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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7대 군주 Þiudarīks | 테오도리크 2세 | ||
제호 | 한국어 | 테오도리크 2세 |
고트어 | Þiudarīks | |
라틴어 | Theodoric | |
생몰 년도 | 미상 ~ 466년 | |
재위 기간 | 453년 ~ 4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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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7대 군주. 절친한 사이였던 아비투스를 로마 황제로 옹립했으나 마요리아누스가 아비투스를 폐위하자 그를 적대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에게 연전연패하여 남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잃고 주권을 상실할 위기에 몰렸지만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살해당하면서 모면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갈리아 총독으로 선임된 아에기디우스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몇년 후 동생 에우리크에게 암살당했다.2. 행적
테오도리크 1세의 아들로, 형제로 형 토리스문드, 남동생 프레데리크, 에우리크, 리키메르 및 힘네리스가 있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 2명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아비투스를 가정교사로 두고 라틴어를 숙달했으며, 아비투스와 절친한 관계였다는 것만 전해진다. 451년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 형 토리스문드와 함께 카탈라우눔 전투에 참여하여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로마군과 함께 아틸라의 훈족군을 격파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아버지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전사한 뒤 형 토리스문드가 새 군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가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알란족을 격파하고 로마의 영역인 아를과 나르본을 위협하는 등 로마에 대한 적대행위를 서슴지 않자, 로마와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해야 서고트 왕국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겼던 그와 프레데리크는 반감을 품었다. 453년, 두 형제의 사주를 받은 아스칼 등 여러 하인이 토리스문드를 암살했다. 그 후 그가 귀족들에 의해 새 군주로 옹립되었고, 프레데리크는 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서로마 제국과 화해했고, 454년 프레데리크를 시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농민) 반란을 진압했다. 455년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의 부하들에게 피살된 뒤 새 황제에 오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파견했다. 그는 스승이자 친구인 그를 정성껏 대접하며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로 쳐들어왔고, 페트로니우스 황제가 도망치다가 시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아비투스는 속주민들과 갈리아 주둔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고, 그는 아비투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아비투스는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서고트 왕국이 세력을 히스파니아로 확장하는 걸 용인했다.
이렇게 아비투스의 승인을 얻어낸 뒤, 456년 히스파니아로 진격하여 캄포스 파라무스 전투에서 레치아르 왕이 이끄는 수에비군을 격멸하고 브라가를 수에비 왕국으로부터 탈취하고 메리다를 함락시켰으며, 457년에 아스토르가와 팔렌시아를 약탈했다.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맹공으로 수도 브라가를 빼앗겨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 후 테오도리크 2세는 아키텐으로 귀환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수네리크 공작과 키릴라에게 해당 지역의 방위를 일임했다
그런데 456년 10월,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반란을 일으켜 아비투스를 폐위했다. 그 후 리키메르는 1년 가까이 뜸을 들이다가 로마군이 이탈리아에 침공해온 알레마니족을 격퇴하고 돌아오던 마요리아누스를 방패에 올려서 황제로 추대하자 457년 4월 1일에 마요리아누스를 정식으로 로마 황제로 옹립했다. 테오도리크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마요리아누스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적대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 왕국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458년 말에 군대를 이끌고 남부 갈리아로 진군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남부 갈리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용인하고 마요리아누스가 확보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
459년, 마요리아누스는 여세를 몰아 히스파니아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치 장군을 파견해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던 수에비족을 격파하게했다. 두 장군은 루쿠스 아우구스티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스칼라비스를 점령했다. 그 동안 마요리아누스는 사라고사를 거쳐 히스파니아 깊숙히 진군해 카르타기니엔시스까지 나아갔다. 이리하여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서고트 왕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던 461년, 반달 왕국으로부터 아프리카 속주를 되찾기 위해 카르타고노바에 함대를 집결시켰던 마요리아누스는 반달 왕국의 군주 가이세리크의 급습으로 다수의 함대가 파괴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귀환하다가 리키메르에 의해 긴급 체포되어 폐위된 뒤 며칠간 고문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마요리아누스가 비참하게 죽자, 그에 의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네포티아누스는 리키메르에 의해 새 황제로 선임된 리비우스 세베루스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도리크 2세의 침공으로 축출되었고, 로마 관리 아르보리우스가 새 총독으로 임명되어 서고트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한편 역시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아에기디우스도 리비우스 세베루스에게 복종하는 걸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꾸렸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추종자인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로 파견하여 아에기디우스의 권력을 대체하게 했다. 아그리피누스는 테오도리크 2세에게 접근해 자신을 도와준다면 나르본 시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나르보 시를 공략하고 싶었던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프레데리크를 시켜 아에기디우스를 치게 했다. 그러나 아에기디우스는 당시 갈리아 북부에 거주하던 알란족의 일파와 동맹을 맺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했고, 프레데리크는 전사했다. 아에기디우스는 가이세리크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와 서고트 왕국에 대한 동시 공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464년 가을 아에기디우스가 역병으로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테오도리크 2세는 적들이 아에기디우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혼란한 틈을 타 루아르 중류 일대를 공략했다.
466년, 그는 툴루즈에서 살해당했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부하들에게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로스는 동생 에우리크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요르다네스는 그는 자연사했지만 에우리크가 지나치게 서둘러서 왕이 되었기에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술했다. 사후 에우리크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