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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5 23:49:15

루마니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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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사
1.1.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 다키아 왕국1.2. 105년 ~ 275년, 로마제국 속주1.3. 275년, 로마제국의 포기1.4. 275 ~ 5세기까지: 이웃 언어권에서의 고립
2. 중세사
2.1. 681 ~ 1018 투르크계 유목민, 불가르인들의 지배, 불가리아 제1제국 영토2.2. 1018 ~ 11852.3. 1185 ~ 1396 , 불가리아 제2제국 영토2.4. 1346 ~ 1867, 공국들의 시대: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2.4.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2.4.2.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시대2.4.3. 1593 ~ 1601, 첫 번째 루마니아 통합: 미하이 2세
3. 1881, 루마니아의 독립4. 냉전5. 루마니아
5.1. 20세기5.2. 21세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maniaBorderHistoryAnnimation_1859-2010.gif
1859년부터 2010년까지의 루마니아의 영토 변경 기록. '청록색'이 그 당시의 루마니아 영토다.

1. 고대사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부터 트라키아인의 일파로 추정되는 부족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베스족, 코스토복족, 카르프족으로 불렸는데 카르파티아 산맥의 명칭은 아마도 이 카르프족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로마에서는 갈리치아 산 기슭에서 게르만계 부족인 바스테르나이족이 루마니아 일대로 남하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기원전 3세기 로마인들과 전투를 벌였던 바 있었다.

1.1.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 다키아 왕국

이 지역에 기원전 82년부터 나타난 국가가 바로 다키아 전쟁으로 유명한 다키아 왕국으로 로마 제국과 다키아 전쟁이 있었다.

1.2. 105년 ~ 275년, 로마제국 속주

다키아 전쟁 이후로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다키아에는 로마인들이 이주해오고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100년 좀 지나 다키아에 있던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에 의해 다시 로마로 쫒겨났다.

1.3. 275년, 로마제국의 포기

3세기 이후부터 로마 제국이 계속 쇠퇴하면서 로마 제국이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게 됨에 따라, 상당수 로마인들은 다키아에서 다뉴브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파일:Dacia province map.png

1.4. 275 ~ 5세기까지: 이웃 언어권에서의 고립

로마 제국이 다키아 속주를 포기한 이후 다키아에는 고트족이나 훈족, 게르만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마자르족, 불가르족, 페체네그족, 쿠만족 등 여러 민족들이 훑고 지나갔다. 이들은 차례대로 현재의 루마니아에 정착했다. 고대 로마 제국은 그리스어를 주된 공용어로 사용하는 동부와, 라틴어를 주된 공용어로 사용하는 서방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제국 내부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경계선은 불가리아 중부의 발칸 산맥을 따라 그려졌기 때문에 그 이북이었던 모이시아 속주와 다키아 속주는 라틴어를 쓰는 서부의 영향을 받아 민중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대부분 철수한 후에도 다키아 지역에 잔류한 로마인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며 이들은 다키아 땅이 다른 민족들의 영향권에 들어갈 때도 동화와 유지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중세 초까지 계속된 이러한 민족들의 대이동 속에서도 루마니아 지역의 민중 라틴어 화자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그들이 쓰던 민중 라틴어는 다른 언어들의 영향을 받아 동부 로망스어 계열의 루마니아어로 변화하였다.

2. 중세사

2.1. 681 ~ 1018 투르크계 유목민, 불가르인들의 지배, 불가리아 제1제국 영토

고대 로마 제국의 동부 영토를 물려받은 동로마 제국에서는 루마니아 영토를 거쳐서 들어온 아바르인, 불가르인을 비롯한 투르크계 유목민들 및 여러 슬라브 부족들과 사투를 벌여나갔다. 그 중 특히 불가르인들이 동로마 제국에 위협적이었는데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제2차 불가리아 제국 당시에는 현 루마니아의 영토 전역이 불가리아인 지배자들의 통제 하에 있었다. 특히 불가리아 제1제국을 893년부터 927까지 30여년을 통치한 차르 시메온 1세때가 바로 이 1제국의 전성기로서, 불가리아만의 차변화된 독자적 문화가 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다른 로망스어권 국가[1]들이 가톨릭을 믿는 것과는 다르게 루마니아는 정교회를 따르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정교의 대표 국가였으며, 불가리아 제국 역시 동로마 제국과 적대국이기는 했지만 동로마로부터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고 동방 정교를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2.2. 1018 ~ 1185

하지만 동로마 제국에 의해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한 후로, 루마니아의 땅은 특정 왕조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백이 상태가 된다. 이 땅에 사는 민족을 블라크(Vlachs)라고 불렀다. 당시 이들은 페체네그 등의 유목민들의 약탈을 피해서 쉽게 피난갈 수 있도록 농사를 짓는 것 보다 목축을 선호했으며, 유목민처럼 텐트를 치고 살지는 않았으나, 땅을 판 후 지붕만 덮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주거를 선호하였다.

2.3. 1185 ~ 1396 , 불가리아 제2제국 영토

동로마 제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영향으로 루마니아 각 지역에 그리스-정교회 문화가 확고하게 뿌리내렸으며 경제 부흥에 힘입어 농업과 임업이 발달하였으나, 이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력이 다시 쇠퇴하였다.

2.4. 1346 ~ 1867, 공국들의 시대: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중세에 번영을 누렸던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차례로 몰락하자 현재 루마니아 영토 내에서도 여러 공국들이 들어섰다. 오늘날 루마니아의 남부에는 왈라키아 공국(1351 ~ 1859)이, 그리고 북동부와 오늘날 몰도바에는 몰다비아 공국(1346 ~ 1859)이 들어섰다.

몰다비아의 절반인 프루트 강 동부는 현재 몰도바로 독립해 다른 나라가 되었고, 트란실바니아는 1918년에 루마니아와 합병될 때까지 줄곧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2] 발라히아[3]는 발라키아 혹은 왈라키아라고도 읽는다. 현재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698년 이래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였으며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였던 이아시는 이아시 대학을 필두로 현재 루마니아의 중요한 교육도시로 입지를 굳혔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오랜 시간 나뉘어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의 지역의 영웅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다.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은 불가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등에게 포위된 채 발전이 지지부진했으며 두 나라로 나뉘어져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지낸 구도가 5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트란실바니아의 경우, 두 나라와 맥락이 좀 다르다. 왈라키아 출신으로 트란실바니아 총독을 지내면서 헝가리 왕국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지켜내어 헝가리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후녀디 야노시는, 현대의 기준으로는 헝가리인이지만, 루마니아에서도 영웅시하고 있다. 또한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로 헝가리의 국왕이었던 마차시 1세 같은 경우에는, 루마니아의 국가에서도 '위대한 그림자(mărețe umbre)', 즉 '위대한 조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다만 마차시 1세 부자를 루마니아에서도 추앙하는 것은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루마니아의 역사 주권 확립 의도가 다분하다. 트란실바니아에서 루마니아인은 수 백년 동안 농노로서 사람 대우도 못받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 혈통이 조금이라도 섞여있으면 어떻게든 부풀려야 영토 점유 정당성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1570년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형식의 헝가리인 자치 공국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들어섰다. 1699년 이후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되면서 다시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민족자결주의를 핑계로 강제편입시켰다.

2.4.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데 왈라키아 공국공작 미르체아 1세드라큘라로 유명한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3세,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 등과 같은 영웅들이 나타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와 맞서 싸우고 특히 블라드 3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독하게 저항하였다.

2.4.2.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시대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국력 앞에는 중과부적이었고, 주변국과의 갈등도 겹치며 결국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 되었다.

한편 헝가리 왕국도 마차시 1세 사후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의 무능한 울라슬로 2세(보헤미아 왕으로는 블라디슬라프), 러요시 2세(보헤미아 왕으로는 루드비크)가 즉위하면서 국력이 약화되었다. 1526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왕국을 침공했고 헝가리 왕국은 모하치 전투에서 국왕 러요시 2세가 패퇴하여 도망가다 전사하는 등 대패하여 사실상 소멸하면서 헝가리 왕권은 야기에우워 왕조와 통혼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귀속되었다. 이때 헝가리 귀족 출신 서포여이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때부터 세워진 동헝가리 왕국은 1570년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재탄생했다.

2.4.3. 1593 ~ 1601, 첫 번째 루마니아 통합: 미하이 2세

그 후로도 루마니아는 16세기 후반을 시작으로 몇 차례 오스만 제국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특히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왈라키아 공작을 지낸 미하이 2세(미하이 비테아줄) 같은 경우,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넓혀 1599년부터 1600년까지는 트란실바니아 공작, 1600년에는 몰다비아 공작을 겸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루마니아 출신의 군주 한 명이 오늘날 루마니아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4]

3. 1881, 루마니아의 독립

빅토리아 시대인 1881년, 카롤 1세가 독립전쟁을 마치고 즉위함으로써 독립에 성공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친 후에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부코비나 공국, 러시아 제국베사라비아, 불가리아 왕국의 남부 도브루자를 얻으며 최대영토를 얻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베사라비아는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북부 부코비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떨어져나갔고, 남부 도브루자는 불가리아로 반환되며 망했다. 그나마 헝가리에게 돌아갔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되찾았다.

4. 냉전

5.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1989년 크리스마스, 공산 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이 이후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서서히 정상국가로 진입하고 있다.

5.1. 20세기

사실 1989년 크리스마스 반란의 큰 수혜자는 민중이나 소수 민족 또는 민주 세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이 권력을 차지한 차우셰스쿠 측근의 최고 당지도자들이었다. 1989년 12월 이온 일리에스쿠가 지도한 '민족구국전선'(Frontul Salvării Naționale)은 12월 26일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1996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루마니아의 민중적 조직은 너무 취약하며 산만하였기 때문에 구 엘리트의 정치 조작에 대항할 수 없었다. 야권 세력은 당 기관지나 출판물, 건물, 조직적 망이나 큰 지도부를 가지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민족구국전선'은 모든 국가의 재원, 언론 기구, 경찰 기구를 독점하였다. 곧 부쿠레슈티 대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민주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엄한 검열과 감시하에 놓였으며,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 인과 유대 인 역시 탄압을 받았으며 체포되거나 구금되었다. 1990년 1월부터 수십 개의 정당이 조직되었다. 가장 큰 2개의 정당은 도시민을 대표하는 '민족자유당'(Partidul Național Liberal)과 전통적인 소농층을 대변하는 '민족농민당'(Partidul Național Țărănesc)이었다. 농민당은 나중에 '기독교민주민족농민당'(PNF - CD)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정당 지도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루마니아 국민들 사이에 계층의 유대감이 형성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체로 공산주의 체제에서 기득권을 가진 집단들은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연속성을 원하였다. 과거 동유럽이나 발칸 지역에서 공산당원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10~15%였으나 루마니아에서는 거의 인구의 1/3에 해당되어 그 수는 380만 명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신생 정당은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1990년 선거에서 '민족자유당'의 득표율은 6%, '민족 농민당'의 득표율은 3%에 그쳤다. 이에 비해 공산당에 기초를 둔 민족 구국 전선은 60%의 득표율을 획득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한편 소수 민족 정당인 '루마니아 민주헝가리인연맹'은 7% 이상의 득표율을 거둠으로써 두 번째 정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일리에스쿠는 85% 투표 득표율과 함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엘리트와 민중 사이에 괴리가 여전히 격심하였기 때문에 이 선거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민중적 지지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선거 이후 트란실바니아 지역과 구 루마니아 지역 사이에 대조는 점점 더 현저해졌다. 트란실바니아의 유권자는 극우 민족주의자와 자유 민주주의자들로 양극화를 이루면서 민족구국전선에 대하여 양극단의 반응을 보였다.

과거 차우셰스쿠 정권 시절에 강제적 산업화와 도시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무수한 루마니아인들이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후일 이들 중 상당수가 매우 유리한 취업, 승진, 경제적 지위 상승의 기회를 누렸으며 이들은 강하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었다. 이에 비해 토착 트란실바니아인들은 매우 서구 지향적이었으며 자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도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와 같은 양극단의 경향이 나타났다. 계몽된 시민들은 점차 그들의 혁명이 왜곡되어 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거 이후 새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적 시위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도화된 조직이나 기반을 갖추지 못한 시민들은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인 양상으로만 나타났다. 1990년 6월 13~15일,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약 1만 명의 광부들이 투입되어 대학생들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이른바 'Mineriada din iunie 1990(1990년 6월 광부폭동)' 사건이 발생하였다. 1990년 5월 선거 이후 루마니아 정치 체제는 마치 이온 일리에스쿠 개인에 의한 쇼와 같았다. 각료들은 대부분 그의 측근들이었고 노멘클라투라의 사람들이었다. 그의 측근 피터 로만은 선거 이후 총리로 임명되었다. 로만은 보다 젊고 실용적인 노멘클라투라의 인물이었다.

양자는 전통주의와 근대주의 또는 민족주의와 유럽화라는 등식으로 구분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만은 루마니아의 고립성과 개혁 부재에 점차 불만을 느끼고 이온 일리에스쿠 체제를 비판하였다. 양자는 곧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일리에스쿠는 로만을 반역자로 규정짓고 다시 광부를 동원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로만은 피신하고 사임하였다. 일리에스쿠의 두 번째 수상인 테오도르 스톨로얀(Teodore Stolojan)은 비당원 기술 전문가 출신으로서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민족 자유당의 인물을 내각의 일부 포함시키는 유화적 제스처를 썼다.

1991년 2월 실시한 국민 투표에서 루마니아는 헌법을 채택하였는데 프랑스형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대통령은 최고 국가 방위 위원을 겸직하고 총리와 내각을 지명할 수 있으며, 의회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루마니아 의회는 대통령의 권한에 비하여 매우 약화되었고 견제와 균형의 구조는 결여되었다. 대통령은 여전히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였고 행정부가 입법부가 실질적으로 그의 권한하에 놓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또다른 루마니아의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은 끊임없는 민족주의적 전통파와 유럽적 근대화파 사이의 긴장과 불화에서 나타났다. 결국 1992년 민주민족구국전선은 둘로 쪼개어 졌다. 일리에스쿠는 민족주의적 전통파를 주도하여 민주민족구국전선으로 개칭하고 두 번째 집단인 근대화파는 반 일리에스쿠 입장을 취하였던 피이터 로만이 주도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곧 루마니아 전 야당들은 연합하여 1992년 9월 선거에서 루마니아 민주공회(Convenţia Democrată Română, DCR)를 형성하여 민주민족구국전선과 경쟁하였다. 1992년 9월 선거에서 여당은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였으나 27.7%의 득표율에 그쳐 정치적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민주공회는 20%의 득표율을 획득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일리에스쿠는 루마니아 민주공회가 내세운 후보자인 부카레스크 대학 총장이었던 에밀 콘스탄티네스쿠(Emil Konstantinescu)와 경합하여 1차 투표에서는 31.24% 대 47.34%, 2차 투표에서 61.43%를 획득하여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민족구국전선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리에스쿠가 당선된 것은 심각한 선거구의 불균형 탓이었다. 국민 선거 위원회는 상하원을 포함한 투표 용지의 12%가 부정 선거로 인하여 무효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주장은 당국에 의하여 탄압받았다.

루마니아에서는 지역적 분열로 인하여 80여 개의 군소 정당이 난립하였고 단지 8개 정당만이 의회 의석을 획득하였다. 루마니아 민주공회는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 승리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끊임없는 이합집산으로 말미암아 일리에스쿠 정권의 강력한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루마니아 정치 구조의 제3의 변수는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세운 군소 정당의 탄생이었다. 대 루마니아당(Partidul România Mare)과 루마니아 민족통일당(Partidul Unităţii Naţionale a Românilor) 같은 민족주의적인 정당들이 여론의 압력 탓으로 민주공회는 헝가리인을 위시한 소수 민족 문제에 대하여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야당의 통합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1992년 선거에서 가장 큰 패배자는 루마니아 민주공회를 떠난 민족자유당(Partidul Național Liberal, PNL)이었다. 공산주의적 정당들은 선거 이후 민주민족구국전선을 중심으로 연립하여 무소속 출신의 기술 관료인 니콜라에 버커로이우(Nicolare Vacaroiu)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 연립 내각은 내부적으로 약간의 변동을 거치면서 1996년 가을 선거까지 지속되었다. 인민주의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통령제의 구조하에서 바카로유 정부는 주요 쟁점에서 의회와 타협하는 입장을 취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 내각은 정치적 권위의 유지에 결정적이라고 보는 국립 언론 매체나 안보 영역에 대한 감시 감독의 역할을 결코 의회에 내주지 않았다.

1992년 선거 이후 헝가리에 근접한 트람실바니아와 루마니아 사이의 유권자들의 정치적 입장이 점차 양극화되어 가는 현상이 뚜렷하였다. 이 양극화는 전통주의적 민족주의적 정당들과 근대화 - 유럽화를 지향하는 정당들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일리에스쿠 정부는 실질적으로 반서구적, 반지성적,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이로 인하여 루마니아에서는 자연히 사유화나 시장 경제 체제로 향하는 경제적 변혁의 속도는 매우 느렸고 인권 문제, 특히 소수 민족을 위한 권리와 제도 수립을 위한 변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루마니아의 국내 정치의 불안정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통합하려고 하는 외교적 노력을 낙관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유럽 공동체는 루마니아에게 부회원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1993년 7월 선거에서 일리에스쿠의 정당은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여 유럽으로부터 개혁적 좌파 정당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요청은 기각되었다. 대체로 불가리아에 비하여 루마니아의 개혁의 내용이나 속도는 크게 뒤지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정치 구조는 권력을 평화적으로 야당으로 이양시킬 수 있는 정도의 단합성이나 성숙성과 협상의 능력은 매우 부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야당들은 '정치적 철새'의 경향이 여전히 심하다. 1995년 초 하원에 22명의 무소속, 상원에 15명의 무소속 의원을 위시하여 15개 정당이 존재한다. 정당들의 분열과 합병은 같은 계보 내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현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점차적으로 극단적 민족주의적 정당들이 우세해지는 경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민주적이거나 자유주의적 정당은 너무나 이질적 요소들이 혼합하여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민주화를 추진시키기 위한 시민적 조직이나 운동들이 차츰 증가하고 있지만 지도부들이 아직도 공통의 이해보다는 개인적 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탓으로 내분이 심하여 여당의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1992년 선거에서 승리한 일리에스쿠 정부는 붕괴의 여파로 인하여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적 체제를 대안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996년 자유 의회 선거 이후에도 루마니아가 과연 민주주의적 전환에 들어 선 것인지 아니면 민주주의적 전환의 이전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큰 논란이 일 정도였다. 물론 1996년 11월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변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더 유력하다. 과거 차우체스쿠 체제의 낡은 유산과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고 민주적 외양을 띤 권위주의와 정치적 통제 그리고 여론 조작이 판을 치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이 같은 지연된 정치 발전은 발칸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구국전선'(Frontul Salvării Naționale)과 일리에스쿠를 중심으로 한 전통파는 여전히 과거 공산당 간부들이 운영하던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으며 서구적 정치 경제 모델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루마니아 변혁은 여전히 관료적, 중앙 집권적이며 강한 국가주의적 전통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제도화된 민주 절차를 공공연히 무시하고 사회적 선동, 정치적 카리스마를 이용한 정치적 야합을 공공연히 행사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국수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1989년 혁명 당시 민중들의 민족주의적인 감상과 일리에스쿠 정부와의 야합으로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점점 맹렬하게 민족적 공산주의적 시각을 선전하였다. 한편,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에 지친 국민은 약체인 자유 민주주의적 정당보다는 민족적 색채를 띤 공산주의적 정당들의 연합과 선전에 쉽게 현혹되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발칸 지역의 국제 정세와 여론에서 고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다. 자유 선거, 언론의 자유, 인권, 시장 경제 등의 국제적 기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다. 국내 정치의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정부는 계속해서 유럽 대서양 통합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1996년 11월의 의회와 대통령 선거는 루마니아 정치에서 획기적인 새 변화를 가지고 올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야당이 의회와 대통령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두드러진 선거상의 부정 행위는 보고 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민주공회는 라두 바실(Radu Vasile)이 지도하는 민족농민당과 1996년 이전에 피터 로만이 창당한 사회민주연합(Uniunea Social-Democrată)의 지원을 받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루마니아 민주공회는 30.2%의 득표율과 의회의 122석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루마니아 민주 정치에서 야당의 첫 승리였다.

드디어 1996년 말 이 정당은 루마니아 헝가리인 민주연합(Uniunea Democrată Maghiară din România, UDMR)[5]의 참여로 빅토르 쵸르베아(Victor Ciorbea)를 수상으로 하여 새 연립 내각을 형성할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공회의 후보자인 에밀 콘스탄티네스쿠가 1차 투표에서는 28.2%의 득표율로 32.2%를 획득한 이온 일리에네스쿠에 이어 2위를 하였으나 2차 투표에서는 야당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54.4%를 획득하여 일리에네스쿠를 누르고 승리하였다. 이와 같은 선거의 결과는 루마니아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건이 되었다.

1997년 2월 빅토르 쵸르베아는 루마니아 경제 위기 경영과 사유화를 위한 충격 요법을 위한 긴축 정책을 선언하였다. 그해 8월에 그는 다시 적자를 양산하는 대규모 국유 산업체에게 폐쇄 조치를 하고 국제 정치면에서도 새로운 개방을 위한 정책을 시도하였다. 수상은 3월 헝가리를 방문하여 '5개 협정안'에 서명하였다. 이것은 양국 사이의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국내에서는 루마니아 헝가리인 민주연합양국의 관계 정상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루마니아는 또한 우크라이나와 호혜 상호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사이에 오랫동안 역사적 쟁점으로 남겨져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1997년의 루마니아 선거는 루마니아 국내 민주화와 국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루마니아는 시장 경제 도입이나 사유화 그리고 경제적 경쟁력 회복의 속도가 매우 지연되어 있으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정치적 안정과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루마니아의 정치적 지도부가 과연 위기 관리 면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민주화의 길에 성공을 거둘 것인지 아니면 다시 민중이 오랫동안 누적된 불만으로 인하여 권위적 인민주의 체제로 돌아 설 것인지 하는 문제는 발칸 지역의 새로운 모델로서 전 유럽인의 공통된 관심사로 남을 것이다.

5.2. 21세기

2000년대 이후 이 같은 파열음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며 대침체 이전까지 상당한 고성장을 기록했다. 2008년 이후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에 따른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2012년 이후 정상 궤도에 올라섰으며 2015년 명목 기준 1인당 GDP가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 고소득 국가[6] 대열 진입을 앞두고 있다.

2004년 3월 29일 NATO에 가입하였으며 2007년 1월 1일에는 불가리아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2015년 11월에 빅토르 폰타 총리가 나이트클럽 화재 참사를 계기로 사퇴한 뒤 1년 이상을 과도내각이 이끌었다가 2017년 1월 4일에 사회민주당 소속의 그란데아누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에 루마니아 정부가 부패사범들을 풀어주겠다고 밝히자 루마니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결국 부패사범을 사면하겠다는 조치는 철회되었다.# 하지만 다시 부패범죄의 처벌을 완화하려고 하자 루마니아 내 사법부와 클라우스 이오한니스 대통령이 이를 비판했고, 미국과 EU도 비판했다.#

루마니아는 2018년 10월 6일과 7일 헌법상의 결혼 개념을 '배우자 간 결합' 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루마니아에서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투표에서 무산되었다.#

2018년 12월 1일에 제1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 겸 근대 국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 등 행사를 치렀다. 헝가리로부터 받은 트랜실바니아 도시 알바 이울리아에서 가졌으며, 그 와중에도 부쿠레슈티는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로 여전히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9년 2월 23일에는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 정부의 검찰과 사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되었다.#

2020년 12월 6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절대 다수 표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난 것으로 출구조사가 발표되었다.# 사회민주당이 승리하자 총리는 사퇴한다고 밝혔다.#

2021년 10월 5일에 시투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1]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2] 그냥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다. 지형상으로도 트란실바니아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의해 다른 두 지역과 분리되어 있다.[3]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항목 참조.[4] 다만 자신의 힘을 이용했다기보다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체제가 잠시 흔들렸던 것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통합 루마니아의 군주라는 지위는 반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래도 루마니아 통합이라는 업적으로 인해 미하이 2세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5] 헝가리어로는 Romániai Magyar Demokrata Szövetség.[6] 세계은행 기준으로 1인당 명목 GDP가 1만 2000달러 이상이면 고소득 국가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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