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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11대 군주 Amalareiks | 아말라리크 | ||
제호 | 한국어 | 아말라리크 |
고트어 | Amalareiks | |
라틴어 | Amalaric | |
생몰 년도 | 502년 ~ 531년 | |
재위 기간 | 526년 ~ 5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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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11대 군주. 알라리크부터 시작된 발티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2. 행적
502년 서고트 왕국 9대 군주 알라리크 2세와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크 대왕의 여동생 테오데고타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출생 직후부터 왕위 계승자로 예정되었지만, 507년 8월 아버지가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군과 맞서다 전사했을 때 5살에 불과했다. 이에 귀족들은 알라리크 2세의 사생아인 게살레크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테오도리크 대왕의 보호를 받았다.511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게살레크를 폐위하면서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실권은 섭정왕을 자처한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있었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탈리아에 남아 통치를 행사했고, 리우비리투스와 암펠리우스를 민사 감독관에, 테우디스를 군사 담당관에 선임하여 히스파니아를 대신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히스파니아 신민들은 자신이 정한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으며,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두 종족간의 혼인을 후원했다.
526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한 뒤 두 왕국은 분열되었고, 아말라리크는 비로소 실권을 잡았다. 그는 히스파니아 신민들이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세금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지만,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동고트 관료들이 계속 머무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527년 톨레도에서 정교 사제들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529년 현치인 출신의 스테판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세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며 지난날 부이예 전투에서 아버지를 죽여버렸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를 아내로 삼는 등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클로틸데는 서고트 궁정 내에서 배척당했다. 왕국에 큰 손실을 입힌 클로비스 1세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은 데다, 아리우스파를 고수하는 귀족들 입장에서 정교를 믿는 왕비를 곱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교회에 갔을 때 거름 등 여러 가지 불순물을 그녀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내를 너무 심하게 때려서 코피가 났고, 그녀는 피묻은 손수건을 오빠 킬데베르 1세에게 보냈다고 한다.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31년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던 나르본을 침공해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베손이라는 이름의 프랑크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면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모두에게 멸시받은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나르본 전투 직후 탈출을 시도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잃어버린 보석을 찾고자 나르본 시로 돌아갔다가 한 프랑크인의 창에 찔러 사망했다고 한다. 킬데베르는 여동생과 지참금을 챙긴 뒤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아말라리크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척 역시 알려진 바 없었기에, 알라리크부터 100여 년간 이어지던 발티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후 테오도리크 대왕에 의해 서고트 왕국에 보내진 관원이었던 테우디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