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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 6대 군주 Vitiges | 비티게스 | ||
제호 | 한국어 | 비티게스 |
라틴어 | Vitiges | |
생몰 년도 | 미상 ~ 542년 | |
재위 기간 | 536년 12월 ~ 540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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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고트 왕국의 6대 국왕.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시기 동로마 제국의 침공에 무능하게 대처하는 테오다하두스를 폐위하고 전력을 기울여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에 맞섰으나, 끝내 패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다.2. 생애
왕이 되기 전의 전반적인 생애는 기록이 미비해 알기 어려우나, 동고트군에서 인기가 많은 걸 볼 때 테오도리크 대왕 치세 때 군공을 많이 거둔 것으로 보인다. 536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동로마군이 벨리사리우스의 지휘하에 나폴리까지 공략했으나, 테오다하두스 왕은 우유부단하게 굴 뿐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못했다. 귀족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비티게스를 옹립했다. 테오다하두스는 라벤나로 도망치다가 플라미니우스 가도에서 암살당했다.비티게스는 로마 시에 4천 병력을 남긴 뒤 라벤나로 후퇴한 후 병력을 최대한 긁어모았고, 프랑크 왕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또한 이 시기에 아말라순타의 딸이자 아탈라리쿠스의 누이인 마타순타와 결혼하여 정통성을 강화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접근하자, 로마 시민들과 실베리오 교황은 로마를 넘기기로 했다. 이에 4천 병사들은 도시를 떠나 라벤나로 철수했다.
이윽고 5만 병력을 규합한 비티게스는 537년 3월 로마로 진격했다. 그는 벨리사리우스의 병력이 5천 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거나 도망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농성을 택하자, 비티게스는 수비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로를 절단했다. 그 후 1년 9일간의 공성전을 벌였으나 벨리사리우스의 능수능란한 지휘력과 동고트군의 공성 능력 부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파견한 동로마 지원군이 속속 합류했고, 벨리사리우스의 부관 요한네스의 기병대가 피케눔 일대를 약탈하며 라벤나를 위협했다. 결국 비티게스는 라벤나로 퇴각했고, 벨리사리우스는 적이 티베리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들이닥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 후 비티게스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2년간 항전했지만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연전연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원 올 줄로 기대했던 프랑크군은 밀라노를 초토화시킨 뒤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540년 봄, 비티게스는 라벤나에서 고립되었다.
비티게스는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에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달라고 청원했고, 호스로 1세는 이에 응해 대군을 일으켰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사산 왕조군을 막게 하기 위해 동고트와의 전쟁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온건한 조건의 휴전을 제의했다. 비티게스는 이에 동의했으나, 벨리사리우스가 강력히 반대하며 서명을 거부했다. 비티게스는 상황이 절박해지자 자신은 퇴위하고 벨리사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추대하기로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역을 꾀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라벤나 접수를 위하여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540년 5월, 동로마 군대는 고트족의 수도인 라벤나에 입성하였다. 그 후 벨리사리우스는 본색을 드러내 비티게스와 동고트 수뇌부를 체포해 콘스탄티노플로 이송했다. 그렇게 끌려간 비티게스는 542년에 사망했다. 아내 마타순타는 그가 사망한 직후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카인 게르마누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