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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치 죄르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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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2대 공
라코치 죄르지 1세
I. Rákóczi György
파일:라코치 죄르지 1세.jpg
이름 라코치 죄르지
(Rákóczi György)
출생 1593년 6월 8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세렌치(현재 헝가리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 주 세렌치)
사망 1648년 10월 11일 (향년 55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줄러페헤르바르(현재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630년 12월 1일 ~ 1648년 10월 21일
배우자 로란피 주잔나 (1616년 결혼)
자녀 라코치 사무엘, 라코치 죄르지 2세, 라코치 지그몬드, 라코치 페렌츠
아버지 라코치 지그몬드
어머니 게렌디 언너
형제 라코치 에르제베트(이복 형제), 라코치 지그몬드, 라코치 팔
종교 칼뱅파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2대 .

2. 생애

1593년 6월 8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세렌치에서 라코치 지그몬드와 게렌디 언너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라코치 에르제베트[1], 라코치 지그몬드[2], 라코치 팔[3]이 있었다. 1605년 아버지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 루돌프 2세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킨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거점으로 삼은 커셔의 궁정으로 보내졌다. 1606년 12월 21일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사망한 후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고, 1607년 2월 11일에 아버지가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된 뒤에도 고향에 그대로 남았다.

1608년 3월 5일 아버지가 퇴위한 뒤 트란실바니아 공에 등극한 바토리 가보르 치세 때인 1615년 보르소드 카운티의 이슈판(Ispán, 군대 수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뒤이어 오노디의 왕실 고기 담당관 및 수비대장에 선임되었다. 1616년 4월 18일 젬플렌의 지주 로란피 미하이의 딸인 로란피 주잔나와 결혼했다. 주잔나는 지참금으로 샤로슈퍼터크 저택을 받았는데, 이 저택은 나중에 문키시와 함께 라코치 가문 영지 중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619년 베틀렌 가보르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헝가리 국왕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인 페르디난트 2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최초로 합류한 트란실바니아 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같은 해 상 헝가리 방면군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베틀렌 가보르는 을 포위하면서, 그에게 후방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의 요청으로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한 폴란드군 10,000명에게 패배해 트란실바니아 각지가 약탈당하는 걸 막지 못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틀렌 가보르는 어쩔 수 없이 1619년 11월 23일 빈 포위를 중단하고 트란실바니아로 귀환했다.

이후 상 헝가리 사령관 직위에서 물러났지만 왕실 고문으로 선임된 뒤 베틀렌 가보르 치세 내내 그를 보좌했다. 1625년 베틀렌 가보르의 사절로서 그의 새 신부가 될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를 맞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626년 1월 22일 베를린에서 라코치 죄르지가 대리 신랑을 맡은 채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한 카타리나는 그 해 3월 2일 커셔에서 열린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했다. 1629년 11월 15일 베틀렌 가보르가 과로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가 당초 맺은 결혼 계약에 따라 트란실바니아 여공이 되었지만,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를 맡은 베틀렌 가보르의 동생 베틀렌 이슈트반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때 그는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의 지지를 받으면서 기회를 엿봤다.

1630년 8월, 치사키 이슈트반이 카타리나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자, 베틀렌 이슈트반은 라코치 죄르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코치 죄르지가 하이두크를 동원해 진군하기 직전인 1630년 9월 21일, 카타리나는 심각한 사치를 연이어 규탄당하고 사임 압박을 받은 끝에 시기쇼아라에서 열린 의회 앞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다만 의회는 카타리나가 차기 공을 정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 후 베틀렌 이슈트반이 트란실바니아 공을 맡았지만, 라코치 죄르지가 이에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누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든 상관이 없었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에 카타리나가 둘 중 한 사람을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정해야 했는데, 베틀렌 이슈트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그녀는 12월 1일 라코치 죄르지의 임명장만 읽음으로써 그를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베틀렌 이슈트반은 하이두크와 세케이인의 지원을 받은 라코치 죄르지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물러섰다.

이리하여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된 라코치 죄르지는 대지주의 손에 넘어간 국고 재산을 회수하기 위해 그들의 불법 행위를 적발해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을 라코치 가문의 재산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확보한 재산을 토대로 영지 내에 여러 성과 요새를 건설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늘어나자, 당초 물러섰던 베틀렌 이슈트반은 이를 이용해 지지 세력을 끌어들였다. 1636년, 라코치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이 요구한 공물 납부를 거부하면서 관계가 악화하자, 그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부다의 후세인 파샤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세인 파샤는 차우시 알라를 라코치 죄르지에게 사절로 보내 오스만 파디샤에게 복종하고 퇴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라코치 죄르지는 차우시 알라를 체포하고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에 후세인 파샤는 베키르 베이가 이끄는 2~3만 명의 오스만군을 트란실바니아로 파견했다. 라코치 죄르지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일으켰고, 1636년 10월 스잘론타(현재 루마니아 나기스잘론타)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이 소식을 접한 후세인 파샤는 라코치 죄르지와 화해하기로 했다. 이후 맺어진 사스바로시 조약에 따르면, 오스만 파디샤는 라코치 죄르지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되는 걸 인정했고, 라코치 죄르지는 그 대가로 베틀렌 이슈트반을 사면하기로 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트란실바니아는 물론 유럽에서 큰 명예를 얻었다.

1637년,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가 자기 아들 이오안 루푸를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 삼기 위해 현재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라코치 죄르지 1세는 휘하 장군 케메니 야노시에게 수천 명의 세케이인 보병 및 기병대를 맡겨 마테이 바사라브를 돕도록 했다. 1637년 11월, 케메니 야노시의 부대는 동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마테이 바사라브의 군대와 연합한 뒤 바실레 루푸를 격파해 몰다비아로 축출했다. 하지만 바실레 루푸는 포기하지 않고 2년 후에 다시 침공헀지만, 마테이 바사라브는 1639년 12월 6일 부쿠레슈티 인근에서 라코치 죄르지가 파견한 트란실바니아 기병대의 도움으로 재차 격파했다. 그 후 바실레 루푸와 마테이 바사라브는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중재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고, 마테이 바사라브는 자기를 도와준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매년 5,000 탈러와 말 세금을 바치고 그를 자신의 주권자로 인정했다.

1644년, 라코치 죄르지는 스웨덴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트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164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와 동맹을 맺었고, 브르노 인근에서 스웨덴군과 합류해 황제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그러나 30년 전쟁에 봉신이 개입하는 걸 원하지 않은 오스만 궁정이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자, 라코치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3세와 린츠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그는 죽을 때까지 어버우, 베레그, 보르소드, 웅, 젬플렌 카운티의 주권자로 군림할 수 있었고, 그의 자녀들은 사볼츠, 사트마르 카운티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헝가리에서 개신교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하는 걸 허락받았고, 농민들에게 교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영주는 농노가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의 신부를 배치하는 걸 금지했다. 트란실바니아 본토는 그의 치세 동안 대체로 평화로웠으며, 인구가 증가했고, 무역과 산업이 번창했으며,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종교의 자유가 대체로 인정되었다. 다만 유니테리언안식일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상대로 재산을 몰수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등의 박해를 가했다.

1648년 10월 11일에 사망했고,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라코치 죄르지 2세가 공위를 물려받았다.

3. 가족



[1] 1588 ~ 1604, 상 헝가리 방면군 총사령관 드러게트 발란트의 부인[2] 1595 ~ 1620, 라코치 가문의 영지를 형제들과 함께 경영했다.[3] 1596 ~ 1636, 사로스 및 토르나 카운티의 최고 영주이자 최고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