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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1570년 ~ 1711년[1] | |
위치 | 동유럽 |
수도 | 줄러페헤르바르(Gyulafehérvár)[2] 헤르만슈타트(Hermannstadt)[3]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언어 | 라틴어, 헝가리어, 독일어 |
종교 | 가톨릭, 개신교 |
민족 | 루마니아인, 헝가리인, 세케이인, 독일인, 루테니아인 |
성립 이전 | 동헝가리 왕국 |
멸망 이후 | 합스부르크 제국(트란실바니아 대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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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70년부터 1711년까지 존속했던 헝가리인의 자치 공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는 신하국이었다가 1711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가 되어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인 관료들의 지배를 받았다.2. 건국 배경
트란실바니아는 고대에 다키아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다키아 왕국이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망한 뒤 다키아 속주에 편입되었고, 로마가 철수한 후에는 서고트, 훈족, 게피드족,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았다. 아바르족이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쇠락한 후 슬라브 부족들의 터전이 되었다가, 9세기부터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를 잡았던 마자르족에게 장악되었고, 1000년 또는 1001년에 출범한 에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3세기 중반부터 다수의 독일인[4]이 진출해 상당 수준의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 깊숙이 진출하는 16세기까지도 헝가리인, 세케이인, 독일인 3민족을 중심으로 한 자치권이 유지되었다.그러던 1526년 8월 29일, 헝가리군과 오스만 제국군 사이에 벌어진 모하치 전투에서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는 등 헝가리군이 참패했다. 그 후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이었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1526년 11월 10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헝가리 법에 따르면, 왕이 부재한 경우 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는 이는 궁정백이었다. 그러나 당시 궁정백이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은 그와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그는 바토리 이슈트반을 배제한 채 의회를 소집하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 달 후, 바토리 이슈트반은 헝가리 대귀족 13명과 헝가리 대주교 및 추기경들을 포조니로 소집하여 의회를 개최했다. 그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궁정백 없이 왕을 선출하는 의회를 소집한 뒤 즉위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니 적법한 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전임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체결한 협약[5]에 따라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의회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1526년 12월 16일 포조니에서 열린 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서포여이 야노시와 페르디난트 1세는 서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전세가 불리해진 서포여이 야노시는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그를 도와줬고, 헝가리 왕국은 양분되었다. 1541년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즉위하자, 어린아이를 헝가리 왕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한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며, 오스만 제국이 직할지로 삼은 헝가리 중부를 오스만 헝가리로 지칭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는 서부 헝가리를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칭한다.
동헝가리 왕국은 1541년부터 1551년까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모후인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재무대신 프라테르 죄르지가 섭정했고, 1551년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에 귀속해서 직위를 보전하려던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를 실각시킨 뒤 페르디난트 1세를 주권자로 받들면서 일시적으로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가 프라테르 죄르지와 마찰을 벌인 끝에 1551년 12월 17일 프라테르 죄르지를 암살했고, 이에 분노한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거 귀순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은 페르디난트 1세가 자신의 봉신인 이자벨라 모자를 부당하게 몰아냈다며, 이를 보복하고 두 사람을 복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침공했다. 카스텔도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제대로 막지 못하다가 1553년 봄 빈으로 소환되었다.
1556년 3월 12일, 사스셰베시(Szászsebes)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기로 결의하고, 이자벨라의 추종자였던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왕의 부총리로 선출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지지자들과 서포여이 지지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데,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의 지원을 받은 서포여이 지지자들은 신속하게 에르데이 전역을 장악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귀환을 지지하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트란실바니아를 포기했다.
그렇게 해서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서 합스부르크 헝가리로부터 분리된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자연스럽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봉하는 가톨릭의 권위로부터 벗어났고, 루터교회와 칼뱅교회가 번성했다. 1563년 궁정 의사로 발탁된 조르조 블란드라타는 삼위일체론을 단호히 거부하는 유니테리언 신자로, 트란실바니아 궁정에서 유니테리언 신자들을 대거 양산했다. 특히 칼뱅파 주교였다가 조르조 블란드라타에게 설복되어 유니테리언 신자가 된 다비드 페렌츠는 트란실바니아 통일교회 주교로서 반삼위일체 사상을 설교에 포함했다. 1567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페렌츠 다비드에게 감화되어 반삼위일체 사상을 수용했다. 페렌츠 다비드는 그의 지원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홍보하는 다섯 권의 책을 출판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우상 숭배자라고 비난했다.
1568년 초 투르다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설교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해에 따라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승인했고, 아무도 종교적 이유로 다른 사람의 손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가톨릭, 루터교회, 칼뱅교회 성직자들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았고, 유니테리언, 정교회, 콥트교, 유대교, 이슬람교 신자들은 비록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믿는 교리에 관해 어떤 간섭도 받지 않았다. 1568년 3월 8일부터 17일까지,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공식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뒤이어 1569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바러드에서 칼뱅파와 유니테리언 신학자들 사이의 토론회가 열렸다. 두 토론회 모두 승자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마침내 삼위일체를 거부하기로 마음먹고, 1569년 말 대다수 신하들과 함께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했다. 그는 유일한 유니테리언 군주로서 유럽사에 기록되었다.
1570년 8월 16일, 슈파이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막시밀리안 2세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은 더 이상 왕을 칭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트란실바니아의 공이자 헝가리 왕국 일부의 주권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채택했으며, 자신이 통치하는 공국은 헝가리 왕국의 일부이며, 자기가 죽은 후에는 막시밀리안 2세 또는 막시밀리안 2세의 후계자에게 돌아갈 것임을 확인했다. 12월 1일 슈파이어 조약이 에르데이 의회에서 비준되면서, 오랜 세월 이어진 합스부르크 가문과 서포여이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되었다. 이리하여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 역사
3.1. 바토리 가문
3.1.1. 바토리 이슈트반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출범된 지 4달 후인 1571년 3월 14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에, 의회에 새로운 군주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했다. 1570년 8월 16일에 체결된 슈파이어 조약에 따른다면,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이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돌아가야 했고, 트란실바니아 내 친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인 가스파르 베케시(Gáspár Bekes)가 총독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대로 트란실바니아를 장악하고 총독을 세운다면 자치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거라고 여겼다.1571년 5월 25일,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인 바토리 이슈트반을 만장일치로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출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셀림 2세도 이듬해에 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막시밀리안 2세가 무력으로 응징하는 걸 피하기 위해 막시밀리안 2세에게 밀사를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트란실바니아를 장악하고 싶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그를 인정하기로 했고, 말년에 이단인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뒤를 이은 이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기뻐하는 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573년, 가스파르 베케시가 막시밀리안 2세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 내 친 합스부르크 파벌을 결성해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정식으로 병합하려 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이 군대를 일으켜 카스파르 베케시의 근거지인 포가라스 성을 점거하고 베케시의 가족을 사로잡았지만, 베케시는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피신한 뒤 군대를 끌어모은 뒤 세케이인과 작센인을 부추겨서 바토리 이슈트반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1575년, 베케시는 세케이푈트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세케이인들을 모집해 3,000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이에 맞서 파르티움(Partium)[6] 군대, 아라뇨스체크 출신 800명, 부더의 파샤가 지원한 튀르크 경기병대를 규합해 베케시를 향해 진군했다.
1575년 7월 9일, 양자는 케렐뢰센트팔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오전 10시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진 끝에 바토리 이슈트반의 대승으로 끝났고, 베케시는 막시밀리안 2세에게 망명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포로로 잡힌 귀족 5명을 전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한 달 후 의회의 승인을 받아 또 다른 베케시 추종자 43명(귀족 7명 포함)을 처형했다. 이리하여 그는 트란실바니아를 확고히 장악했다. 이후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서포여이 야노시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재검토해 일부를 회수했고, 국가 수입을 조사하고 무역과 광업을 진흥했다. 한편, 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톨릭의 세력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1579년 클루지나포카에 예수회를 정착시켰고, 유니테리언 주교로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유니테리언으로 개종시켰던 페렌츠 다비드를 데바 성 감옥에 가뒀다. 1581년에는 세게드 대학교의 전신인 클루지 예수회 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궁정을 파도비아세 교육받은 지식인들로 채웠다. 그러면서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종교 관용 정책을 이어받아 개신교 신도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따르는 걸 허용했다.
1576년 5월 1일, 바토리 이슈트반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테판 바토리로 등극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공을 겸임하면서, 형제인 바토리 크리스토프를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로 선임해서 트란실바니아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오스만 사절단은 그해 7월에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크리스토프의 보이보드 취임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그가 국경을 따라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만 스테판 바토리는 트란실바니아 행정을 별도로 감독하기 위해 크라쿠프에 트란실바니아 총리실을 설립하고 베르제비치 마르톤을 트란실바니아 총리로 선임해 크리스토프와 상호 협력하도록 했다.
1576년, 유니테리언 설교자들이 파르티움과 세케이푈트에서 엄연한 인간인 예수를 신으로 받드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트란실바니아 유니테리언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인 페렌츠 다비드는 1578년 가을에 공개적으로 이들을 지지했다. 크리스토프는 페렌츠 다비드에게 분쟁을 일으키는 짓을 그만두라고 권고했지만, 다비드가 이를 따르지 않자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를 연 뒤 다비드를 데바 성 감옥에 가뒀다. 또한 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톨릭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스테판 바토리의 시도를 지지했으며, 1579년 5월 5일 콜로즈바르(현재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예수회에 영지를 부여했다.
1581년 초, 크리스토프는 두번째 아내 보치커이 에르제베트가 사망한 직후 중병에 걸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코스탄티니예에 퍼지자, 오스만 대재상 코차 시난 파샤는 크리스토프가 추방했던 헝가리 귀족 마르카지 팔에게 트란실바니아 공에 오르는 걸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의회는 미르카지 팔이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되는 걸 막기 위해 크리스토프가 죽기 전에 그의 아들 바토리 지그몬드를 보이보드로 선출했다. 1581년 5월 27일 크리스토프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는 1581년 7월 3일 바토리 지그몬드의 선출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매년 15,000 플로린의 공물을 코스탄티니예에 납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마르카지 팔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스만 궁정에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주 다면 공물을 2배로 늘리고, 100,000 플로린에 달하는 추가 세금을 납부하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 3세는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마르카지 팔의 제안을 전하면서, 그에게도 이와 같은 공물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도 오스만 제국의 탐욕으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지킬 의사를 표명했다. 여기에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서도 과도한 공물 요구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무라트 3세는 1581년 11월에 바토리 지그몬드의 통치를 재차 인정하기로 했다.
지그몬드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섭정 의회가 권력을 잡았다가 1585년부터 헝가리 귀족 그히치 야노시(Ghiczy János ?~1589)가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자 트란실바니아 공인 스테판 바토리는 크라쿠프에 별도의 트란실바니아 정부를 조직하고 어린 조카를 대신하여 트란실바니아에 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또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 때 트란실바니아에서 동원한 군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3.1.2. 바토리 지그몬드
1586년 12월 13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자 트란실바니아 공이었던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했다. 그 후 바토리 지그몬드가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아직 14살의 미성년자였고, 그히치 야노시가 섭정으로서 계속 통치했다. 지그몬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의회는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놓고 지그문트 3세 바사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전쟁을 벌일 때, 트란실바니아 정부는 지그문트 3세를 지원했다. 한편, 스테판 바토리 생전에 크라쿠프에서 별도의 트란실바니아 정부를 이끌었던 바토리 발타자르는 스테판 바토리 사후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간 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퍼거라슈에 있는 자신의 궁정을 섭정 그히치 야노시의 통치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집결지로 만들었다.1588년 10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개신교에 지나치게 적대적이어서 트란실바니아에서 종교 갈등을 유발하는 예수회를 추방하라고 권고했다. 그들은 그렇게 해준다면 당시 16세였던 지그몬드를 성인으로 인정해 친정을 실시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지그몬드는 예수회 인사들과 가까운 사이였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친족들은 개신교 대표들이 주도하고 있는 의회에 저항하면 트란실바니아 공 직위가 위태로워진다며, 그들의 요구에 따르라고 설득했다. 의회는 1588년 후반에 다시 소집된 뒤 같은 요구를 되풀이 했고, 지그몬드는 고심 끝에 12월 8일 예수회 추방을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는 성인으로 선포되면서 친정을 시작했고, 12월 23일 트란실바니아 공 대관식을 거행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예수회가 추방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해 지그몬드를 파문했다. 지그몬드의 사촌이자 헝가리 추기경인 바토리 언드라시는 교황에게 "개신교 고문들이 그에게 예수회를 추방하라고 강요했을 뿐, 지그몬드는 그들을 추방하고 싶지 않았다"라며 파문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식스토 5세는 1589년 5월 지그몬드가 고해신부를 고용하는 걸 허가했고, 1590년 부활절에 파문을 취소했다. 이후 지그몬드는 국가 행정 최고 직위에 가톨릭 신도를 앉힘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고, 1591년 8월 바토리 언드라시와 바토리 발타자르와 접견해 예수회를 합법화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예술가와 장인들을 자신의 궁정에 초대해 고문이나 집사로 삼았다.
지그몬드의 이같은 행보에, 개신교 영주들은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이대로 가다간 궁정이 비헝가리 인사들로 채워지고, 가톨릭이 트란실바니아를 지배해 자신들을 억압할 거라고 여겼다. 1591년 11월,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는 지그몬드의 방탕한 생활 방식을 비판하면서, 그가 왕실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후 바토리 발타자르가 사촌 지그몬드를 폐위하고 공위를 가로채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반대로 지그몬드의 전직 가정교사인 갈피 야노시가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간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두 사람 모두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1592년 여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특사인 아틸리오 아말테오가 트란싧라니아 공국에 찾아와서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또한 그는 지그몬드에게 가톨릭 공주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1592년 8월, 무라트 3세는 지난날 몰다비아 공국 보야르들에 의해 폐위된 전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을 복위하기로 하고, 지그몬드에게 현재 자포로제 카자크의 지원을 받아 보이보드에 오른 페트루 7세 카자쿨을 축출하고 아론을 복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그몬드는 이 명령에 따라 1592년 10월 시브리크 가스파르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군을 파견해 아론을 복위시켰다. 또한 지그몬드는 연간 공물을 2배 지불하라는 무라트 3세의 명령에 복종했다.
이 무렵, 헝가리 역사가이자 지그몬드의 비서인 규라이 팔은 갈피 야노시와 함께 줄러페헤르바르에서 비밀 의회를 소집한 뒤 영주들에게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사이의 불화가 끝나지 않는다면, 발타자르를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것에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이 비밀 의회의 정보가 누설되었고, 영주들은 발타자르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책임을 규라이 팔과 갈피 야노시에게 떠넘겼다. 1592년 12월 10일, 발타자르는 지그몬드를 압박한 끝에 그의 동의를 받아낸 뒤, 병사들을 이끌고 아바파에서 규라이 팔을 체포한 뒤 사지를 잘라 죽였다. 또한 1593년 3월 8일에는 지그몬드의 동의를 다시 받고 갈피 야노시를 체포한 뒤 처형했다. 이리하여 발타자르의 권세가 매우 강해지자, 지그몬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움을 받아 권좌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1593년 여름, 지그몬드는 변장을 한 채 크라쿠프로 간 뒤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여동생인 안나와의 결혼을 협상했지만 무산되었다.
1593년 8월,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지그몬드에게 오스만 제국군을 돕기 위한 보조군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지그몬드는 이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고, 교황 클레멘스 8세도 지그몬드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조직된 신성 동맹에 가입하라고 설득했다. 루돌프 2세의 황제군이 1593년 가을에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일련의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가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신성 동맹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는 건 자살 행위라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1594년 7월, 발타자르는 이를 기회로 삼아 주요 관리들을 포섭해 지그몬드를 폐위한 뒤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지그몬드를 압박해 퇴위하도록 했고, 지그몬드는 코바르로 가서 이탈리아로 이주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다른 군 사령관들과 함께 코바르로 달려갔고, 지그몬드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보치커이는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압박해 바토리 지그몬드를 공으로 도로 받들도록 했다. 그 해 8월 28일, 8월 28일 발타자르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던 귀족 12명이 보치커이 이슈트반에 의해 음모 혐의로 체포된 뒤 감옥에서 교살되었다.
1594년,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교황령, 스페인,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가담한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그 해 9월 16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이 참가했고, 11월 13일에는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하이 2세도 가담했다. 아론 트리아눌과 미하이 2세는 교황청과 직접 협상하려 했지만, 지그몬드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자신의 봉신이니 그럴 수는 없다며 가로막았다. 그의 사절인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1595년 1월 28일 프라하에서 트란실바니아가 신성 동맹에 가입한 것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때 맺은 조약에 따르면, 루돌프 2세는 트란실바니아와 파르티움을 통치 하고 '프린스'라는 칭호를 사용할 지그몬드의 세습권을 인정했지만, 지그몬드 가문이 단절될 경우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 수중에 있는 헝가리 왕국에 재통합되어야 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4월 16일에 조약을 확정했다. 또한 의회는 종교적 혁신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우드바르헬리셰크의 세케이인 안식일 수호파[7]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595년 5월 3일 또는 5월 4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은 지그몬드로부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논의하자는 초청장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긴급 체포되었다. 지그몬드는 아론이 신성 동맹을 이탈하고 무라트 3세와 단독으로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기에 자기가 손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 연대기 작가들은 아론이 지그몬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빈슈 데 조스의 마르티누치 성에 투옥되었고, 1597년 6월에 독살당했다. 이후 슈테판 8세 라즈반이 트란실바니아군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 후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미하이 2세를 대신해 바토리 지그몬드와 협상한 끝에 줄러페헤르바르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12명의 대 보야르로 구성된 위원회는 보이보드와 함께 국가의 행정 통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보야르들은 트란실바니아 공의 승인 없이는 보이보드에게 처형될 수 없고,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다. 미하이 2세는 사절들이 협상한 조약 내용이 자기에게 지극히 불리하고 보야르들에게 유리한 걸 보고 불만을 품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보야르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후 지그몬드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의 공, 신성로마 제국의 프린스, 세케이의 백작, 헝가리 왕국 일부의 군주"라고 칭했다. 1595년 8월 6일,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조카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했다.
1595년 8월, 오스만 대재상 시난 파샤가 85,000 ~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미하이 2세는 오스만 제국군 선봉대를 상대로 칼루가레니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시난 파샤에게 여전히 대규모 병력이 있으며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적군이 수도 부쿠레슈티를 향해 행진하는 걸 허용하고 산악 지대로 후퇴해 지그몬드의 지원을 기다렸다. 시난 파샤는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여 그곳에 메흐메트 파샤와 10,000명의 수비대를 배치하고 교회를 모스크로 바꾼 뒤, 트르고비슈테를 추가로 점령하고 1,500명의 병력과 대포 30문을 남겨뒀다. 오스만군 대부분은 스토에네슈티로 진군해 미하이 2세의 군대 앞에 진영을 세웠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시난 파샤는 왈라키아 각지에 분견대를 파견해 여러 곳을 장악하고 오스만 관리들을 임명해 왈라키아를 제국의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스만군의 가혹한 수탈과 약탈에 분노한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키면서, 점차 입지가 불안해졌다.
1595년 9월 6일, 지그몬드가 용병 13,200명, 세케이인 8,000명을 이끌고 미하이 2세와 합류했다. 여기에 10월 초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파견한 정예병 1,500명과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온 실비오 피콜로미니 휘하 포병 300명이 도착했다. 미하이 2세는 총 23,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반격 작전을 개시해 10월 5~8일 트르고비슈테 공방전을 벌인 끝에 탈환했고, 뒤이어 부쿠레슈티로 진군해 1595년 10월 12일 치열한 공병전을 치른 끝에 탈환했다. 여기에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적의 군세가 갈수록 불어나자, 시난 파샤는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10,000마리 이상의 짐승과 포로 수천 명을 끌고 가느라 철군 속도가 매우 느렸고, 결국 10월 15일 도나우 강변의 지우르지우에서 철수 작전을 수행하던 중 연합군에게 따라잡혔다. 시난 파샤 본인은 강을 건넜지만, 10,000명 가량의 병사들과 포로, 짐승들은 강을 미처 건너지 못했다. 이어진 지우르지우 전투에서, 미처 건너지 못한 오스만군 대부분이 궤멸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지우르지우 성채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처절하게 항전했지만, 끝내 궤멸되었다. 특히 오랜 세월 정찰 및 적지 약탈 임무를 수행했던 아킨지(Akinji) 부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1596년 1월 초,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프라하로 떠났고,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 그해 2월, 세케이인들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농노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케이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토벌대를 이끌고 이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정부에 대한 세케이인들의 반감이 매우 거세졌다. 한편,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로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지원군과 자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3월 4일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왔다. 이후 테메스바르를 포위했지만 오스만군 2만 명이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다가오자 철수했다. 그 해 여름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3세가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자, 지그몬드는 황제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케레츠테스 전투에서 완패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잇따라 보내 퇴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1597년 12월 23일, 루돌프 2세는 그의 퇴위를 승인하기로 했다. 루돌프 2세는 그에게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과 연간 50,000 탈러의 보조금을 부여했다. 이 협정은 몇 달 후 공개되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598년 3월 23일에 그의 퇴위를 인정했다.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루돌프 2세가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선임한 막시밀리안 3세가 도착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를 임시로 다스렸다.
그렇게 트란실바니아 공에서 물러난 뒤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에 도착했지만, 지그몬드는 곧 이곳의 여건이 자기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여겼고, 루돌프 2세가 보낸다고 했던 보조금이 오지 않는 것에도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그가 퇴위한 뒤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조속히 트란실바니아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1598년 8월 21일, 그는 콜로즈바르로 향했고, 보치커이는 루돌프 2세가 선임했던 합스부르크 인사들을 추방한 뒤 사스세베스에 있는 자신의 숙영지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했다. 대다수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바라드의 부사령관인 키랄리 죄르지는 루돌프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그 해 9월, 오스만군이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침공해 마로스 강변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지그몬드는 오스만 제국군에 사절을 보내 트란실바니아 본토로 침입하지 말고 바라드를 공격해 달라고 설득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신성 로마 제국과 단절하고 오스만 제국의 신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그는 그는 루돌프 2세와 협상하기 위해 프라하에 사절을 파견했고, 고해 신부 알폰소 카릴로를 폴란드로 보내 폴란드-리투아니아 총리 얀 자모이스키와 협상하도록 했다. 1599년 3월 21일, 지그몬드는 메드제슈에서 열린 의회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8일 후인 3월 29일, 의회는 그의 사촌이며 친 오스만 제국 인사인 바토리 언드라시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포했다.
3.1.3. 바토리 언드라시와 미하이 2세의 침공
바토리 언드라시는 집권 이후 보도니 이슈트반을 콜로즈 주의 이슈판으로 삼았고, 시브릭 가스파르를 기병대 사령관으로 삼았다. 1594년 언드라시의 형제 바토리 발타자르를 처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코르니스 가스파르는 여전히 왕실 의회의 일원으로 남았다. 한편, 그는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에 대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종주권을 탈환하고자 했다. 1599년 7월 3일, 언드라시가 파견한 사절들은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협의했다. 그는 자기 동생인 바토리 이슈트반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하려 했고,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자기 동생 시미온 모빌라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앉히고 싶어했다. 두 사람은 일단 친족끼리 결혼시켜서 동맹을 맺기로 하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하이 2세를 공동으로 공격해 폐위시키기로 합의했다. 미하이 2세는 1598년 6월 26일 바토리 언드라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리를 보전하려 했지만, 언드라시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여기에 더해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자신이 왈라키아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제국은 위험 인물인 미하이 2세보다는 언드라시 쪽이 상대하기 편할 거라 여기고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1598년 8월, 트란실바니아 전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사촌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었다. 언드라시는 마리아와 결혼하면 루돌프 2세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통치하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언드라시의 요청을 기각했다. 미하이 2세는 루돌프 2세의 마음을 읽고, 1599년 7월 프라하에 있던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가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는 것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루돌프 2세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같은 해 말 루마니아인과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동원해 부자우 고개를 통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다.
1599년 10월 28일, 미하이 2세는 셀림바르 전투에서 바토리 언드라시가 이끄는 16,000명 가량의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몰다비아로 도망쳐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합세해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도중에 산지에서 세케이인들에게 생포된 뒤 10월 31일에 참수된 후 수급이 미하이 2세에게 전달되었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1599년 11월 1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후 주교 데메트리우스 나프라기로부터 요새의 열쇠를 받았다. 이후 언드라시의 수급을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정중히 묻었다. 전승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루마니아 관습에 따라 언드라시의 수급이 담긴 관을 양초를 손에 든 채 따라갔다고 한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들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된 후 스스로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를 칭했다. 또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법률, 제도 및 관습을 준수했고, 모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바토리 지그몬드와 바토리 언드라시 치세 때 박해받았던 세케이인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며,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작센인들이 루터교를 믿는 걸 허용했다.
트란실바니아를 공략한 뒤, 미하이 2세의 눈길은 몰다비아로 향했다. 1600년 4월 14일, 미하이 2세는 줄러페헤르바르를 떠나 왈라키아로 돌아가면서 미할카 반이 자신을 대신해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하도록 했다. 1600년 5월 1일 브러쇼 인근에 숙영지를 세운 그는 장병들에게 지난날 자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추방하기 위해 몰다비아로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5월 6일, 미하이 2세는 카르파티아산맥을 등반했다. 이때 그는 적군이 산길을 막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통행이 가장 어려워서 경계가 허술한 산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의 군대는 몰다비아에 도착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미처 이를 막을 병력을 모으지 못하고 바커우로 도주했지만, 적군이 그곳까지 이르자 가족과 함께 호틴으로 피신했다.
1600년 6월 1일, 미하이는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에 도착한 뒤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루돌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와 연합해 왈라키아를 침공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대한 자신의 영구 통치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7월 6일자 공식 문서엔 "루마니아 땅과 트란실바니아 및 몰다비아 전체의 군주"를 칭했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몰다비아에 대리인을 앉혀놓은 뒤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했다.
미하이 2세가 1599년부터 1600년까지 불과 1년만에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를 석권하자, 주변 열강들은 긴장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루돌프 2세는 충실한 봉신이라 여겼던 미하이 2세가 너무 강해져서 트란실바니아를 영향권에 두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고 여겼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몰다비아가 미하이 2세에게 넘어가면서 통제권을 잃게 생기자 불만을 품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미하이 2세의 급격한 성공으로 인해 봉신으로 두기 힘들어졌다고 여겼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귀족들은 미하이 2세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으며, 작센인들은 미하이 2세의 군대가 여러 마을에서 약탈을 저지르자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하이 2세는 자기에게 공공연히 적대하는 헝가리 귀족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던 중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18,000명이 헝가리 귀족들을 돕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하이 2세는 이에 맞서려 했다. 1600년 9월 18일에 벌어진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미하이 2세는 무레슈 강, 언덕, 로파데아 강 및 도랑으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지형에 10,000 ~ 12,000명을 배치하고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다. 조르조 바스타는 미하이 2세의 군대가 강력한 방어 진형을 구축한 걸 보고, 그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이 적진을 공격했다가 강력한 저항에 못 이겨 후퇴하자, 미하이 2세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마음먹고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총사대가 왈라키아 기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뒤이어 독일 흉갑 기병대가 출격해 믹대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미하이 2세는 4,000명을 잃고 패주했고, 트란실바니아는 순식간에 오스트리아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미하이 2세는 산지에 사는 주민의 도움으로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몰다비아로 돌아갔다.
3.2. 합스부르크 제국의 간섭
미하이 2세를 축출한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은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고, 당초 미하이 2세를 축출한 것에 환영했던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크게 실망했다. 1601년 3월, 폴란드군이 바토리 지그몬드를 앞세워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황제군을 몰아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4월 3일 콜로즈바르에서 바토리 지그몬드의 복위를 선포했다. 이에 조르조 바스타는 빈으로 망명했던 미하이 2세와 함께 그 해 여름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1601년 8월 3일 고로슬로 전투에서 지그몬드의 군대를 격파했다. 당초 루돌프 2세는 미하이 2세의 협조를 받아내는 조건으로 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1년 전에 루마니아 전역을 석권했던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조르조 바스타에게 그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1601년 8월 9일 또는 8월 19일, 미하이 2세는 투르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평원에서, 조르조 바스타의 왈롱인 용병대장 자크 드 보우리가 이끄는 용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미하이 2세는 자기 천막을 습격한 그들에 맞서 검을 뽑아 용병 한 명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다른 용병이 내지른 창에 배를 찔러 땅바닥에 쓰러진 뒤 머리가 베어졌다. 그의 유해는 크리스티슐루이 평야에 던져졌고, 수급은 나중에 미하이 2세의 부하인 투르투레아 파하르니쿨이 수습해 왈라키아로 가져와 달루 수도원에 있는 그의 아버지로 간주된 파트라스쿠 첼 분의 유해 옆에 안장되었다.
1601년 10월,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했던 바토리 지그몬드가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대다수 지역을 공략했다. 하지만 조르조 바스타는 전력을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해 여러 전투에서 바토리 지그몬드를 물리쳤다. 이에 지지자들이 조만간 자기를 배신할 거라고 의심한 지그몬드는 1602년 3월에 조르조 바스타와 퇴위에 대한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1602년 7월 26일 퇴위가 확정된 뒤 조르조 바스타의 군대에 합세했고, 이후 프라하로 가서 루돌프 2세에게 자비를 구해 보헤미아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받아냈다.
이리하여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조르조 바스타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서 개신교 세력을 트란실바니아에서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칼뱅파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정교회 왈라키아인과 세르비아인, 루터교 색슨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에 분노한 세케이인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황제군을 이끌고 퇴비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세케이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 각지에서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아사했다.
1602~1603년 겨울, 트란실바니아 귀족 세케이 모제시와 베틀렌 가보르가 반(反) 합스부르크 연맹을 조직한 뒤 티미쇼아라에서 거점을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3세의 지원을 받으며 조르조 바스타에 대적했다. 세케이 모제시는 1603년 4월 15일 하체그 인근의 숙영지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되었고, 5월 9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조르조 바스타는 적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오스트리아로 퇴각했다.
1603년 여름,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10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사주를 받아들여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게오르게 라슈와 바실라 마르자가 지휘하는 왈라키아군 선봉대는 텔레아제눌루이 계곡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펠디오아라에 숙영지를 세웠고, 라두 10세는 본대를 이끌고 루카르-브랜 고개를 통해 카르파티아산맥을 등반해 선봉대와 교차점을 이루었다. 세케이 모제시는 이에 대응해 헝가리인 4,000명, 타타르인 2,000명, 경대포 25문을 이끌고 브라쇼브 인근에 도착했다. 모제시는 왈라키아군과 정면 대결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라쇼노프 인근에서 요새를 세운 뒤 방어 전술로 적에 맞서기로 했다.
1603년 7월 17일에 벌어진 라쇼노프 전투에서, 왈라키아군은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방어선을 뚫고 적군을 패주시켰고, 라두 10세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때 세케이 모제시는 탈출을 시도하다 추격대에 따라잡혀 전사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국경지대의 여러 요새를 자기 수중으로 삼은 뒤 왈라키아로 철수했다. 이후 총독으로 복귀한 조르조 바스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감을 품은 자들을 탄압하다가, 1604년 루돌프 2세의 지시를 받아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이동하여 오스만 제국군에 대적했다. 그 대신 자코모 바르비아노 디 벨기오조소가 트란실바니아에 주둔한 황제군을 지휘했다.
3.3. 보치커이 이슈트반의 봉기
1604년 10월,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귀족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루돌프 2세와 그의 관리들이 폭정을 저지른 사례를 열거하며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고, 귀족들은 이에 호응해 그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보치커이는 칼뱅파 영주 드러게트 발린트와 마고치 페렌츠를 군대 사령관으로, 가톨릭 귀족인 카타이 미하이를 재상으로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루돌프 2세는 조르조 바스타에게 10,000명에 달하는 용병대를 맡겨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조르조 바스타는 11월 17일 오스갸나(현재 슬로바키아 오즈아니) 인근에서 보치커이를 추종하는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 부대를 격파했고, 뒤이어 11월 27일 에델레니 인근에서 보치커이가 직접 이끄는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커셔를 포위 공격하다가 보치커이가 파견한 유격대가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보급난에 허덕이다가 12월 초 에페르예스(현재 슬로바키아의 프레쇼브)로 철수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1월20일 베틀렌 가보르와 랄라 메흐메트 파샤를 커셔에 사절로 파견해 보치커이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수여했다.보치커이는 조르조 바스타를 물리친 뒤 트란실바니아 각지에 서신을 보내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세케이 출신 유니테리언 귀족 페트키 야노시가 가장 먼저 합류했다. 그는 보치커이에게 1596년에 세케이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일에 대해 사죄하라고 권고했다. 보치커이는 이에 따르기로 했고, 세케이인들에게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면 농노 신세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하이두크 대장 발라즈 리파이가 그를 배신하고 조르조 바스타와 내통한 정황이 드러났고, 보치커이는 1605년 1월 6일 리파이를 긴급 체포해 처형했다.
1605년 2월 21일, 트란실바니아 귀족과 세케이인 대표자들은 니아라체레다(현재 루마니아 미에르쿠레아 니라줄루이)에서 보치커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했다. 반면 트란실바니아 색슨족과 콜로즈바르 시민들은 루돌프 2세를 여전히 따랐다. 보치커이는 그해 3월 유럽 왕실에 <Querelae Hungariae(헝가리의 불행)>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송해, 폭군 루돌프 2세가 저지른 악행을 열거하며, 자기들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루돌프 2세는 사태가 갈수록 커지자 그에게 화해를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그 후 조르조 바스타가 루돌프 2세로부터 별다른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용병들을 유지할 돈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서 프레스부르크로 퇴각하자, 상 헝가리와 파르티움의 22개 주 대표단이 세렌치에 모여 논의한 끝에 4월 20일에 보치커이를 헝가리의 공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트란스다누비아(헝가리 판노니아) 일대는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치커이의 군대는 여세를 이어가 나지좀바트(현재 슬로바키아 트르나바), 쉬메그, 솜버트헤이, 베스프렘을 공략한 뒤, 복종을 거부한 트란스다누비아로 진군해 여러 도시를 함락했다. 1605년 5월에는 니더외스트라이히, 모라비아, 실레시아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보치커이의 사절인 바이스 미하이는 브라쇼브로 가서 색슨족을 설득해 보치커이의 통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해 5월 19일,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콜로즈바르 시민들도 보치커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해 9월 9일 세게슈바르(현재 루마니아 시기쇼아라)가 공략되면서, 색슨족의 저항은 끝났다. 그 해 9월 14일, 트란실바니아 귀족 대표단은 메드제스(현재 루마니아 메디아슈)에서 보치커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보치커이는 그동안 자기를 도와준 하이두크에게 보답하기로 하고, 12월 12일 9,254명이 하이두크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하고 사볼치 백국 내 자기 영지에 정착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그의 봉기를 기회로 삼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몰아붙이기로 마음먹었다. 1605년 10월 3일, 릴라 메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에스테르곰을 점령했다. 이후 보치커이는 11월 11일에 페슈트에서 릴라 메흐메트 파샤와 만난 뒤 왕관을 수여받았다. 상 헝가리에 속했던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군이 에스테르곰을 점령하자, 이러다가 오스만 제국이 자기들 영지까지 모조리 석권해버릴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보치커이에게 루돌프 2세를 폐위하기로 결정한 루돌프 2세의 동생 마티아스와 협상하라고 설득했다. 보치커이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일레샤지를 빈으로 보내 마티아스와 협상하도록 했다. 협상은 1606년 6월 23일에 체결된 빈 조약으로 끝났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내 개신교 귀족과 시민들은 자기들이 믿는 종교를 준수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보치커이는 트란실바니아의 세습 군주로 인정되었고, 샤볼치, 샤트마르, 우고스카, 베레그 주와 토카이 성에서의 주권도 인정되었다. 8월 17일, 보치커이는 커셔에서 조약을 확인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루돌프 2세도 백기를 들었다. 1605년 11월 24일, 루돌프 2세는 보치커이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더라도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걸 인정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보치커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고, 양국은 11월 11일 지트바토로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13년간 이어졌던 기나긴 전쟁을 종식했다. 그러나 보치커이는 자기가 일궈낸 성공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1606년 봄부터 부종을 앓기 시작한 그는 12월 17일 후계자들에게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보존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1606년 12월 29일, 그는 향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의 이른 죽음에 깊은 의혹을 품었다. 자기들을 귀족으로 올려준 보치커이를 존경하던 하이두크는 수상 카타이 미하이가 독살했을 거라고 믿고, 1607년 1월 12일 커셔 광장에서 카타이를 공격해 사지를 절단해 죽였다.
3.4. 라코치 지그몬드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생전에 잘라 카운티에 영지를 소유한 하급 귀족인 하기마시 레스타르의 딸 하기마시 커털린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1804년 9월 커털린이 사망한 뒤, 그는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의 결혼이 무효로 처리된 뒤 미망인으로 살아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재혼을 요청했지만 루돌프 2세가 이를 막아서면서 무산되었다. 그렇게 해서 생전에 친자식을 얻지 못한 그는 유언장에서 상 헝가리 방면군 총사령관 드러게트 발린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이후 라코치 지그몬드, 바토리 가보르, 베틀렌 가보르, 나리 팔, 코르니스 볼디자르, 실바시 볼디자르 등과 경쟁한 끝에, 1607년 2월 11일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투표 결과 라코치 지그몬드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되었다. 라코치 지그몬드는 자기가 나이가 많고 통풍을 앓고 있기에 자격이 없다며 사양 의사를 밝혔지만, 의원들의 청원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 군주 선서를 했다. 그의 선출은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자유롭게 군주를 선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례였다.바토리 가보르는 일단 그의 선출을 받아들였지만, 1595년 몰수되었던 영지를 회복해달라고 요구했다. 드러게트 발린트는 그의 선출에 반발해 후스트와 코바르를 점거했다. 이에 라코치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에게 서신을 보내 드러게트에게 두 요새에서 철수하라고 명령에 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제국 대재상인 쿠유주 무라트 파샤는 1607년 1월 18일에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유언에서 후계자로 삼은 드러게트 발린트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지만, 서한을 가져온 무스타파는 라코치 지그몬드의 선출을 알게 되자 그의 이름으로 변경한 뒤 2월 22일에 트란실바니아 의회에 제출했다. 라코치 지그몬드는 쿠유즈 무라트 파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요한 국경 요새인 리파와 예노에서 트란실바니아군을 철수할 테니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쿠유주 무라트 파샤는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전임 공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7년 4월 19일, 상 헝가리 귀족들은 로즈고니에 모여 라코치 지그몬드에게 드러게트 발린트에게 양위하라고 촉구했다. 이후 지그몬드는 드러게트 발린트가 황제군을 등에 업고 침공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남부에 있는 포가라스 요새로 이동했다. 하지만 루돌프 2세는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 왕국의 고유한 영토로 여겼기에, 자코치 지그몬드와 드러게트 발린트 모두 배제하려 했다. 그 대신, 그는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이며 퇴위 후 보헤미아의 리보초비체에서 조용히 지내던 바토리 지그몬드를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바토리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의 제안을 물리치고 리보초비체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후 라코치 지그몬드는 드러게트 발린트와 협의한 끝에, 발린트가 트란실바니아 공위 주장을 그만두는 대가로 후스트와 코바르를 자기 영지로 가지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607년 6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바토리 가보르에게 영지를 반환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 개신교에 지나치게 적대적인 예수회를 공국에서 추방하도록 했다. 이에 트란실바니아 공국 내 가톨릭 영주들이 격분하자, 바토리 가보르는 그들에게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면 가톨릭 세력의 이익을 증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사망한 후 봉급을 받지 못했던 하이두크는 1607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뒤 드러게트 발린트를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드러게트 발린트는 하이두크와 손잡기를 거부했고, 지그몬드는 바토리 가보르와 협상한 끝에 하이두크와 협상해 주는 대가로 그에게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넘기기로 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08년 2월 6일 하이두크와 평화 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고, 가톨릭과 유니테리언 귀족을 트란실바니아 공의 고문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3.5. 바토리 지그몬드
1608년 3월 5일, 라코치 지그몬드가 콜로즈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그 후 바토리 지그몬드가 3월 7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옹립되었다. 그는 3월 14일에 트란실바니아 공 선출을 수락하면서, 공국의 법률과 귀족들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3월 31일, 그는 콜로즈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의회는 그에게 포가라스와 코바르를 세습 영지로 부여했다. 또한 파르티움에 하이두크를 정착시키기 시작했고, 하이두크에게 밀려난 이들을 하이두뵈쇼르메니로 이주시켰다. 당시 3만 명에 달했던 하이두크 군인들이 그의 치세 동안 정착할 토지를 확보했다.한편, 바토리 지그몬드는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트란실바니아 공의 종주권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를 무력으로 폐위하려 했지만, 트란실바니아 의회와 트란실바니아 색슨 도시 브라쇼브의 시장 바이스 미하이가 만류했다. 라두 10세는 5월 31일 바토리 가보르가 파견한 사절들 앞에서 앞으로 트란실바니아 공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7월 13일에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모빌라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8,000플로린의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7월, 바토리 가보르는 브라쇼브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무척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 술에 매일 취했고, 젊은 여성들을 유혹했으며, 자신에게 아내를 제공해줄 의향이 있는 귀족들을 승진시켰다. 이에 시민들은 그를 새로운 사르다나팔루스[8]라고 비난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베틀렌 가보르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오스만 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고, 임레피 야노시를 커셔로 보내 내치를 다스리게 했다. 1608년 8월 20일, 임레피 야노시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의 사절단과 협의한 끝에 2개의 조약에 서명했다. 첫번째 조약은 합스부르크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하이두크의 특권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2번째 조약은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인정하지만, 헝가리 왕국에서 이탈하는 걸 금지했다. 그 해 11월, 베틀렌 가보르는 코스탄티니예에서 돌아온 뒤 바토리 가보르의 선출을 인정하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의 칙령을 가져왔다. 여기에 오스만 궁정은 트란실바니아가 3년 동안 공물을 바치는 걸 면제하기로 했다. 한편, 정교회 사제들은 자기들을 농노처럼 대하는 헝가리 귀족들에게 반감을 품고, 바토리 가보르에게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09년 6월 지주들의 세금과 요역 요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기로 했다. 또한 그들에게 공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도 부여했다. 그해 10월, 의회는 일부 귀족 영지에 대한 세금 면제를 제공했던 모든 보조금을 폐지했다.
이렇듯 통치 초기는 무난하게 흘러갔지만, 바토리 가보르는 이내 암살 위기에 직면했다. 1610년 3월 10일에서 11일 밤, 바토리 가보르가 세크에 있는 트란실바니아 총리 켄디 이슈트반의 집에서 취침했을 떄, 침입자가 침실로 들어와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바꿔 귀순하면서, 켄디와 가톨릭 귀족 여러 명이 자기를 고용했다고 자백했다. 켄디는 곧바로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망명했지만, 공범들은 모조리 체포되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3월 24일에 공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임레피 야노시를 총리로 선임했고, 베틀렌 가보르를 세케이인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이들이 바토리 가보르를 해치려 한 동기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하이두크 군대가 많은 마을을 파괴한 원흉이 바토리 가보르에게 있다고 여기고 그를 죽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반면 칼뱅파 측 기록은 가톨릭 귀족들이 칼뱅교회를 신봉하는 왕자를 없애고 싶어했다고 주장했다. 바토리 가보르가 세케이인 대장 코르니스 볼디자르의 젊은 아내를 유혹했기 때문에 암살 음모가 벌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합스부르크 헝가리를 휩쓸고 헝가리 왕국을 자신의 통치하에 재통합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와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모빌라에게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에게 100,000 플로린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두 공국의 군주들은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고, 색슨족은 10,000 플로린만 지불했다. 이에 화가 난 그는 보복을 결심했다. 1610년 12월 10일, 그는 군대를 이끌고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세벤(현재 루마니아 시비우)로 향했다. 그는 군인 50명만 대동하여 도시에 입성했고, 군대는 외곽에 주둔하게 했다. 하지만 성문이 열려있는 동안, 그의 군대는 예쌍치 못하게 진군해 도시를 별다른 저항없이 접수했다. 그 후 의회는 12월 17일 세벤에 소집된 뒤 이곳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새 수도로 선언하고, 귀족들이 부동산을 취득하는 걸 허가했으며, 칼뱅파 사제들이 세벤의 루터파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하는 걸 허락했다. 이리하여 세벤의 색슨족은 그동안 누렸던 특권을 크게 제약당했다.
1610년 12월 20일, 바토리 가보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왈라키아로 진격해 5일간 샤라 바르세 일대를 약탈한 뒤 눈덮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 본토로 진입했다. 미처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 라두 10세는 트라고비슈테를 떠나 몰다비아로 피신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용병들은 왈라키아를 잔인하게 약탈했다. 교회와 수도원이 모조리 약탈당했고, 납 지붕이 녹여져서 총알로 제작되었으며, 수많은 무덤이 도굴당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11년 1월 26일 자신을 왈라키아의 공으로 칭하는 헌장을 반포했으며,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에게 자기가 왈라키아를 통치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햇으며, 하이두크의 급여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흐메트 1세는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라두 9세를 선임하기로 하고, 3월에 바토리 가보르에게 사절을 보내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이에 분노했지만, 감히 강대국인 오스만 제국의 의사를 거역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1611년 6월, 라두 10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9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바토리 가보르는 재차 군대를 동원해 라두 10세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이스 미하이가 바토리 가보르를 새로운 네로라고 성토하며 브라쇼브 주민들을 선동해 반기를 들었다. 바토리 가보르는 하이두크 대장 나지 언드라시를 파견해 브라쇼브를 포위하게 했지만, 바이스는 나지에게 뇌물을 줘서 포위를 해제하도록 했다.그러는 사이, 라두 10세는 바토리 가보르가 왈라키아에 행한 악행을 복수하려는 보야르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르기로 하고, 대규모 병력을 소집한 뒤 7월에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프레지미르로 진격했다. 라두 10세가 쳐들어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토리 가보르는 급히 브라쇼브로 후퇴하려 했지만, 라두 10세는 산을 넘는 험난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격해 7월 9일 브라쇼브와 산페트루 마을 사이의 평야에서 따라잡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왈라키아인과 라두 10세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된 폴란드 흉갑기병들은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고, 가보르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세벤으로 도주했다.
한편, 마티아스는 왈라키아 공국을 헝가리 왕국의 영역으로 여겼기에, 바토리 가보르가 왈라키아를 공격한 것을 배신으로 여기고 응징하기로 했다. 상헝가리의 총사령관 포르가흐 지그몬드는 마티아스의 회유에 넘어가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나지와 그를 따르는 하이두크는 포르가흐를 지지했지만, 대다수 개신교 귀족들은 침공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대부분의 트란실바니아인들은 침공을 불법 행위로 여겼고, 오직 색슨족만이 포르가흐를 지원할 의향이 있었다. 그 후 포르가흐와 라두 10세는 세벤을 포위했지만 공략하지 못했고, 바토리 가보르는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해 9월, 나지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포르가흐를 배신하기로 마음먹고, 포르가흐가 자기에게 보낸 지원군을 섬멸했다. 여기에 라두 10세도 오스만 제국군이 라두 9세를 복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왈라키아로 돌아갔다.
나지와 라두 10세가 이탈해 버리자, 포르가흐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수백 명을 생포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바라드로 진군해 상 헝가리로 쳐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에 상 헝가리의 백국과 도시의 대표자들은 바토리 가보르와 협상했고, 12월에 토카이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서, 바토리 가보르는 헝가리 왕실 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농노들이 하이두크에 가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 색슨족과 협정을 맺을 때까지 조약을 비준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바토리 가보르는 하이두크 지휘관 게치 언드라시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자기를 도와준 것에 감사를 표하도록 했다. 그러나 게치는 브라쇼브에서 바이스 미하이와 협정을 맺고, 1611년 11월 코스탄티니예로 간 뒤 바토리 가보르를 폐위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궁정은 이를 받아들여 바토리 가보르를 게치 언드라시로 교체하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까맣게 모른 채, 바토리 가보르는 브라쇼브로 쳐들어가서 1612년 3월과 4월에 요새 7개를 점령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5월에 브라쇼브에 항복하라고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자기를 폐위하고 게치 언드라시를 옹립하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된 바토리 가보르는 극도로 분노했고, 6월에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한 뒤 오스만 제국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 나지 언드라시는 게치 언드라시에게 조만간 바토리 가보르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바토리 가보르는 1612년 8월에 나지 언드라시를 처형했다. 또한 베틀렌 가보르는 바토리 가보르가 자기를 의심하는 걸 눈치채고 9월 12일에 오스만 제국 영내로 도주한 뒤 티미쇼아라, 부다, 카니자의 베이들을 접견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오스만 대재상 나수흐 파샤와 연락했다. 1612년 10월 14일, 바토리 가보르는 바이스와 게치의 군대를 습격해 대승을 거뒀다. 바이스는 전장에서 체포된 뒤 참수되었고, 게치는 브라쇼브로 피신했다. 이후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게치와 베틀렌 가보르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반란에 가담한 이들 중 항복한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사절을 프레스부르크로 파견했다. 1612년 12월 24일, 프레스부르크에서 마티아스와 바토리 가보르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바토리 가보르는 마티아스를 주권자로 받들기로 했고, 마티아스가 오스만 제국에 맞설 때 충실히 따르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마티아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바토리 가보르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613년 4월 12일, 양자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마티아스는 바토리 가보르의 트란실바니아 통치에 대한 세습권을 인정했으며, 바토리 가보르는 마티아스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다시 약속하면서, 색슨족과 그들의 동맹군, 게치 언드라시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게치는 사면을 받아들이고 바토리 가보르에게 귀순한 뒤 경호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마티아스는 사절을 트란실바니아로 보내 색슨족에게 바토리 가보르에게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나중에 프레스부르크 조약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는 격노했고, 대재상 나수흐 파샤의 설득에 따라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1613년 8월, 오스만 제국군은 베틀렌 가보르를 앞세워 코스탄티니예로 출진했다. 이때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9세와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9세 톰샤도 아흐메트 1세의 지시에 따라 오스만 제국군의 원정에 참여했고, 크림 칸국의 칸 차니베크 기라이도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침공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압도적인 군세로 밀려오는 적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트란실바니아 본토에서 도망쳐 바라드로 철수한 뒤, 마티아스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오스만 제국군 총사령관 스켄더르 파샤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10월 21일에 바토리 가보르를 폐위하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이를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10월 23일 의회는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게치 언드라시는 또다른 경호대 지휘관 아바피 미클로시를 설득해 바토리 가보르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들은 바토리 가보르의 힘이 무척 세서 함부로 시도했다간 잘못 될 수 있다고 여기고, 교묘한 책략을 세우기로 했다. 10월 27일, 아바피는 바토리 가보르에게 마티아스가 파견한 군대가 그와 대면하길 원하니,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자고 권유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차를 타고 아바피의 군영에 들어가서 마티아스의 군대를 어떻게 맞이할지를 논의한 후 바라드로 돌아갔다. 그때, 아바피의 지시를 받은 기병들이 마차를 공격해 좁은 골목으로 몰아갔다. 바토리 가보르는 마차에서 뛰어내렸지만 총에 맞았다. 그는 페체 강 인근에 있던 버드나무로 피신한 뒤 저항을 시도했지만, 하이두크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서 결국 피살되었다.
3.6. 베틀렌 가보르
바토리 가보르가 피살되면서 집권에 성공한 베틀렌 가보르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내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내치를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자치권을 회복해줬고,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을 지킬 권리도 인정했다. 1616년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영주들 중 주모자 2명을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용서했다. 1616년 11월 트란실바니아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던 하이두크를 응징하는 원정을 개시해 에세드, 실라기슬로묘, 실라기체흐 성을 점령한 뒤,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또한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권을 회복했으며,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국고 수입에 대한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고 1588년 이후 국가가 귀족들에게 내준 특권을 조사해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특권만 인정했다.다만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추진한 방식 중에는 마녀재판이라는 악습을 활용한 것도 있었다. 후녀드의 여성 영주로서 트란실바니아에서 막강한 재력을 갖췄던 퇴뢰크 커털린은 남편이 따로 있음에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의 공비가 되기를 원해 가보르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베틀렌 가보르는 그녀가 주술을 일삼고 바토리 가보르와 불륜을 맺은 혐의로 고발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추방하고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바토리 가보르의 여동생인 바토리 언너는 마녀 혐의로 3번이나 재판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합의금 명목으로 많은 재산을 국고에 헌납해야 했다.
베틀렌 가보르는 산업과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상품의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상품의 다방향 이동을 규제했고, 타국 사업가들을 자국에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귀금속 채굴을 권장했고, 해외의 유능한 채굴 전문가를 초청했다. 그리고 줄러페헤르바르에 웅장한 새 궁전을 세웠다. 그는 예술을 후원했고 칼뱅파 교회에 상당한 자금을 기부했으며, 개신교 사제들에게 세습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베틀렌 가보르 대학'을 설립하고 헝가리 학자와 교사의 등록을 장려했으며, 트란실바니아 학생들을 영국, 네덜란드, 독일 내 신교도 제후령 등 개신교 국가들에 파견해 학습하도록 장려했으며, 농노의 자녀들에게도 기초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했다.
한편, 마티아스는 자신과 평화 협약을 맺었던 바토리 가보르를 축출한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는 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양자간 오랜 협상이 이어진 끝에, 1615년 5월 6일 협정이 맺어졌다. 마티아스는 베틀란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며, 후스트 성을 돌려주기로 했다. 1617년 7월 31일에 양국 모두 협정을 조인했다. 이리하여 마티아스와 화해한 그는 1616년 리파 성을 오스만 제국에 넘겨줌으로써 그들의 호의도 확보했다. 리파 성을 내준 일은 당대 헝가리인들은 물론이고 후대 역사가들에게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다만 그는 1616년 봄 오스만 제국이 폴란드를 주권자로 섬기는 몰다비아 공국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여하는 걸 거절했고, 추가로 성을 내주라는 요구 역시 거절했다.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베틀렌 가보르는 보헤미아 왕국의 후스파와 손잡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1619년 11월 27일, 그의 군대는 빈 교외엔 에베르스도르프를 점령했고, 빈을 포위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페르디난트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에게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고, 지그문트 3세 바사는 매형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폴란드군 10,000명을 트란실바니아로 파견해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약탈하게 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베틀렌 가보르는 트란실바니아로 철수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앙심을 품고,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대상으로 보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오스만 2세는 1620년 이스칸데르 파샤가 이끄는 20,000명을 파견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원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와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스폴츠키는 몰다비아의 이아시 인근 체초라에서 8,000 가량의 보병과 수백 명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고무된 오스만 2세는 1621년 봄 친히 12만 대군을 이끌고 폴란드로 진격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에 맞서 싸우느라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위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620년 8월 25일, 베틀렌 가보르는 상 헝가리의 반스카비스트리차에서 열린 의회에서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다가 보헤미아 반란군이 1620년 11월 8일에 벌어진 백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파견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가 이끄는 황제군에게 격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페르디난트 2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1621년 12월 31일, 양자는 니콜스부르크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헝가리 왕위를 포기했지만, 그 대신 신성 로마 제국 공작이라는 칭호와 상부 티서 7개 백국, 실레시아의 오폴레 공작령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30년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실레시아 내 영지를 운영하는 게 힘들어지고 자칫했다간 전쟁의 불똥이 자기한테까지 미칠 위험이 생기자, 그는 1625년 5월 8일에 빈 협약을 체결하면서 실레시아에 있는 영지를 반납하는 대가로 페르디난트 2세와 완전히 화해했다.
1622년 아내 카로이 주전너가 사망한 후, 베틀렌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이 폴란드-티루아니아를 상대로 호틴 전투에서 참패한 여파로 흔들리는 틈을 타, 페르디난트 2세와 결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3세의 오스트리아 대공비 체칠리아 레나타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2세가 독일 내 개신교 세력을 상대로 거세게 몰아붙이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반(反) 합스부르크 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1626년 3월 1일,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의 누이인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와 동맹을 맺었고, 1626년에는 웨스트민스터 개신교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전쟁에 참여한 그는 한때 헝가리에서 황제군을 몰아냈지만, 개신교 세력의 호응이 미비하자 페르디난트 2세와 브라티슬라바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3.7. 카타리나와 베틀렌 이슈트반
1629년 11월 15일, 베틀렌 가보르가 과로에 시달린 여파로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다. 그에게는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기에, 당초 남동생 베틀렌 이슈트반을 후계자로 삼았지만,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와 재혼한 뒤인 1626년 6월 12일 줄러페헤르바르 의회에서 카타리나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러면서도 이슈트반을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으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트란실바니아 여공이 된 카타리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인 페르디난트 2세에게 상부 티서 7개 백국을 반납하는 대가로 여공으로 인정받았고,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트란실바니아 여공이 된 걸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그녀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을 맡은 베틀렌 이슈트반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트란실바니아 정계는 곧 두 패로 나뉘었다. 금고 관리인 치사키 이슈트반, 토르다 수석 주교 코바초치 이슈트반, 트란실바니아 의원 할러 이슈트반, 코바르 수비대장 체르니 퍼르커시 등이 카타리나를 지지했고, 버러드와 트림셰크 수비대장 졸료미 다비드, 하이두크 지도자이자 트란실바니아 총독의 아들인 베틀렌 이슈트반, 궁정 대장 나기 팔과 막스카시 페렌츠, 재무관 미코 페렌츠, 볼디자르 수비대장 케메니 포가라시, 우드바르헬리셰크 수비 대장 발라시 페렌츠 등은 베틀렌 이슈트반을 지지했다.치사키 이슈트반은 베틀렌 이슈트반 지지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코바르에서 군사 행동을 준비했지만, 베틀렌 이슈트반이 코바르에 집결하려던 장정들을 차단하면서 지연되었다. 1630년 1~2월, 의회는 베틀렌 이슈트반의 사주에 따라 여공의 권한을 더욱 제한했다. 여공은 총독과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직책이나 재산을 부여할 수 있었고, 물품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며, 여공의 재산은 총독과 궁정 평의회가 임명하고 감독하는 재무관에 의해 관리될 수 있었다. 1630년 6월 메지에시에서 소집된 의회는 추가 제한 사항이 도입되었다. 치사키 이슈트반은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트란실바니아에 방문할 수 있으며, 그가 여공에게 보낸 편지는 베틀렌 이슈트반이 먼저 읽어야 했다.
이후 양자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양측은 상대방이 자기를 암살하려 들까 봐 두려워했다. 1630년 8월, 치사키 이슈트반이 카타리나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자, 베틀렌 이슈트반은 라코치 죄르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코치 죄르지가 하이두크를 동원해 진군하기 직전인 1630년 9월 21일, 카타리나는 심각한 사치를 연이어 규탄당하고 사임 압박을 받은 끝에 시기쇼아라에서 열린 의회 앞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다만 의회는 카타리나가 차기 공을 정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 후 베틀렌 이슈트반이 트란실바니아 공을 맡았지만, 라코치 죄르지가 이에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누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든 상관이 없었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에 카타리나가 둘 중 한 사람을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정해야 했는데, 베틀렌 이슈트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그녀는 12월 1일 라코치 죄르지의 임명장만 읽음으로써 그를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여기에 하이두크와 세케이인이 모두 라코치 죄르지를 지지하자, 베틀렌 이슈트반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3.8. 라코치 죄르지 1세
1630년 12월 1일 트란실바니아 의회의 추대로 트란실바니아 공에 등극한 라코치 죄르지 1세는 대지주의 손에 넘어간 국고 재산을 회수하기 위해 그들의 불법 행위를 적발해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을 라코치 가문의 재산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확보한 재산을 토대로 영지 내에 여러 성과 요새를 건설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늘어나자, 당초 물러섰던 베틀렌 이슈트반은 이를 이용해 지지 세력을 끌어들였다. 1636년, 라코치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이 요구한 공물 납부를 거부하면서 관계가 악화하자, 그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부다의 후세인 파샤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세인 파샤는 차우시 알라를 라코치 죄르지에게 사절로 보내 오스만 파디샤에게 복종하고 퇴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라코치 죄르지는 차우시 알라를 체포하고 총동원령을 선포했다.이에 후세인 파샤는 베키르 베이가 이끄는 2~3만 명의 오스만군을 트란실바니아로 파견했다. 라코치 죄르지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일으켰고, 1636년 10월 스잘론타(현재 루마니아 나기스잘론타)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이 소식을 접한 후세인 파샤는 라코치 죄르지와 화해하기로 했다. 이후 맺어진 사스바로시 조약에 따르면, 오스만 파디샤는 라코치 죄르지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되는 걸 인정했고, 라코치 죄르지는 그 대가로 베틀렌 이슈트반을 사면하기로 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트란실바니아는 물론 유럽에서 큰 명예를 얻었다.
1637년,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가 자기 아들 이오안 루푸를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 삼기 위해 현재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라코치 죄르지 1세는 휘하 장군 케메니 야노시에게 수천 명의 세케이인 보병 및 기병대를 맡겨 마테이 바사라브를 돕도록 했다. 1637년 11월, 케메니 야노시의 부대는 동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마테이 바사라브의 군대와 연합한 뒤 바실레 루푸를 격파해 몰다비아로 축출했다. 하지만 바실레 루푸는 포기하지 않고 2년 후에 다시 침공했지만, 마테이 바사라브는 1639년 12월 6일 부쿠레슈티 인근에서 라코치 죄르지가 파견한 트란실바니아 기병대의 도움으로 재차 격파했다. 그 후 바실레 루푸와 마테이 바사라브는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중재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고, 마테이 바사라브는 자기를 도와준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매년 5,000 탈러와 말 세금을 바치고 그를 자신의 주권자로 인정했다.
1644년, 라코치 죄르지는 스웨덴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트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164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와 동맹을 맺었고, 브르노 인근에서 스웨덴군과 합류해 황제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그러나 30년 전쟁에 봉신이 개입하는 걸 원하지 않은 오스만 궁정이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자, 라코치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3세와 린츠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그는 죽을 때까지 어버우, 베레그, 보르소드, 웅, 젬플렌 카운티의 주권자로 군림할 수 있었고, 그의 자녀들은 사볼츠, 사트마르 카운티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헝가리에서 개신교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하는 걸 허락받았고, 농민들에게 교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영주는 농노가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의 신부를 배치하는 걸 금지했다. 트란실바니아 본토는 그의 치세 동안 대체로 평화로웠으며, 인구가 증가했고, 무역과 산업이 번창했으며,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종교의 자유가 대체로 인정되었다. 다만 유니테리언과 안식일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상대로 재산을 몰수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등의 박해를 가했다.
3.9. 라코치 죄르지 2세
라코치 죄르지 1세는 트란실바니아 공을 세습하기 위해 1642년 2월 3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설득해 아들 라코치 죄르지 2세를 공동 공으로 옹립했다. 1648년 10월 11일 라코치 죄르지 1세가 사망한 뒤,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트란실바니아의 단독 공이 되었다. 이 무렵,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가 사망한 뒤 차기 국왕 선출을 놓고 선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과거에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을 겸임했던 걸 재현하고 싶어서 국왕 선거에 입후보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20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이복 동생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카자크를 이끌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혼란에 빠뜨리자, 그와와 동맹을 맺고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대적했다. 1651년 리투아니아의 야전원수로서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고 자기가 리투아니아 군주가 되려던 야누시 라지비우와도 동맹을 맺었다. 1652년 2월 18일,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라코치 가문이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세습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들 라코치 페렌츠 1세를 공동 공으로 세웠다.한편,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와 몰다비아 공국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와의 전쟁이 재개될 때 마테이 바사라브를 지원했다. 바실레 루푸는 이에 맞서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크림 칸국과 손잡았다. 1653년 4월,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요구자 게오르게 슈테판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고, 마테이 바사라브와 함께 힘을 합쳐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바실레 루푸는 4월 13일 이아시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피신한 뒤, 1653년 5월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지원을 받아 카자크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을 탈환한 뒤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마테이는 이에 대응하고자 출진해 핀타 전투에서 바실레 루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바실레 루푸는 핀타 전투 패전 후 카자크로 도주했다가 크림 칸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으나 곧 일곱 개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 1661년경에 사망했다.
165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왕국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스웨덴 왕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656년 12월 6일 라드노트(현재 루마니아 이에르누트)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여러 개로 분할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스웨덴은 프로이센 공국, 쿠야비, 북부 마소비아, 사모기티아, 쿠를란트, 리보니아를 가지고, 리투아니아 대귀족으로서 스웨덴과 손잡고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대적하던 보구슬라프 라드빌라는 노보그로데크 일대를 확보하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폴란드를 받고,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 왕국의 남동부(바토흐와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 사이의 영토)를 가지며,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크라쿠프를 포함한 소폴란드 일대를 받기로 했다.
1657년 1월, 라코치 죄르지 2세는 라드노트 조약에서 명시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트란실바니아 본토와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서 파견한 지원군까지 합해 25,000명을 동원하여 폴란드 남부로 진군했다. 여기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파견한 자포로제 카자크 10,000명도 가세했다. 원정군은 초기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상하여 3월 28일 소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크라쿠프에 입성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에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폴란드인을 대거 학살해 그들의 공분을 샀다. 이후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크라쿠프에 수비 병력을 일부 남긴 뒤 계속 북진하여 4월 12일 츠미에루브에서 칼 10세 구스타브가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5월 13일 브레스트 요새를 함락시키고 3일간의 포위전 끝에 5월 17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상황은 곧 꼬이기 시작했다.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의 폴란드군과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리투아니아군이 연합하여 스웨덴-트란실바니아 연합군을 압박했고,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별동대를 이끌고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문카치 일대를 파괴했다. 여기에 스웨덴 본토가 덴마크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칼 10세 구스타브가 급히 회군하면서,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졸지에 폴란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급히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지만, 7월 11일 르부프 근처의 마기에루브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게 패퇴했다.
1657년 7월 20일 포돌리아의 차르니 오스트루브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자, 그는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7월 23일, 양자는 오스트루프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해야 했으며, 크라쿠프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57년 7월 26일, 잔존 병력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에게 스카와트에서 급습당했다. 그는 휘하 장성 케메니 야노시에게 군대를 맡긴 뒤 홀로 본토로 돌아왔지만, 트란실바니아군은 끝내 궤멸되어 25,000명 중 함께 돌아온 이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11,000명이 생포되어 크림 반도로 끌려갔다. 그는 타타르족에게 사로잡힌 장병들의 몸값을 지불해 구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왈라키아, 몰다비아, 스웨덴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및 카자크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이 동맹이 장차 다뉴브 3공국(트란실바니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라코치 죄르지 2세에게 동맹을 맺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했다. 이제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원정을 말아먹고 돌아오자, 오스만 궁정은 불충한 가신을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1657년 10월 25일 라코치 죄르지 2세의 폐위를 선고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참담한 원정 실패로 인해 위신이 추락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이 페렌츠를 새 공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르헤데이 페렌츠는 공으로 선출되기 전에 나중에 오스만 궁정이 동의하면 직위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라코치 죄르지 2세와 비밀리에 맺었다. 1658년 1월 9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히 페렌츠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라코치 죄르지 2세를 공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기엔 사절을 보내 라코치 죄르지 2세를 도로 폐위하라고 요구했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658년 여름 군대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압박해 10월 7일 버르처이 아코시를 새 공으로 세우도록 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파르티움으로 피신한 뒤 그곳의 중심지인 버러드에서 버르처이 아코시를 반기독교인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파르티움으로 쳐들어갈 조짐이 포착되자, 그는 이에 굴복하여 1659년 3월 30일 트란실바니아 공에서 물러나고 버러드를 버르처이 아코시에게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사볼츠와 사트마르 카운티에 있는 자신의 광범위한 영지에서 무장병을 계속 두면서 재기를 꾀했다. 1659년 9월, 버르처이 아코시가 티미쇼아라로 가서 센기자데 알리 파샤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그는 기회를 포착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진군했고, 9월 27일 마로스바사헬에서 열린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복위했다. 그 해 10월 버르처이 아코시에 의해 버러드 수비대장으로 선임되었던 할러 가보르를 몰아내고, 귈라이 페렌츠를 새 수비대장으로 세웠다.
1659년 11월, 부더의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버르처이 아코시를 돕기 위해 쳐들어와서 11월 22일 자이카니와 11월 말 토르다에서 라코치를 추종하는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12월에 겨울 한파를 피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했다. 한편 트란실바니아로 귀환한 버르처이 아코시는 나기세벤(현재 루마니아 시비우)으로 이동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즉각 나기세벤을 포위했지만, 버르처이 아코시는 1660년 봄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가 다시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올 때까지 버텼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일단 군대를 물린 뒤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와 맞섰다. 그러나 1660년 5월 22일 사슈페네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뒤 너지버러드로 피신했지만 1660년 6월 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10. 버르처이 아코시와 케메니 야노시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사망하면서, 버르처이 아코시는 트란실바니아의 단독 공이 되었다. 그러나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의 군영을 방문했다가 본래 바쳐야 할 연공이 늦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억류된 뒤, 8월 말에 첫번째 연공 분할 납부가 이뤄진 후에야 석방되었다. 그 동안 바러드는 오스만 제국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오스만 제국군은 뒤이어 파르티움 대부분을 장악한 뒤 바러드 빌라에트(vilayet: 오스만 제국 행정 구역)로 편성했다. 이에 자국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대거 상실하고 막대한 연공을 지불하게 한 버르처이 아코시에 대한 헝가리 귀족 및 백성들의 지지도는 급감했고, 트란실바니아 귀족 상당수가 지난날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장군이었으며 라코치 죄르지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 크림 칸국에서 포로로 지내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던 케메니 야노시를 지지했다.1660년 11월 22일, 케메니 야노시는 자신이 진정한 트란실바니아 공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맞서 형제인 버르처이 가슈파르에게 군대를 맡겼지만, 1660년 11월 말 외르메니예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결국 그는 저항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케메니 야노시와 협상한 끝에 1660년 12월 31일 의회를 소집한 뒤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퇴위를 선언했다. 케메니 야노시는 1661년 1월 1일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공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버르처이 아코시가 나중에 복위를 꾀할 거라 여기고, 1661년 7월 초 코즈마텔케에서 추종자인 부다이 지그몬드, 코넷 연주자 쇼베르디와 함께 처형했다. 여기에 버르처이 아코시의 또다른 형제인 버르처이 언드라시는 버르처이 아코시의 권유에 따라 포가라스 성을 케메니 야노시에게 넘겨줬지만, 1661년 5월 16일 케메니 야노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케메니 야노시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선출권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오스만 제국의 태도를 보고, 이러다가는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이 누려온 자치권이 완전히 박탈될 것을 우려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움을 받고 오스만 제국에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1661년 4월, 케메니 야노시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고 빈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오스만 궁정은 그 해 6월 크림 칸국과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고, 케메니 야노시는 이들에게 축출된 뒤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피신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대신해 어퍼피 미하이 1세를 새 공으로 옹립했다 1662년 1월, 케메니 야노시는 합스부르크 장성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식량난에 시달리다가 클루지만 점령한 뒤 철수해 버렸고, 케메니 야노시는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다가 그해 1월 23일 세게스바르 인근 나지스졸로스에서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과 맞붙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3.11. 어퍼피 미하이 1세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 덕분에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굳힌 뒤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봉신을 자처했고, 250,000 플로린을 자기를 옹립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바치고, 매년 50,000 플로린을 코스탄티니예에 공물로 바쳤으며,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그대로 주둔한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의 통제에 따랐다. 트란실바니아 북부 콜로즈스바르 요새의 독일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자,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는 그 요새를 포위했고,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이에 가담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북부 요충지인 이곳을 장악하고 싶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이곳을 아예 지배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콜로즈스바르에 입성하는 걸 막으려 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 레오폴트 1세에게 콜로즈스바르 수비대에 항복을 명령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레오폴트 1세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는 1662년 6월 15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1663년 2월 22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케메니 야노시의 전 지지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이때 사면된 인사 중 한 명인 반피 데네시는 트란실바니아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4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선전포고한 뒤 대재상 파질 에흐메트 파샤에게 원정군을 맡겼다. 파질은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합스부르크 헝가리를 오스만 제국의 산하로 삼기 위해 원정을 단행하니 작전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감히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지만, 헝가리 총독 베셀리니 페렌츠에게 오스만 제국의 계획에 대해 알리고 출전을 가능한 한 미뤘다. 그러다가 파질이 크림 칸국을 시켜 타타르족이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별 수 없이 원정에 참여했다. 1663년 10월 에르셰쿠이바르에 있는 파질의 진영에 도착한 뒤, 파질의 지시에 따라 헝가리 귀족들에게 오스만 제국군에 항전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촉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해 10월 말 오스만 제국군이 베오그라드에서 겨울을 보낼 때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1664년 초, 합스부르크 제국 당국으로부터 한 달 치 급여를 받지 못한 세켈리히드와 콜로즈스바르의 독일 용병대가 반란을 일으켜 두 요새를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넘겼다. 이후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코스탄티니예에 있는 잉글랜드 대사인 윈칠시아 3대 백작 헤니지 핀치에게 접근해, 개신교 군주인 잉글랜드 국왕이 트란실바니아의 주권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으며, 프랑스 외교부 장관인 위그 드 리옹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또한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그리고레 1세 기카가 1664년 11월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자 망명을 받아주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보내줬다.
1664년 8월 1일, 파질 아헤므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생고트하르트 전투에서 라이몬드 몬테쿠콜리가 이끄는 황제군에게 패배했다. 이리하여 전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유리해졌지만,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 왕국의 침공을 우려해 오스만 제국을 더 밀어붙이지 않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8월 11일에 바스마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22년간 휴전하기로 했고, 오스만 제국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대를 철수하되 트란실바니아와 에르셰쿠이바르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황제군이 장악했던 크로아티아 해안지대와 헝가리 땅 일부가 도로 오스만 제국의 소유로 돌아갔고, 즈린스키 가문의 영지였던 노비즈린 성은 해체되었다. 또한 양국은 서로에게 공물을 보내기로 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잠재적인 새로운 공 후보 및 서로의 적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된 뒤, 트란실바니아는 오랜만에 평화를 맞이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정치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 대신 아내인 보르네미자 언너와 총리 텔레키 미하이가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의 치세에 산업 부흥이 활발히 일어났고, 고르게니 제지 공장이 수리되어 책이 대량으로 인쇄되었으며, 보이더후녀드에서 제철소가 건설되었으며, 유리와 직조 생산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한편,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독실한 칼뱅파 신자로서 종교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백성들에게 욕설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반포했고, 교회와 목회자를 보호하기 위한 엄격한 조항을 실시했다. 그러면서도 가톨릭 신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며,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이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걸 허용했다. 또한 그는 학교를 교회의 "수확된 정원"으로 여기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1682년 베틀렌 가보르가 설립한 줄러페헤르바르의 '베틀렌 가보르 대학'을 재건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합스부르크 헝가리 내 귀족들과 친분을 다졌고, 바스마르 조약에 반감을 품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레오폴트 1세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당하자 트란실바니아로 대거 망명했을 때 기꺼이 받아들였다. 1677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강적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공식적인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헝가리 내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상 헝가리에서 반란을 일으킨 쿠루츠(Kurucs) 지도자 퇴쾨이 임레를 지원했다. 그러나 1679년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네이메헌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하자, 그는 이제 합스부르크 제국이 트란실바니아에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그들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따라 퇴쾨이 임레에 대한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그러자 퇴쾨이 임레는 1681년 그의 아들이 트란실바니아 공을 세습하는 걸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노골적으로 적대 의식을 내비쳤다. 이에 오스만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퇴쾨이 임레의 편을 들어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퇴쾨이 임레에 대한 원조를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1683년, 오스만 제국군이 퇴쾨이 임레의 요청에 따라 제2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다. 이때 어퍼피 미하이 1세도 오스만 궁정의 지시에 따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빈 공방전에 참여하고자 행군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라바 강 다리를 지키는 임무만 맡았다. 제2차 빈 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1684년 봄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한 신성 동맹이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주도하에 결성되었다. 이후 신성 동맹이 오스만 제국을 거침없이 몰아붙이자,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레오폴트 1세와 협의한 끝에 1686년 6월 28일 할러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트란실바니아 공은 자녀에게 세습하는 걸 인정받는다.
2. 트란실바니아 공이 사망한 후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3.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종교, 법률, 자유, 그리고 모든 교회 및 세속 문제를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4. 트란실바니아 공은 오스트리아 가문과 헝가리 왕에게 명백히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기독교 통치자와도 자유롭게 동맹을 맺을 수 있다.
5. 트란실바니아 공은 헝가리 왕에게 매년 50,000 제국 탈러를 지불하고 경의를 표한다.
6. 트란실바니아 군대가 오스만군으로부터 회수한 영토는 트란실바니아의 것으로 돌아가고, 황제군과 트란실바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관련 지역에서 회수한 것은 트란실바니아에 넘어가야 하지만 헝가리 왕의 주권을 인정한다.
7. 제국군의 1/6은 트란실바니아 수비를 위해 현지에 파견되고, 트란실바니아 공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한다.
8. 클루지와 데바의 2/3은 제국 경비대가 지키고, 1/3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 경비대가 지킨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제국 경비대는 철수하고 트란실바니아 공이 가진다.
2. 트란실바니아 공이 사망한 후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3.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종교, 법률, 자유, 그리고 모든 교회 및 세속 문제를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4. 트란실바니아 공은 오스트리아 가문과 헝가리 왕에게 명백히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기독교 통치자와도 자유롭게 동맹을 맺을 수 있다.
5. 트란실바니아 공은 헝가리 왕에게 매년 50,000 제국 탈러를 지불하고 경의를 표한다.
6. 트란실바니아 군대가 오스만군으로부터 회수한 영토는 트란실바니아의 것으로 돌아가고, 황제군과 트란실바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관련 지역에서 회수한 것은 트란실바니아에 넘어가야 하지만 헝가리 왕의 주권을 인정한다.
7. 제국군의 1/6은 트란실바니아 수비를 위해 현지에 파견되고, 트란실바니아 공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한다.
8. 클루지와 데바의 2/3은 제국 경비대가 지키고, 1/3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 경비대가 지킨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제국 경비대는 철수하고 트란실바니아 공이 가진다.
계약서 사본은 외국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졌다. 그 후 오스만군은 황제군에게 공략당한 부더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합류를 요청했지만,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할러 비밀 조약이 실현되리라 믿고 거부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그가 배신했다고 믿고 퇴쾨이 임레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우고 대항하게 했지만,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퇴쾨이 임레의 침공을 격퇴했다. 1686년 겨울 안토니오 카라파와 요한 프리드리히 안톤 암브로시우스 폰 베테라니가 이끄는 황제군이 할러 비밀 조약에 따라 트란실바니아에서 겨울을 보내려 하자,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막대한 뇌물을 두 장군에게 줘서 다른 지역에서 겨울을 보내게 했다.
1687년 8월 12일, 로렌 공작 샤를 4세가 지휘하는 황제군이 나기하르사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그 후 샤를 4세는 트란실바니아로 곧장 진군해 솜요, 클루지, 세즈반, 사모수이바르를 점령했다. 그 후 어퍼피 미하이 1세가 급히 파견한 사절단과 접견한 샤를 4세는 본인은 트란실바니아를 강점할 생각은 없으며,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협상 결과, 양자는 발라즈스팔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 공은 700,000 탈러를 황제군에 군자금으로 지불하고, 밀 66,000 부셸, 귀리 120,000 부셸, 건초 144,000 부셸, 짚 50만 단, 고기 40,000 점, 와인 7,000 배럴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 대신, 샤를 4세는 어퍼피 미하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걸 보장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내치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농노가 무료로 일하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를 완전히 복속하길 원했던 레오폴트 1세는 발라즈스팔비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샤를 4세는 곧 소환되었고, 안토니오 카라파가 샤를 4세를 대신해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안토니오 카라파는 1688년 2월 시비우로 진군한 뒤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서신을 보내 군대 공급과 관련된 논란이 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총리 텔레키 미하이 등 트란실바니아의 핵심 귀족들과 접견한 그는 텔레키 미하이와 협상한 뒤 다른 대표단과 별도로 협상했다. 5월 3일, 비서 다니엘 압솔론과 합께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안토니오 카라파는 대표단에게 선언문에 서명하라고 권고했다. 사전에 안토니오 카라파와 협의했던 텔레키 미하이는 즉시 서명하려 했지만, 다른 대표단은 먼저 선언문 내용을 본 뒤 협의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이 지연되자, 안토니오 카라파는 대포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열린 포가라스 성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대표단은 5월 9일에 선언문에 서명했다.
포가라스 선언문에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귀속될 것이 명시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은 레오폴트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오스만 제국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 했다. 또한 황제군은 트란실바니아의 요충지인 코바르, 후슈트, 괴르게니 및 브라쇼브 성에 주둔하며, 공국은 연간 70만 탈러를 황제에게 바쳐야 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이 선언문으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되고, 공국의 자치권과 트란실바니아 공의 권력이 침해되어 버린 것에 깊이 상심했지만, 감히 황제군에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3.12. 어퍼피 미하이 2세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트란실바니아 장악
1688년 8월 아내가 사망한 후,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1690년 초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냥에 나섰다가 감기에 걸렸고, 그해 4월 15일 포가라스에서 사망했다. 당시 어퍼피 미하이 1세의 유일한 아들 어퍼피 미하이 2세는 14세의 어린 아이였고, 오스만 제국에 의탁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던 퇴쾨이 임레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2세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승인되었지만, 레오폴트 1세가 파견한 황제군이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장악하고 있던 터라 실제로 통치하지 못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레오폴트 1세가 집권한 빈에 사절을 보내 1687년 발라즈스팔비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퍼피 미하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던 걸 근거로 삼아 어퍼피 미하이 2세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1690년 8월, 퇴쾨이 임레는 15,000명의 쿠루츠-루마니아-오스만-타타르 연합군을 이끌고 몰다비아에서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진군했다. 도나트 요한 하이슬러 폰 하이터샤임이 이끄는 황제군과 텔레키 미하이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군은 이에 맞서 제르니스트에 주둔해, 적의 예상되는 진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그는 통행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산악 지대를 등반한 뒤 8월 21일 적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그 결과 트란실바니아-황제군 연합군은 제르니스트 전투에서 완패했고, 하이슬러는 체포되었고 텔레키 미하이는 전사했다. 그 후 퇴쾨이 임레는 레오폴트 1세에게 하이슬러를 풀어주는 대신 자기 아내 옐레나 즈린스카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제국 공작 칭호를 받는다면, 앞으로 반 오스만 투쟁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레오폴트 1세는 1692년 1월 옐레나 즈린스카를 풀어줬지만 다른 요구는 거절했다.
1690년 9월 22일, 퇴쾨이 임레는 케레스테니시게트(현재 루마니아 스제반 카운티 크리스티안)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바덴 자작 루트비히 빌헬름이 이끄는 16개 기병 연대가 베오그라드에서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고, 10월 말에 퇴쾨이 임레를 하바살푈드로 밀어내고 상 헝가리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그 후 레오폴트 1세는 어퍼피 미하이 2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후견인으로 세웠다.
1690년 10월 16일, 레오폴디눔 헌장이 반포되었다. 이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인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완전히 귀속되며, 연간 50,000 탈러를 황제에게 납부해야 하며, 트란실바니아 공은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는다. 또한 어퍼피 미하이 2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총독을 선출할 권리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가톨릭, 루터교회, 칼뱅교회, 유니테리언 신도들은 신앙을 유지할 권리를 인정받으며, 귀족들은 트란실바니아 공이 부여한 특권을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로부터 공인받으며,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자치권은 여전히 유효하며, 행정, 입법, 사법행정은 기존 형태를 유지했다. 다만 의원과 이사회 구성원 중 최소 3명과 최고 재판관 중 최소 한 명은 가톨릭 신자여야 했다.
1691년, 포가라스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반피 죄르지를 총독으로 선임했고, 총리로 베틀렌 미클로시, 재무관 아포르 이슈트반, 사령관 베틀렌 게르게이, 그리고 고문 12명이 선임되었다. 이 시스템은 훗날 구베르니움(gubernium: 총독제)으로 명명되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임시 제도일 뿐이어서, 어퍼피 미하이 2세가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폐지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1694년 6월 30일, 어퍼피 미하이 2세는 보돈(현재 루마니아 마로스 카운티 메조보돈)에서 베틀렌 게르게이의 딸인 베틀렌 커털린과 결혼했다. 이는 총리 베틀렌 미클로시 등의 강력한 권고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퍼피 미하이 2세를 가톨릭 신자이자 외국인인 여인과 결혼시키는 걸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허가 없이 이뤄졌기에, 레오폴트 1세가 그를 트란실바니아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1696년,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인 팔츠 계승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오스만 제국을 밀어내고 발칸 반도를 석권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퇴쾨이 임레가 여전히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노렸고,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트란실바니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오폴트 1세는 이런 상황에서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유지했다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이탈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에 레오폴트 1세는 자기의 허락 없이 결혼하는 불충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어퍼피 미하이 2세를 빈으로 소환했고, 구베르니움 제도는 존속되었다.
어퍼피 미하이 2세는 빈 궁정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수 차례 요청했지만, 빈 궁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1699년 1월 26일, 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한 신성동맹과 오스만 제국이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식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 협약에서 상 헝가리, 오스만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주권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회수하고 헝가리 왕국에 귀속시켰다. 이후 더 이상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군림할 가망이 없다는 알게 된 어퍼피 미하이 2세는 1701년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갈 희망을 잃고 트란실바니아 통치권을 합스부르크 황실에 반납하고, 그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공작 칭호와 연간 급료 10,000 탈러를 수여받았다. 이제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세운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3.13. 라코치 죄르지 2세의 봉기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의 성립
170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뒤 대부분의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헝가리에서 라인 강 전선으로 이동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프랑스 궁정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회를 노리던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이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얼마 후 문카치에서 쿠루츠 무리가 봉기를 일으킨 뒤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인 뒤 5월 12일 베르체니 미클로시와 함께 헝가리 귀족과 비귀족 시민들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의 압제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길 촉구하는 브레즈나 선언을 반포했다.우리는 모든 참된 헝가리인, 애국자,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옛 영광스러운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 교회와 세속, 고귀함과 이방인, 무기를 들고 고향에 거주하는 참된 헝가리인들이 되기를 하느님에게 기원한다. 지금까지 헝가리에서 신과 정의에 반하여 불법적으로 통치하고 불가능한 방법으로 모든 질서를 탄압하고 분할에 대한 괴롭힘과 무능함을 억압해 온 외국의 잔인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헝가리인일 수 없다. 우리는 세금, 자유법 위반, 국가와 자유에 대한 경멸, 이미 발 아래 놓인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이해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머물고 질서를 혐오하지 않고 나라를 신뢰하며 가난의 완전한 비참함을 바꾸려고 약탈하는 것을 미리 단호히 금지한다. 개별적으로든, 조직으로든, 군대와 함께든,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인, 교회, 회랑, 회랑, 귀족 주민, 귀족 집, 성, 여행자, 상인을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윗사람에게 주어진 방법과 전달받은 방법에 따라 원수를 찾고, 그들 자신과 나라의 유익을 위해 조용하고 경건한 한마음으로 모든 일에 참여하라!
브레즈나 선언문은 5월 17일 폴란드와 헝가리 국경지대에 있는 타르파 마을에 이르렀고, 얼마 후 헝가리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후 에제 타마슈(Esze Tamás, 1666 ~ 1708)이 이끄는 쿠루츠군이 가담했고, 베르체니 미클로시는 프랑스가 보내준 자금과 폴란드 용병 600명을 거느리고 라코치 페렌츠 2세에게 가담했다. 당시 그가 확보한 총병력은 3,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대다수 귀족들은 그의 봉기를 농노들의 폭동으로 간주하고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재산이 약탈되는 일은 일절 없으며, 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받을 것을 약속하는 내용의 바사로스나메니 선언을 반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했고, 1703년 9월 말에 이르면 트란스다누비아(서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했다. 당시 프랑스군을 상대로 고전하던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라코치 페렌츠 2세를 물리칠 엄두를 못 냈고, 그와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1704년 8월 13일, 블렌하임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 후 프랑스의 지원은 사실상 끊겼고, 그는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백성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했다간 민심이 급격히 이반할 수 있었기에, 그는 그 대신 많은 양의 구리 동전을 주조해 재정을 충당하려 애썼지만, 동전 유통이 잘 되지 않으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그의 대의를 받드는 헝가리군 중 장비가 잘 갖춰진 정규군은 7,000명도 채 안 됐고, 민병대는 그 10배에 달했다. 적합한 지휘관, 장교, 말, 무기는 모두 부족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은 레오폴트 1세를 지지했고, 황제군은 상당수의 덴마크, 프로이센, 바덴 용병 부대를 헝가리에 배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독립을 쟁취하고 싶었던 헝가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꿋꿋이 이어갔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큰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황제군은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헝가리인들은 황제군이 타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다시 봉기를 일으키며 항전했다. 또한 일부 프랑스 장교들이 헝가리로 파견되어 헝가리 봉기군에게 군사 기술을 전수했다. 이렇듯 헝가리 봉기군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던 1705년 5월 15일,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하고 요제프 1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요제프 1세는 레오폴트 1세와는 달리 헝가리 봉기군과 평화 협약을 맺는 걸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빈에 잇달아 사절을 파견해 협상을 이어갔다.
1705년 9월,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세체니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영주와 평민뿐만 아니라 교회 신자들도 많이 모였다. 그들은 라코치 페렌츠 2세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등극하는 걸 확인했고, 위원 24명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국가를 통치하도록 했다. 그의 군대는 갈수록 불어나서 1705년에는 100,000명에 달했으며, 52개 기병 연대와 31개 보병 연대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압도적인 군대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내려 했지만, 1705년 11월 11일 즈시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의 주도로 헝가리 봉기군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의 평화 협상이 이어졌다. 양측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군사 상황에 맞게 협상안을 조정했지만, 양자 모두 트란실바니아를 포기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707년 6월 13일, 오노드에서 소집된 의회는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제프 1세를 더 이상 헝가리 왕으로 섬기지 않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왕이 되는 걸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자기가 헝가리 왕이 되는 대신 외국에서 왕이 되어줄 사람을 물색했다. 이는 그 사람이 속한 열강의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이 더 이상 헝가리를 공략하려는 엄두를 못 내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지원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루이 14세 마저 헝가리 봉기군과 직접적인 동맹을 맺기를 꺼렸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최후의 희망으로 러시아 제국에 의뢰해 봤지만, 차르 표트르 1세는 대북방전쟁을 치르느라 정신 없었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08년 8월 3일,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트렌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말에서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고, 쿠르츠 병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 대부분 전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정신을 차린 라코치 페렌츠 2세는 군대가 와해된 걸 알게 되자 문카치 및 사트마르 주변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후 그곳에서 군대를 재건한 뒤 다시 맞서 싸우려 했지만,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병대로 항전을 이어가는 건 무리였다. 이에 프랑스, 폴란드, 스웨덴 용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어떻게든 재편했다. 1710년 1월 22일, 그는 롬하니와 바드케르트 시 인근 평원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황제군을 상대로 회전을 벌였다. 이때 스웨덴군이 오스트리아군 일부 부대를 포위하고 분쇄하자, 승리를 확신한 그는 장병들이 적진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 그 사이에 전열을 재정비한 오스트리아군이 맹렬한 반격을 가해 스웨덴군을 물리쳤고, 전의를 상실한 그의 군대는 퇴각했다.
그 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폴란드 용병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남아있던 군대 역시 전염병에 시달렸다. 결국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요제프 1세에게 평화 협상을 간청했다. 요제프 1세는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이었던 팔피 야노시(Pálffy János 1664~1751)에게 그와 협상하도록 했다. 양자는 1710년 말부터 협상을 시작했고, 1711년 1월 31일 바야 성에서 팔피 야노시와 라코치 페렌츠 2세간의 면담이 이뤄졌다. 협상 도중인 1711년 4월 17일 요제프 1세가 사망한 후 빈에서 헝가리 반란군을 무력으로 소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협상이 파토나는 듯 했지만, 팔피 야노시가 협상을 도중에 끝내 버리고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간 헝가리인들의 분노에 직면하고 말 거라고 강력히 경고하자, 스페인에 있던 새 황제 카를 6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던 황태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는 협상을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팔피 야노시가 자기를 지켜주겠다고 설득하는 걸 믿을 수 없다고 여겼고, 설령 그가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합스부르크 궁정이 나중에 자기를 해코지할 거라고 여겼다. 결국 그는 카로이 산도르(Károlyi Sándor 1669~1743)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떠났다. 이후 카로이 산도르가 팔피 야노시와 협상을 이어간 끝에, 1711년 4월 29일 사트마르(Sathmar)[9]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라코치 페렌츠 2세와 반란군을 사면했고, 3주 안에 충성 맹세를 하면 재산을 지킬 수 있으며, 만약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에 있고 싶지 않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떠날 수 있었다. 4월 30일, 카로이 산드로는 반란군 12,000명과 함께 황제군에 무기를 반납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폐지하고,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는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을 설립했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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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코치 페렌츠 1세 (1646 ~ 1676, 재위 : 1652~1660): 1652년 2월 18일, 라코치 가문이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세습하기를 원한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의향을 받아들인 트란실바니아 의회에 의해 공동 공으로 선임되었다.
- 르헤데이 페렌츠 (1610~1667, 재위 : 1657~1658)
- 버르처이 아코시 (1619~1661, 재위 : 1658~1660)
- 케메니 야노시 (1607~1662, 재위 : 1661~1662)
- 어퍼피 미하이 1세 (1632~1690, 재위 : 1661~1690)
- 퇴쾨이 임레 (1657~1705, 재위 : 1690)
- 어퍼피 미하이 2세 (1676~1713, 재위 : 1690~1701)
- 라코치 페렌츠 2세 (1676~1735, 재위 : 1704~1711)
5. 참고 문헌
- 김정환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부코비나에 대한 역사적 일고찰", 2009, pp. 235-273
- 네이버 지식백과 "헝가리의 역사"
6. 관련 문서
[1] 1699년까지는 오스만 제국, 그 뒤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하국이었으며, 1711년 자치권을 상실했다.[2] 1570~1692[3] 1692~1711[4] 특히 작센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이주했기에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으로 불렸다.[5] 울라슬로 2세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를 점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6] 오늘날 헝가리 동부 미슈콜츠, 데브레첸과 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 일대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지역. 라틴어가 쓰인 이유는 중세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7] 안식일 준수를 비롯한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기독교 분파[8] 당시 아시리아의 마지막 국왕으로 알려진 인물.[9] 현 루마니아 사투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