대가 서방 일대보다 보수적인 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바로 옆의 아나톨리아 지역과 함께 성관념, 문화적 관습 등에서 가장 보수적 색채가 강하기로 유명했다. 하여 이 일대는 로마 편입 전부터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주변의 그리스인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가부장적이고 신체 노출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 등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류 기독교가 보이는 보수적인 성관념이 로마 시대의 시리아, 팔레스티나, 아나톨리아 일대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평도 있을 정도.

3.11. 북아프리카

Africa
로마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지역이자 로마의 밀셔틀 2.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대부분이다. 대략 현재의 튀니지, 알제리 북동쪽, 시르테 만을 따라 있는 서부 리비아 해안과 이집트 대부분을 포괄한다.

포에니 전쟁 직후, 카르타고에게 빼앗은 지역을 속주로 만든 까닭에 로마인들에게 아이깁투스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대부분은 포에니쿠스(Poenicus) 지방으로 불렸다. 이 일대에서 생산된 곡물 생산량은 매년 100만 톤[85]이었고, , 무화과, 건포도, 직물, 대리석, 목재, 가축, 북아프리카산 명마, 도자기, 양모, 맹수 등 온갖 품목의 수출품의 명성은 반달족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제국 전체에서 대단했다. 더욱이 2세기부터는 이 지역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이 원로원 입성 후 부와 권력을 쥐거나, 사업 성공 후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 부동산을 사들여 로마 제국 전체의 권력을 쥐면서 기존의 로마-이탈리아 혈통 귀족들을 밀어내고 서기 2세기~4세기까지의 로마 원로원 내 보수적 귀족 세력과 갑부들의 고향이자 본거지로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와 함께 위세를 떨쳤다.

상술했듯, 편입 전부터 지중해 일대에서 1, 2위를 오갈 정도로 잘 살던 동네인 까닭에, 일찍부터 그 명성이 대단했다. 서방 기준으로 보면 본국 이탈리아가 제정 시대에 접어든 이후 부와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도 1, 2위를 왔다갔다 할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한다. 덕분에 북이탈리아 일대보다 교육, 문화 수준이 월등히 높고 외적 침입도 없는 안전한 동네로 명성이 대단했다. 이는 동방과 견주어도 평가가 비슷해, 동방의 그리스, 아시아, 시리아 일대의 어떤 대도시들과 비교해도 꿀리는 게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북아프리카 일대는 다른 속주들과 달리 일찍부터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유대인들이 두루 이주해 살면서 공존한 동네인 까닭에 문화적으로 자유롭고 민족간의 갈등도 적었다고 한다.

이런 명성처럼 카르타고, 하드루메툼, 렙티스 마그나 같은 대도시들은 서기 1세기 후반 도미티아누스부터 법학자, 수사학자, 희극 시인, 소설가, 의사, 천문학자, 문법가, 연설가, 전기작가, 전차기수, 건축가 등 제국에서 유명인 혹은 사회지도층으로 불린 이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당연히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외에도 이 지방에서 배출한 로마인들은 본국 이탈리아나 문화적 선진지역으로 평가받은 그리스, 아시아 일대보다 많았다.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스승인 법학자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하드루메툼이 낳은 천재적인 법학자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뛰어난 의술로 명성이 대단했던 아우구스티누스, 라틴어와 헬라어 모두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준 소설가 아풀레우스, 변호사이자 전기작가이며 호사가인 수에토니우스, 시인 드라콘티우스 등이 그들인데, 이들 외에도 2세기~3세기 초반 로마 원로원을 장악한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3세기 군인황제시대 이름난 전직 집정관과 그 후손들도 끝없이 배출됐다.

다만, 아이깁투스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옛 카르타고 일대인 까닭에 이 지역 출신 로마인들은 발음이 억세고 특유의 페니키아 억양이 묻어나 로마와 이탈리아로 이주해도 발음을 고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령 이 지역 출신들은 S를 / ʃ /로 읽었던데다, 우리말로 ㅅ, ㅆ으로 구분되는 발음도 모두 /ㅅ/으로 읽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또 A와 O 발음 역시 애매하게 발음하고, CH 발음도 /h/와 /X/로 각각 읽어 발음이 억세면서도 음율이 있고 밑받침을 잘 못했다고 한다.

속주의 주요 수출 품목은 올리브, 대추야자, 곡물이었고 대표산업은 농업과 노예 무역. 이 속주를 거쳐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서방, 동방 속주들로 향하는 품목들로는 금과 향신료, 포도주, 북아프리카산 말, 약재가 유명했는데, 이중 아프리카 내륙에서 공급된 노예와 금은 가라만테스인들이 렙티스 마그나를 비롯한 해안 항구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편입 당시부터 농업 생산력이 대단한데다, 상업망도 카르타고인들이 만들어 놓은 까닭에, 일찍부터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유대인들이 이주해 있었고, 로마 편입 이후에는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 이주민들까지 넘어왔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페니키아 문화에 접목된데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도 높고, 서기 2세기까진 주변 침공도 없는 까닭에 평화로우면서도 국제성도 있고 묘한 매력이 있는 지방으로 이름 높았다고 한다. 다만, 푸닉 지방답게 옆동네의 아프리카 속주처럼 페니키아 억양이 남아 있고, 대농장주나 대상들이 많았다.
부유하기로는 편입 때부터 유명했지만, 바로 옆의 아프리카 속주와 달리 "렙티스의 흥망성쇠 = 트리폴리타니아의 흥망성쇠"라고 할 정도로 렙티스 마그나가 곧 이 속주의 모든 것이었던 동네다. 따라서 해당 속주의 주도 렙티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대대적인 후원을 받아 부두와 항만이 새롭게 건설되고 온갖 특권을 받았으며, 황제와 황족들의 기부로 건설된 대규모 공공건축물들이 세워질 당시에는 아프리카 속주와 푸닉 지방의 맹주를 놓고 다퉜다고 한다.[89] 허나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고, 365년 렙티스 마그나가 쓰나미로 회복불능의 타격을 받으면서 쇠락하게 된다.* 아프리카 속주(Provincia Africa) ♠: 현 튀니지 일대로 주도는 처음엔 자마 레기아(그 유명한 자마 전투가 벌어진 곳 맞다. 현 튀니지 자마)에서 카르타고(현 튀니지 카르타지.[90])로 옮겼다.[91] 제국 전체에서도 손 꼽히는 부유한 지역으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인들에게 푸닉 지방으로 불렸다.
속주 총독과 로마 속주 정부가 위치한 주도는 카르타고인데 이 도시는 3차 포에니 전쟁 후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재건된 신도시다. 즉, 로마인들이 재건한 신(新) 카르타고로 과거 해상제국 카르타고 도시 위에 세워진 도시다. 때문에 원래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 유물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한다. 카르타고가 폐허였을 때의 주도는 우티카(현 튀니지 자나)이다. 아프리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은퇴 후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진 사병을 정착시킨 땅이기도 하다. 즉 마리우스는 여기 속주를 최초의 기반 및 클리엔테스로 가지게 되었다.
1세기 말 ~ 3세기 초 로마 제국 내에서 권세를 휘두른 원로원 의원들의 본적지로 유명했던 곳으로, 전직집정관 중 힘 꽤나 쓰는 유력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속주 총독 부임지로 유명했다. 2세기부터 3세기 초까지만 대충 살펴보더라도 루피누스, 발레리우스 푸덴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등 오현제 시대동안 이름난 권세가부터 세베루스 왕조의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동안 율리아 마이사-율리아 마마이아를 도운 디오 카시우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와 그 동생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비롯해 고르디아누스 1세 등 그 명단은 거의 전직 집정관 올스타 수준이다. 이는 3세기 말도 예외는 아니라서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동명이인 증손자 카시우스 디오 역시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막대한 재력과 권세를 이용해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자리를 차지했다.[92] 그 이유는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고, 상대하는 민원들도 한통속인데다 외침이나 반란은 누미디아 속주 총독이 다 뒷처리를 해준 꿀보직이기 때문이다. Notitia Dignitatum의 400년 기준으로 아카이아(아테네와 스파르타 주변), 아시아(에페수스 주변)와 더불어 3대 프로콘술 속주인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위상과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때 이름을 날린 지식인, 사업가, 부자 원로원 의원들 대부분이 이 동네 출신이었고, 팍스 로마나 시대 동안 이 지역 출신 상당수가 집정관, 법무관을 무수히 지낸 만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황제와 원로원 역시 이 속주의 주장을 많이 반영해 조세정책을 꾸렸다. 허나 이런 배경 때문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끝없는 세금 징세에 가장 불만이 컸고, 세금 부담율도 높아 가장 먼저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일이 벌어지고 이후에도 야심가들이 부유한 주민들과 연합해 여러 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칭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담으로 이 지역 출신들은 여타 다른 속주와 비교해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에 페니키아 특유의 발음과 억양이 있었는데, 로마나 이탈리아로 상경해도 다른 속주 출신들과 달리 평생동안 그 억양을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알제리의 역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고대 중세 근현대




























아바스
왕조

무할라브
왕조









지리 왕조 무와히드
왕조

가니야족
하프스 왕조 오스만
제국

아이트
압바스
왕국
,
쿠쿠 왕국















함마드 왕조
힐랄족
자이얀
왕조

오랑
누미디아
왕국
알타바
왕국
루스탐 왕조 이프란 왕조,
마그라와족
무라비트 왕조 마린 왕조
베르베르
녹색은 칼리프 국가 또는 아랍계 왕조, 노란색은 베르베르계 왕조, 분홍색은 페르시아계 왕조
}}}
* 누미디아 속주(Provincia Numidia)[93] ♠: 현재의 알제리 북부로, 지중해성 기후의 북부 해안을 제외한 알제리 땅의 대부분이 사막인 걸 감안하면 실제 알제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94] 주도는 키르타. 오래 전 로마에 편입된 속주인데다, 서기 40년 북아프리카 경비와 방어를 담당하는 로마군이 배치된 역사를 가진 만큼 군사도로, 로마 식민지배를 담당한 여러 로마식 도시들이 밀집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개편 당시부터, '누미디아 동부 → 누미디아 서부 → 트리폴리타니아와 병합 후 아프리카 속주 편입 → 분리 후 아프리카 속주 휘하 속주로 재편입'의 복잡한 개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미디아 총독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서기 193년 정식 분리시키기 전까지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밑에서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는 모양새를 띄었다. 이런 까닭에 해당 속주의 일에 다른 속주가 사실상 압박을 하거나, 반란이나 내란시 벌어질 위험성이 잠재된 지역으로 인식됐다. 이에 서기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유일무이한 북아프리카 군대를 가진 누미디아 속주를 아프리카 속주에서 정식으로 분할시킨 뒤 그 독립성을 보장해줬다. 이때 세베루스 황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누미디아 총독에게 이러저리 명령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이전까지도 황제가 파견한 누미디아 총독들은 야전사령관 경력을 가진 법률가 출신 원로원 의원들이 맡았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누미디아 총독은 전직 집정관 출신 중 권세가들이 파견된 아프리카 속주 총독 밑에서 군사 업무를 하는 부하격 총독인 모양새라서, 양 속주가 합동으로 처리하는 사법, 행정 업무 중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누미디아 일에 개입한다거나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황제를 선언한 직후 제 부하를 후임자로 파견하는 등 볼썽사나운 일로 골머리를 앓는 자리였다.
아프리카와 함께 로마의 전투 코끼리를 책임져왔으며 누미디아 왕국은 2차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카르타고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2차 포에니 전쟁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자를 회유했고, 전쟁 이후 마시니사가 왕이 되어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다. 마시니사의 누미디아는 종전 협정 결과로 카르타고가 독자적인 교전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을 이용하여 카르타고를 괴롭힌다. 이는 로마가 보기에도 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이 때문에 모든 로마 지식인들이 불필요하다고 욕한[95] 3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된다. 한편 카르타고 멸망 약 반 세기 후에는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오해실책악수를 쌓은 끝에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를 유구르타 전쟁이라 부른다. 유구르타 전쟁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전쟁이었으며 유구르타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물론 유구르타는 처형되었고 영토 상당 부분은 이웃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에는 유구르타의 배다른 형제 가우다와 그의 아들 히엠프살 2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실정으로 본국에서 쫓겨난 히엠프살 2세를 폼페이우스가 복위시켜 주면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히엠프살의 아들 유바 1세는 로마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어 아프리카에 쳐들어온 카이사르파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전사시키는 실적을 올렸지만, 결국 직접 쳐들어온 카이사르에게 탑수스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했다.[96] 이후 누미디아는 주인을 잃고 이웃 마우레타니아 세력이 활개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 유바 1세의 아들 유바 2세가 복위되었지만 누미디아 대신 마우레타니아를 다스리게 되었고 누미디아는 속주화되었다. 제정 시대에 벌어진 인근 속주 주민 봉기나 속주총독들의 황제 참칭 사건이 벌어질 때, 투입된 병력이 이 속주 주둔 로마군이었다.*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Provincia Mauretania Caesariensis):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사이에 끼인 속주. 주도는 카이사리아(현 알제리 셰르셸)이다. 여러 속주들에 카이세리, 카이사리아 등 이름이 비슷한 도시가 많은데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또는 역대 황제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카이사르 이후 황제들의 공식 이름에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들어갔으며 카이사르 자체가 황제를 뜻하게 되었기 때문. 이 카이사리아는 위의 유바 2세가 마우레타니아로 옮긴 이후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수도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3.12. 히스파니아

Hispania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영토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산악지형이라 게릴라전이 자주 일어났으며 한니발의 동생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기도 하였고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이후에는 갈리아와 함께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불렸으며, 네로 시대부터 시작된 본국 이탈리아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의 속주 군대 지원 기피현상을 해결하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라틴 시민권 확장 및 속주 태생 로마 시민권자 정규군 입대 허가를 갈리아와 함께 가장 빨리 부여받은 동네다. 공화정 시대때부터 이탈리아 출신 로마군 퇴역병과 그 가족들이 정착도시를 건설하고 이주한 까닭에 이탈리아 출신 조상을 둔 로마 시민권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이미 원로원 의원들을 여럿 배출했고, 이런 배경 속에서 1세기 말인 서기 98년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를 배출하고,[99] 117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까지 배출했다. 이 외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가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도 히스파니아에서 기원한 대표적인 세습 원로원 귀족 가문이다.

로마인이 히스파니아로 부른 마우레타니아 지방의 경우,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 아래에서 속주로 공식 편입됐다. 이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대대적인 로마화 강제 명령 아래에서 그 원인이 있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무리하게 로마화라는 이름으로 현지의 베르베르 부족 중 반유목 생활을 하던 주민들과,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구성한 베르베르인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을 장기화시켰고,[100] 이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부터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불린 동쪽과 반유목 생활을 영위한 서쪽 모두 전란에 휩싸인 이유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로마군 보조병 출신 타크파리나스가 로마인 정착촌, 로마군을 게릴라 전술로 공격하게 됐고,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파견한 돌라벨라 장군이 타크파리나스를 제거하기 전까지 큰 문제가 됐다. 더욱이 3대 황제 칼리굴라 아래에서 로마 황제, 원로원의 긴장 상태를 이용한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프톨레마이오스 국왕의 로마 내정 개입과 황제, 원로원 갈등 조장 등은 로마가 이 일대를 보호국 아래의 통치 대신 속주로 만드는 배경이 됐다. 하여 칼리굴라와 원로원은 사이가 나쁨에도 히스파니아 안정, 푸닉 지방으로 불린 북아프리카 안정을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암살과 강제 병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마우레타니아를 속주로 만든다.

상술했듯 갈리아, 북이탈리아, 북아프리카와 함께 퇴역예비군 로마군이 정착하여 세운 도시가 굉장히 많다(로마 제국 서부지역의 도시들은 거진 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 이 지역 속주는 대부분 히스파니아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스페인어로 에스파냐, 영어표현으로는 스페인이 나오게 된다. 또한 현재는 히스파니아가 곧 이베리아 반도라고 생각하지만, 로마 제국 당시에는 이베리아 반도 건너편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지역(현재의 모로코)까지도 (광의의) 히스파니아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중세 내내 지속되었으며 레콩키스타의 최종목표가 그라나다 왕국의 멸망과 이베리아 반도 통일에서 그치지 않고 팅기타나 지역 까지 수복하는 것인 점에서 알 수 있다. 다만 문화적으로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기독교 문명인데 비해 팅기타나 지역은 아프리카-이슬람 문명으로 분리된지 500년이 넘었기 때문에 히스파니아 = 이베리아 반도라는 현재의 통념이 굳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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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 로마 - 게르만족의 대이동 - 헤콩키스타 - 포르투갈 제국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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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갈라이키아 속주 루시타니아 속주
게르만족의 대이동 반달족 수에비 왕국 알란 왕국 반달족
수에비 왕국 서로마 제국
수에비 왕국
수에비 왕국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


* 루시타니아 속주(Provincia Hispania Lusitania)[104]: 현 포르투갈 중 도루 강 이남 지역이며 일부 스페인 서부 영토(현재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를 포함한다. 주도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현 스페인 메리다)이다. 하지만 리스본, 코임브라, 브라가, 에보라 등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 중 상당수가 로마 제국 시절에 건설된 것이다. 네로의 자살 전에는 후임 황제 오토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었던 곳이다.

* 갈라이키아 속주(Provincia Gallaecia)[105]: 포르투갈 북부-스페인 북서부. 주도는 브라카라 아우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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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니키아 베르베르
카르타고
마우레타니아 왕국 게툴리 부족
(제나타 연맹)
베르베르
로마 제국
팅기타나 속주
고중세 서고트 반달 마우레타니아 왕국
동로마
이슬람화 우마이야 왕조
베르베르 대항거 베르베르
노르만
살리흐 왕조
이드리스 왕조 바르가와타 이드리스 미드라르
(시질마사)
파티마 vs
우마이야
분열기 페스
미크나사
파티마-지리 왕조 바르가와타 지리왕조 베르베르
지리왕조 후 우마이야 왕조
힐랄 - 술라임 마그라와 vs 이프란 제나타
스페인
진출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베르베르
마린 왕조
중근세 와타스 왕조 사드 왕조 수스
사드 왕조
알라위 왕조
근현대 스페인 프랑스 스페인
현대 모로코 왕국 서사하라
※ T는 북부 탕헤르 일대, N은 지중해 연안 리프 지방, C는 카사블랑카, F는 페스(중북부), M는 마라케시, A는 아틀라스 산지, S는 동부 테필랄트(시질마사), WS는 서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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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Provincia Mauretania Tinginata): 아프리카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속주. 주도는 팅기스(현 모로코 탄자). 지리적으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지만, 히스파니아 관구의 일부로 통치되었다. 참고로 마우레타니아라는 말에서 무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으며 모로코, 모리타니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유바 2세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모두 능숙하여 자연사, 지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남기는 등 교양인이었다. 왕비 클레오파트라 역시 남편의 통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유바 2세의 통치 아래 왕국은 번영하여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고 교역을 진흥시키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유바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106]의 시대까지도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로마 치하의 왕국들 중 가장 부유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21살까지 로마에 살면서 로마 최상류층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의 이복언니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두 아들 등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 황족들과 함께 로마에서 살면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대가 끊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상징과 같은 군주였고,[107] 그의 가문은 로마의 클리엔테스이지만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자처한 헬레니즘 세계의 왕실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 국왕은 로마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꾸준히 로마 쪽에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신을 코끼리, 사자 등으로 비유해 헬레니즘 군주로서의 권위와 정통성을 부친 이상으로 티나게 강조했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신격화하고 자신 역시 살아있는 신으로 강조한 전형적인 헬레니즘 왕국 군주였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치하에서 진행된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번영과 부국강병의 노력과 함께 로마를 은연 중 신경쓰이게 했고 로마는 서서히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도리어 프톨레마이오스의 훌륭한 통치와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안정적인 성장세는 굳이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일을 벌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로마의 관계가 파탄이 나고, 친로마파인 이 왕국이 로마 직할 속주로 될 운명을 예견케 했다. 이런 묘한 구도 속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서기 40년 로마를 방문하는데, 당시 황제 가이우스와 로마는 그를 환영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암살한다. 이후 로마는 자신들에게 큰 위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로마 속주화 작업을 진행시킨다.
이 사건에 대해 백여 년 뒤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부와 그가 입은 보랏빛 망토를 보고 환호를 보낸 극장 관객들의 환호를 시기해 그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주장을 "전형적인 수에토니우스식의 해석"이라고 말하면서, 칼리굴라로 불리는 가이우스가 미치거나, 또는 젊은 황제와 원로원이 부와 풍요로움을 빼앗기 위한 시기심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1940년 이후 연구들에서 발표되었듯, 가이우스 황제의 속주 통치 스타일은 놀랍게도 변덕스러운 것 같았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속국을 통한 간접지배 방식을 선호했고 그는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우스 같은 방법도 과감히 사용한 황제였다. 로마 원로원 역시 이런 방법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데다, 이런 방식을 공화정 시대부터 선호해왔다. 심지어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원로원과 장군들의 입장은 보호국이자 우방국 마우레타니아의 급격한 농업 생산력 향상을 서서히 부담스러워 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군사 원정들을 경계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굳이 칼리굴라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적당히 눈치껏 했어야 했는데, 이 국왕은 자신의 로마 내 입김을 강화시키면서 칼리굴라와 로마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칼리굴라 제거 계획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로마 내정과 프린키파투스 체제 안정성에까지 깊이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시대였다고 해도 결과는 뻔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108] 따라서 "칼리굴라가 안토니우스 피가 흐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앞뒤 안 가리고 죽이고 봤다"는 고대기록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하여 로마와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이런 속사정 때문에, 더 이상 밑에 두고 관리가 어려워진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고 마우레타니아를, 더이상 밑에 두고 관리가 어려워진 보호국으로 결론 내리고 속주로 만들기 시작한다. 당연한 말인데 허무하게 왕이 로마를 방문했다가 살해당하자, 로마의 대응에 반발한 마우레타니아에서는 대규모 베르베르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로마는 초반 생각 외의 저항과 얼마 후 벌어진 가이우스 암살 사건 등으로 고전하는 듯 했지만, 애당초 가이우스가 일을 벌이기 전부터 국력으로 충분히 제압할 힘이 있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하고 본격적으로 가이우스 암살 전처럼 로마군이 대응하자 마우레타니아에서의 대규모 봉기는 진압되고 이 일대는 끝내 속주로 편입된다. 이때 로마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둘로 나누어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를 설치하였다.

로마령 아프리카중 마지막 영토로, 8세기 초반 총독의 항복으로 상실 당했고 이후 서고트 멸망의 단초가 된다.

3.13. 지중해 도서 지역

Insulae Mediterraneae
본격 로마의 밀셔틀 3

3.14. 이탈리아

Italia
파일:Roman_Italy.gif

로마의 발상지이자 수도인 로마가 위치한 곳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까지는 로마 제국의 형식적·실질적인 본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대 개막 이후에도 로마의 법률상 본국이다. 위의 지도에서 이탈리아 내 지역 넘버링이 남쪽이 북쪽보다 앞섰으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넘버링이 뒤로 가던 것으로 보아, 이탈리아 내에서도 북이탈리아보다는 남이탈리아가 더욱 우대받았던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북이탈리아까지 이탈리아 본국으로 포섭되었던 것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넘버링을 매긴다면 영광의 1번은 당연히 로마 시와 그 주변의 라티움에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 라티움이 북쪽의 에트루리아가 아닌 남쪽의 캄파니아와 묶여 '라티움과 캄파니아'로 합칭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본국 내지 로마 공화국의 유일한 모체가 된 시기는, 기원전 87년 "모든 이탈리아 민족 및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과 완전한 권리 및 명예을 부여한다"고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민권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다. 허나 로마 공화국/제국에서 본국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규정되고 다른 속주와 그 지위가 다르게 명시된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및 지방행정 개편때부터다. 개편 당시 로마 시를 14개 구(區)로 나누었는데, 이탈리아 반도 또한 1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여기에는 11개였지만, 후대 가서 증설했다고 한다.

원래 이탈리아란 개념은 오로지 지리적인 것으로서 이탈리아 반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동맹시 전쟁 이전에는 정치적 행정적으로 본국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명확하게 정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동맹시 전쟁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는 도시국가로서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 연합체인 로마 연합 그리고 여러 로마의 사유지와 에트루리아 족, 삼니움 족 등의 부족국가 또는 그 영토들이 섞인 짬뽕과도 같은 상태였다. 또한 로마 연합의 동맹국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 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라틴 시민권[111]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민족을 포용한 다는 점에서 굉장히 장점인 제도였지만 라틴 시민권을 로마 시민권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되어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세계 곳곳에 속주를 두게 됨으로서 동맹국 시민에 대한 역차별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포에니 전쟁 때 끌려온 카르타고인 소년 노예가 능력만 좋으면 주인의 신뢰를 얻고 장성하여 자유를 구입할 수 있었고 그 소년의 자식이나 손자대에 가서 일정 재산을 갖추게 되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 시민은 영원히 라틴 시민권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로마 연합 초기에 로마에게 정복당한 동맹시들은 병력 지원을 구실로 한 병력 징발은 당했을지 언정 병력 징발 외 추가적인 배상금이나 노예화, 약탈, 조공도 없었으며 전리품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갖게 된 해외 속주 영토 및 영토의 생산물은 점점 로마가 독식하게 되고 동맹시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로마의 동맹시들이 서서히 불만을 갖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되자 기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이러한 불만 및 사회적 문제를 막기 위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자고 하였으나 기득권 층은 물론 무산자 로마 시민까지 반대하였다.[112] 반대만 하면 모를까 기득권 층은 드루수스를 살해해 버리는 짓을 저질러 버렸고, 중재 역을 해줄 드루수스가 사라지자 동맹시 및 이탈리아의 부족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게 된다. 이를 동맹시 전쟁이라 부른다.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독자적 수도(코르피니움), 독자적 국명(이탈리아), 독자적 화폐와 상징(로마의 늑대에 대비되는 이탈리아의 황소)을 만들었다고. 이 전쟁은 마리우스, 술라, 크라수스, 폼페이우스[113] 등 로마의 쟁쟁한 정치가들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114]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내고 민회의 찬성을 얻음으로써 동맹시 전쟁은 종결된다. 동맹시 전쟁의 결과로 한니발침공 했을 때도 굳건하였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의 연합체인 로마 연합은 해체되고, 로마 연합을 이루던 도시들은 모두 합병되어 본국 이탈리아의 각 지방을 구성하게 된다.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전환이 되었으며, 한 국가 그 자체 이기도 하였던 로마는 영토국가의 수도가 된다. 그리고 합병된 도시 국가들을 가리키던 단어인 무니키피움(municipium)은 본국 이탈리아 내의 각 지방으로 의미가 변했다가, 오늘날 영어의 municipal, 즉 기초자치단체의 의미로 정착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이후를 기준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관습 및 법률상 본국으로 명시된 지역인 만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편 전까지 로마 황제와 로마 정부에게 속주와 구별되는 본국으로 대우받았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시작된 여러 조치들이 베스파시아누스 이래, 현직 로마 황제가 반드시 해야 할 덕목이자 의무가 되었던 것이 컸다. 그러나 황제들이 이 의무를 하지 않더라도, 법률상 본국 이탈리아에 대한 특권 보장이 규정된 터라 본국 거주 로마시민권자들은 속주 거주 로마시민권자와 달리 누리는 혜택이 많았다. 먼저,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 시민권자는 직접세를 내지 않았다(다만, 직접세 외의 상속세, 토지재산세, 노예세 등은 부과됐다). 또 이탈리아는 다른 속주들과 달리 역대 황제와 원로원, 정부에게 각종 인프라(도로, 항만, 수도교, 하수시설 등)를 제공받고, 모든 공공건축물 사용 혜택 역시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하게 제공됐고, 로마 거주 로마시민권자는 아우렐리아누스의 개혁 전까지는 매일 식료품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3세기의 위기 동안 이탈리아가 황제 교체 무대가 되고, 전염병과 이민족들의 침공으로 사회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수도 로마의 중요성은 떨어지고 대신 북이탈리아 평원의 메디올라눔, 라벤나 등 지방도시들이 중심지화되고[115],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를 제거한 이후부터 시작되는데,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래에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법률상 본국 정도로 그 위상이 하락하게 된다. 그러다가 후기 로마제국의 중심이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이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에서 그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실질적인 본국 지위는 상실하게 된다. 그렇지만 420년대 초까지는 어쨌든 제국의 발상지이자 서로마의 중심으로 형식상 지위는 유지했고, 서로마 제국 시기까지도 여전히 서로마 관할 정부의 중심지였다.

4. 고대 로마 후기/중세 초기[116]의 지방행정 체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의 로마 행정구역 전도. 260년 발레리아누스에데사 전투 패배와 생포로 동쪽 국경이 꽤 밀려 있었다가, 오히려 사산 페르시아 쪽으로 상당히 멀리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98~299년 갈레리우스사탈라 전투 승리와 크테시폰 일시 점령 이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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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즉 아르카디우스·호노리우스 형제 때의 로마 행정구역 전도. 빨간 속주 세 곳은 100여개의 속주들의 장관 중에서도 프로콘술 급으로 급이 가장 높은 곳이며[117], 문민 원로원 귀족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부임되는 곳이었다. 원수정기의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라는 개념 자체가 그 동안의 제국 관료제와 지방행정의 발달로 거의 사라지고 나서도 원로원 속주들 중 마지막까지 특별히 남아있었던 곳으로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라인·도나우 강과 동방 국경 모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평화로웠고, 로마의 영토가 된 시점이 기원전 2세기 중·후반까지 거슬러올라가서 주변 다른 지역보다 로마령으로 지낸 기간이 제법 길었으며[118], 문명의 역사가 깊은 동시에 부유한 곳으로서[119], 문관 입장에서는 완전히 좋은 요직이었고, 무관 입장에서는 너무 평화로운 나머지 전공을 쌓을 수가 없어서 한직(...)인 곳이다. 상주병력도 정규 군단이 아닌, 오늘날로 따지면 경찰이나 치안대 정도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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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황제(Augustus)와 2명의 부황제(Caesar)[120]가 제국 영토를 4분하여 분담 방위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 정제를 맡고, 서방 정제는 막시미아누스, 동방 부제는 갈레리우스, 서방 부제는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방위하게 되었다.

각 황제들의 담당 지역은로 분담되었으며, 각 지역을 총 12개 관구(Dioecesis)[121]로 나누고 관구 밑에 속주를 두었다. 대신 속주의 규모를 작게 하여 숫자가 대폭 늘어나게 된다.[122]이는 보다 느슨하게 운영해도 되던 제정 초기 때에 비하여, 외적이 강해졌으며, 또한 한계에 도달한 영토확장을 포기하고 수비 위주가 된 지도 제법 시일이 흘러서, 영토확장에 수반되는 외부에서의 약탈경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국내 지방에 대해서 행정력의 밀도를 높이고 정교화할[123]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주를 잘게 쪼개서 반란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새로 생긴 보다 큰 단위의 민정·군정직인 프라이펙투스, 코메스, 마기스테르, 비카리우스 등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로는 마찬가지였다는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구 모이시아 관구가[124] 마케도니아 관구와 다키아 관구로 분리되었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이집트가 오리엔트 관구에서 독립 및 신설되어 최종적으론 14개 관구로 정립된다.[125] 즉 4개의 Praefectura Praetorio[126] - 12~14개의 관구- 101~119개의 속주로 3단계의 지방행정이 정립된 것이다.

대관구의 장은 종전의 근위대장에서 이름이 유지되는 Praefectus Praetorio가 맡게 되었다. 단 중앙직과 지방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익숙한 현대와는 달리 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또한 직위의 유래 자체가 로마 시의 근위대장이라는 중앙직이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지방관은 전혀 아니었다. Anthemius (praetorian prefect), 참고로 동명이인인 후대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외조부) 문서에 의하면, 이 직위에 있는 405년에서 414년까지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성벽(테오도시우스 2세의 통치기간이라 후대에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도 불리는) 증축을 책임졌고, 아르카디우스 말기과 테오도시우스 2세 초기의 실질적인 섭정(effective regent)이었을 정도이니 지방관에 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동서로마의 각 수도를 끼고 있던 이탈리아와 동방 대관구의 치소는 다름아닌 수도 그 자체이며, 한편 그 프라이펙투스에게는 산하 지방의 통치보다는 수도에서의 중앙정치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측근들이나 비카리우스 등 산하의 지방관들에게 지방통치를 보다 많이 위임했다.[127] 반면 수도를 끼고 있지 않던 일리리쿰과 갈리아 대관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Praefectus Praetorio가 점차 최상위 지방관스럽게 성격이 변모하는 현상은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시작되었다.[128]

한편 관구의 장은 일반적으로 Vicarius로 불렸다. 단 안티오키아에 소재했던 동방 관구장은 Vicarius 대신에, 동급의 무관직이었던 Comes로 불렸는데, 이는 범지중해적인 판도 형성 후부터 로마 주변의 체급을 갖춘 유일한 문명국이었던 이란계 국가와의 상시적인 대치 상태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밑 속주의 장은 지역의 위상에 따라 여러 칭호로 나뉘었다. 한국사에서 고을의 위상에 따라 일반적인 행정구역이 부목군현으로, 그 장이 각각 부사, 목사, 군수, 현감으로 나뉘었고 그 위에 한성부의 판윤(서울시장)과 유수부의 유수가 있었던 것과 유사하게, Notitia Dignitatum 기준으로 동서로마 합산 36곳의 Consularis급 속주, 5곳의 Corrector급 속주, 71곳의 Praeses급 속주로 나뉘었고(위상은 서로마에서는 Consularis > Corrector > Praeses, 동로마에서는 Consularis > Praeses > Corrector였다.)[129] 그 위에 프라이펙투스를 둔 로마 및 콘스탄티노플 시와[130], 프로콘술을 둔 아시아, 아프리카, 아카이아 3곳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Consularis급 및 Praeses급의 속주는 수십 곳이었는데 Corrector만 5곳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Corrector 또한 고대 후기의 정규 관제라기보다는 그 이전 제도의 잔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운영상으로는 겸직이 많아서 프라이펙투스(대관구의 장)가 해당 대관구의 치소를 끼고 있는 관구의 장(원래대로라면 비카리우스)를 겸했던 경우도 있었고,[131] 정확히는 그런 경우도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트라키아를 제외한 곳에서는 다 그랬다고 한다.[132] 비카리우스가 해당 관구의 치소를 끼고 있는 속주의 장(원래대로라면 프라이토르 등)을 겸했던 경우도 제법 보였다. 한편 급박한 사태에서 3단계 보고·명령체계를 지키기가 어려운 나머지, 비카리우스는 위아래에서 치이게 되어,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원로원 속주니 황제 속주니 이런 구분에서 아예 열외되어 황제의 직속으로 운영되어 오던 이집트 관구와[133] 수백년간 거의 유일하게 로마 주변의 큰 체급을 갖춘 문명국이었던 이란계 국가를 최일선에서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100여개가 넘게 나뉘어졌던 개별 속주급으로는 상대도 안 되고 그걸 크게 한 단위 묶은 관구급으로나 상대해야 했던 동방 관구[134]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5세기 말, 6세기에 사문화되기 시작했다. 속주가 100여개나 되니 그 각 속주 총독들은 그만큼 관할구역이 좁아서 현장에 밀착되어 있었던 한편, 프라이펙투스들은 로마 전국에서도 권력 순위로는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들이었던 가운데, 비카리우스 급은 그 사이에서 포지션이 애매해졌던 것이다.[135]

서로마가 망하면서 4개 중 서쪽의 2개를 잃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때 이탈리아 대관구의 전역과, 갈리아 대관구의 일부였던 스페인 동남해안을 찾았다.[136] 하지만 서로마 시절과 다르게, 신설된 이탈리아 대관구는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시키고, 북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대관구[137]를 신설했다가, 580~590년대에 둘 다 총독령(Exarchatus)으로 전환했다. 차이는 종전의 문-무 분리와 달리 문-무가 일원화되었던 것으로서, 종전의 지역 군사령관(Magister Miletum)이 문민 대관구장(Praefectus praetorio)의 역할까지 흡수한 것이다.[138] 이탈리아 대관구는 그 유명한 라벤나 총독부가 되며, 아프리카 총독부도 총독제가 실시되며 설치되었다. 엑사르카투스는 총독령 정도로 번역되며, 원래 서로마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만 두었고 종전의 3단계 행정구역이 총독령-속주 2단계로 간소화되었다. 원(原) 동로마 지역은 총독령이 아닌 시리아와 이집트를 잃고 나서 7세기 중반 콘스탄스 2세 때 테마로 바꾼다. 서방의 총독령들은 테마로 바꾸지 않고 총독령으로 두다가, 7세기 말 ~ 8세기 초에 북아프리카를, 8세기 중반에 로마 시와 라벤나를 비롯한 중북부 이탈리아를 전부 잃고 남이탈리아도 이슬람 세력과 랑고바르드, 프랑크 세력 가운데에서 몇몇 거점을 가까스로 지키다가 반격을 시작해 다시 어느 정도 확보한 9세기 후반 바실리오스 1세 ~ 레온 6세 때 남이탈리아에도 테마를 설치했다. 테마는 종전의 3단계 행정구역과 달리 1단계로 간소화되었다.

한편 다른 시각에서 보면, 소위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재정복한 구 서로마 지역 중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남이탈리아(정확히 말하면 그 중에서도 메시나 해협 기준 동쪽) 지역은 6세기 후반 총독령 설치로 일종의 특수 행정구역이 된 후[139] 300년이 지나서 다시 원 동로마 지역과 같은 테마의 형태로 정규 행정구역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140], 나아가서, 구 서로마 지역 중에서도 콘스탄티노플 본국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고 유사시 구원군을 효과적으로 파견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라거나 콘스탄티노플 본국과 계속 같은 노선을 갈 것인지 아니면 독자 노선을 탈 것인지에 대한 정체성 등의 측면에서 남이탈리아 지역만을 그나마 건사해서 동로마에 온전히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메시나 해협 너머의 남서부 티레니아 해안(아말피, 나폴리 등)과 사르데냐 섬은 시칠리아가 827년부터 이슬람 세력의 손에 조금씩 들어가면서 본국과의 교통 통신이 어려워진 탓에, 구 롬바르드 왕국의 남쪽의 잔해들인 롬바르드계 소국들와의 밀고 당기기는 있었지만 완전히 침탈당한 것도 아니었고, 한편 앞장서서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직할이 거의 불가능해져 차차 독립하게 되었다.

※ 대관구명의 경우 동로마 지역에는 그리스어까지 병기하나 서로마 지역에는 병기하지 않는다.

4.1. 동방 대관구


치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수도를 끼고 있기에, 이 동방 대관구의 장(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직위는 지방관이라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총리에 더욱 가까웠다.[141]

4.1.1. 동방 관구


치소는 안티오키아였다. 400년 당시에는 산하에 15개의 속주를 두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황후였던 테오도라를 기념하여 라오디케아 근처의 시리아 I 및 II 속주의 일부를 각각 떼서 '테오도리아스 (Theodorias)'라는 속주를 새로 만들어 주어서(...) 산하 속주가 16개로 늘어났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소아시아의 동남부 일부(킬리키아 등) 지역은 폰토스나 아시아가 아니라 여기에 속해 있었는데, 타우루스 산맥이라는 천연 경계 때문이었다. 후대 아랍 이슬람 세력의 침공도 동로마가 타우루스 산맥에 의지해서 소아시아 내부의 영토화를 어찌저찌 막았기 때문에, 경계가 이와 같이 형성되어서 킬리키아 지역은 10세기 중반 동로마가 타우루스 산맥을 완전히 넘어서 고토 탈환을 시도할 때까지[142] 7세기 중반부터 300여 년간 이슬람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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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폰투스 관구


치소는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소아시아 북부의 아마시아였다고도 하고, 위의 로마 전도에 의하면 'Pontica'라고 붙어 있는 하늘색 부분에 유일하게 표시된 니코메디아였을 수도 있다. 소아시아의 동·북부와 아르메니아를 관할했다. 400년 당시에는 산하에 11+2개의 속주를 두었다. 마치 깍두기처럼 '+2'라고 표시한 이유는, 가장 동쪽의 'Armenia Maior'와 'Satrapiae' 이 2곳에는, 다른 지역은 물론 바로 옆의 'Armenia I'과 'Armenia II'에도 없는 빨간 작은 글씨가 써 있는데, 이들은 아르메니아 계열의 소국들로서[143] 밑의 지도는 400년 시점인데, 이 영역이 로마령으로 확정된 것은 387년의 아킬리세네 조약 (Peace of Acilisene)으로서 그리 얼마 되지 않았던 데다가 유프라테스 강 너머이고 산악 지대였던 관계로[144] 아직 직할통치가 어려웠고 토착 세력이 셌던 까닭에 상당한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145] 단 'Armenia Maior'는 자치의 수준이 가장 낮은 'Civitas stipendaria'로 분류되어 꼬박꼬박 로마 정규군에 인원을 보내야 했던 등 직할 속주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반면[146] 'Satrapiae'는 자치의 수준이 보다 높은 'Civitas foederata'로 분류되어, Stipendaria와는 달리 요청을 받아야 비로소 인원을 보내도 되었으며, 신속(臣屬)의 표시로 황제에게 금관을 바치고 그 답례로 붉은 신발을 포함한 왕실 아이템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즉 완전히 로마 국내였다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외국으로 간주되었다고 볼 수 있다.[147][148] 지명만 봐도 Satrapiae는 그 옛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사트라프에서 유래했던 현지 아르메니아계의[149] 세습지배자들이 다스리는 '사트라프령(領)'이라는 뜻으로서 어느 정도 자치가 이루어지는 특수구역이라는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제노 황제 때인 485년에 이 사트라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그 대가로 자치 및 직책 세습의 권한을 빼앗기고 사실상 Armenia Maior의 stipendaria급으로 격하되었다.[150] 50여년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6년에는 이 stipendaria 취급까지 폐지되어 정식 속주가 되었고 또 북쪽의 Pontus Polemoniacus까지 포함시켜서 5개 구역 간의 경계조정을 거쳐 4개로 나누어 제1, 제2, 제3, 제4 아르메니아 속주로 바뀌었다.[151] 즉 종전의 11+2개가 12개가 된 것이다. 한편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끼고 있는 비티니아 속주 바로 옆에 호노리아스(Honorias) 속주가 있었는데 이는 눈썰미가 있으면 보이겠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기 아들 호노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호노리우스는 서로마를 맡게 되어 자기 이름이 붙은 속주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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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도는 황족이 아니면서 찬탈바흐람 추빈을 591년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페르시아 제위계승 분쟁에 개입해 끌어내리고서 호스로 2세를 복위시킨 대가로 할양받은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영토를 포함한 국경을 387년 아킬리세네(Acilisene) 조약 이래 기존 국경과 대비해서 그린 지도이다. 이 영역은 동쪽으로 반 호수까지 포함했을 정도로 상당한 면적이었다.[152] 하지만 얼마 안 되어 602년에 찬탈당해 죽은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호스로 2세가 명분으로 내걸고 전쟁을 개시해서 도로 다시 회수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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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아시아 관구


치소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페수스였다. 소아시아의 서·남부와 에게 해의 섬 대부분을 관리했다. 산하에 치소 에페수스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서해안 대부분을 끼고 있는 같은 이름의 '아시아 속주'를 비롯하여 11개의 속주를 두었다.[153] 소아시아 본토 부분은 하나도 없이, 에게 해의 섬만을 관리하는 속주가 이름도 정직하게 '섬들'[154]로 편제되어 있었다. 참고로 가장 남쪽 끝의 로도스 섬이 이 '섬들' 속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155] 하지만 그리스 쪽에 가까운 섬들 일부와 크레타는 마케도니아 관구에 속해 있었다.
파일:Dioecesis_Asiana_400_AD.png

4.1.4. 트라키아 관구


치소는 필리포폴리스(現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다면 산하에 6개의 속주를 두었다. 콘스탄티노플이 359년 로마와 동급의 수도 내지는 특별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156] 트라키아 소속이었다. 주목할 점은, 동로마의 전통적인 유럽 영역(≒ 발칸 반도) 중에서는 트라키아만이 일리리쿰이 아닌, 마르마라 해 너머와 함께 동방 대관구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소속 관구와 이름이 같은 '트라키아 속주'도 있었고 관구의 치소 필리포폴리스도 거기에 속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수도권이었기 때문에 필리포폴리스 근처를 중심부라고 하기에는 어렵다.[157] 또한 오늘날 기준으로는 유럽의 동남쪽 끝인,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속주의 이름이 에우로파, 즉 '유럽'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한편 산하 속주 중 제2 모이시아(Moesia II)가 보이는데, 정작 대응되는 제1 모이시아(Moesia I) 속주는 트라키아 관구가 아닌 일리리쿰 대관구의 다키아 관구에 속해 있다. 원래는 사실 붙어 있었는데 아우렐리아누스 때 제1 모이시아의 일부를 떼어 새로운 속주를 만들면서 떨어지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다키아 관구 참조.
파일:Dioecesis_Thraciae_400_AD.png

4.1.5. 아이깁투스(이집트) 관구


치소는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산하에 6개의 속주를 두었다가(리비아(키레나이카) 2곳, 좁은 의미의 원래 이집트 4곳) 좁은 의미의 아이깁투스 속주, 아우구스탐니카, 테베스를 각각 2개씩으로 추가 분할하여 9개로 늘었다. 예전과 똑같이 수도에(단 이 때는 고대 후기라 콘스탄티노플로)[158] 곡물 배급을 떠안았다. 참고로 테베스는 로마 전국에서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러한 위치로 인해 속세와 거리를 두고자 했던 은자들과 수도승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고 한다.[159] 오리엔트 관구 및 대관구에 속해 있었으나, 380년경 이집트 관구가 분리신설되었다. 現 리비아의 동부지역인 키레나이카 지역도 여기 속해 있었던 반면, 중·서부 지역인 트리폴리타니아는 아프리카 관구에 속했다. 즉 각각 동로마 및 서로마에 속했다는 얘기도 되는데, 이 구분은 해당 시대에 갑자기 만들어졌던 것이 절대 아니며,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기원전 631년에 그리스인들이 중심도시인 키레네를 세웠으며, 그 점이 반영된 그리스 신화 상의 동명의 여왕도 있었을 정도이니 키레나이카는 오래 전부터 그리스 문화권이었던 반면, 트리폴리타니아는 로마 이전에는 페니키아(카르타고)-베르베르 문화권이었고 그리스와 거의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일:Dioecesis_Aegypti_400_AD.png

콰이스투라 엑세르키투스(Quaestura Exercitus): 536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트라키아 관구의 다뉴브 하류의 최전방 두 속주와 아시아 관구의 소아시아 서-남해안 중 세 속주를 따로 떼서 만든 특수행정구역이다. 이 지역의 장은 이름대로 Quaestor, 즉 고대 로마의 재무관이었지만 원래 재무관과 달리(콘술(집정관)은 물론 법무관, 안찰관 밑이었다.) 대우는 매우 높아서 마기스테르 밀리툼과 동급이었다. 다뉴브 하류 지역이 잦은 외세의 침략 때문에 주둔군을 부양할 경제력도 뽑아내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지자, 후방 지역의 일부를 떼어서 다뉴브 하류 주둔군만을 전담하여 부양하게끔 묶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그 경로는 당연히 에게 해-마르마라 해-흑해를 통한 해로였다. 이로써 다뉴브 하류의 경제난이 다소 완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말고도 제국 전체에 걸쳐 관구(Diocese)를 전부 폐지했었던 등 지방행정체제를 전면적으로 갈아엎었다가 부작용이 커서 도로 원복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유스티니아누스 사후인 570년대까지 이 콰이스토르 직책이 존속했었던 것이 보인다고 하니 소기의 성과는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160] 자세하게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이래 견지된 문-무 간 분리 원칙으로부터, 문-무가 다시 일체화된 후대 동로마 테마 제도로 변화하는 과정의 효시에 해당된다. 7세기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다뉴브 하류를 상실하여 형해화되었다.
파일:Quaestura-Iustiniana-Exercitus.png

4.2. 일리리쿰 대관구


치소는 판노니아가 이탈리아 대관구로 붙는 379년까지는 시르미움, 379년부터는 테살로니키였다. 모에시아 관구를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뉴브 강을 낀 내륙 지역의 다키아 관구와, 에게 해를 낀 그리스 지역의 마케도니아 관구로 분할했다. 눈에 띄는 것은, 속주 중 스위스-오스트리아 쪽의 'Noricum Ripense'와 불가리아 쪽의 'Dacia Ripensis'가 보이는데, Ripense/Ripensis는 라틴어로 강변이라는 뜻으로서 그 강은 당연히 다뉴브 강이고, 근처에 각각 세트로 'Noricum Mediterranum'과 'Dacia Mediterranea'이 보이는데, Mediterranum/Mediterranea는 당연히 지중해를 의미한다. 둘 다 각각 남쪽이라 상대적으로 지중해에 가까워서 붙은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지중해 해안가가 아니라 내륙이라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파일:Illyricum_&_Dacia_-_AD_400.png
일리리쿰과 다키아 관구가 같이 나온 지도.

4.2.1. 일리리쿰 관구[161]


※ 일리리쿰 관구는 서로마와 동로마가 동시에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일리리쿰 대관구에 속하기도 이탈리아 대관구에 속하기도 하였으므로 편의상 중복기재한다.

치소는 시르미움이었으며 산하에 7개의 속주를 두었다. 그런데 시르미움은 관구 내에서도 동쪽 끝의 다뉴브 강변 국경에 있었다. 여하튼 대체로 서로마의 영역이었지만, 위의 4두정치 당시 지도에 동방 부제의 영역으로 들어가 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따져보자면 동로마 영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162], 동로마도 이따금씩 영유권을 주장하는 지역이었으며[163], 근현대 학계에서 정식 서로마 황제로는 잘 간주되지 않으나, 동로마의 인준을 받았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흔히 말하는 476년 서로마 멸망 후에도 480년까지 웅거하던 곳이었다.

주목할 점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좁은 의미의 일리리쿰은 원래 이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164] 서로마 쪽으로 할당하기로 동서로마가 합의하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판노니아로 바뀌면서 이탈리아 대관구 산하로 넘어간 반면, 밑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만 기존의 일리리쿰 대관구 산하로 남아 있으면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의 사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2.2. 다키아 관구


치소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였으며 산하에 5개의 속주를 두었다. 일리리쿰이 이탈리아 대관구로 소속이 변경되고 나서로 보인다. 한편 산하 속주 중 제1 모이시아(Moesia I)가 보이는데, 정작 대응되는 제2 모이시아(Moesia II) 속주는 다키아 관구가 아닌 동방 대관구의 트라키아 관구에 속해 있다. 사실 이 곳이 원래 다키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원래 다키아는 다뉴브 이북 지역) 여기에 다키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과정과, 이 두 모이시아가 부자연스럽게 서로 떨어져 있게 된 점은 연관이 매우 깊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방어선 단축을 위해 다뉴브 이북에서 철수하면서[165] 제국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되니 그 땅에 남고 싶어한 사람들은 남게 허락한 후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원래 다키아의 바로 다뉴브 강 너머인 모이시아 슈페리오르(Moesia Superior; 상 모이시아)의 동쪽 부분으로 내려가서 정착시키고 그 일대를 따로 떼어서 다키아 아우렐리아나(Dacia Aureliana)로 새롭게 획정했다. 이렇게 된 바람에 이 새 다키아가 모이시아 슈페리오르와 인페리오르[166] 사이에 껴서 두 모이시아가 분리된 것이며, 이 새 다키아에 소재한 세르디카를 중심지로 하여 몇몇 주변 지역과 함께 출범한 것이 이 다키아 관구이기 때문에 원래 다키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키아란 이름이 이어진 것이다.

4.2.3. 마케도니아 관구


치소는 대관구와 마찬가지로 테살로니키였으며 산하에 6~7개의 속주를 두었다. 대강 좁은 의미의 원래 그리스 + 에피루스 + 테살로니카 주변의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6~7개인 이유는, 위의 로마 전도에는 테살로니카를 낀 마케도니아 속주가 크게 하나로 합쳐져 있으나, 이후 테살로니카와 주변의 해안 지역이 제1 마케도니아(Macedonia I) 속주로, 내륙 지역이 제2 마케도니아(Macedonia II) 속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원래는 희한하게도 바다 너머의 키레나이카와 합쳐서 복합 행정구역을 이루던 크레타가 이 때부터 비로소 그리스와 같이 마케도니아 속주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관구 산하의 아카이아(Achaea)[167] 속주의 치소가 아테네가 아니라 코린토스라는 점이다.[168] 공화정 말이나 제정 초만 해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둘만이 역사성을 인정받아서,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상당한 자치권과 특수지위를 부여받은 바 있었는데, 그 때와 구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는 동로마 때까지도 이어져서,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되면서 생긴 펠로폰네소스 테마에서도 스파르타를 제치고 코린토스가 치소였고, 헬라스 테마에서도 아테네를 제치고 테베가 치소였다가 테베가 불가리아 제1제국시메온 1세가 동로마와 14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을 때[169] 그리스 지역으로 남하하며 테베를 함락시키고 파괴한 후에야(...) 아테네가 치소가 되었다. 그마저도 확고하지 못해서 이따금씩 지도에 나온 테살리아 속주의 치소였던 라리사가 헬라스의 치소였던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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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세기 동로마 시대의 발칸반도: 시르미움이 서북쪽 끝에 있고, 그 너머의 경우 해안인 달마티아는 유지하고 있지만 내륙은 통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발칸 지역을 슬라브족의 이동불가리아 제1제국의 흥기로 뺏겼다가 다시 정복한 바실리오스 2세 때에도, 시르미온(시르미움)이 실제 영역의 서북쪽 끝에 있었고, 그 너머 (현대 국가가 아닌, 지도 속 중세 당시의)'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는 실제 영역은 아니고 속국 정도로 느슨하게 거느렸었던 점을 볼 때, 두 지도에서 공통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동로마의 경우' 발칸반도의 내륙은 시르미움 정도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 한계이며, 그 너머의 판노니아 및 달마티아의 내륙지역, 오늘날 국가로 말하자면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내륙지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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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탈리아 대관구

4.3.1. 이탈리아 관구


둘로 나뉘었던 것은 서로마 시대였고, 동로마의 수복 이후로는 딱히 둘로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171] 어차피 고트전쟁 최종 승리 후 십몇년 밖에 안 지나서 568년에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을 가져가기도 했고. 그런데 북부와 남부의 구분은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운용상의 것이었고, 제도적으로는 남북 이탈리아는 하나의 관구였던 가운데 단지 비카리우스를 둘 두었을 뿐이라고 한다.[172] 오도아케르 및 동고트 치하의 60년 동안에도 이 이탈리아의 지방행정 직제가 대체로 유지되었고, 게르만족 본인들이 아닌 구 서로마 원로원 귀족들을 프라이펙투스, 비카리우스 등 문민 행정직에 앉혔다고 한다. [173]

4.3.2. 아노나리아(북부) 관구


실질적 수도[174]였던 메디올라눔(現 밀라노)과 라벤나를 낀, 서로마의 실질적 수도권이었지만,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는 아니었고 오늘날의 이탈리아도 아닌 라이티아(Raetia, 現 스위스 동부와 오스트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치소는 서로마의 (실질적) 수도를 똑같이 따라 메디올라눔 → 라벤나였으며 산하에 7개의 속주를 두었다.

4.3.3. 수부르비카리아(중남부[175]) 관구


'Suburbicaria'의 뜻 자체가 'under the City'(=Rome)으로 로마 시의 직할지라는 뜻으로서 당연히 치소는 로마 시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프라이펙투스를 따로 두어서 특별시 비슷하게 간주되던 로마 시를 제외한다면[176] 산하에 10개의 속주를 두었다.(이탈리아 본토 7개, 섬 3개[177]. 이탈리아 본토는 소위 서로마 멸망 이후 잘 알려진 대로 오도아케르-동고트 왕국의 지배에 있었던 반면, 이 섬들은 반달 왕국의 지배에 있었다.) 이 곳은 서로마의 명목상 수도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여기서 로마 시가 북이탈리아보다 남이탈리아와 더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이 엿보이는데,[178] 실제로 카이사르 때까지는 루비콘 강 이북의 북이탈리아는 갈리아 키살피나라는 이름으로 본국이 아닌 속주였고 그 이남의 중남부만이 본국이었는데, 카이사르 사후 제2차 삼두정치 시절, 즉 황제가 되기 전의 '옥타비아누스' 시절에 아우구스투스가 속주에서 승격시켜서 종전의 본국에 합쳤고 그 본국에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붙인 후 11개의 위에서도 나온 무니키피오[179]로 나누었다. 뒤에 3개가 추가되어 14개가 되었다. 이것이 '이탈리아'라는 이름이 로마 행정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쓰인 것이다. [180] 뭐 어쨌든 로마 제국 시기에 북이탈리아보다 더 잘나가고 우대받은 남이탈리아 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그 관계가 역전되었으니 격세지감이라 할 것이다.

4.3.4. 아프리카 관구


치소는 카르타고였으며 산하에 6~7개의 속주를 두었다. 아래에 보이는, 카르타고를 끼고 있는 좁은 의미의 아프리카 속주(= Zeugitana)의 바로 서쪽에 있는 곳이 누미디아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북쪽 해안가의 'Cirtensis'와, 남쪽 내륙의 'Militiana'로 나뉘어 있었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시 하나로 합쳤다. 그 외에도 북아프리카 가장 서쪽의 'Mauretania Tingitana'(현 모로코)는 혼자 스페인 쪽의 관구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530년대 동로마의 재정복 이후에는 이탈리아 대관구와 따로 아프리카 대관구[181]를 세웠다가 마우리키우스 때 총독령[182]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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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일리리쿰 관구[183]


※ 일리리쿰 관구는 서로마와 동로마가 동시에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일리리쿰 대관구에 속하기도 이탈리아 대관구에 속하기도 하였으므로 편의상 중복기재한다.

치소는 시르미움이었으며 산하에 7개의 속주가 있었다. 그런데 시르미움은 관구 내에서 동쪽 끝의 다뉴브 강변 국경에 있었다. 여하튼 대체로 서로마의 영역이었지만, 위의 4두정치 당시 지도에 동방 부제의 영역으로 들어가 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따져보자면 동로마 영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184], 동로마도 이따금씩 영유권을 주장하는 지역이었으며[185], 근현대 학계에서 정식 서로마 황제로는 잘 간주되지 않으나, 동로마의 인준을 받았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흔히 말하는 476년 서로마 멸망 후에도 480년까지 웅거하던 곳이었다.

주목할 점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좁은 의미의 일리리쿰은 원래 이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186] 서로마 쪽으로 할당하기로 동서로마가 합의하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판노니아로 바뀌면서 이탈리아 대관구 산하로 넘어간 반면, 밑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만 기존의 일리리쿰 대관구 산하로 남아 있으면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의 사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4. 갈리아 대관구


치소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Augusta Treverorum, 現 독일 트리어)였다가, 407년[187]에 아렐라테(Arelate, 現 프랑스 아를)로 옮겼다.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구 로마 직제에 그대로 올라탄 동고트 왕국 때까지 형식적으로 존속했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선진국들이 모여있어 가장 소득이 높고 선진적인 지역이지만, 로마 당시에는 정반대로 4개의 대관구 중 가장 후진적인 지역이었다.

4.4.1. 갈리아 관구


치소는 대관구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이었으며, 산하에 10개의 속주를 두었다. 한편 갈리아라는 이름은 남부 대신 북부인 이 곳으로 이어졌다. 대강 오늘날의 중·북부 프랑스, 스위스 서부, 벨기에 전역, 네덜란드의 라인강 이남·이서, 독일의 라인강 이서 지역이다. Notitia Dignitatum이 작성되었던 당시에는 이 행정구역은 거의 형해화되어 바로 남쪽의 비엔네시스 관구에서 통합 운영되었다고 한다. [188]

4.4.2. 비엔네시스 / 셉템 프로빙키아(7개 주) 관구


치소는 부르디갈라(Burdigala, 現 프랑스 보르도)였으며, 이름대로 산하에 7개의 속주를 두었다. 윗 지도 프랑스 중남부의 'Septem Provinciae'가 여기다. 비엔네시스였다가 셉템으로 바뀌었는데 뜻은 7이라는 뜻이다. 저 부분을 잘 보면 7개로 쪼개져 있다. 여기서 따서 프랑스 중남부 지역을 칭하는 '셉티마니아'라는 역사적 지명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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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히스파니아 관구


치소는 아우구스타 에메리타(現 스페인 메리다)였으며, 산하에 6~7개의 속주를 두었다. 위의 사두정치에서는 이탈리아 대관구 쪽에 속해있었으나, 그 시절에는 정제와 부제의 위상 차이 때문에 정제 쪽에 더 많은 영역을 할당하기 위해 이탈리아 쪽에 붙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관구들이 정제와 부제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행정구역으로 굳어지면서, 또한 이탈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가 모두 서로 월경지처럼 떨어져 있다는 운영상의 난점으로 갈리아 대관구 쪽으로 소속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북아프리카 가장 서쪽의 'Mauretania Tingitana'(현 모로코 북부)도 특이하게 아프리카 관구가 아니라 지브롤터 해협 너머 여기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7개인 이유는, 4세기 중에 발레아레스 제도가 북동부의 타라코넨시스 속주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속주로 신설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지도는 발레아레스가 분리되고 나서의 지도이다. 눈썰미가 있거나 로마에 대한 배경지식이 다소 있으면 느낄 수 있겠지만 다른 관구에 비해서 속주 하나하나의 크기가 큼직큼직했는데,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곳의 갈라이키아(現 갈리시아)와 루시타니아가 로마 전국에서 최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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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 브리타니아 관구

5. 동로마 시대 속주

5.1. 라벤나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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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아프리카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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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군관구(테마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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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발해의 행정구역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자 자체가 다르다(涑州). 또한 허생전에서 장기일본의 속주로 인구가 30만 호에 달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것 말고는 보통 고대 로마의 속주를 가리킨다.[2] 대부분 고전식으로는 프로윙키아, 교회식으로는 프로빈치아로 읽는다. 일반적인 한국어 표기는 프로빈키아.[3] 각각 프로방스/프로빈스로 발음한다[4] 대부분 고전식으로는 프라이펙투라, 교회식으로는 프레펙투라로 읽는다.[5] 대부분 고전식으로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교회식으로는 프레펙투스 프레토리오로 읽으며, 영어로는 Praetorian prefect로 번역된다.[6] 프라이토리아니가 사라진 것이지 근위대의 역할은 Scholae Palatinae(스콜라이 팔라티나이/스콜레 팔라티네)가 가져갔다. 근위대라는 개념 자체는 제대로 된 국가라면 없을 수가 없다.[7] 영어 위키백과 Dacia Aureliana 중. 'The Emperor Diocletian's tetrarchy reorganization of the empire divided Dacia Aureliana in two provinces, both part of the civil diocese of Moesia(e), under the eastern Caesar (junior emperor), whose 'quarter' became the Praetorian prefecture of Illyricum.'[8] 이후 서방통치는 사촌 율리아누스에게 맡겼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서방을 다스렸던, 그 시점에서 이미 죽은 형제들은 콘스탄티우스와 동급의 정제(Augustus)였던 반면, 율리아누스는 그에 못 미치는 부제(Caesar)였다는 것이다.[9] 아이깁투스 지역은 경우 황제 직할령. 개신교 성경에서 이집트를 이르는 애굽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바로 아이깁투스이다.[10] 에퀴테스. 원래는 보통 생각할 법한 '말 탄 무사'로서의 기사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일정한 자산과 자격을 지닌 자산가나 귀족 계층을 일컫는 말로 바뀌었다.[11] 혹은 수에토니우스가 본인이 강하게 비난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칼리굴라를 비방할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는 말도 있다.[12] 보조군 부대 편제를 2개 군단 수준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13] 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이전부터 상당한 시간을 두고 철저히 준비하고, 칼리굴라 생전부터 수뇌부 일원으로 있었기 때문이다.[14]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15]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16] 다만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 글래스고에딘버러를 잇는 선까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는 현 스코틀랜드 남부 지방이다.[17] 로마식 방어의 개념을 당시에는 리메스(Limes)라 불렀으며, 이런 리메스 시스템은 팍스 로마나의 기초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대 이탈리아의 군사전문 잡지의 이름도 이걸 따서 리메스라 한다.[18] 동로마를 주로 연구하며, 그 학계에서 젊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학자인 Anthony Kaldellis(이쪽을 전공하고 있어서 퀄리티가 높기로 유명한 모 블로그의 주인장도 이 학자의 저서를 매우 자주 언급 및 인용하고 있다. 물론 좋은 쪽으로)의 "From Rome to New Rome, From Empire to Nation-State: Reopening the Question of Byzantium’s Roman Identity," in Two Romes: Rome and Constantinople in Late Antiquity 라는 논문에도 이를 지지하는 내용이 나온다. 'New" Romans from Gaul, for instance, amazingly soon after the conquest looked back to Caesar as their "ancestor" and not to Vercingetorix.'[19] 갈리아 사투리는 켈트 억양과 프랑스 특유의 억양이 섞여 있었던 듯 하나, 푸닉 사투리처럼 발음부터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참고로 푸닉 일대의 라틴어, 그리스어 사투리는 s 발음을 ∫로 읽고 특유의 억쎈 억양이 있어 타지 출신들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고 쌍시옷 발음 역시 쉽게 못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20]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21]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22] 원래 이름은 갈리아 트란살피나(Provincia Gallia Transalpina)였으나 후에 바뀌었다.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는 Trans+Alpina로 되어 있으며, 트란스는 "반대 방향의", "변화의"란 뜻을 가진 접두사이다. 즉,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이탈리아와 반대 방향에 있는 갈리아, 알프스 산맥을 넘은 갈리아란 뜻이다. 물론 한국어판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알프스 저쪽의 갈리아"라고 번역했다. 이와 같이 지명에 트란스를 쓰는 경우는 루마니아어 넘어의 땅이란 뜻의 트란실바니아, 그리스어로 옥수스 강(아무다리야 강) 너머 땅이란 뜻의 트란스옥시아나, 요르단 강 너머 땅이란 뜻의 트란스요르단, 몰도바어로 드네스트르 강(니스트르 강) 너머 땅이란 뜻의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이 있다. 냉대동계건조기후의 이명인 트란스바이칼 기후 또한 시베리아를 기준으로 바이칼호 넘어서의 지역의 기후대를 말한다.[23]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24] XX(경기도, 충청남도, 강원도, 경상북도 등)도청영어로 XX Provincial Office라 하는데 여기서 Provincial이란 말도 프로방스처럼 프로빙키아에서 유래하였다.[25]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본가는 조부때 원로원에 입성해 부친이 의석을 세습한, 갈리아 혈통의 원로원 가문이기에 혈통적으로 맞다. 다만,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본국 이탈리아 태생이며, 일평생동안 이탈리아 반도 밖을 떠나지 않은 이탈리아 귀족으로 분류된 전형적인 2세기 원로원 세습귀족이었다. 당장 황제는 태어날 당시부터 친가와 외가의 성씨를 결합해 함께 사용했고, 유아기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으로 돌아간 어머니 품을 떠나 외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당시 로마 귀족들의 전통대로 아들이 없던 외조부에게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가문(안토니누스 가문)을 상속받았고, 안토니누스 황제와 두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 마르쿠스 황제의 아들로 손자이면서도 친딸 파우스티나의 아들 콤모두스 황제의 가문명은 아우렐리우스를 쓰면서도 풀부스 가문이 아닌, 안토니누스 가문을 입양된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가문 이름과 결합해 사용했다.[26] 한 개 군단이 약 6천 명 규모이므로 3개 군단은 약 1만 8천 명에서 2만 명 사이. 이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약 4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였다.[27] 라인강 동쪽 지역은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인해 상실되었다.[28]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통해 편입.[29] 비스와 강은 심지어 독일도 아니고 폴란드에 있는 강이다.[30]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로마의 데나리우스가 발견된 적이 있다.[31] 루비콘 강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불명이다. 루비콘 강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강이 여러 곳이기 때문.[32] 베네치아의 전신이 된 도시. 훈족에 의해 파괴된 후 유민들이 근처 섬에 베네치아를 건설하였다.[33] 참고로 키살피나의 스펠링은 Cis+Alpina인데 알피나(Alpina)는 알다시피 알프스 산맥을, 시스(Cis)는 "이쪽의", "같은 방향의"란 뜻이다. 화학에 있어서 기하 이성질체에서 같은 방향 배열이란 뜻의 시스화합물, 같은 유전자에 A, B형 인자가 모두 있는 cis-AB형, 젠더에 있어서 시스젠더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즉, "갈리아 키살피나"는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이탈리아와 같은 방향에 있는 갈리아란 뜻이고, 로마인 이야기 한국어판에선 "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고 번역해놨다. 마찬가지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개명 전 이름인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또한 Trans+Alpina로 되어 있으며, 트란스는 "반대방향의", "변화의"란 뜻을 가진 접두사로 트랜스젠더나, 트랜스지방, 변압기란 뜻을 가진 저글리시도란스 내려같은 단어들 때문에 시스보다도 잘 알려져 있다.[34]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35] 시르미움은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4등분할 때 일리리아 속주의 수도가 된다.[36] 여기서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는 수도 로마를 기준으로 해서 가깝냐(수페리오르) 아니면 머냐(인페리오르)에 따라 기준이 나뉘며, 영어 superior(우등한), inferior(열등한)의 어원이 된다.[37]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다뉴브 강 좌안(하류 방향 기준, 로마제국 영토는 주로 다뉴브 강 우안에 있다.)에 있다.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이 다뉴브 강 바깥인 슬로바키아 땅에 무얼 한 건 없지만 브라티슬라바 남쪽 근교에서 로마 제국의 국경촌 유적이 발굴된 걸로 보아 국경 거점 몇개 정도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38] 다만 마르쿠스의 사망 당시 로마는 재정적 한계에 봉착해서 콤모두스가 취소하지 않더라도 정복되었을 확률이 낮았고, 정복되더라도 단기간내에 포기될거라는 예상이 다수. 최악의 경우 보헤미아에서 도나우 군단이 소멸하여 도나우 강이 뚫리고 사실상 빈집인 그리스나 이탈리아까지 털릴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콤모두스를 최악의 황제라고 평가하는 대다수 역사가들도 "보헤미아 포기"는 크게 비판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기도 한다.[39] 이 당시 남동유럽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은 이 일대에 존재하는 하이모스(Αἵμος) 산맥에서 이름을 딴 하이모니아였다. 발칸(Balkan)이라는 지명은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크인들이 하이모스 산맥을 발칸 산맥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지역명으로 확대되면서 19세기 경부터 이 일대의 명칭으로 발칸이라는 단어가 자리잡게 된다.[40] 로마의 유명한 기병대장들이나 3~4세기의 황제 대부분은 이 지역 출신으로, 기병을 장악한 뒤에 황제가 되곤 했다.[41] 118~158년 사이에 다키아 수페리오르, 다키아 인페리오르로 분할되었다가 다시 합쳐짐[42] 보통 다키아 하면 도나우강 이북 루마니아를 떠올리지만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었다. 지금의 루마니아는 물론 몰도바, 우크라이나 서부(舊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역) 및 폴란드 남부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이다.[43] 뜻은 아우렐리아누스의 다키아[44] 유려하게 이어진 다뉴브 강 방어선에서 다키아만 툭 북쪽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영역 대비 국경선이 훨씬 넓었던 탓에 방어의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다.[45]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46] 혹은 살로나라고도 부른다.[47] 모이시아로부터 분화[48] 다만 트라키아 일대가 수도권으로서 우월한 지위를 제대로 형성하기 시작한것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한 세기가 더 지나고 나서였다. 자세한 것은 레오 1세 트라키안 참조.[49]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가 새 수도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주도나 로마제국 주요 도시가 아닌 그냥 소도시였다. 즉, 대한민국세종특별자치시노무현의 원안대로 서울에서 수도기능 및 정치적 중심지 기능을 세종시로 모조리 이전했다면, 아마 콘스탄티노플과 위상이 비슷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 최대도시, 아니 유럽 최대도시로 성장하기는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800년대까지 오현제 시기 로마의 인구수를 따라잡지 못했다.[50] 스파르타쿠스의 원래 목표는 고향인 트라키아에 독립국을 세우는 것이었다.[51] 물론 로마 이전의 트라키아 지방에 왕국이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고 기원전 5세기 말엽에 오드뤼사이 왕국이 있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물론 그 이전의 그리스인들도 트라키아인을 전통적으로 호전적이고 야만스런 민족으로 알고있고 촌동네 취급하였다. 즉, 왕국이라봐야 그리스와 교류가 용이한 국경이나 해안 지대에 적당한 규모의 도시 몇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대다수는 내륙이나 산지에서 야만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52] 대표적으로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가 있다. 여기서 트라쿠스는 트라키아 정복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이 아니라, 트라키아 촌놈이라는 반멸칭이다. 무슨 땅의 정복자, 무슨 땅에서의 승리자를 의미하는 어미는 '-이쿠스'이다.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같은 집안에서의 인명들이 서로 워낙 많이 겹치다보니, 프라이노멘, 노멘, 코그노멘 다 빼고 아예 이 존칭만으로 특정인을 지칭하게 된 케이스이다. 물론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아를 평정한 후에 클라우디우스 자기 대신에 자신의 아들에게 브리타니쿠스란 이름을 준 사례도 있지만 이 경우도 영예로운 호칭인 건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트라쿠스보다 후대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고티쿠스'도 고트족에 대한 정복 및 승리를 의미하는 존칭이다. 이 링크에서는 다키아에 대한 존칭이 다키쿠스로 나오고 있으므로, 똑같이 -키아로 끝나는 트라키아에 대한 존칭은 '트라키쿠스'가 된다. 근데 트라키쿠스가 아니라 '트라쿠스'라서 존칭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어쨌든 스파르타쿠스 사후 군인황제시대까지는 약 300년의 기간이 지났음에도 촌동네 이미지는 여전하였다.[53] 참고로 # 해당 링크에서 존칭들은 다음과 같다. Africus(아프리카), Germanicus(게르마니아), Britannicus(브리타니아), Parthicus(파르티아), Adiabenicus(아디아베네-상 메소포타미아), Dacicus(다키아), Sarmaticus(사르마티아), Frankicus(프랑크), Armenicus(아르메니아), Arabicus(아랍)[54] 이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그리스~헬레니즘 시대 사이에 활동했던 경보병 병과 펠타스트 때문이었다. 이들은 투창과 작은 방패를 들고 다니면서 척후병 겸 경보병 역할을 담당했기에 그리스 폴리스나 헬레니즘계 왕국들이 경보병 용병으로 흔히 트라키아인들을 고용하기도 했다.[55] 물론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에는 아나톨리아 내륙지방이 대신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이루게 된다.[56] 스파르타의 병영국가적 생활양식은 이미 로마시대 때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어 스파르타 사람들의 돈벌이가 되었다.[57] 총독이 되면 임기 내내 지역 유지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아카이아에 부임하게 되면 라틴어와 그리스어 모두에 능통한 지식인과 그리스 출신 원로원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인척관계를 맺게 되는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또 자녀가 있다면 굳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당대 최고의 학부들이 밀집한 아테네에서 자녀 교육까지 시킬 수 있어 인기가 높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58] 게다가 속주세까지 면제되었다! 물론 네로가 속주세 면세 혜택을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혜택을 주는 것으로 원상복구되었다.[59] '타우리카'라는 단어는 원래 이 일대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인의 일파인 타우리(Tauri)인에서 유래한 것이며 현재 쓰이고 있는 '크림(Crimea)'이라는 단어는 13세기 타타르인들이 세운 도시인 '에스키 크름(Eski Qırım)'에서 유래했다.[60]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61] 로마의 종속국이었다가, 이란계 국가의 종속국이었다가, 독립국이었다가 계속 바뀌었다.[62] 판티카파아니다![63] 2014년 유로마이단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계가 다수이던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해 러시아에 편입되었다.[64] 라자스탄이 아니다![65] 실제로 동로마는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소아시아 내륙을 상실하였는데, 이는 기병의 공급처인 목초지가 없어짐으로서 기병의 양과 질이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12세기 알렉시오스 1세-요안니스 2세-마누엘 1세로 이어지는 콤네노스 왕조 시대의 회광반조 시기에는 소아시아 내륙 상실로 인한 악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방어에는 취약한 소아시아 서부 지역이 아예 소아시아 내륙에 터를 잡은 튀르크족의 공세에 노출되었고 4차 십자군에 의해 한 번 망했다가 다시 부활한 동로마는 이를 저지할 능력을 상실하면서 동로마가 소아시아를 완전히 상실하고 끝내 멸망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만다.[66] 3세기의 위기 때 로마 군사들 대부분은 페르시아파르티아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고 반격하기 위해 쳐들어 가는 것을 마치 스페인인들이 엘도라도를 정복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67] 클라우디우스 1세 때 원로원과 황제가 입법한 시민권 특칙에 따라 오스티아 항구 개발로 인한 무역업 피해자와 그리스어 교사들에게 시민권을 마구잡이로 뿌린 결과다.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집정관을 지낸 이 중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oooo,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등을 사용한 이들 중 상당수는 그리스인 내지 아나톨리아인, 혹은 북아프리카 출신들이 많다.[68] 당장 신약성경 에페소스서, 갈라티아서, 콜로사이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졌는지 생각해보자.[69] 파일:QXT5KdnDXHd_KPFcfdfX-LEAVSJrHKIgfpl7lzOtado.png 발칸 반도의 형세가 대강 이랬지만, 다소 오류가 있다.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가 저렇게 커졌던 것은 소위 시메온 전쟁의 결과이고, 그 이전에는 저 지도만큼 넓지는 않았다(애초에 시메온 전쟁으로 저렇게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시메온 1세가 '대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에 같이 표시되어 있는 대 모라비아('Great Moravia')는 907년에 멸망했다(...). 그리고 동프랑크 왕국도 911년에 카롤루스 왕실의 직계가 끊어짐으로써 독일 왕국으로 바뀌었는데도 동프랑크라고 쓰여있고, 안티오키아 지역은 969년부터 다시 동로마령인데도 벌써부터 동로마령으로 나와 있으며, 시칠리아도 902년 이후로는 거의[189] 완전히 이슬람에게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여전히 동로마 영역으로 나와 있는 등 서로 시간상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 공존하는 것이다.[70] 이에 관련된 Sclaveni(슬라브족의 이동으로 눌러앉은 슬라브인들) 문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오는 즈음에서 re-Hellenized(-zation), 즉 재 그리스화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와 있다.[71] 사실 비티니아 속주는 폰투스 속주와 함께 오랫동안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Bithynia et Pontus)라는 한 속주로 묶여 있었다.[72] 한편 소아시아에서 최초로 로마 영토가 된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은 고대 로마 당시의 본거지였던 서쪽의 로마 시 및 이탈리아 반도와 가장 가까웠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시기에 따라 본거지가 달랐을지언정) 본거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가장 먼저 얻고 가장 나중까지 보유했던 것이다.[73] 이곳에서 나중에 가장 잘 알려진 트라페주스(트레비존드, 트라브존)는 나중에 뜬 도시다.[74] 소아시아의 최서단이니 당시 본거지였던 서쪽의 로마 시 및 이탈리아 반도와 가장 가까웠기도 하다. 한편 동로마까지 포함하면 거의 마지막까지 보유하고 있던 곳은 소아시아의 북서쪽, 고대 로마 기준 지명으로 따지면 비티니아였는데, 당시의 본거지였던 마르마라 해 너머의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시기에 따라 본거지가 달랐을지언정) 본거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가장 먼저 얻고 가장 나중까지 보유했던 것이다.[75]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유언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76] 그리스 폴리스 시절부터 소아시아 서해안의 최대도시. 고대 후기에도 이 지역을 포함해 소아시아의 서·남부 거의 전체를 관할하던 아시아 관구의 치소였다. 하지만 지진, 항구기능 상실, 이슬람군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나서 소아시아 서해안의 최대도시 위상은 스미르나에게 넘어가 스미르나(이즈미르)는 지금까지도 터키 전국에서 인구순위로 3위(이스탄불앙카라 다음으로)이며 소아시아 서해안에서는 당연히 최대도시이다.[77] 사도 바울로가 쓴 콜로사이서는 프리기아에 위치한 콜로사이라는 도시의 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서신이다.[78] 영어 위키백과 Cappadocia (Roman province) 중, 'Cappadocia remained an important and trusted eastern client kingdom under Emperor Augustus' reign. Rome's policy towards Cappadocia changed, however, following Augustus' death in 14 AD and the reign of Emperor Tiberius. Years earlier, Tiberius had been slighted by Archelaus when the Cappadocian king showed favor to Gaius Caesar, one of Augustus' grandsons and chief heirs. While Tiberius was in retirement on the Greek island of Rhodes from 6 BC to 2 AD, though the nominal commander of the Eastern half of the Empire, in 1 BC Archelaus recognized Gaius Caesar, then a military commander subordinate to Tiberius, as Augustus' true representative. Though Gaius Caesar was Augustus' preferred successor, his death in 4 AD while on military campaign in Armenia forced Augustus to adopt Tiberius and name him as his successor.' 및 'Wanting direct access to Cappadocia's resources and seeking to reduce Archelaus, Tiberius summoned Archelaus to Rome in 17 AD. At the time, Archelaus had governed Cappadocia as Rome's client king for over fifty-years. When he arrived in Rome, Tiberius accused Archelaus of harboring revolutionary schemes and imprisoned him, where he died of natural causes soon thereafter. Sending his adoptive son Germanicus to oversee Rome's affairs in the East, Tiberius then annexed Cappadocia directly into the Empire by reducing the kingdom into a Roman province.'[79] 후에 시리아 속주에 흡수[80] 116년 트라야누스 때 설립 후 2년 후인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81] 제국 동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속주인 시리아의 총독이었다.[82]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네로자살 명령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업적이나 명성으로 보아 네로 사후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가 황제가 되었을 거라 추측한다.[83] 시리아로부터 분화[84] 흔히 아는 유대는 개신교 성경식 표기이고 실제로는 유데아, 유다이아 등으로 불렸다.[85] 이집트 일대를 제외한 북서아프리카 일대의 밀 생산량 기준이라고 한다. 이 중 매년 4분의 1이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로 수출됐다.[86] 게다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함으로써 모든 로마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로마 시민은 자기네 정치가가 외국 공주와 정략결혼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가진 카이사르는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생아 카이사리온까지 낳았어도 클레오파트라를 애인으로만 삼았지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을 감안해 카이사르의 유언에서 사생아 카이사리온은 빠져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의도를 파악했는지는 불명.[87] 또한 후일 황제가 되는 티투스도 유대 왕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긴 했으나 결혼하지는 않았다. 이는 티투스의 치세 내내 지지율이 높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88] 참고로 김연아의 2009-10 시즌 갈라 프로그램에서 마스네가 작곡한 '타이스의 명상곡'의 배경이 4세기-로마제국 말기의 이집트이다. 원래 타이스의 명상곡은 오페라 타이스(Thais)에서 막이 바뀔 때 나오는 음악으로 오페라 타이스는 아나톨 프랑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교도 여사제 타이스가 기독교의 수도승 아타나엘과 사이에서 종교적인 지조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이다.[89]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고향 렙티스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그리고 푸닉 지방으로 불린 아프리카 속주를 무척 사랑했다. 따라서 집권 직후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내리고, 푸닉 일대의 부흥에 힘을 쏟았는데 이때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본 곳은 렙티스 마그나였다. 덕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 트리폴리타니아의 주도 렙티스 마그나는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대적할 푸닉 지방의 대표 도시까지 오르게 된다.[90] 튀니스 근교의 도시다. 튀니스 대도시권 안에 속한다.[91] 카르타고의 경우 7세기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최종 멸망하였는데, 이 멸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유럽지역의 로마 도시들은 개발과 맞물려 제대로 된 문화재 발굴도 어렵고, 또 개발이 잘 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많다고. 대표적으로 로마 지하철이 문화재 발굴 때문에 1호선을 만드는 데만 20년이 넘게 걸리고, 이제야 3호선을 만들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거대 도시들 중에서는 고대에는 타 도시 주변의 위성도시였으나, 근대에 그 도시를 제치고 거대도시가 된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톨레도-마드리드의 관계가 있다.[92]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의 집정관, 법무관 명단들을 보면 아프리카 속주 출신 내지 그 본적이 아프리카 속주인 권세가가 상당히 많고 그들의 재산 규모도 엄청날 정도라고 한다. 2세기 후반인 세베루스 왕조 후기부터 군인황제 시대까지의 명단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세베루스 왕조부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까지 권세를 휘두른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형제와 그 일가 등 상당수 속주 총독과 집정관들이 이 지역 출신들이다.[93] 아프리카로부터 분화[94] 먼 훗날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어 유럽인들을 이주시켰을 때에도 이 지역에 대부분 정착했다.[95] 심지어 2차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까지도 반대했다고 한다.[96] 폼페이우스파의 장군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에게 죽었다는 설도 있다.[97] 말 그대로 푸른 나일 강(The Blue Nile)이다. 나일 강의 가장 큰 두 개의 지류 중 하나. 다른 하나는 우간다의 앨버트 호에서 발원하는 백(白)나일 강.[98] 참고로 고대 이집트인은 누비아 지방을 카슈(Kash), 구약성경에서는 쿠슈라고 불렀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우스가 구출한 공주 안드로메다가 속한 에티오피아가 "누비아 에티오피아"이다. 단, 구약성경에서 솔로몬 지혜에 대한 대담을 나눈 시바의 여왕이 통치했던 에티오피아는 "누비아 에티오피아"가 아닌 "아비시니아 에티오피아" 맞다.[99] 단, 순수하게 고향이 속주 출신인 것까지 따진다면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으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의 외손자인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최초다. 하지만 이 황제는 애당초 이탈리아와 로마를 대표하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면서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인 카이사르 가문 출신의 황족답게 겨울이 되기 전 일찍히 로마로 돌아가 살았다. 따라서 고향만 루그두눔일 뿐인 로마 출신으로 보아야 하며, 로마인들과 현대 학자들 역시 그를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로 보지 않는다.[100]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지나칠 만큼 과도한 세금이 매겨진 부분 역시 문제가 됐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적 명령 아래에서 생활영역이 제한되고, 여름철과 겨울철마다 가축을 이끌고 이주생활을 한 마우레타니아 서부 지역을 시작으로 반(反) 로마 기류가 퍼지게 된다.[101] 히스파이나 울테리오르 속주로부터 분화[102] 284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로부터 분화[103] 298년 히스파이나 타라코넨시스 속주로부터 분화[104] 히스파이나 울테리오르 속주로부터 분화.[105] 298년 히스파이나 타라코넨시스 속주로부터 분화.[106] 여동생의 이름은 드루실라인데,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많이 쓰인 '드루수스/드루실라'를 그대로 따온 이름이다. 기원전 8년경 태생으로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나라 로마로 건너가, 로마에서 교육받고 살았다고 하며 남편은 로마 원로원의 오래된 귀족이었고 후손들 역시 마우레타니아 편입 이후에도 원로원 귀족으로 대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107] 어머니의 이름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로마에 대항한 상징처럼 여겨진 클레오파트라였고, 외할머니는 실제 그 클레오파트라인데다 이 사람의 이름은 대대로 이어받은 이름 대신 아예 프톨레마이오스였다.[108] 2015년 배렛의 저서 등에 나오듯, 프톨레마이오스는 반황제 운동과 같은 민감한 로마 내정에까지 개입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로마 내 입지를 키우며 그 우월성을 강조했다고 하니, 칼리굴라와 로마 입장에선 당연히 암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조차 주저하지 않았다.[109]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의 식민지와 땅이 늘어나자 귀족과 부자들은 이 땅을 싸게 매입하고 싼 값에 노예를 부려 밀값을 폭락하게 한다. 이 대농장을 라디푼디움이라 하며 세계사시간에 단골소재이기도 하다.[110] 전쟁으로 땅이풀리네 → 밀 농사의 플랜테이션화 → 밀값 폭락 → 자영농은 망했어요 테크 → 온갖 사회문제 발생. → 로마 공화정의 근본이 흔들림 → 걸출한 장군과 사병의 등장 → 내전! → 로마제국 성립 → PROFIT![111] 로마 시민권과 다른 권리는 동일하지만, 공직 선거권·피선거권(suffragio)이 없다. 이것을 Civitas sine suffragio(영어로는 Citizenship without suffragette)이라고 했다.[112] 무산 시민들이 반대한 것은 19세기 미국에서 형편이 썩 좋지 않은 백인들이 흑인 노예 해방을 반대한 원리와 유사하다. 내가 가난하다 해도 어쨌든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주변의 이탈리아계 비시민들보다 신분이 높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시민권을 확대하게 되면 이게 무너지기 때문.[113] 이때 폼페이우스는 10대 청소년이었다![114]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큰아버지이다. 이 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생이므로 10살 남짓한 어린이였다.[115] 이는 로마 시가 이탈리아의 중서부에 있었던 관계로 북방의 라인 강, 다뉴브 강 전선과 매우 멀었으며, 또한 이탈리아 기준의 서해(티레니아 해)와는 가깝지만 동해(아드리아 해)와는 멀어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정부와의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116] 동로마 초기와 겹친다고는 하지만, 476년에 고대가 끝났고 중세가 시작했다는게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현재는 다른 학설도 많다. 476년의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지중해권에서의 로마의 압도적인 위상으로 상징되는 고대는 끝나지 않았으며, 고대(정확히는 고대 후기; Late Antiquity)의 끝과 중세의 시작을 아랍인의 이슬람 정복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게르만족은 포에데라티로 로마군에 들어갔다가 조금씩 서로마 군부를 잠식해 들어가면서도 로마의 체제에 포섭되었고, 기독교를 믿었으며, 이후로도 동로마로부터 작위, 주화 시스템 등을 한동안 하사받거나 차용해서 쓰다가, 로마 시 및 교황으로 상징되는 구 서로마·라틴 문화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및 황제·총대주교로 상징되는 동로마·그리스 문화권이 지리적, 신학적, 문화적, 언어적, 종족적으로 점점 멀어지자 그 빈틈을 노려 전자를 후자에서 분리해서 자신들 쪽으로 포섭해가면서 조금씩 로마의 종주권에서 독립해 나간 반면, 아랍인은 아예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체계를 창안한 후 로마를 완전히 극복하려 했다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117] 이 프로콘술 급의 속주 장관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위 행정구역인 관구의 관구장급(비카리우스)보다 급이 높았다. 한국사 용어를 써서 말하자면, 산하 하위 행정구역의 장이 상위 행정구역의 장보다 일종의 '관등'이 높았던 것이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Proconsul 중, 'These outranked vicars in precedence, though administratively they were subordinates like all governors. They governed the provinces of: Asia, comprising the central part of the western Anatolian coast; Achaea, comprising the Peloponnese and most of Central Greece; and Africa, the northern part of modern Tunisia.'[118] 영어 위키백과 (영어) 로마 속주#공화정 시절 속주 목록를 보면, 일찍 정식 속주로 편성된 순서대로 1등은 시칠리아, 2등은 코르시카와 사르데냐, 3등은 스페인 동해안, 4등은 스페인 남해안이었고 그 다음이 이 세 곳이었다. 5등이 마케도니아(에피루스와 아카이아 포함. 나중에 분리되었다), 6등이 아프리카, 7등이 아시아.[119] 스페인 같은 곳은 국경에서는 멀었지만, 문명의 역사가 얕았다. 반면 레반트의 지중해 해안은 문명의 역사는 그리스와 로마 그 이상으로 깊었고 생산물도 풍부했으며 상업도 발달했지만, 동쪽의 이란계 국가와의 국경과 너무 가까웠다. 아미다 등 내륙의 국경기지에서 한 번 삐끗해서 뚫리면 안티오키아까지 바로 위험해졌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120]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라는 번역으로도 널리 퍼져 있다. 원어가 라틴어임을 고려해 라틴어 주를 붙였다. 보다시피 원어에서 정황제는 아우구스투스, 부황제는 카이사르라는 직함이었다.[121] 카톨릭에서도 여기서 따와서 그대로 Dioecesis라는 용어를 쓴다.[122] 중국에서도 한나라 ~ 삼국 ~ 진나라 시기에는 삼국지의 '후한 13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가 최상급 행정구역이었다가, 오호십육국 및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수당시대에는 한대의 군과 같은 규모로 축소되고, 가 최상급 행정구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참고로 도는 송나라 때 대동소이한 '로'로 바뀌어 쓰이다가(합성어인 '도로'라는 형태로 아직까지 매우 빈번하게 쓰이듯이) 원나라 때 ~~행성으로 바뀌어 그 줄임말인 '성'이 명, 청, 현대중국까지 이어지고 있다.[123] 적나라하게 말해서 숨어있는 세금과 인력을 발굴해서 뽑아내는.[124] Diocese of Moesiae.[125] 이탈리아는 후술하듯 공식적으로 두 개의 관구로 양분된 것은 아니다.[126] 한글로 적절한 번역이 아직 없지만 필요할 때는 이하에서 편의상 대관구로 칭한다.[127] 단, 서로마에서는 이탈리아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보다도 보·기병 총사령관(Magister utriusque militiae,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퀘 밀리티아이)의 권력이 훨씬 셌던 반면, 동로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동로마에는 황제 아래에 서로마의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퀘 밀리티아이처럼 실질적으로 군통수권을 틀어쥔 단 한 명의 '전군 총사령관'이 없었다. 동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리툼들 중 '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라이센탈리스'(Magister Militum Praesentales)가 서로마의 보기병 총사령관과 위계상 동격이긴 했으나 이쪽은 1명이 아닌 2명이어서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지진 못했다.[128]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에 'A single emperor could not control everything, so between 326 and 337, Constantine progressively transformed the 'ministerial' Praetorian Prefect into a 'regional' Prefect, in charge of a specific territory which contained several dioceses and was called a 'Praetorian Prefecture' (praefectura praetorio).'라는 대목이 있다.[129] Corrector 중 'Those of the West Roman Empire ranked between the consulares and the ordinary praesides, while in the East Roman Empire, they ranked below the praesides.'[130] 두 수도의 프라이펙투스와 비슷한 것으로 후한에서의 낙양 시장인 하남윤, 장안 시장인 경조윤을 생각할 수 있다. 원래 수도는 서쪽이었는데(로마 시 및 장안) 동쪽으로 옮겨간 것(콘스탄티노플 및 낙양) 또한 공교롭게도 같다.[131]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평양 감사'는 엄밀하게 따지면 성립이 되지 않는 말인데, 왜냐하면 감사는 관찰사(도지사)의 다른 표현이라 '평안(도) 감사'가 맞는 표현인 한편 평양은 감영(도청) 소재지이자 중심도시격인 부(府)이기 때문에 '평양 부사'(평양 시장)가 맞는 표현이기 때문이지만, 워낙에 관찰사와 감영 소재지의 장 간 겸직이 많아서 아예 '평양 감사'가 관용어로 정착한 것이다.[132]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에 'In fact, according to Jones, the diocese in which each Praetorian Prefect was based was generally under their direct control, except for the Diocese of Thrace, which was administered by a vicarius Thraciarum even though the Praetorian Prefect of the East had his seat in the diocese.'[133] 이집트는 관구장 명칭이 여전히 비카리우스가 아니라 원수정 시절부터 쓰던 'Praefectus Augustalis'였다. 영어 위키백과 List of Late Roman provinces 중, 'This diocese, comprising northeastern Africa—mainly Egypt, the rich granary and traditional personal domain of the emperors—was the only diocese that was not under a vicarius, but whose head retained the unique title of Praefectus Augustalis. It was created by a split of the Diocese of Oriens'[134] 단 바로 위에서 보이듯이, 동급의 무관직인 Comes였지만.[135] 영어 위키백과Roman diocese 중, 'The direct link between the prefects and the governors bypassed the Vicars and caused their power to decline'이라는 대목이 있다.[136] 여기는 금방 서고트 왕국에게 다시 뺏겼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워낙 멀기도 하고, 이탈리아 및 북아프리카에 비해서 중요성도 확실히 떨어지니만큼... 지형도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길쭉한데 비해 스페인은 원형이나 네모 비슷한 통 덩어리의 판도를 가진 소위 단괴국이라서, 상륙해서 해안 일부를 장악하고 나서 내륙 지역으로부터 들어오는 공격을 버티기에 훨씬 불리한 지형이다.[137]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Africae,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Africa.[138] 딱 저 마우리키우스 때의 인물이었던 겐나디우스 1세는 마지막 아프리카 군사령관이자 초대 아프리카 총독이라고 나온다. 군사령관이 그대로 총독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문민행정의 역할을 흡수했다는 뜻이 된다.[139] 원 동로마 지역은 당시도 여전히 대관구-관구-속주의 3단계 체제였기 때문.[140] 다만 그리 머지 않은 965년에 남이탈리아 지역 전체가 종전의 Exarch 대신 Katepano(s)라는 또 다른 이름의 총독이 다스리는 총독령으로 묶여서 다시 특수 행정구역이 되었다. 영어로는 소위 Catepanate of Italy라고 한다.[141] List of Late Roman provinces 중, 'As the rich home territory of the eastern emperor, the Oriens ("East") prefecture would persist as the core of the Byzantine Empire long after the fall of Rome. Its praetorian prefect would be the last to survive, but his office was transformed into an essentially internal minister, stripped of its original military function.'[142] 이 때의 킬리키아 재정복에 대한 문서가 영어 위키백과에 따로 있다. Byzantine conquest of Cilicia[143] 대부분이 '-ene'로 끝나는데 아르메니아 특유의 지명 어미로 보인다. 근처의 역사적 지명인 오스로에네(Osroene), 콤마게네(Commagene)와 도시 멜리테네(Melitene, 現 말라티아)도 이에 해당된다.[144] 이 '산악 지대'가 중요하다. 이 Satrapiae의 바로 남쪽이자 동방 관구에서 가장 동쪽인 메소포타미아 및 오스로에네(Osrhoene) 속주 또한 유프라테스 강 너머인 점은 마찬가지였지만, 지도에서 보이듯이 아르메니아 쪽은 산악 지대인 반면, 메소포타미아로 내려오면 평지의 비중이 확 늘어나고 오스로에네는 아예 평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메소포타미아는 한참 이전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때인 198년에, 오스로에네는 그 아들인 카라칼라 때인 214년에 직할 속주가 되었다.[145] 영어 위키백과 Roman Armenia 중, 'Another treaty followed between 384 and 390, the Peace of Acilisene (usually dated c. 387), which established a definite line of division, running from a point just east of Karin (soon to be renamed Theodosiopolis) to another point southwest of Nisibis in Mesopotamia. The area under East Roman control thus increased, but still, about four fifths of the old Kingdom of Armenia remained under Persian rule. Unlike Armenia Minor west of the Euphrates, which had been constituted into full provinces (Armenia I and Armenia II) under the Diocese of Pontus already in the time of Diocletian, the new territories retained a varying level of autonomy.'[146] 영어 위키백과 Roman Armenia 중, 'Armenia Maior, the northern half, was constituted as a civitas stipendaria under a civil governor titled comes Armeniae, meaning that it retained internal autonomy, but was obliged to pay tribute and provide soldiers for the regular East Roman army.'[147] 로마 국내의 일반적인 총독/속주 장관과 황제 사이에는 이런 것이 일절 없었다.[148] 영어 위키백과 Roman Armenia 중, 'The Satrapies (Latin: Gentes) in the south on the other hand, which had been under Roman influence already since 298, were a group of six fully autonomous principalities allied to the Empire (civitates foederatae): Ingilene, Sophene, Antzitene, Asthianene, Sophanene and Balabitene. The local Armenian nakharar were fully sovereign in their territories, and were merely required to provide soldiers upon request and to dispatch a golden crown to the emperor, as a token of submission. In return, they received their royal insignia, including red shoes, from the emperor.'[149] 페르시아(이란)과 아르메니아는 서로 다르지 않나 할 수 있지만, 서로 언어, 종족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그런데 아르메니아가 서방(그리스-로마-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페르시아(이란)과 완전히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150] 영어 위키백과 Roman Armenia 중, 'The situation remained unchanged for near a century, until a large-scale revolt by the satraps in 485 against Emperor Zeno (r. 474–491). In its aftermath, the satraps were stripped of their sovereignty and their rights of hereditary succession, being in effect reduced to the status of tax-paying and imperially-administered civitates stipendariae.'[151] Roman Armenia 중, 'In 536, new reforms were enacted that abolished the autonomy of the trans-Euphrates territories and formed four new regular provinces. Armenia Interior was joined with parts of Pontus Polemoniacus and Armenia I to form a new province, Armenia I Magna, the old Armenia I and Armenia II were re-divided into Armenia II and Armenia III, and the old Satrapies formed the new Armenia IV province.' 및 Lesser Armenia 중 'In 536, the emperor Justinian I reorganized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and First and Second Armenia were renamed Second and Third respectively, while some of their territory was split off to the other Armenian provinces.'[152] 반 호수 인근까지 다시 찍었던 것은 1021년의 바실리오스 2세였다.[153] 트라키아에도 상위 관구와 이름이 같은 '트라키아 속주'가 있었지만, 그 곳은 관구의 치소인 필리포폴리스를 끼고 있되 결국은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수도권이라 중심부가 아니었다.[154] 라틴어 Insulae, 영어 the Islands, 그리스어 ἐπαρχία νήσων.[155] 영어 위키백과 Islands (Roman province) 중, 'Rhodes was the capital of the province, whose governor had the modest rank of praeses (hegemon in Greek).'[156] 로마 시를 제외한 중요 도시의 시장은 프로콘술이었는데, 359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콘스탄티노플 시장의 직급을 프로콘술에서 종전에는 로마 시에만 있었던 Praefectus Urbi로 올렸다.[157] 반면 소속 관구와 이름이 같은 '아시아 속주'는 관구의 치소이자 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최대도시였던 에페수스를 끼고 있는 중심부였다.[158] 원 로마 시의 수급처는 북아프리카로 바뀌었다.[159] 영어 위키백과의 Thebaid에 'Around the 5th century, since it was a desert, the Thebaid became a place of retreat of a number of Christian hermits, and was the birthplace of Pachomius. In Christian art, the Thebaid was represented as a place with numerous monks.'라는 대목이 있다.[160] 영어 위키백과 Quaestura Exercitus'The authority of the quaestor was the equivalent to that of a magister militum. Since the strategically vital Danubian provinces were economically impoverished, the purpose of the quaestura exercitus was to help support the troops that were stationed there. By connecting the exposed provinces of the Lower Danube with wealthier provinces in the interior of the empire, Justinian was able to transport supplies via the Black Sea. This territorial restructuring relieved both the destitute populations and devastated countryside of the Danubian provinces from sustaining any stationed troops.' 및 'However, since the position of quaestor was still extant during the mid-570s, this indicates that the overall territorial unit achieved a modicum of success.', 및 Diocese of Pontus 중 'Justinian's reforms also abolished the diocese in 535, and its vicar was made into the governor of Galatia I. The results however were not satisfactory, and the diocese was reestablished in 548, continuing to function until replaced by the themata of Armeniakon and Opsikion in the later 7th century.'[161] ~379, 이후 판노니아로 명칭변경[162] 영어 위키백과 Dacia Aureliana 중. 'The Emperor Diocletian's tetrarchy reorganization of the empire divided Dacia Aureliana in two provinces, both part of the civil diocese of Moesia(e), under the eastern Caesar (junior emperor), whose 'quarter' became the Praetorian prefecture of Illyricum.'[163] 이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이 지역이 동서로마 중 어디에 속하는지 동서로마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지되고 있었다.[164] 동서로마 간의 세력 균형, Jirecek 라인 상 그리스 문화권보다는 라틴 문화권에 가까웠던 점, 이탈리아와 트리에스테-아퀼레이아를 통한 육로로든, 아드리아 해를 통한 해로로든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 역할 등.[165] 유려하게 이어진 다뉴브 강 방어선에서 다키아만 툭 북쪽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영역 대비 국경선이 훨씬 넓었던 탓에 방어의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다.[166] 각각 I(즉 프리마)와 II(즉 세쿤다)로 그대로 이어졌다.[167]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베 등 과거 네임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두 모여있는, 그야말로 가장 좁은 의미의 그리스 되겠다.[168] 치소를 의미하는 동그란 빨간 점이 아테네가 아니라 코린토스에 찍혀 있다.[169] 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170]오스만 제국은 같은 곳을 수도로 두고서도 이 시르미움 너머의 발칸반도 북서부나 헝가리 등도 제법 오래 통치했었는데, 이에 대해 지리적 한계를 오스만은 넘었는데 동로마는 못 넘었다고 볼 것만은 아니다. 오스만은 소아시아의 북서부에서 출발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 정도하기 이전의 여러 수도들도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멀지 않은 소아시아 북서부 혹은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이었던 반면 동로마의 경우 정복전쟁은 수도가 이탈리아의 로마이던 고대 로마 시절에 이미 다 한 상태에서 동방 담당 수도를 처음에는 니코메디아에,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신설하여 옮겨간 것이기 때문이다.[171]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에 'It is unlikely that the Praetorian Prefecture of Italia was subdivided into two vicariates again in the Byzantine period'라는 대목이 있다.[172]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에 'Thus, under Constantine, the diocese of Italia was split into the two vicariates of Italia Suburbicaria in the south and Italia Annonaria in the north, under the administration of the vicarius urbis Romae and the vicarius Italiae respectively. Italia Suburbicaria and Italia Annonaria were not de jure dioceses, but vicariates within a single Italian diocese, as the Laterculus Veronensis and the Notitia Dignitatum show.'라는 대목이 있다.[173]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에 'In Italia, Odoacer and then the Ostrogothic kings, particularly Theoderic, basically retained the Roman provincial system, including the Praetorian Prefecture of Italia and the two vicariates of Italia Annonaria and Italia Suburbicaria, as well as the various provinces that they contained.', 'The civilian offices, including the vicars, praesides, and Praetorian Prefects, continued to be filled with Roman citizens, while Barbarians without citizenship were barred from holding them.'이라는 대목이 있다.[174] 행재소 내지는 행궁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여하튼 서로마의 명목상 수도가 로마 시였다는 점은 서로마 멸망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175] '중부' 즉 로마 시와 그 주변지역도 여기 포함된다.[176] 한국에서 특별시/광역시가 출신 도에서 독립하고 나서도 한동안 출신 도의 도청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현상은 경북도청이전신도시를 마지막으로 모두 해소되었다.[177]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몰타는 시칠리아에 포함.[178] 위의 고전 시절 속주 설명에서도 아우구스투스의 행정개편에 있어서 1번 속주는 라티움 및, 라티움과 남쪽으로 이웃한 캄파니아였으며, 넘버링도 남쪽에 먼저 붙였고 북쪽을 나중에 붙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179] 지방자치단체 격.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방행정제도 개혁 이전 이탈리아가 본국으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누렸었을 때는 저 11~14개의 하나하나가 지방의 커다란 속주와 법적/행정적인 지위가 동급이었다.[180] 동맹시 전쟁에서 반 로마 연합이 이탈리아라는 국호를 짓고 독립을 시도했었지만 실패했다.[181]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Africae,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Africa.[182] 라틴어 Exarchatus, 영어 Exarchate. 대강 서방 지역에만 적용되는 민군합동 특수 행정구역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유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만 이 직제를 적용했고, 기존 동로마 영역에는 적용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대관구-관구-속주 직제를 유지했었기 때문.[183] ~379, 이후 판노니아로 명칭변경[184] 영어 위키백과 Dacia Aureliana 중. 'The Emperor Diocletian's tetrarchy reorganization of the empire divided Dacia Aureliana in two provinces, both part of the civil diocese of Moesia(e), under the eastern Caesar (junior emperor), whose 'quarter' became the Praetorian prefecture of Illyricum.'[185] 이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이 지역이 동서로마 중 어디에 속하는지 동서로마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지되고 있었다.[186] 동서로마 간의 세력 균형, Jirecek 라인 상 그리스 문화권보다는 라틴 문화권에 가까웠던 점, 이탈리아와 트리에스테-아퀼레이아를 통한 육로로든, 아드리아 해를 통한 해로로든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 역할 등.[187] 영어 위키백과Praetorian Prefecture of Gaul에 따르면 어떤 기록에서는 395년, 다른 기록에서는 407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래의 갈리아 지도에는 아렐라테는 치소가 아닌 일반 도시였던 것으로 보아, 407년이 보다 맞다고 보인다.[188] The Notitia Dignitatum indicates that at some point, the Diocese of Gaul was suppressed and incorporated into the diocese of the Septem Provinci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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