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clearfix]
1. 개요
발칸반도 서부 다뉴브 강의 주요 지류인 사바강에 접하고 있는 고대 로마의 도시. 오늘날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스렘스카미트로비차에 위치해있다.시르미움은 교통상의 입지가 우수하고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고대 로마 시기에는 일리리쿰 및 판노니아 일대의 중심 도시이자 군사기지로 기능했다. 3~4세기 경에는 여러 황제를 배출한 도시이기도 했다. 사두정 시기에는 동방 부제(副帝)의 처소로 지정되어 황궁이 지어졌고, 수도 기능을 분담하며 번성했다.
하지만 고대 로마 시대 말기에 발생한 민족 대이동 당시에 여러차례 이민족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AD 582년경에 아바르 인들이 도시를 함락시키고 파괴해버리면서 결정적으로 쇠락했고 오랜 세월 버려지다시피 했다. 훗날 옛 시르미움 자리에는 드미트로비차, 또는 미트로비차라는 이름으로 정착지가 재건되었다. 4세기 경 초기 기독교 시기의 시르미움에서 박해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디미트리오스(드미트리)를 기념한 지명이었다.
시르미움이 파괴된 이후에도 옛 시르미움의 주변지역은 계속해서 시르미아라고 불렸다. 중세시대에는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제국, 동로마 제국 등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시르미아 일대의 통제권을 두고 각축전이 벌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르미아 지역은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고 2차 대전 이후 동서로 분할되었다. 오늘날에는 크로아티아령 스리옘 지역과 세르비아령 스렘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옛 시르미움이 위치한 도시인 스렘스카미트로비차는 세르비아 공화국의 보이보디나 자치주에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2. 형성과 발전
▲ AD 300년경의 시르미움 복원도 및 모형 |
시르미움에는 선사시대부터 정착지가 존재했고, 로마 제국의 도래 이전에는 일리리아족과 켈트족이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로마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 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일리리아와 판노니아가 로마 제국에 복속되면서 시르미움과 그 주변지역도 함께 편입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 군사적 목적의 식민시(콜로니아)가 시르미움에 건설된다.
시르미움은 일리리아의 북단에 위치하였고 로마 제국의 동서를 육로로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상의 요지였다. 또한 로마제국의 북동쪽 국경인 다뉴브 강에 인접했는데, 국경인 다뉴브 강에 직접 접하지는 않고 얼마간의 거리가 이격되어 있으면서도, 다뉴브 강의 지류인 사바 강을 통해 다뉴브 강의 수운과 이어져 있었다. 북쪽으로는 국경지대의 판노니아를, 남쪽으로는 일리리아를 통제할 수 있는 군사, 경제, 교통의 요충지였다. 시르미움은 이러한 입지적인 조건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
서기 3세기 중반 쯤 부터는 시르미움에서 나고 자란 황제가 여럿 배출되기도 했다. 곧이어 3세기 말에서 4세기 경 시르미움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293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을 실시하면서 시르미움은 동방 부제의 처소로써 수도의 기능을 분담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를 위해 시르미움에는 황궁과 경마장[1]을 비롯한 여러 대규모 공공건물들이 지어졌다.
이 시기에 또 다른 도시의 변화로 기독교 교세의 확장도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와 맞물리면서 시르미움에서도 여러 순교자가 희생되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시르미움의 주교인 성 이레나이우스[2]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서기 304년 4월 6일(부활절)에 시르미움의 다리 위에서 처형 되었고 그 시신은 사바 강으로 던져졌다고 한다. 이레나이우스의 처형 3일 후 그의 동역자인 드미트리오 부제도 순교했다.
3. 쇠락과 멸망
로마 제국의 동서 경계지대 한복판에 위치한 시르미움의 입지는 로마제국의 동서 분할이 공고해지면서 오히려 애매해져갔다. 또한 이 무렵에는 이민족의 로마제국 침입이 더욱 거세졌다. 동서 로마를 이어주는 경로에 위치한 시르미움도 이민족의 숱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4세기 말, 시르미움은 사르마티아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 고트 족의 지배 아래 놓였다가 동로마 제국이 도시를 탈환했다. 441년에는 아틸라의 지도 아래 판노니아 분지에 자리 잡은 훈족이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아틸라의 사망으로 훈족이 분열되고 힘을 잃은 이후에는 동게르만의 일파인 동고트족과 게피드족,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번갈아가며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동고트족이나 게피드족의 치하에서도 시르미움의 도시 기능은 어찌저찌 유지되었고 기독교 공동체도 존속했다.[3] 이는 시르미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게르만 족 치하 시기에서도 주화가 유통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 주조 공정이 이뤄졌다.
▲ AD 582년경 시르미움 기도문 타일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황제로 등극한 이래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567년 경 게피드족의 마지막 왕인 쿠니문드가 경쟁관계에 있던 랑고바르드인과 아바르인에 패배하여 살해당했다. 게피드족이 패망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시르미움을 접수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역시 고토 수복 전쟁으로 인한 재정지출 및 대규모 역병 창궐로 인해 휘청이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또다른 게르만 일파인 랑고바르드인들과 다뉴브 강 이북 판노니아에 정착한 유목민족인 아바르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시르미움은 582년경에 아바르인에게 함락되었고 이때 도시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도시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시르미움의 시민들은 테살로니키나 살로나 등 발칸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4] 고대 도시로서의 시르미움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이때에 종언을 고하게 된다.
마우리키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동로마 제국은 592년경에서 602년에 걸쳐 발칸반도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동로마 제국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등의 이민족들을 무찌르고 시르미움을 포함한 발칸반도 국경지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반란으로 살해당했고, 이후 아바르 칸국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동서 양면 전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동방의 부유한 지역들인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속주가 위협에 처하면서 시르미움을 비롯한 발칸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고 재건할 여력이 없었다.
이라클리온 황제 즉위 이래 동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동방의 전쟁 때문에 발칸반도의 방비는 취약해졌고, 아바르족은 자신들이 복속시키거나 동맹을 맺은 슬라브족, 게피드족, 불가르족 등과 함께 다시금 발칸 반도의 국경을 돌파하며 로마 제국 영내로 쇄도해왔다. 급기야 626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바르 칸국이 동서로 콘스탄티노플을 협공하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이 공방전에서 수성에 성공하며 승리를 거두었고 아바르족과 페르시아는 격퇴되었다.
공방전 패배 이후 아바르 칸국은 슬라브족을 비롯한 피지배민족들이 반기를 일으키거나 이탈하였고 지배층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아바르 칸국은 이때 큰 타격을 입으며 약화되었고 두 번 다시 다뉴브강 이남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측도 이후 위협적으로 부상한 이슬람 제국에 맞서야했다. 때문에 시르미움을 비롯한 발칸 수복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결국 발칸 반도에는 본디 아바르 칸국의 지배 아래 놓였다가 반기를 들고 이탈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불가르인을 비롯한 슬라브족들이 내륙 곳곳에 아예 눌러앉아 정착하게 된다.
4. 멸망 이후: 시르미아와 미트로비차
아바르 인들에 의해 시르미움이 파괴된 이후 이 일대에는 슬라브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했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중반까지의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시르미움은 끝내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된다. 이후로도 오랜 세월동안 그 옛 터가 방치되면서 고대 도시 시르미움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고대로부터 이어온 시르미아라는 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옛 시르미움의 주변지역 일대는 시르미아라고 불리며 그 이름이 이어지게 되었다.8세기 말엽부터는 아바르 칸국이 쇠퇴하고 프랑크 왕국이 발칸과 판노니아로 영역을 확장했다. 800년 초 무렵에 프랑크 왕국은 시르미아 일대까지 진출했고 이때 옛 시르미움에도 정착지가 조금씩이나마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내란과 외침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프랑크 왕국의 시르미아 영유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를 제패하기 전까지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여러 세력들이 시르미아를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먼저 불가리아 제1제국이 혼란기를 극복하여 부흥을 맞이했고, 시르미아 일대도 그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차르 사무일이 사망할 무렵 쯤에는 불가리아 제국이 동로마 제국에게 패퇴하면서 패망을 앞두게 되었다. 불가리아 제국이 무너져가는 상황 속에서, 지역의 불가르인 유력자인 세르몬이라는 인물이 시르미움 공작을 자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완전히 접수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을 파견했다. 디오예니스는 세르몬을 살해하고 일대를 평정했다.
불가리아의 패망 이후 동로마 제국은 옛 시르미움 일대를 테마 제도로 편성했다. 이후로도 여러 세력 간의 시르미아 일대를 둘러싼 분쟁은 계속 이어졌다. 1167년에는 헝가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격돌하여 시르미온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대승리로 끝나고 헝가리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하지만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내란에 가까운 혼돈에 휩싸였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벨러 3세는 이를 기회로 일전의 시르미온 전투에서 상실한 시르미움과 달마티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5]
콤니노스 왕조 시기를 끝으로 동로마 제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제4차 십자군 시기를 거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 동로마 제국은 더 이상 시르미아까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 즈음을 어간으로 옛 시르미움 터에 재건된 정착지는 점차 성 데메트리의 도시(Civitas Sancti Demetrii)로 불리게 된다. 앞서 4세기경에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오는 디미트리오스를 기리는 지명이었다. 15세기 경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급격히 부상했다. 이에 따라 시르미아와 이를 둘러싼 발칸 반도의 정세도 다시 요동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모하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헝가리 왕국 대부분을 정복했고, 시르미아는 부다 에일랴트 산하의 행정구역인 시르엠 산자크로 편성되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대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고 에르데이 공국을 포함한 헝가리 전역을 탈환했다. 시르미아 지역도 다시금 헝가리에 편입되었고 헝가리 왕국의 동군연합이었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스리옘 주로 재건되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스리옘 주도 유고슬라비아에 함께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이 때에 시르미아는 민족분포를 따라 서쪽 크로아티아와 동쪽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내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5. 유적지
19세기 경 무렵부터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인근에서는 이미 고대 로마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었다. 1957년에는 미트로비차에 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옛 시르미움의 황궁터가 발굴되었다. 이때부터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며 각종 유적지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 위: 스렘스카미트로비차 인근에서 출토된 AD 3세기 경의 로마시대 황금투구[6] ▲ 아래: 시르미움 황궁유적 방문센터 |
6. 시르미움 태생의 로마 황제
AD 3~4세기 경, 시르미움은 여러 황제들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했다.시르미움 출신 로마 황제 목록 |
이곳에서 나고 자란 황제들 외에도 시르미움에서 황제로 추대되거나 시르미움에 거주하며 치소로 삼은 황제들도 많다.
또한 시르미움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고 대외원정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보니, 시르미움을 시찰하다가 병사나 암살 등의 여러 이유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황제들도 다수 존재한다.
7. 기타
8. 관련 문서
[1] hippodrome, 로마시대의 경마장은 로마, 메디올라눔, 트레베로룸, 안티오크, 테살로니키, 콘스탄티노플 같은 당대의 대도시에 지어지면서, 황궁 및 여타 공공기관과 복합단지를 이루는 형식으로 설치되는 건물이었다. 시르미움에 황궁이 존재하여 기능했다는 확실한 유물적 증거가 된다. 훗날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시르미움 황궁 유적이 발굴된 이후에도 진짜로 황궁터가 맞는지 건물의 용도를 두고 이견차가 있었는데 대규모 경마장 유적이 발굴되면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2] 리옹의 주교이자 "거짓 지식의 폭로와 반박"의 저자로 유명한 성 이레나이우스와는 동명이인이다.[3] 이 무렵에는 로마 영내에 이주한 이민족, 특히 게르만족과 로마 제국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게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 받아왔고, 소위 "야만족의 로마화, 로마의 야만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많은 게르만 유력자와 부족장들이 로마 당국과 때로는 대립하면서도 명목상 로마의 봉신이 되기도 했고, 점령지의 유지들과 협력하여 로마 제국의 제도나 시스템을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로마 영내에 이주한 여러 이민족들과 그 유력자들 중에는 이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도 많았다. 시르미움을 오랫동안 점거했던 동고트족과 테오도리쿠스 대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게르만족은 아예 시르미움 기독교 사회의 주류와 동일한 아리우스파이기도 했다.[4] John of Ephesus, Ecclesiastical History , XXXII-XXXIII, 256; Georgios Kardaras Byzantium and the Avars, 6th-9th Century AD : Political, Diplomatic and Cultural Relations (Athen, 2010) pp42[5] Paul Stephenson, Byzantium's Balkan Frontier : A Political Study of the Northern Balkans, 900-1204(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6] 보이보디나 박물관 소장. 미트로비차에서 동북쪽으로 17km 떨어진 야라크라는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AD 31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벌인 키발라이 전투에서 패배한 리키니우스 군이 시르미움 방면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유실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