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 |||||
아말라순타 | |||||
발라미르 | 테오데미르 | 테오도리크 | 아탈라리쿠스 | ||
테오다하두스 | |||||
비티게스 | 헬데바두스 | 에라리우스 | 토틸라 | 테이아 | |
}}}}}}}}}}}}}}} |
동고트 왕국 3대 군주 서고트 왕국 섭정왕 𐌸𐌹𐌿𐌳𐌰𐍂𐌴𐌹𐌺𐍃 𐍃𐌰 𐌼𐌹𐌺𐌹𐌻𐌰 | 티우다릭스 대왕 | ||
제호 | 한국어 | 테오도리크 대왕 |
라틴어 | Flavius Theodericus | |
고트어 | 𐌸𐌹𐌿𐌳𐌰𐍂𐌴𐌹𐌺𐍃 𐍃𐌰 𐌼𐌹𐌺𐌹𐌻 | |
이탈리아어 | Teodorico il Grande | |
그리스어 | Θευδεριχος | |
영어 | Theodoric the Great | |
생몰 년도 | 454년 ~ 526년 | |
재위 기간 | 475년 ~ 526년 |
[clearfix]
1. 개요
서로마 제국 멸망기의 동고트족의 지도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를 격파하고 구 서로마 제국 영역의 새로운 실권자가 되었으며 뛰어난 정치력과 외교 능력을 통해 혼란기에도 안정된 치세를 이룩했던 인물이다.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을 만큼 업적이 많고 뛰어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유명세가 약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다른 중요 인물들에게조차 인지도가 밀리는 인물이다.테오도리크의 고트어식 이름은 티우다릭스(𐌸𐌹𐌿𐌳𐌰𐍂𐌴𐌹𐌺𐍃, Þiudareiks)인데, 대체로 백성들의 왕(King of the people) 정도의 뜻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테오도릭 또는 테오도리크라고 부르기도 하고 라틴식으로 테오도리쿠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2.1. 초기
테오도리크는 454년 오늘날 오스트리아 동북부에 있던 카르눈툼(Carnuntum)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동고트족의 왕 테오데미르(Theodemir)였고 모친은 타 부족 출신이었던 에렐류바(Ereleuva)였다. 당시 동고트족은 잠시 훈족에게 복속되었는데, 테오도리크가 태어나기 전 해에 훈족의 왕 아틸라가 사망하였다. 이틈에 훈족 밑에 있던 동고트족과 게피드족을 비롯한 게르만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게르만족 연합군은 네다오(Nedao)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훈족을 크게 격파하고 훈족의 왕 엘락(Ellac)은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 전투 이후 훈족은 점차 분열하여 유럽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동고트족을 비롯한 각 게르만족은 다시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훈족이라는 강력한 위협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게르만족끼리 서로 경쟁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한편으로 동로마 제국이라는 대국과도 관계 설정을 잘 해야 했다. 훈족이 멸망한 직후,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마르키아누스는 동고트족을 제국의 영내인 판노니아 지역에서 살도록 허락해 주었으며 식량과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마르키아누스가 죽고 레오 1세가 즉위한 후 이 지원이 중단되자 동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켜서 일리리쿰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런 난동에 놀란 레오 1세는 다시 동고트족에 대한 경제 원조를 해주기로 약속했으며, 대신 동고트왕의 아들을 일종의 인질로 삼아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르게 했다. 이에 테오도리크는 7살 때인 461년부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인질로 보내졌다.
그런데 말은 인질이지만, 척박한 판노니아의 촌동네를 떠나 번화하고 세련된 콘스탄티노플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데다 먹고 살 걱정도 없고 교육까지 시켜줬으니 훨씬 조건이 좋은 셈이었다. 물론 이런 꿈 같은 생활을 계속하려면 자기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했지만. 실제로 테오도리크는 20년 넘게 콘스탄티노플에서 머무르면서 각종 교육과 혜택을 받았다.[1]
테오도리크는 콘스탄티노플에 장기간 머물면서 로마의 정치학과 군사학을 배우며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눈에 띄어 29살 젊은 나이(483년)에 일종의 로마군 총사령관인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이듬해에는 집정관(consul)에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동고트족 거주지로 복귀했다.[2]
2.2. 오도아케르 제거
14세기 독일 뉘른베르크 삽화에서 묘사된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의 모습
이미 475년에 부친 테오데미르가 붕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간 테오도리크는 실질적인 왕이 되었다. 당시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일종의 동맹을 맺고 제국의 영내에 살고 있었는데, 인구가 늘고 살 곳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자주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게다가 라이벌인 게피드족과 경쟁하면서 자주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이를 빌미로 게피드족이 제국의 영내를 침범하는 등, 동고트족은 동로마에게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다.
테오도리크는 왕위에 오른 직후 자기 부족이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동로마 황제 제노와 협상을 벌였다. 제노는 이때 테오도리크에게 이탈리아 반도로 넘어가서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그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라고 제안한다. 오도아케르 역시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대단히 피곤한 존재였다. 명목상으로는 동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데다 혼란기를 틈탄 이민족의 약탈에 대해 로마인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고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군사 행동에만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노의 제안은 골치 아픈 두 세력 간의 싸움을 유도하는 전형적인 이이제이였는데, 테오도리크는 선뜻 이를 받아들였다. 테오도리크가 이끄는 동고트족은 동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이탈리아를 평정하겠다는 명분을 갖고 부족 전체가 489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했다.
제노 황제는 동고트족은 전투병력 뿐만 아니라 비전투 일반인까지 모두 이동했기 때문에 오도아케르와의 싸움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두 부족이 싸우다가 공도동망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동고트족은 예상외로 초반부터 오도아케르의 군대를 연파하였으며 여기에 친척 서고트족이 동고트족에 지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전쟁은 의외로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오도아케르가 수성이 유리한 라벤나에 은신하면서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전쟁은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갔으며 양측의 공방은 무려 3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지리멸렬한 소모전에 지친 양측은 결국 라벤나의 주교 요한네스의 주선으로 협상을 시작했으며 493년에 드디어 이 협상이 타결되면서 결국 4년 만에 전쟁이 끝나게 된다. 협상결과 오도아케르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테오도리크와 이탈리아 반도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며 통치와 관련된 각종 권한 배분도 의외로 공평하게 나누었다.
협상이 끝난 후 테오도리크는 라벤나에 입성했으며 입성한지 10일 후 오도아케르와의 연합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잔치가 흥이 좀 올랐을 때 테오도리크는 오도아케르와 우정의 표시로 술을 나누어 마셨는데, 마신 직후 갑자기 검을 꺼내들어 오도아케르를 아래쪽으로부터 옆구리까지 단칼에 세게 베어내려 죽여 버린다. 이를 시작으로 오도아케르의 가족들과 친위세력들도 테오도리크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아 모조리 살해됐다. 축하잔치를 빙자해서 오도아케르 세력의 장례식을 치른 후 테오도리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 불쌍한 놈은 마치 뼈가 없는 것 같았다.
이 잔인한 즉결 처형을 통해 테오도리크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가 되었다.
2.3. 이탈리아의 왕
라벤나의 궁전
테오도리크는 군사적인 능력도 뛰어났지만 일단 이탈리아의 패권을 잡은 후 진짜로 빛났던 것은 바로 통치력과 외교력이었다.
테오도리크는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의 신하였지만 실제로는 오도아케르와 마찬가지로 동로마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된 세력을 구축했다. 다만 오도아케르와 달랐던 것은 로마인들의 법과 권리를 그대로 인정해서 기존에 살던 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이민족의 침입이나 약탈을 막아주어 토착 로마인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웠다. 한편으로 라벤나를 중심으로 한 북이탈리아에 자신의 동고트족이 머물러 살도록 했으며 로마인들과 동고트인들을 구분하여 그들이 각자의 법률과 생활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했다. 쉽게 말하면 1국 2체제를 구축한 것. 종교적으로도 관용을 베풀었는데, 테오도리크 본인과 동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였으나 로마인들의 칼케돈파(카톨릭)신앙을 억압하지는 않았으며 기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과 종교적으로 융합되지 못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다스린 최대 영토
한편으로 그는 정략결혼 정책을 비롯한 당근-채찍 전략을 통해 이탈리아 주변의 게르만족들의 위협을 해소하였으며 각지의 게르만 부족간에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우선 테오도리크는 당시 게르만족 가운데 잘 나가고 있던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Audofleda)를 왕비로 맞아들여서 일종의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어 자신의 딸 테오데고타(Theodegotha)를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2세와 결혼시켰고 다른 딸 아말라프리다(Amalafrida)는 반달족의 왕 트라사문트(Thrasamund)와 결혼시켰다.[3] 또 다른 딸 오스트로고타(Ostrogotha)는 부르군트족의 왕 지기스문트(Sigismund)와 결혼시켰다.
500년경의 유럽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심만만한 클로비스 1세와의 충돌을 피하지는 못했다. 테오도리크가 503년에 클로비스 1세와 전투를 벌인 기록이 있는데, 결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규모 회전이 아니라 일종의 탐색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클로비스는 막강한 동고트족 대신 친척이었던 서고트족의 정벌을 시도했다. 507년에는 서고트의 알라리크 2세를 부이예 전투(Battle of Vouillé)에서 크게 격파함과 동시에 패사시켜 가론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내친 김에 서고트 정벌을 시도한다. 서고트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테오도리크가 중재에 나섰는데, 클로비스는 자신의 매제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아키텐 지역을 할양받는 수준으로 정벌을 끝냈다. 한편 507년 부이에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가 죽자 테오도리크는 당시 5세였던 후임 서고트 왕이자 자신의 손자인 아말라릭(Amalaric)을 대신하여 서고트의 섭정이 되었으며, 511년 클로비스가 죽자 프랑크족과 협상을 위해 아예 섭정왕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테오도릭은 프로방스 일대를 차지하고 오랑주를 주도로 하는 갈리아 속주를 설치하였다(508년).
2.4. 말년
이처럼 테오도리크는 옛 서로마 지역의 실권을 잡은 후 성세를 이룩했지만 말년에는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렸다. 523년에는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이 부르군트 왕국에 침입하였으며, 이 와중에 부르군트의 왕 지기스문트와 그 아내 오스트로고타 및 아들 세르게릭(Sergeric)이 모두 살해되었다. 오스트로고타와 세르게릭은 각각 테오도리크의 딸과 외손자였기 때문에 테오도리크는 부르군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후술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직접 군사행동을 벌이는 대신 지기스문트의 형제였던 고도마르(Godomar)를 지원하여 부르군트가 반격에 나설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4]523년에는 반달족의 왕 트라사문드가 죽고 힐데리크가 즉위하였는데, 이 힐데리크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아리우스파를 믿는 반달족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테오도리크의 딸이자 트라사문드의 아내였던 아말라프리다를 선봉에 세웠는데, 결국 반란은 실패하고 아말라프리다는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으며 아말라프리다의 호위를 맡았던 고트족 병사 상당수도 살해당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출병을 계획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계획에 차질을 빚었으며 결국 반달족 정벌에 나서지 못하고 526년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사망하는 바람에 평화를 구가하면서 잘나가던 동고트 왕국은 그의 사후 급격하게 나락으로 빠지고 말았다.
한편으로 말년에는 일국양제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상당히 예민해지고 의심병이 심해졌다. 그로 인해 의심스러운 부하들을 처형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때 희생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보에티우스(Boethius)이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테오도리크의 신임을 받았지만 동로마와 내통했다는 역모죄에 연루된 전직 집정관 알비누스(Albinus)를 변호하다가 본인도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힌 후 처형당했다(523년). 보에티우스는 처형당하기 전 감옥에서 명작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을 저술하였다.
한편으로 그간 서로마 지역의 로마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무색하게 동로마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을 모아놓고 몰살해 버렸다. 이런 만행은 그의 사후에 벌어진 고트 전쟁에서 동고트 왕국의 로마인들이 고트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빼박 흑역사.
테오도리크 사후 그의 외손자인 아탈라릭(Athalaric)이 즉위했으나, 즉위 당시 나이가 10살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자 테오도리크의 딸이었던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섭정을 하였다.[5] 그러나 아탈라릭은 즉위 8년 만인 534년에 사망했고 아말라순타 역시 테오도리크의 조카 테오다하드(Theodahad)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후 동고트 왕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치세의 동로마와 18년에 걸친 고트전쟁(Gothic war)를 벌이다 결국 553년에 동로마에게 멸망당했다.
3. 평가
라벤나에 있는 그의 영묘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고트족의 불가사의로 나온다.[6]
테오도리크는 내치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조정자 역할을 맡으면서 각지에 할거하는 게르만족 간의 분쟁을 막는 데 일조하였다. 당시 동고트 왕국의 북서쪽에는 프랑크 왕국의 야심만만한 클로비스 1세가 활발하게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테오도리크는 군사적 행동보다는 외교술을 활용하여 프랑크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만약 테오도리크마저 정복 활동을 선호하는 부동산 매니아였다면 클로비스 1세와의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7]
여하튼 클로비스 1세와는 다른 스타일로 대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정치 능력을 갖춘 왕이었으나 현재에는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 그의 사후 동고트 왕국이 너무 급격하게 몰락해버렸다. 때문에 다른 대왕들처럼 후손들이 대대손손 그의 치적을 떠받들어 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 클로비스의 경우 프랑크 왕국[8]이 19세기까지 존속했고 국호와[9] 정체성이 현대에도 존속 중인 것과 대조된다.
- 무력보다는 외교와 협상을 통해 평화를 구축한 것이 인기를 얻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정치에서 피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전쟁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테오도리쿠스는 정말 바람직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정복 활동보다는 긴장 완화에 주력한 탓에 전설로 승화될만한 군사적 업적이 적다는 것이 그의 인기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 측면이 있다.
- 아리우스파 기독교였다는 점도 후대에 저평가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테오도리크 이후 서유럽 전체가 가톨릭의 영향권이 되는 바람에 이단 종파를 믿었던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진 점이 있다. 게다가 위대한 라틴 철학자인 보에티우스를 처형하면서 야만족 이미지가 깊어진 건 덤.
협상보다는 화끈한 무력을 선호했고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으며 로마 가톨릭을 수용한 클로비스 1세가 지금까지도 서로마 몰락 후 중세 유럽을 개막시킨 선두 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반면, 그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평화를 구축했던 테오도리크가 묻혀 있는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꽤 많다.
4. 기타
결혼은 평생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 상당히 늦은 나이인 30대 후반에 클로비스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와 결혼했다. 다만 소시적에 여러 여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사생아를 낳기도 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결혼 후에도 이 사생아들을 잘 챙겨 주었다. 결혼 후에 특별히 애인을 두었다는 정황은 없다.그가 문맹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는데,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20년 넘게 공부했다는 걸 고려하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실제로 그는 고트어뿐만 아니라 라틴어, 그리스어에도 능했으며 외교문서를 직접 읽고 작성할 수 있을 정도[10]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췄다. 이런데도 그가 글을 몰랐다는 뜬소문이 난 것은, 로마인 이야기 15권에서 언급된 내용에 따르면[11] 문서에 사인을 할 때 친필 대신 문양이 새겨진 직인을 찍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2]
<nopad> |
Fate/Grand Order의 불가역폐기공 이드에서 제5의 시련 사람대왕(死嵐大王) 테오도리크 얼터로 등장했다. 폭풍의 왕으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며[13] 영기에 여섯 번째 시련 제보당의 괴수가 섞여있고, 그 힘은 신령급이라고 한다. 인게임 에너미로서의 이름은 와일드 헌트이며 클래스는 어벤저. 에너미로서는 1체로 나오지만 자신의 1턴 3회 공격에 제보당의 3회 공격을 추가로 날려 총합 1턴 6회 공격으로 후지마루 리츠카를 몰아붙히지만, 리츠카가 소환한 고르곤과 헤센 로보에 의해 공격이 봉쇄당해 패배한다.
백작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을 떠났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동고트의 왕이며, 테오도리크가 디트리히 폰 베른의 모델이라는 설을 반영했는지 "디트리히 전설의 원전"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디트리히와의 관계는 카를 대제와 샤를마뉴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1] 이런 대접은 동로마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미래의 게르만족 리더들에게 각종 혜택을 주고 로마 친화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자신들과 부드러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데다 이들 가운데 군사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로마군에 편입돼서 큰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술하다시피 테오도리크도 이탈리아의 패자가 되기 전까지는 이와 같은 동로마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던 인물이다.[2] 동로마에서는 인질들을 소속 부족으로 복귀시키 전에 이런저런 감투를 달아줌이 관례였다. 미래의 게르만족 족장에게 로마의 직책을 주어서 동로마 황제와 군신관계를 명확하게 함과 동시에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르만족 족장 입장에서도 로마에서 받은 감투는 소속 부족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쏠쏠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결코 나쁘지 않았다.[3] 당시 반달족은 자주 이탈리아 해안을 돌면서 해적질과 약탈을 해서 이탈리아 지역의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다. 테오도리크는 아말라프리다가 결혼할 때 고트인 호위병 5천 명을 딸려 보냈는데, 명목은 호위병이었지만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들이 반달족 심장부에 주둔한 덕분에 이후 반달족의 해적 행위가 크게 줄었다.[4] 하지만 고도마르는 무능한 인물로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하고 테오도리크 사후 계속 쫓겨다니다가 결국 534년 프랑크군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부르군트 왕국도 멸망했다.[5] 테오도리크의 딸 가운데 전술한 테오데고타(서고트의 알라릭 2세와 결혼)와 아말라프리다(반달족의 트라사문트와 결혼)은 정실 부인에게 낳은 자식이 아닌 서녀였다. 반면 아말라순타는 정식으로 결혼한 아우도플레다(클로비스 1세의 동생)의 소생이었다. 아말라순타는 테오도리크가 후계자로 점찍은 서고트의 왕족 유타릭(Eutharic)과 결혼했는데, 유타릭이 522년에 죽는 바람에 결국 그의 아들 아탈라릭이 테오도리크의 대를 이었다.[6] 정작 영묘에 있어야할 왕은 현재 영묘에 존재하지않는다.[7] 클로비스 1세 vs 테오도리크의 가상 대결은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굳이 가정해 보자면 둘 모두 뛰어난 전략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예측이 쉽지 않다. 다만 군사적인 재능과 별도로 외교적 능력은 테오도리크가 더 뛰어났기 때문에 지원군이나 보급 측면에서는 좀더 유리했을 것이다. 애초에 테오도릭은 클로비스의 매제여서 둘이 싸울 가능성은 적었다.[8] 동로마가 질료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고대 로마와 동일한 나라이듯이, 프랑스는 질료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프랑크와 동일한 나라이다. 또한 클로비스와 그의 가문이었던 메로베우스(소위 메로빙거) 왕조 당시에는 마치 로마제국처럼 오늘날 독일의 서부, 남부 일부만 프랑크령이었고 오늘날 독일의 중부, 동부, 북부까지 프랑크 왕국을 확장시킨 것은 후대의 카롤루스 대제였다.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등 과거 독일계 국가들은 샤를마뉴를 자국의 옛 군주로 보아 군주로서의 넘버링(카를 X세)을 이어왔지만 클로비스는 자국의 왕으로 보지 않았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조차도 "진정한 프랑스의 시작은 클로비스 1세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현대 사학계도 이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다. 따라서 카롤루스와 달리 클로비스의 역사적 귀속권은 확실히 프랑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9] 프랑크든 프랑스든 동일한 Francia의 다른 표기일 뿐이다.[10] 게다가 외교문서를 작성하려면 문학적 재능도 있어야 한다.[11] 15권 380페이지 발췌: 동고트족의 자제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좋게 되었지만, 그 결과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테오도리크는 서명하지 않아도 용무를 끝낼 수 있도록 각자 도장을 사용하게 했다. 테오도리크 자신이 모범을 보여 공문서에는 서명이 아니라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테오도리크도 문맹이 아니었을까 하고 오해하게 된다.[12] 그런데 정작 로마인 이야기 10권에서는 로마의 문맹률이 낮았다고 기술했는데, 이 역시 완전히 잘못된 말이다. 로마 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무려 95% 이상이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몰랐을 만큼 문맹률이 굉장히 높았고, 그래서 돈을 받고 다른 사람 대신에 글씨를 읽거나 써주는 직업까지 있었다. 심지어 로마의 국력이 최전성기였던 서기 2세기 무렵, 이집트의 로마인 관리도 글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문장을 엉터리로 적는 일도 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문맹 항목을 참조할 것.[13] 테오도리크의 망령이 이탈리아의 와일드 헌트 행렬을 이끈다는 전설을 모티브로 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