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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가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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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8대 공
바토리 가보르
Báthory Gábor
파일:바토리 가보르.jpg
이름 바토리 가보르
(Báthory Gábor)
출생 1589년 8월 15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지바러드[1]
사망 1613년 10월 27일 (향년 24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지바러드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608년 3월 7일 ~ 1613년 10월 22일
아버지 바토리 이슈트반
어머니 베베크 즈즈산나
형제 바토리 언너
배우자 호르바트 언너
종교 가톨릭칼뱅교회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8대 .

2. 생애

1589년 8월 15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지바러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바토리 이슈트반은 바토리 언드라시와 바토리 발타사르의 형제이자, 트란실바니아 공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스테판 바토리의 조카로, 바라드의 수비대장을 역임했다. 어머니 베베르 즈즈산나는 펠소치의 헝가리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4명의 형제가 먼저 태어났지만 전부 태어난지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후에도 세 형제가 태어났지만 두 형제는 유년기를 넘기지 못했고, 오직 바토리 언너[2]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1592년 여름 바토리 지그몬드가 아버지를 바라드 수비대장에서 해임한 뒤, 그의 가족은 실라지솜요(현재 루마니아 심레우실바니에이)에 있는 바토리 가문의 성으로 이사했다.

1594년 8월, 바토리 지그몬드가 자신에게 대적한 바토리 발타사르를 처형했다. 형제가 살해된 것에 경악한 바토리 이슈트반은 가족을 실라지솜요에 남겨두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고, 당시 다섯 살이었던 바토리 가보르는 어머니와 갓 태어난 여동생 안나와 함께 투옥되었다. 이슈트반과 발타사르의 형제이며 당시 추기경으로서 폴란드에 머물렀던 바토리 언드라시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이들이 풀려나도록 바토리 지그몬드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이에 응해 특사를 보냈고, 바토리 지그몬드는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바토리 가보르의 가족을 풀어줬다. 이후 이들은 폴란드로 가서 바토리 이슈트반과 합류했지만, 어머니 즈즈산나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1595년 말에 사망했다.

1599년 초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바토리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출되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형제 언드라시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갔고, 바토리 가보르와 언너도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러나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하이 2세가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해 세케이인의 지원에 힘입어 바토리 언드라시를 격파했고, 언드라시는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하던 중 세케이인에게 붙잡혀 피살되었다. 미하이 2세는 여세를 이어가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했고, 바토리 이슈트반은 또다시 코바르(현재 루마니아 레메테아 치오아룰루이)로 피신한 뒤 그곳에 은신했다가 1601년 2월 21일에 사망했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은 바토리 가보르와 언너 남매는 아버지의 사촌이며 자볼츠의 판사인 바토리 이슈트반의 보호를 받았고, 아버지의 재산 대부분을 잃었다. 실라지솜요는 트란실바니아 재무부에 압류되었고, 샤트마르, 샤볼치, 크라스나 주에 흩어져 있던 영지는 먼 친척인 샤니슬로피 페테르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아들이 없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의 정성어린 양육을 받았고, 저명한 헝가리 학자 체글레디 야노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바토리 가보르는 본래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기를 아들처럼 대하는 바토리 이슈트반의 영향을 받아 칼뱅교회로 개종했다. 일설에 따르면, 성장한 그의 힘은 무척 세서 맨손으로 말발굽을 부술 정도였다고 하며, 나중에 영지를 물려받게 되면 영지 내 가톨릭, 루터교회, 유니테리언을 추방하고 오로지 칼뱅교회만 군림하게 할 거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1604년, 보치커이 이슈트반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 루돌프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보치커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바토리 가보르를 커셔에 있는 보치커이의 궁정으로 보냈다. 당시 16살이었던 바토리 가보르는 1605년 2월 초 샤로스파타크 인근에서 황제군과 보치커이의 군대 간의 전투에 참여했다. 보치커이는 1605년 2월 21에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4월 20일에는 헝가리의 공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영토에는 트란실바니아 대부분과 파르티움, 상 헝가리가 포함되었다.

1605년 7월 25일, 바토리 가보르를 잘 키워줬던 바토리 이슈트반이 사망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영지 대부분을 바토리 가보르에게 물려줬다. 이후 보치커이는 상 헝가리 방면군 총사령관 드라가트 발린트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1605년 11월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랄라 메흐메트 파샤와 회동하도록 했다. 이때 그는 만약 드라가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바토리 가보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밝혔다고 전해진다. 젊은 귀족과 군 장교들도 보치커이의 의중을 따라 바토리 가보르를 지지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친척인 트란실바니아 총리 카타이 미하이와 재무관 임레피 야노시도 바토리 가보르를 지지했다.

1606년 12월 29일,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커셔에서 사망했다. 가기들을 귀족으로 봉한 것 때문에 보치커이를 존경했던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 무리는 카타이 미하이가 보치커이를 독살했다고 믿고, 1607년 1월 12일 커셔 광장에서 카타이를 공격해 사지를 절단해 죽였다. 카타이가 비참하게 살해된 것에 위협을 느낀 그는 오스만 제국 영내로 피신한 뒤, 오스만 제국 대재상 쿠유주 무라트 파샤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607년 2월 12일에 라코치 지그몬드를 새 공으로 선임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일단 라코치 지그몬드의 집권을 인정하기로 하고, 그 대신 1595년에 몰수당한 아버지와 삼촌의 영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바토리 가보르는 예수회를 추방한 것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귀족들에게 접근해 자기를 지지해주면 가톨릭 세력을 증진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루돌프 2세의 고문들에게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가톨릭 국가로 삼을 의향이 있으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혹한 루돌프 2세는 6월에 그를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루돌프 2세의 권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607년 가을,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사망한 뒤 급여를 받지 못한 하이두크가 봉기했다. 그들은 드루게트 발린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지만, 드러게트는 단호히 거부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그해 10월 말에 군대를 소집한 뒤, 트란실바니아를 하이두크의 만행으로부터 지켜주겠따고 선언하고 상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는 다시 루돌프 2세의 고문들에게 접근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헝가리 왕국에 귀속시킬 테니 자기를 보이보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라코치 지그몬드와 협상한 끝에, 하이두크와 협상해 주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넘겨받기로 했다.

1608년 2월 6일, 바토리 가보르는 하이두크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파르티움에 하이두크가 거주할 마을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고, 하이두크는 트란실바니아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이단자우상숭배자를 추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뒤이어 임레피 야노시를 라코치 지그몬드에게 보내 조속히 퇴위한다면 라코치가 상 헝가리에서 중요한 영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라코치 지그몬드는 1608년 3월 5일 콜로즈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퇴위를 선언했고, 바토리 가보르는 3월 7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옹립되었다. 그는 3월 14일에 트란실바니아 공 선출을 수락하면서, 공국의 법률과 귀족들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3월 31일, 그는 콜로즈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의회는 그에게 포가라스와 코바르를 세습 영지로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트란실바니아 공이 된 바토리 가보르는 파르티움에 하이두크를 정착시키기 시작했고, 하이두크에게 밀려난 이들을 하이두뵈쇼르메니로 이주시켰다. 당시 3만 명에 달했던 하이두크 군인들이 그의 치세 동안 정착할 토지를 확보했다. 한편, 그는 왈라키아 공국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트란실바니아 공의 종주권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를 무력으로 폐위하려 했지만, 트란실바니아 의회와 트란실바니아 색슨 도시 브라쇼브의 시장 바이스 미하이가 만류했다. 라두 10세는 5월 31일 바토리 가보르가 파견한 사절들 앞에서 앞으로 트란실바니아 공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7월 13일에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모빌라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8,000플로린의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7월, 바토리 가보르는 브라쇼브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무척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 술에 매일 취했고, 젊은 여성들을 유혹했으며, 자신에게 아내를 제공해줄 의향이 있는 귀족들을 승진시켰다. 이에 시민들은 그를 새로운 사르다나팔루스[3]라고 비난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베틀렌 가보르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오스만 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고, 임레피 야노시를 커셔로 보내 내치를 다스리게 했다. 1608년 8월 20일, 임레피 야노시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의 사절단과 협의한 끝에 2개의 조약에 서명했다. 첫번째 조약은 합스부르크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하이두크의 특권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2번째 조약은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인정하지만, 헝가리 왕국에서 이탈하는 걸 금지했다. 그 해 11월, 베틀렌 가보르는 코스탄티니예에서 돌아온 뒤 바토리 가보르의 선출을 인정하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의 칙령을 가져왔다. 여기에 오스만 궁정은 트란실바니아가 3년 동안 공물을 바치는 걸 면제하기로 했다. 한편, 정교회 사제들은 자기들을 농노처럼 대하는 헝가리 귀족들에게 반감을 품고, 바토리 가보르에게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09년 6월 지주들의 세금과 요역 요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기로 했다. 또한 그들에게 공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도 부여했다. 그해 10월, 의회는 일부 귀족 영지에 대한 세금 면제를 제공했던 모든 보조금을 폐지했다.

이렇듯 통치 초기는 무난하게 흘러갔지만, 바토리 가보르는 이내 암살 위기에 직면했다. 1610년 3월 10일에서 11일 밤, 바토리 가보르가 세크에 있는 트란실바니아 총리 켄디 이슈트반의 집에서 취침했을 떄, 침입자가 침실로 들어와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바꿔 귀순하면서, 켄디와 가톨릭 귀족 여러 명이 자기를 고용했다고 자백했다. 켄디는 곧바로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망명했지만, 공범들은 모조리 체포되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3월 24일에 공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임레피 야노시를 총리로 선임했고, 베틀렌 가보르를 세케이인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이들이 바토리 가보르를 해치려 한 동기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하이두크 군대가 많은 마을을 파괴한 원흉이 바토리 가보르에게 있다고 여기고 그를 죽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반면 칼뱅파 측 기록은 가톨릭 귀족들이 칼뱅교회를 신봉하는 왕자를 없애고 싶어했다고 주장했다. 바토리 가보르가 세케이인 대장 코르니스 볼디자르의 젊은 아내를 유혹했기 때문에 암살 음모가 벌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합스부르크 헝가리를 휩쓸고 헝가리 왕국을 자신의 통치하에 재통합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와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모빌라에게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에게 100,000 플로린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두 공국의 군주들은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고, 색슨족은 10,000 플로린만 지불했다. 이에 화가 난 그는 보복을 결심했다. 1610년 12월 10일, 그는 군대를 이끌고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세벤(현재 루마니아 시비우)로 향했다. 그는 군인 50명만 대동하여 도시에 입성했고, 군대는 외곽에 주둔하게 했다. 하지만 성문이 열려있는 동안, 그의 군대는 예쌍치 못하게 진군해 도시를 별다른 저항없이 접수했다. 그 후 의회는 12월 17일 세벤에 소집된 뒤 이곳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새 수도로 선언하고, 귀족들이 부동산을 취득하는 걸 허가했으며, 칼뱅파 사제들이 세벤의 루터파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하는 걸 허락했다. 이리하여 세벤의 색슨족은 그동안 누렸던 특권을 크게 제약당했다.

1610년 12월 20일, 바토리 가보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왈라키아로 진격해 5일간 샤라 바르세 일대를 약탈한 뒤 눈덮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 본토로 진입했다. 미처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 라두 10세는 트라고비슈테를 떠나 몰다비아로 피신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용병들은 왈라키아를 잔인하게 약탈했다. 교회와 수도원이 모조리 약탈당했고, 납 지붕이 녹여져서 총알로 제작되었으며, 수많은 무덤이 도굴당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11년 1월 26일 자신을 왈라키아의 공으로 칭하는 헌장을 반포했으며,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에게 자기가 왈라키아를 통치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햇으며, 하이두크의 급여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흐메트 1세는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라두 9세를 선임하기로 하고, 3월에 바토리 가보르에게 사절을 보내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이에 분노했지만, 감히 강대국인 오스만 제국의 의사를 거역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1611년 6월, 라두 10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9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바토리 가보르는 재차 군대를 동원해 라두 10세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이스 미하이가 바토리 가보르를 새로운 네로라고 성토하며 브라쇼브 주민들을 선동해 반기를 들었다. 바토리 가보르는 하이두크 대장 나지 언드라시를 파견해 브라쇼브를 포위하게 했지만, 바이스는 나지에게 뇌물을 줘서 포위를 해제하도록 했다.그러는 사이, 라두 10세는 바토리 가보르가 왈라키아에 행한 악행을 복수하려는 보야르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르기로 하고, 대규모 병력을 소집한 뒤 7월에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프레지미르로 진격했다. 라두 10세가 쳐들어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토리 가보르는 급히 브라쇼브로 후퇴하려 했지만, 라두 10세는 산을 넘는 험난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격해 7월 9일 브라쇼브와 산페트루 마을 사이의 평야에서 따라잡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왈라키아인과 라두 10세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된 폴란드 흉갑기병들은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고, 가보르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세벤으로 도주했다.

한편, 마티아스는 왈라키아 공국을 헝가리 왕국의 영역으로 여겼기에, 바토리 가보르가 왈라키아를 공격한 것을 배신으로 여기고 응징하기로 했다. 상헝가리의 총사령관 포르가흐 지그몬드는 마티아스의 회유에 넘어가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나지와 그를 따르는 하이두크는 포르가흐를 지지했지만, 대다수 개신교 귀족들은 침공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대부분의 트란실바니아인들은 침공을 불법 행위로 여겼고, 오직 색슨족만이 포르가흐를 지원할 의향이 있었다. 그 후 포르가흐와 라두 10세는 세벤을 포위했지만 공략하지 못했고, 바토리 가보르는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해 9월, 나지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포르가흐를 배신하기로 마음먹고, 포르가흐가 자기에게 보낸 지원군을 섬멸했다. 여기에 라두 10세도 오스만 제국군이 라두 9세를 복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왈라키아로 돌아갔다.

나지와 라두 10세가 이탈해 버리자, 포르가흐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수백 명을 생포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는 바라드로 진군해 상 헝가리로 쳐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에 상 헝가리의 백국과 도시의 대표자들은 바토리 가보르와 협상했고, 12월에 토카이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서, 바토리 가보르는 헝가리 왕실 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농노들이 하이두크에 가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 색슨족과 협정을 맺을 때까지 조약을 비준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바토리 가보르는 하이두크 지휘관 게치 언드라시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자기를 도와준 것에 감사를 표하도록 했다. 그러나 게치는 브라쇼브에서 바이스 미하이와 협정을 맺고, 1611년 11월 코스탄티니예로 간 뒤 바토리 가보르를 폐위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궁정은 이를 받아들여 바토리 가보르를 게치 언드라시로 교체하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까맣게 모른 채, 바토리 가보르는 브라쇼브로 쳐들어가서 1612년 3월과 4월에 요새 7개를 점령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5월에 브라쇼브에 항복하라고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자기를 폐위하고 게치 언드라시를 옹립하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된 바토리 가보르는 극도로 분노했고, 6월에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한 뒤 오스만 제국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 나지 언드라시는 게치 언드라시에게 조만간 바토리 가보르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바토리 가보르는 1612년 8월에 나지 언드라시를 처형했다. 또한 베틀렌 가보르는 바토리 가보르가 자기를 의심하는 걸 눈치채고 9월 12일에 오스만 제국 영내로 도주한 뒤 티미쇼아라, 부다, 카니자의 베이들을 접견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오스만 대재상 나수흐 파샤와 연락했다. 1612년 10월 14일, 바토리 가보르는 바이스와 게치의 군대를 습격해 대승을 거뒀다. 바이스는 전장에서 체포된 뒤 참수되었고, 게치는 브라쇼브로 피신했다. 이후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게치와 베틀렌 가보르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반란에 가담한 이들 중 항복한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사절을 프레스부르크로 파견했다. 1612년 12월 24일, 프레스부르크에서 마티아스와 바토리 가보르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바토리 가보르는 마티아스를 주권자로 받들기로 했고, 마티아스가 오스만 제국에 맞설 때 충실히 따르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마티아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바토리 가보르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613년 4월 12일, 양자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마티아스는 바토리 가보르의 트란실바니아 통치에 대한 세습권을 인정했으며, 바토리 가보르는 마티아스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다시 약속하면서, 색슨족과 그들의 동맹군, 게치 언드라시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게치는 사면을 받아들이고 바토리 가보르에게 귀순한 뒤 경호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마티아스는 사절을 트란실바니아로 보내 색슨족에게 바토리 가보르에게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나중에 프레스부르크 조약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는 격노했고, 대재상 나수흐 파샤의 설득에 따라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1613년 8월, 오스만 제국군은 베틀렌 가보르를 앞세워 코스탄티니예로 출진했다. 이때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9세와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9세 톰샤도 아흐메트 1세의 지시에 따라 오스만 제국군의 원정에 참여했고, 크림 칸국의 칸 차니베크 기라이도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침공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압도적인 군세로 밀려오는 적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트란실바니아 본토에서 도망쳐 바라드로 철수한 뒤, 마티아스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오스만 제국군 총사령관 스켄더르 파샤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10월 21일에 바토리 가보르를 폐위하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이를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10월 23일 의회는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게치 언드라시는 또다른 경호대 지휘관 아바피 미클로시를 설득해 바토리 가보르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들은 바토리 가보르의 힘이 무척 세서 함부로 시도했다간 잘못 될 수 있다고 여기고, 교묘한 책략을 세우기로 했다. 10월 27일, 아바피는 바토리 가보르에게 마티아스가 파견한 군대가 그와 대면하길 원하니,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자고 권유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차를 타고 아바피의 군영에 들어가서 마티아스의 군대를 어떻게 맞이할지를 논의한 후 바라드로 돌아갔다. 그때, 아바피의 지시를 받은 기병들이 마차를 공격해 좁은 골목으로 몰아갔다. 바토리 가보르는 마차에서 뛰어내렸지만 총에 맞았다. 그는 페체 강 인근에 있던 버드나무로 피신한 뒤 저항을 시도했지만, 하이두크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서 결국 피살되었다. 하이두크 보병대장 나기 발라즈는 바토리 가보르의 시신을 먼저 나지엑세드로 보냈다가, 다시 니르바토르로 옮겼다. 그의 유해는 니르바토르에 있는 교회의 지하 납골당에 묻히지 않은 채 누워 있다가, 1628년이 되어서야 베틀렌 가보르의 명령으로 매장되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07년 헝가리 귀족 호르바트 죄르지와 보치커이 이슈트반의 조카였던 보츠커이 크리스티나의 딸인 호르바트 안나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호르바트 안나는 남편이 피살된 후 코바르에 있는 아버지의 요새로 피신했고, 1618년 가보르를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 후 해외로 망명했다가 바토리 가보르가 사망한 뒤 귀국하여 베틀렌 가보르의 정적이 된 켄디 이슈트반과 재혼했다.


[1] 현재 루마니아 오라데아[2] 1594 ~ 1636, 마녀재판을 3차례나 받았지만 전부 무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3] 당시 아시리아의 마지막 국왕으로 알려진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