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크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2px -12px" | 민족 | |||
<colbgcolor=#f3feff,#649298> 보편 튀르크 | <colbgcolor=#f3feff,#649298> 시베리아 | 돌간인 | 쇼르인 | 알타이인 | 사하인 | 유고족 | 차탕족 | 소요트 | 출름 | 토파 | 투바인 | 하카스인 | ||
킵차크 | 노가이인 | 바시키르인 | 발카르인 | 우룸인 | 카라임 | 카라차이인 | 카라칼파크인 | 카자흐 | 쿠만 † | 쿠미크인 | 키르기스 | 타타르 (립카 타타르 | 크림 타타르) | |||
카를루크 | 우즈베크 | 위구르 | |||
오구즈 | 가가우즈인 | 살라르족 | 시리아·이라크 튀르크멘 | 아제르바이잔인 | 카슈카이족 | 튀르키예인 | 투르크멘 | 페체네그 † | 호라산 튀르크 | |||
아르구 | 할라지인 | |||
오구르 | 불가르 † | 아바르 † | 추바시인 | 하자르 † | |||
국가 및 지역 | ||||
독립국 | 북키프로스 (미승인) | 아제르바이잔 | 우즈베키스탄 | 카자흐스탄 |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 튀르키예 | |||
자치 지역 | 가가우지아 | 나흐츠반 |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 사하 공화국 | 신장 위구르 자치구 | 키질수 키르기스 자치주 | 일리 카자흐 자치주 | 알타이 공화국 | 추바시야 공화국 |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 | 카라칼팍스탄 | 카바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 | 타타르스탄 공화국 | 투바 공화국 | 하카시야 공화국 | |||
다수 거주지 |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 바잉울기 | |||
사회문화 | ||||
언어 | 튀르크어족 | |||
신화 | 쾨로을루 신화 | 텡그리 신앙 | |||
외교 및 사상 | 범튀르크주의 (튀르크어권 국가 기구) | 범투란주의 |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 남아제르바이잔 분리독립 | }}}}}}}}} |
1. 개요
페체네그 칸국(Pecheneg Khanates)을 이루며 10세기 ~ 12세기 초의 시기 동안 다뉴브 강 하류 ~ 카스피 해 북안의 대평원을 지배한 튀르크 계통의 민족.서부 유라시아 대초원 유목민의 한 갈래로, 유목민답게 목축업과 사냥, 약탈, 교역 등에 종사했으며 본래는 카스피 해 북안의 볼가 강과 우랄 강 일대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스키타이 계통의 유목민으로 강거라는 국가를 이뤘으나 훈족 등 튀르크인의 서진 과정에서 튀르크화되었다는 주장이 있다.링크. 다만, 강거(캉가르)가 유럽으로 이동해 페체네그가 되었다는 캉가르-인도유럽 연결설은 "매우 가설비중이 높은(highly hypothetical)이론"으로 불린다. 애초에 페체네그는 하나의 민족집단이라기보단, 서돌궐이 당나라에 멸망하면서 붕뜬 카자흐스텝의 기마민족들이 뭉친 연맹으로 하나의 족속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다.링크
당나라 역사책 《당회요》는 강거[1]와 캉가르-캉글리를 별개의 부류로 서술했고, 튀르크 계보학의 대부인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11세기 인물)는 캉글리가 쿠만족(폴로베츠)의 일부라고 서술했으며, 실제로 동부 튀르크계 킵차크족은 캉글리라고 불렸다.
더군다나 페체네그족 지도층 일부가 이란계 캉가르일뿐 대부분의 페체네그인들은 현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오우르 튀르크계-알란계-우랄계-슬라브계-기타 등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체네그는 '캉가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모든 페체네그인을 이렇게 칭하지는 않는다. 세 지역, 즉 야브디이르티(Yabdiirti), 쿠아르치추르(Kuartsitsur), 하북신길라(Khabuksingila) 출신의 누구보다도 용맹스럽고 고결한 페체네그인만을 이렇게 부른다. 이것이 바로 '캉가르'라는 별칭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
-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
9세기 경에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 강 유역에서 흑해 주변의 드네프르 강 유역과 크림 반도 인근으로 이주해 왔으나 889년, 하자르 칸국에게 패배하고 서진하여 현재의 몰다비아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슬라브족과 불가르족, 마자르족에 대항하는 동로마 제국의 외교적 용병으로 쓰였고, 이후 하자르 칸국이 쇠퇴하자 다시 동쪽으로 영역을 넓혀 10세기 ~ 11세기 말까지 흑해 북안의 넓은 스텝 지역을 영유했다. 10세기 말 ~ 11세기 초에는 키예프 공국의 남진을 저지하고, 왈라키아와 흑해 이북을 잇는 통로를 확보하기까지 했다. 11세기 초반 드네프르 강 하류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통행권을 인정받아 민족의 동•서 분단은 피했다.
페체네그인들은 전장으로 향할 때 아녀자를 비롯한 가족 전체를 데리고 이동했는데, 부족 전체가 움직이는 이 모습은 역사가들이 '움직이는 국가'라고 평할 정도였다.[2] 이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군세를 과시하거나 군수 지원을 맡기고 사기를 고양시키는 점 등에서는 장점이었겠지만, 비전투원이 많아 단점도 많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패배했을 경우 괴멸적인 타격을 입기 십상이었다.
특히, 대학살이 일어났던 레부니온 전투가 그러했다. 부족 전체가 군사활동에 동행하는 것은 유목민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사실 평소에는 레부니온 전투처럼 한번의 패배가 부족 전체의 괴멸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유목민간의 대결 상황이라면, 만약 패배했을 경우, 부족 전체가 군대와 함께 퇴각-도주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씨족이나 부족에 얽혀 이루어진 연합체인 유목민 사회의 특성상 승자쪽에서도 괜히 패자측을 학살하여 스스로의 평판을 떨어트리고 적을 늘리는 것 보다는 약탈이나 실컷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고, 이러한 약탈은 유목민 사회의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즉, 승자측의 군대를 이루는 각 씨족과 부족 입장에서 보면 괜히 손실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퇴각하는 적의 주력을 추격, 교전하기보다는 퇴각중 낙오하는 재산(가축)과 적 부족원들을 실컷 약탈하는 쪽이 훨씬 매력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패자측 입장에서 보더라도, 패배로 인하여 부족과 그 재산이 크게 손실되는 상황 자체는 피할 수 없겠지만, 반대로 낙오한 부족원과 그 재산을 미끼삼아 적의 추격을 피함으로써 부족의 수뇌부와 군사적 주력은 그나마 덜 위험하게 퇴각하여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했다. 말하자면 좋은 말을 많이 가진 부족의 귀족층이나 엘리트 전사들이 계속 말을 바꿔타면서 제일 빨리 도망치는 동안 다른 부족 구성원과 그 재산들이 추격자들의 발을 묶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목민간의 대결이 아닌 정주민과의 전쟁 상황이라면 애초에 유목민만큼 다수의 기병을 확보하기 어려운 정주민들로써는 전력으로 도주하는 유목민을 추격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며, 오히려 퇴각하는 유목민을 섣부르게 추격하는 것은 역습의 우려 때문에 유목민을 상대할 때 가장 금기시되는 행동 중 하나였다.
다만 레부니온 전투 같은 경우는 일단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이 정주민족의 영역에 너무 깊숙히 들어온 상태였고, 상대인 동로마군은 각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스스로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인 유목민 군대와 달리 일원화된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가난한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보다는 철저히 섬멸하여 침공에 대해 복수하고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에 훨신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데다 쿠만족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정주민에게 부족한 대단위 기병 전력까지 확보하여 기동성 면에서도 밀리지 않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패배 후 재빨리 안전한 영역으로 퇴각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벌어진 상황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레부니온 전투 당시 페체네그족은 이기면 호랑이 가죽을 얻지만 지면 끝장인 호랑이굴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고, 여기서 패배하였기에 민족이 괴멸당하는 대참사를 겪은 셈이다. 또한 승전 후 쿠만족이 '자신들도 도륙당할까봐' 무서워서 얼른 전리품만 챙겨서 돌아갔다는 것 역시 이와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다.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에게 했던 것과 같은 철저한 섬멸전은 유목민의 입장에서는 별로 익숙하지 못한 전쟁 스타일이었고, 전리품 챙기기보다 페체네그족을 박살내는 데 집중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유목민인 쿠만족의 입장에서는 지옥에서 올라온 무서운 괴물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여담으로, 러시아군의 기관총 PKP 페체네그가 여기서 따온 것이다.
2. 쇠퇴
11세기 들어서 영역을 확대한 것은 좋았으나 더 넓은 영역에서 더 크고 더 많은 분쟁을 겪으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주변의 쿠만족, 오우즈족, 키예프 공국,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의 소모전이 그 멸망을 앞당겼다. 특히, 전자의 세 세력에게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압박받아 밀려난 끝에 동로마 제국과 3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이 결정적이었다.동로마 제국과의 충돌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숙적이자 북방의 완충지대인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트로스 강 국경을 수복하면서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1020년대부터 크고 작은 분쟁을 겪던 양국은 1040년대부터 1120년대까지 로마-페체네그 전쟁이라 불리는 대전쟁을 벌이게 된다.
2.1. 로마-페체네그 전쟁
2.1.1. 1차 페체네그 전쟁
1차 전쟁은 페체네그족 자신들의 내분으로 인한 것이었다. 1040년대의 페체네그족은 오우즈족 등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보다도 여유가 없던 상황이었는데, 전쟁기간 동안 활약한 모 부족장이 페체네그의 대족장과의 갈등 끝에 추방당하는 일이 일어났다.추방당한 부족장과 그를 따르는 부족들은 고민 끝에 동로마 제국으로 투항했는데, 당시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이던 콘스탄티노스 9세는 이들을 받아들여 지도자들에게는 작위와 칭호를 내리며 북방 이스트로스 하류 국경을 담당하는 파리스트리온(Paristrion) 관구에 정착시켰다(1047). 용병 혹은 로마식 보조병이나 '포이데라티'(Foederati)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었다. 이에 페체네그의 대족장은 반환 혹은 추방을 요구하고 대대적인 약탈을 벌이는 등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해군을 강 하류에 배치하는 등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1047년의 겨울은 매우 혹독해서 강이 얼어붙어버렸고, 배치해놓은 함대 역시 작전이 곤란하게 되어버렸다. 북방 유목민들 입장에서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와서 먹고 살기위해 남하할 이유도 충분했으므로, 페체네그족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수십만, 호왈 80만명에 달하는 민족대이동을 시작했다.
대전쟁이 예상되었으나, 새로운 땅과 낯선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페체네그의 부족들이 항복하고 일부는 이탈하자 상황은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49년 초, 셀주크 제국과 전쟁중이던 동부전선으로 파견된 페체네그인 부대가 도중에 이탈한 것을 계기로 페체네그족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양측은 1053년까지 승패를 주고받으며 엄청난 소모전을 벌였는데, 결국 페체네그 측의 제안으로 30년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데 합의하였다. 제국의 지배를 따르지 않는 독립적인 유목민 집단은 여전히 파리스트리온 지역을 무단점유하였으나, 콤니노스 왕조의 이사키오스 1세가 1059년에 원정하여 이스트로스 강 북쪽으로 쫓아냈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치세에 키예프 공국, 노르만, 셀주크 제국 등과 전쟁을 벌이던 동로마 제국은 이 전쟁까지 치르면서 엄청난 재정적, 군사적 손실을 입었으며,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화폐개혁 단행(1092)까지 기나긴 화폐 순도 하락과 국방력 약화를 겪게 되었다.
2.1.2. 2차 페체네그 전쟁
1080년대 초반의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대패로 소아시아 대부분을 잃어버려 약해진 제국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침공해온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인들과 전쟁중이었는데, 마침 1081년 디라히온 공방전에서 대패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중앙군을 거의 잃어버린 신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정예라 할만한 예비전력이 사라지면서 여유가 없어졌다.때문에 여유가 있던 때에는 신경쓰지 않던 국내외의 여러 집단에게도 손을 뻗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특권을 보장받던 수도원이나 이민족, 명목상 봉신국, 해외의 우호국 등은 물론 발칸산맥 이남의 마케도니아 관구[3]에서 독자적인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던 파울리키아파(Paulicia)도 있었다.
이들은 아모리아 왕조의 테오도라가 <성상 파괴령>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킨 이후(843) 박해의 대상이 되면서 말썽꾸러기 집단이 되었는데, 당시 이슬람 세력과 대치중이던 동부 변경에서 9세기 말 즈음 이주당해 수백년이 흐른 당시까지 별다른 간섭없이 잘(?) 살고있던 이들은 급박해진 제국 정부가 물자와 병력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버렸다.
당연히 제국 정부는 주요 지도자나 반발을 주도한 인사를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박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던 파울리키아파 신도들은 발칸산맥 북쪽에 다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페체네그족과 내통하기 시작했다. 페체네그족 입장에서는 마침 동로마 제국과 1053년에 맺었던 30년 평화조약이 끝날 즈음이었다.
1083년부터 크고 작은 노략질을 하며 제국 국경을 넘나들던 페체네그족은 파울리키아파의 사주에 힘입어 점점 더 그 수위를 높여갔다. 동로마 제국이 노르만인들을 제국령 유럽에서 완전히 축출한 1085년 중순이 되면 황제의 친정이 필요할 정도로 북방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결국 1086년, 알렉시오스 1세는 백부 이사키오스 1세처럼 페체네그족을 쫓아버리기 위해 원정했다.
그러나 이스트로스 강변의 드리스트라(Dristra. 현대 불가리아 Silistra)에서 벌인 공방전에서 대패하면서 2차 페체네그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최악으로 치닫는 듯 했던 전황은 동로마 제국이 1087년에 승리를 거두면서 간신히 수습되었고, 그 해 평화조약에 양자가 동의하면서 전쟁은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해 말, 조약을 파기한 페체네그족은 이듬해인 1088년이 되자 전쟁을 재개했다. 제국의 수도권인 트라키아를 유린한 페체네그족은 매년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가며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조금씩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전진해 들어갔다. 1090년에는 수도 지척의 추룰로스(Tzouroulos. 현대 터키 Çorlu)나 레디스토스(Rhaedestos. 현대 터키 Tekirdağ)항 인근까지 페체네그군이 진출했고, 1091년 초 겨울에는 페체네그의 약탈대가 아나스타시오스 방어선(Anastasian Wall)을 넘어 수도에서 30여km 떨어진 지금의 부육체크메세(Büyükçekmece) 호수 인근에 출현할 지경이 되었다.
또한 남쪽 바다에서는 스미르니의 에미르 차카(Tzachas)가 함대를 건설하여 에게 해 일대를 공격하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공략하기 위해 페체네그족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영토가 반토막난데다 경제까지 파탄나고 연이은 전쟁과 반란으로 국력을 모두 소진한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이젠 수백년전 수륙 양면으로 수도가 포위당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들의 악몽이 재현될 판이었다.
결국 국내외의 용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4] 후방인 불가리아와 블라흐 일대의 테마군까지 모두 소집한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2~3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금의 마리차(Maritsa) 강 하구에서 8만여명의[5] 페체네그 '국가'와 대치했다. 이즈음 쿠만족과 협상을 성사시켜 4만여 명의 동맹군을 확보한 알렉시오스 1세는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다 근처의 레부니온(Levounion) 산에서 양 국가의 명운을 건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벌였고, 이 레부니온 전투에서 대패하고 밤중에 포로들까지 학살당한 페체네그인들은 세력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2.1.3. 3차 페체네그 전쟁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안니스 2세가 페체네그인들을 격파하여 로마-페체네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전쟁. 베로이아 전투 참조.3.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로마-페체네그 전쟁 기간을 전후하여 동로마 제국 정부의 허락하에 동로마령 유럽에 정착하거나 투항하여 이주당한 페체네그인들은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등의 민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 외의 잔존 세력은 다시 이스트로스 강을 건너 왈라키아 지방으로 후퇴하였고, 1130년 즈음 강대해진 쿠만인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몽골 제국의 동유럽 침략 이후에는 헝가리 왕국이 자리잡고 있던 판노니아 평원으로 흩어졌다가 헝가리인에게 흡수되어 차차 역사에서 사라졌다.[1] 강거족과 소그드족을 일컷는 강(康)족[2] 사실 약탈이나 침공 등 대규모 군사 행동에 나설 때 아녀자와 노약자를 포함한 부족 전부+가축을 중심으로 한 모든 재산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은 꼭 페체네그족 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목민들이 보여준 특징 중 하나였다. 지구 표면에 못박혀 움직일 수 없는 토지가 재산의 핵심인 정주민과 달리 목초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고, 평소부터 목초지를 찾아 계속 움직이는 것에 익숙한 유목민의 특성상 부족 전체가 군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족 전체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보급거점 자체가 군대를 따라다니는 격이며, 또한 상호 약탈이 일상화되어있던 유목민 사회의 특성상 군대가 원정을 나간 사이 이웃 유목민들에게 재산과 일족이 약탈당할 우려를 감당하거나, 남아있는 부족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에 비해 군대가 지켜야 할 부족 자체가 군대와 함께 움직임으로써 얻어지는 전략적 이점 역시 막대했던 것이다. 물론 정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부족(사실상의 나라) 전체가 함께 움직여서 쳐들어오는 모습은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동시에 장관이었겠지만 말이다.[3] 당시엔 전통적인 의미의 마케도니아가 아니라 트라키아 서북부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필리포폴리스 인근 까지의 지역을 의미했다.[4] 서유럽 출신의 프랑크 용병대는 물론, 저 멀리 플랑드르 백작이 보내준 500여명의 병력까지 포함할 정도로 급박했다.[5] 전투원만(!) 추산해도 이정도였다고 하니, 실제로는 엄청난 대인원이 몰려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11만명 이상을 이야기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