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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1:39:39

바토리 크리스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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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바토리 이슈트반
바토리 크리스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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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바토리 크리스토프
Báthory Kristóf
파일:바토리 크리스토프.jpg
이름 바토리 크리스토프
(Báthory Kristóf)
출생 1530년
동헝가리 왕국 실라지솜요(현재 루마니아 심레우실바니에이)
사망 1581년 5월 27일 (향년 50~51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쥘러페헤르바르(현재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보이보드
1576년 1월 14일 ~ 1581년 5월 27일
배우자 카타지나 다니츠카, 보치커이 에르제베트
자녀 발타자르, 미클로시, 지그몬드, 그리셀다
아버지 바토리 이슈트반
어머니 텔레그디 커털린
형제 미클로시, 언드라시, 이슈트반, 에르제베트, 언너[1], 안제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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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보이보드. 트란실바니아 인 형제 바토리 이슈트반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그를 대신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다스렸다.

2. 생애

1530년경 동헝가리 왕국 실라지솜요 성에서 헝가리 왕국 바토리 가문의 가주이며 서포여이 야노시의 지지자인 바토리 이슈트반과 헝가리 왕실 재무관 텔레그디 이슈트반의 딸인 텔레그디 커털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153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삼촌인 언드라시와 친적 나다시디 타마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젊은 시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을 방문했고, 카를 5세의 궁정에서 시종으로 일했다. 1550년대 후반에 어린 아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대신해 동헝가리 왕국의 섭정을 맡은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의 고문이 되었고, 1557년 프랑스로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를 설득해 동헝가리 왕국에 병력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59년 11월 15일 이자벨라 야기엘론카가 사망한 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친정을 시작했다. 이때 크리스토프는 지그몬드의 고문으로서 역할을 이어갔다. 1562년 3월 4일, 멜치오르 벌러셔(Melchior Balaša)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던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허더드(현 루마니아 호도드)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세케이푈드 주민들은 발러셔의 선동에 힘입어 세금 면제 등 특권을 회복하고자 봉기했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이 상황에 절망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피신하려 하자, 크리스토프는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며 왕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라고 설득했다. 지그몬드는 그의 설득에 따라 토벌대를 파견해 5월에 세케이푈드 봉기를 진압했고, 주동자들은 꼬챙이에 꿰뚫리거나 사지가 절단되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군 사령관을 맡았고, 1565년 후슈트를 포위한 막시밀리안 2세의 사령관 라자루스 폰 슈벤디를 격파했다.

1571년 3월 14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한 뒤,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는 5월 25일 그의 형제 바토리 이슈트반을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출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크리스토프를 너지버러드(현재 루마니아 오라데아)의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1573~1575년 친 합스부르크파 지도자 가스파르 베케시(Gáspár Bekes)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바토리 이슈트반과 함께 이에 맞섰고, 1575년 7월 9일 케렐뢰센트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1575년 12월 15일, 바토리 이슈트반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테판 바토리로 등극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의 군주라는 칭호를 채택한 뒤, 1576년 1월 14일에 크리스토프를 트란시랍니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오스만 사절단은 그해 7월에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크리스토프의 보이보드 취임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그가 국경을 따라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만 스테판 바토리는 트란실바니아 행정을 별도로 감독하기 위해 크라쿠프에 트란실바니아 총리실을 설립하고 베르제비치 마르톤을 트란실바니아 총리로 선임해 크리스토프와 상호 협력하도록 했다.

1576년, 유니테리언 설교자들이 파르티움과 세케이푈트에서 엄연한 인간인 예수를 신으로 받드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트란실바니아 유니테리언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인 페렌츠 다비드는 1578년 가을에 공개적으로 이들을 지지했다. 크리스토프는 페렌츠 다비드에게 분쟁을 일으키는 짓을 그만두라고 권고했지만, 다비드가 이를 따르지 않자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를 연 뒤 다비드를 데바 성 감옥에 가뒀다. 또한 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톨릭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스테판 바토리의 시도를 지지했으며, 1579년 5월 5일 콜로즈바르(현재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예수회에 영지를 부여했다.

1581년 초, 크리스토프는 두번째 아내 보치커이 에르제베트가 사망한 직후 중병에 걸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코스탄티니예에 퍼지자, 오스만 대재상 코차 시난 파샤는 크리스토프가 추방했던 헝가리 귀족 마르카지 팔에게 트란실바니아 공에 오르는 걸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의회는 미르카지 팔이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되는 걸 막기 위해 크리스토프가 죽기 전에 그의 아들 바토리 지그몬드를 보이보드로 선출했다. 크리스토프는 1581년 5월 27일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그 악명 높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