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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5대 공 버르처이 아코시 Barcsay Ákos | ||
이름 | 버르처이 아코시 (Barcsay Ákos) | |
출생 | 1619년 | |
트란실바니아 공국 후녀디 카운티(현재 루마니아 후냐드 카운티) | ||
사망 | 1661년 7월 (향년 41~42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코즈마텔케(현재 루마니아 마로스 카운티 코즈마)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 |
1658년 10월 7일 ~ 1660년 12월 31일 | ||
배우자 | 스잘란치 에르제베트 (1655년 이전 결혼 / 1659년 또는 1660년 사망) | |
반피 이자벨라 (1660년 결혼) | ||
아버지 | 버르처이 산도르 | |
어머니 | 팔라틱스 에르제 | |
종교 | 칼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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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5대 공.2. 생애
1619년경 트란실바니아 공국 후녀디 카운티에서 출생했다. 그가 속한 버르처이 가문은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226년 그들의 조상이 크로아티아의 반(Ban)을 역임할 때부터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들의 옛 거점은 후녀드 카운티의 너지버르차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성과 이름을 땄다. 아버지는 버르처이 산도르이고, 어머니는 팔라틱스 에르제였다. 그는 라코치 죄르지 1세 치세 동안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몰다비아 공국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에게 파견된 트란실바니아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뒹이 코스탄티니예에 파견된 트란실바니아 대표 세케이 모제시[1]의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외교 업무에 기여한 공으로 평의회 의원이 되었고, 1644년부터 루고스와 카란세베스의 반(Ban)으로 발탁되었다. 1648년 후녀디 카운티의 최고 영주 작위를 받고 데바 성을 수여받았다.1648년 10월 라코치 죄르지 2세의 트란실바니아 공 취임식은 코스탄티니예 궁정에서 그의 주관하에 수행되었다. 1657년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르헤데이 페렌츠, 세레디 이슈트반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총독을 맡았지만, 곧 줄러페헤르바르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던 1657년 10월 25일, 오스만 제국은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스웨덴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카자크와 동맹을 맺은 걸 문제 삼아 그의 폐위를 선고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에서 2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면서 위신이 추락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이 페렌츠를 새 공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르헤데이 페렌츠는 공으로 선출되기 전에 나중에 오스만 궁정이 동의하면 직위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라코치 죄르지 2세와 비밀리에 맺었다.
1658년 1월 9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히 페렌츠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라코치 죄르지 2세를 공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기엔 사절을 보내 라코치 죄르지 2세를 도로 폐위하라고 요구했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658년 여름 군대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압박해 10월 7일 버르처이 아코시를 새 공으로 세우도록 했다. 그는 명령에 복종하고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준 것에 대한 대가로 50만 두카트를 지불하고, 연간 40,000 두카트를 오스만 궁정에 지불하며, 루고스와 카란세베스를 넘기기로 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파르티움으로 피신한 뒤 그곳의 중심지인 버러드에서 버르처이 아코시를 반기독교인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파르티움으로 쳐들어갈 조짐이 포착되자,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이에 굴복하여 1659년 3월 30일 트란실바니아 공에서 물러나고 버러드를 버르처이 아코시에게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사볼츠와 사트마르 카운티에 있는 자신의 광범위한 영지에서 무장병을 계속 두면서 재기를 꾀했다. 1659년 9월, 버르처이 아코시가 티미쇼아라로 가서 센기자데 알리 파샤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라코치 죄르지 2세는 기회를 포착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진군했고, 9월 27일 마로스바사헬에서 열린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복위했다. 그 해 10월 버르처이 아코시에 의해 버러드 수비대장으로 선임되었던 할러 가보르를 몰아내고, 귈라이 페렌츠를 새 수비대장으로 세웠다.
1659년 11월, 부더의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버르처이 아코시를 돕기 위해 쳐들어와서 11월 22일 자이카니와 11월 말 토르다에서 라코치를 추종하는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12월에 겨울 한파를 피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했다. 한편 트란실바니아로 귀환한 버르처이 아코시는 나기세벤(현재 루마니아 시비우)으로 이동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즉각 나기세벤을 포위했지만, 버르처이 아코시는 1660년 봄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가 다시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올 때까지 버텼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일단 군대를 물린 뒤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와 맞섰다. 그러나 1660년 5월 22일 사슈페네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뒤 너지버러드로 피신했지만 1660년 6월 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버르처이 아코시는 트란실바니아의 단독 군주가 되었지만,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의 군영을 방문했다가 본래 바쳐야 할 연공이 늦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억류된 뒤, 8월 말에 첫번째 연공 분할 납부가 이뤄진 후에야 석방되었다. 그 동안 바러드는 오스만 제국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오스만 제국군은 뒤이어 파르티움 대부분을 장악한 뒤 바러드 빌라에트(vilayet: 오스만 제국 행정 구역)로 편성했다. 이에 자국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대거 상실하고 막대한 연공을 지불하게 한 버르처이 아코시에 대한 헝가리 귀족 및 백성들의 지지도는 급감했고, 트란실바니아 귀족 상당수가 지난날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장군이었으며 라코치 죄르지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 크림 칸국에서 포로로 지내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던 케메니 야노시를 지지했다.
1660년 11월 22일, 케메니 야노시는 자신이 진정한 트란실바니아 공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맞서 형제인 버르처이 가슈파르에게 군대를 맡겼지만, 1660년 11월 말 외르메니예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결국 그는 저항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케메니 야노시와 협상한 끝에 1660년 12월 31일 의회를 소집한 뒤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퇴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케메니 야노시는 그가 나중에 복위를 꾀할 거라 여기고, 1661년 7월 초 코즈마텔케에서 추종자인 부다이 지그몬드, 코넷 연주자 쇼베르디와 함께 처형했다.[2] 사형 집행인들은 3구의 시체를 마을 인근에 암매장했다. 케메니 야노시는 버르처이 아코시를 살해한 일로 동시대인들에게 강한 비난을 받았고, 19세기 헝가리 역사가 실라기 산도르(Szilágyi Sándor, 1827 ~ 1899)는 1662년 1월 23일 케메니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경건하고 자비로웠던 버르처이 아코시의 무고한 죽음을 갚아주었다고 평했다.
버르처이 아코시는 스잘란치 에르제베트[3], 반피 이자벨라[4]와 잇따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두번째 아내 반피 이자벨라는 그가 처형된 지 1년 후에 바러드의 수비대장이자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 르헤데이 페렌츠의 아들인 르헤데이 라슬로와 재혼했고, 1664년 르헤데이 라슬로가 사망한 뒤 후녀디 카운티의 최고 영주 카피 죄르지와 삼혼해 딸 카피 보르바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