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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폴란드-리투아니아 제5대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Władysław IV Waza | |||
출생 | 1595년 6월 9일 | ||
폴란드-리투아니아 워브주프[1] (現 폴란드 마워폴스키에주 올쿠시군 볼브롬 자치시 워브주프) | |||
사망 | 1648년 5월 20일 (향년 52세) | ||
폴란드-리투아니아 메레츠 (現 리투아니아 알라투스주 바레나구 메르키네) | |||
재위기간 |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 ||
1632년 11월 8일~ 1648년 5월 20일 | |||
루스 차르 | |||
1610년 7월 19일~ 1613년 2월 2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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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브와디스와프 바사 (Władysław Waza) | ||
아버지 | 지그문트 3세 바사 |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아나 | ||
형제자매 | 안나 마리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얀 알베르트, 카롤 페르디난트, 알렉산데르 카롤, 안나 카타르치나 콘스탄차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 (1637년 결혼 / 1644년 사망) | ||
곤차가느베르의 마리아 루이사 (1645년 결혼) | |||
자녀 | 지그문트 카지미에시, 마리아 안나 이자벨라, 브와디스와프 콘스탄티[2] | ||
종교 | 기독교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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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문장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폴란드 역사상 유일하게 짧게나마 러시아의 차르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595년 6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 크라쿠프 근교 워브주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의 딸인 아나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지그문트 3세와 아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유년기에 사망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하루의 전반부를 침대에서 보냈다. 그는 누운 채 아침 미사를 드렸고, 점심을 먹은 후에야 일어나 공무를 보거나 사냥을 나갔다.브와디스와프는 일찍부터 왕위 계승자로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군사와 정치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폴란드어 외에도 스웨덴 사람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웨덴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어머니 아나가 1598년에 사망한 뒤 시녀인 우르술라 마이에린의 보살핌을 받을 때 독일어에 능통한 그녀의 영향으로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1611년부터 공무에 익숙해지기 위해 세임에 참석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15세부터 세임에 참석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예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오페라를 무척 좋아해 유럽 각지의 저명한 작곡가들을 데려왔고, 그가 세운 극장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정원에도 관심이 있었다. 미술에도 열정이 가득해,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생전에 그렸던 그림을 스페인 궁정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구입했다. 또한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사냥이었다. 그는 바퀴가 달린 작은 집을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장소에 텐트처럼 설치하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곤 했으며, 배에서 낚시하는 것도 좋아했다.
2.2. 루스 차르
1609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9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 6,500 ~ 6,800명은 국경을 넘어 루스 차르국으로 진격해 7월 4일 클루시노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연합군 35,000명을 상대로 적병 5,000명을 사살하는 동안 불과 400명만 상실하는 대승을 거둔 뒤 9월 29일에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그후 루스 차르 바실리 4세는 7명의 보야르들에게 축출되었고,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보야르들과 협상한 끝에 그들이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새 차르로 옹립하는 걸 받아들이게 했다.1610년 8월 27일, 브와디스와프는 모스크바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지기스문도비치'로서 차르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후 이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이 루스 차르국 각지에 배포되었다. 보야르들은 그를 차르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정교회 개종, 루스 차르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 가톨릭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제시했고, 브와디스와프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지그문트 3세는 아들이 정교회로 개종하는 걸 격렬하게 반대했고, 정교회를 가톨릭으로 강제 전환시키고 가톨릭을 수용하지 않는 귀족 및 백성들을 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폴란드군의 잔혹행위가 빗발치자, 1611년 쿠즈마 미닌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폴란드 점령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군은 보급로를 끊고 유격전을 벌이는 적에게 시달리는 바람에 식량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졌다. 급기야 2천 명의 병사들이 봉급을 받지 못한 것에 분개해 폭동을 일으키자, 결국 폴란드 수뇌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몰렌스크로 철수했다. 1617년, 브와디스와프는 스몰렌스크 일대에서 루스군을 상대로 일진일퇴를 벌이고 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 장군과 합세한 뒤 모스크바를 향한 공세를 기획했다. 그 해 4월 4일, 그는 루스 차르로서 아버지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와 영구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 및 크림 칸국과 투쟁을 벌일 것이며, 브란스크, 쿠르스크, 뉴얼, 노브고로드 시에비에르스키, 포체프, 푸티블, 릴스크, 시베츠, 스몰렌스크, 스타로두브 및 벨리츠를 폴란드에 넘기며,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1617년 9월, 브와디스와프와 코드기에비츠는 도로호부슈를 포위해 한달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10월 11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뒤이어 10월 28일에 뱌지마 시의 항복을 받아내고 모스크바 인근에 이르렀으나, 모스크바 수비대와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하고 12월에 추위를 피해 철군했다. 1618년 12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스몰렌스크를 점거하는 것을 인정받는 대가로 루스 차르국의 독립이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차르 직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2.3.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620년 9월 10일,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 이아시 인근의 체초라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명장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와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고무된 오스만 파디샤 오스만 2세는 1621년 봄 친히 12만 대군을 이끌고 코스탄티니예를 출발해 폴란드로 진격했다. 이에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2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이를 막으러 진군했고, 브와디스와프 역시 10,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그와 합세했다. 여기에 카자크 지휘관 페트로 코나세비치가 이끄는 25,000명도 가세했고, 국경 수비대가 규합하면서 총 병력은 63,000명에 이르렀다.브와디스와프 왕자는 뒤이은 호틴 전투에 참전해 솔선수범한 모습을 보이면서 귀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류머티즘 질환에 시달리고 있어서 전투에 직접 뛰어들지 못했지만, 진영을 떠나지 않고 모든 회의에 참석했고, 병사들을 일일이 격려하고 규율을 관리했으며, 실책을 저지른 장수들을 엄중히 질책했다. 9월 24일 코드키에비츠가 진중에서 병사한 뒤 스타니스와프 루보미르스키가 지휘권을 물려받자 즉시 이를 받아들이고, 장수들에게 코드키에비츠에게 복종했던 것처럼 루보미르스키에게도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이후 루보미르스키는 브와디스와프와 함께 오스만군의 공세를 연이어 물리쳤고, 오스만군은 9월 28일 이후 공세를 중단했다. 양측은 10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스만 제국이 몰다비아 공국을 점유하는 것을 인정하고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호틴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식했다.
2.4. 폴란드 행정관
1619년, 지그문트 3세는 아들에게 루스 차르국과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자국에 편입된 영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다. 1621년에는 프로이센 공국의 오시에크와 미엥질레시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며, 1623년에는 야보로프와 후류비에슈프의 관리관으로 발탁되었다. 1627년 솔렉의 스타로스타로 선임되었으며, 1630년 크르제피체의 스타로스타를 역임했다. 여기에 리투아니아에서는 보리소프 및 메레츠 지방을 영지로 수여받았다.1624년, 브와디스와프는 30세의 나이에 스노펙(Snopek)이라는 가명을 쓰고 이탈리아 로레토에 순례하고자 서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 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궁정을 방문했고, 뒤이어 브라반트에 들러 스페인의 명장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도리아가 브레다 요새를 함락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이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머물렀을 때 루벤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으며, 로마로 가서 1625년 1월 19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우르바노 8세로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검과 모자를 수여받았다. 브와디스와프는 서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여러 국가의 정치 체제와 사회 풍습, 경제적 관계, 군대 장비 및 전쟁 수행 방법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분석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수년간 정치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 않고, 갈수록 쇠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는 역할만 수행했다.
2.5.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국왕
2.5.1. 즉위
1632년 4월 30일, 아버지 지그문트 3세가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폴란드 귀족들 역시 그를 왕이 될 재목으로 일찌감치 여기고 있었기에, 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이 되는 걸 가로막을 경쟁자는 없었다. 그래서 1632년 9월 27일에서 11월 13일까지 이어진 선거 대회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선거로 일컬어졌다. 브와디스와프의 이복 형제 4명 모두 그를 왕으로 추대했고, 투표에 참여한 폴란드 귀족 2,847명과 리투아니아 귀족 696명도 그에게 만장일치로 투표했다. 11월 13일, 그는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신이 결혼하기 전에 상원에 결혼 계획을 제출하겠다고 서약했다.대관식은 1633년 1월 31일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가 1월 초에 병에 걸리는 바람에 연기되었다. 그는 2월 3일이 되어서야 크라쿠프에 도착했고, 2월 4일에는 전임 국왕 지그문트 3세와 콘스탄차 왕비의 유해를 안장했다. 2월 6일, 그는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얀 벵지크의 주관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2.5.2. 외치
2.5.2.1. 폴란드 - 러시아 전쟁(1632 ~ 1634)
디올리노 평화 협약이 만료되기도 전인 1632년, 루스 차르국이 동부 국경을 공격했다. 그들은 폴로츠크와 오르샤를 점령한 뒤 스몰렌스크를 압박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즉위식을 거행한 뒤 스몰렌스크를 구하려 했지만, 류터티즘이 재발하는 바람에 출진이 지연되었다. 병이 쉽사리 낫지 않자, 그는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인 크시슈토프 라지비우를 지휘관으로 삼고 스몰렌스크를 구하게 했다.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지그문트 3세 시기 스웨덴 왕국, 오스만 제국, 루스 차르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피폐해져 있었기에, 대규모 무장병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수의 병력이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남동쪽 국경을 지키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기에, 3,000명 가량의 병력만 스몰렌스크로 파견할 수 있었다. 반면 스몰렌스크 인근에 주둔한 루스군은 30,000명에 달했고, 대포는 150문이었다. 이에 크시슈토프는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적의 보급로를 유린하고 적군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유격전을 구사했다. 또한 루스군은 성벽을 부술 때 필요한 중포가 부족했고 겨울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공성전을 차일피일 미뤘다.
1633년 봄, 루스군은 날씨가 풀리고 중포가 마련되자 공성전을 개시했다. 그들은 매일 도시를 포격했고, 공병들을 동원해 땅굴을 파게 했다. 수비대와 주민들은 악착같이 버텼고, 7월 중순 성벽 일부가 무너지자 페허 위에 방어 대형을 결성하고 결사적으로 싸워 성내로 진입하려는 루스군을 격퇴했다. 이에 루스군은 본진으로 돌아간 뒤 도시를 재포격했다. 그동안 병이 나은 브와디스와프 4세는 크시슈토프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반격 계획을 세웠고, 세임이 병사 모집을 위한 특별세를 걷기로 결의하자마자 각지를 돌면서 민병대를 모았다. 이때 그는 지난날 서유럽에 여행갔을 때 눈여겨봤던 보병 전술을 폴란드에 도입하기로 했다. 30년 전쟁에 참여해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외국 장교들을 초빙해 병사들을 훈련시키게 했고, 경갑옷, 레이피어, 권총, 화승총, 머스켓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이제까지는 귀족들이 알아서 무기를 조달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직접 군인들의 장비를 관리했으며, 무기고를 특별히 만들었다.
폴란드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스몰렌스크로 이동하자,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은 이때를 틈타 우크라이나 일대를 약탈하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가 지휘하는 2,500명 가량의 국가 용병군(Wojsko kwarciane)이 배치되어 있었다. 타타르인들은 포돌리아를 약탈한 뒤 귀환하다가 코니에츠폴스키가 이끄는 국가 용병군의 맹추격을 받고 몰도바 북서쪽의 사소비 로그 인근에서 궤멸되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남쪽 국경은 한동안 조용했고, 브와디스와프 4세는 그 덕분에 스몰렌스크 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1633년 8월 30일, 브와디스와프 4세는 3,000명의 윙드 후사르를 포함해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스몰렌스크 인근에 당도해 크시슈토프 라지비우와 수천 명의 자포리자 카자크들과 합세했다. 루스군은 야전에 응하지 않고 스몰렌스크를 참호로 에워싼 채 버티고 있었기에, 그는 적의 포위망을 직접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폴란드 보병대는 루스군의 포격 세례를 묵묵히 견디며 적의 진지를 하나둘씩 공략했고, 윙드 후사르와 카자크 기병대는 적군이 숙영지에서 출격해 진지를 구하는 걸 막았다. 그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2주 만에 적군을 스몰렌스크에서 몰아냈고, 뒤이은 추격전 끝에 3주 만에 루스군을 포위했다. 이후 연방군은 3개월 동안 루스군을 향해 포격을 퍼부으며 압박을 가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루스군 사령관 미하일 보리소비치 셰인은 1634년 2월 25일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에 항복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 기병대가 루스 차르국의 여러 지역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폴로츠크, 므스티슬라프 등 루스군에게 점령되었던 지역 주민들이 대거 봉기해 루스군을 괴롭혔다. 1634년 3월에는 예레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이끄는 12,000명의 자포리자 연대를 이끌고 시에프스크를 포위해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포가 없었기에 성벽을 뚫지 못하자 루스 차르 미하일 1세의 개인 영지인 코마리체를 황폐화하기로 마음먹고 4월에 쿠르스크로 진군해 도시를 2주간 봉쇄하고 주변 마을을 초토화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미하일 1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고, 브와디스와프 4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634년 5월 27일, 두 사람은 뱌지마 인근 폴라노프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미하일 1세는 스몰렌스크, 시에비에르스크, 체르니히프 등지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였으며, 브와디스와프 4세가 스웨덴을 향한 전쟁을 벌일 때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그 대가로 차르 직위 주장을 포기하고 세르페이스크에 대한 주권 역시 포기하기로 했다. 또한 양자는 포로를 교환하고 무역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했다.
2.5.2.2. 폴란드 - 오스만 전쟁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633년 10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실리스트리아의 총독 메흐메드 아바제가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포돌리아를 침공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가 국가 용병군을 이끌고 카미아네츠-포딜스키 인근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 격파했다.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4세는 당초 아바제의 원정을 은밀히 지원했고, 그가 원정을 성공하면 본격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려 했다. 그러나 원정대가 실패하자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않기로 마음먹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는 아바제의 요청을 묵살했다.브와디스와프 4세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고, 세임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은 뒤 3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과 대포 75문을 카미아네츠에 집결시켜 공세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무라트 4세는 특사 샤힌 야가를 바르샤바로 파견했다. 샤힌 야가는 아바제가 파디샤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공격했을 뿐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적대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책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는 걸 자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과 평민 모두가 이 결과에 기뻐했지만, 이 기회에 발칸 반도를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가톨릭을 널리 전파하려 했던 브와디스와프는 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이지 못하게 된 것에 실망했다.
2.5.2.3. 스웨덴과의 전쟁 계획
브와디스와프 4세는 아버지처럼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고, 스웨덴 왕위를 되찾은 뒤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이복 형제인 얀 카지미에시 왕자에게 넘겨주려 했다. 사실, 그는 즉위 직후에 스웨덴 왕관을 되찾을 기회가 있었다. 그가 대관식을 거행한 지 이틀 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고, 자식으로는 오직 8살된 딸 크리스티나만 남겼다. 그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스웨덴 귀족들과 접촉해 어린 아이 대신에 자신을 왕으로 세우라고 권고했다.그러나 스웨덴 귀족들은 그 대신 크리스티나를 여왕으로 받들었고, 악셀 옥센스티에나 총리가 섭정을 맡았다. 그후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의 침략 문제를 해결하느라 3년을 지체한 그는 1635년 1월 바르샤바에 세임을 소집한 뒤 귀족들이 스웨덴과의 전쟁을 지지하게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군대를 모집하고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특별세를 거둬들였으며, 유럽 국가들의 호의를 확보하기 위해 활발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그는 먼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딸이며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조카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해 영국 왕실의 호의를 사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가톨릭 개종을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빈에 사절을 보내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 스웨덴 동맹을 제안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1634년 말, 브와디스와프 4세는 그단스크에 방문해 해안 요새 건설을 감독했고, 12척의 함대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윽고 1635년에 휴전이 만료되자, 양측 대표단이 그해 5월부터 회담을 시작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협약을 맺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프로이센, 영국, 프랑스의 대표들로 구성된 중재자들이 양국간의 평화를 맺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하자, 이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그 결과, 1635년 9월 12일 슈툼스카 비에스에서 26년 반 동안, 즉 1661년 7월 11일까지 이어지는 장기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 스웨덴은 프로이센 공국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지만, 리보니아 점유는 인정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은 2년 동안 프로이센 항구로부터 관세를 부여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브와디스와프 4세의 스웨덴 왕관에 대한 권리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이렇게 휴전 협약이 맺어졌지만, 브와디스와프 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협상을 이어갔고, 163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딸 체칠리아 레나타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1637년 9월 12일 바르샤바의 성 요한 교회에서 거행되었고, 폴란드 왕비 대관식은 다음날 같은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즉위 이후 크라쿠프가 아닌 곳에서 열린 첫번째 대관식이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에 발끈해 항의했고, 브와디스와프 4세는 이를 달래기 위해 1638년에 크라쿠프가 아닌 곳에서 대관식을 여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세임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체칠리아 레나타와의 결혼 후, 브와디스와프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랑스와 맞서는 제국군을 도울 병력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와 쓸데없이 적대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1644년 체칠리아 레나타가 사망하자, 그는 느베르 공작 샤를 1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실의 친척인 곤차가느베르의 마리아 루이사와 1645년에 재혼해 프랑스 왕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러면서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가, 장차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2.5.2.4.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계획
브와디스와프 4세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벌여 발칸 반도를 해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폴란드 귀족들이 오스만 제국과의 정면 대결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 계획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극비리에 계획을 추진했다. 1646년 3월, 그는 바르샤바 궁정에 보흐단 흐멜니츠키, 이반 바라바쉬를 포함한 카자크 대표들을 비밀리에 초빙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벌이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 해 봄, 그는 군대 모집을 요청하는 편지를 각지에 보냈다. 그러나 연방법에는 세임의 허락이 있어야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고, 귀족들은 이 법을 어기면서 왕을 도울 이유가 없다고 여기고 모집령에 응하지 않았다.편지가 별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다. 먼저 크림 칸국을 침공해 수개월 안에 굴복시키기로 했고, 그 다음에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루스 차르국에게 트란실바니아를 넘겨주는 대가로 지원군을 받아내기로 했다. 여기에 자포리자 코사크들은 12,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브와디스와프 4세에 협력하기로 했다. 그는 이 계획안을 가지고 세임에 제출했지만, 세임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 대결을 거부했다. 그리고 등록된 카자크의 숫자를 늘리자는 왕의 제안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새로 등록되어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법적 보호를 받기를 원했던 카자크들은 불만을 품었고,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몰락으로 이끌 카자크 대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2.5.3. 내치
브와디스와프 4세는 일찍이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절대군주제를 구축해가고 있던 국가들을 부러워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 공화제를 환멸했다. 그는 어떻게든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싶어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많은 귀족들이 광범위한 특권을 누리면서 각 지역에서 군림한 지 수백년이 흐른 터라, 그의 뜻을 섣불리 실현시키려 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반발을 살 우려가 컸다.1632년, 브와디스와프 4세는 왕실 재무관인 예르지 오솔린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무염시태 기사단'을 창설했다. 이 기사단은 그의 반 오스만 제국 정책을 지지하는 가톨릭 기사들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폴란드 내에서 72명, 외국에서 24명이 모집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1634년 기사단 설립을 승인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그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무장 집단을 구축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걸 눈치채고 거세게 반발했다.
여기에 칼뱅파였던 빌뉴스 주지사이자 리투아니아 대 헤트만 크시슈토프 라지비우 등은 비 가톨릭교도들이 이 일을 계기로 입지가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 기사단을 폐지하라고 촉구했고, 폴란드 추기경 얀 벵지크마저 왕의 권력이 강해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반대했다. 결국 거센 압력에 버티지 못한 브와디스와프 4세는 1638년 세임의 동의 없이는 기사단을 창설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무염시태 기사단은 자연히 폐지되었다.
한편, 브와디스와프 4세는 프로이센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이 직접 경의를 표하지 말고 사절을 통해 경의를 표하는 걸 허용했으며, 프로이센의 내정에 폴란드 왕실의 간섭을 제한하는 것 역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폴란드-스웨덴 전쟁 중 프로이센 공작이 폴란드에 비우호적으로 나오자, 그는 술에 찌들어 살며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게오르크 빌헬름을 대신해 프로이센 공국을 다스려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예르지 오솔린스키를 프로이센 공국의 총독으로 세웠다. 하지만 슈툼스카 비에스 협약이 체결된 후 총독 직을 폐지하기로 했다. 1641년,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바르샤바에 사절을 보내 브와디스와프 4세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것이 프로이센 공작이 폴란드 국왕에게 바친 마지막 조공이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당대의 많은 예술가 및 과학자들을 후원했다. 아직 왕자 신분이었던 1618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로부터 갈릴레이가 직접 제작한 망원경을 선물받은 바 있었고, 왕이 된 후 전 유럽의 유명한 병호사이자 철학자인 휴고 그로티우스를 초대했다. 또한 이탈리아 조각가 클레멘테 몰리를 왕실 조각가로 초대했고, 베네치아 출신의 바로크 화가 토마소 돌라벨라를 왕실 화가로 초빙했다. 토마소 돌라벨라는 크라쿠프의 비엘라니에 있는 카말돌레세 교회에 예수를 묘사한 이콘을 그렸다. 또한 그의 치세에 빌뉴스 대성당의 성 키지미에시 예배당이 세워졌는데, 훗날 이곳에 브와디스와프 4세의 내장과 심장이 안장되었다. 1644년에는 아버지 지그문트 3세를 기리기 위해 바르샤바 광장에 로마의 포카스 기둥을 본뜬 지그문트 기둥을 세웠다.
1634년 종 주조소가 세워졌고, 1643년 바르샤바에 무기고가 세워졌으며, 1648년 크라쿠프스키에 프셰드미에시치에 거리의 모든 목조 건물을 석조 건물로 교체하라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또한 1642년 바르샤바 왕궁의 방들에 최근의 전쟁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들을 장식했다. 그는 이와 더불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최초의 오페라 극장을 바르샤바에 조직했다. 이 오페라는 유럽 최초의 장기 운영 오페라로, 1645년부터 1648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오페라에는 성명 미상의 작가가 작곡한 갈라테아가 공연되었다고 전해지며, 1634년 6월 14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차르국 사이의 평화 협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오페라 주디타(Giudittta)도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2.6. 사망
브와디스와프 4세는 말년에 류머티즘, 신장 결석, 매독, 통풍으로 인한 관절염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또한 치아가 좋지 않았고 열이 자주 났으며, 편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던 1647년 8월 9일, 당시 7살이었던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시가 갑작스런 병에 걸려 사망했다. 유일한 적법한 왕위 계승자였던 어린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슬픔이 너무 컸던 나머지 크라쿠프에서 열린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1648년 초 메르키네 근처에서 사냥하던 중 담석 또는 신장 결석에 걸린 그는 병세가 악화되자 유언장을 구술하고 병자성사를 거행했고, 그 해 5월 20일에 사망했다. 사후 이복 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이전 버전에서는 유일한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하던 브와디스와프 4세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사망했다고 기술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헤트만 미코와이 포토츠키는 1648년 5월 5일에 브와디스와프 4세에게 흐멜니츠키의 봉기에 대한 소식이 담긴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조브티 보디(Zhovti Vody)에서 카자크들이 사소한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만 담겨 있었다. 게다가 편지가 바르샤바에 도착할 당시에는 브와디스와프 4세가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서신을 읽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신하들도 굳이 죽어가는 왕에게 이 일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훌륭한 왕으로서 존경을 받았던 브와디스와프 4세의 사망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귀족 및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긴 건 사실이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의 사후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3. 가족
-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1611 ~ 164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딸.
- 곤차가느베르의 마리아 루이사(1611 ~ 1667)
느베르 공작 샤를 1세의 딸. 브와디스와프 4세 사후 새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재혼.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 (Cecilia Renata of Austria) | ||||
1남 | 지그문트 카지미에시 바사 (Sigismund Casimir Vasa) | 1640년 4월 1일 | 1647년 8월 9일 | |
1녀 | 마리아 안나 이자벨라 바사 (Maria Anna Isabella Vasa) | 1642년 1월 8일 | 1642년 2월 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