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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동헝가리 왕국 총독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 Giovanni Battista Castaldo | |
출생 | 1493년 이탈리아 노체라 시 인근 산 피에트로 마을 |
사망 | 1563년 1월 6일 (향년 69~70세) 밀라노 공국 밀라노 |
재위 | 동헝가리 왕국의 총독 |
1551년 ~ 1553년 | |
아버지 | 카를로 카스텔도 |
어머니 | 마리엘라 리날디 |
형제 | 조반니 마테오 카스텔도 |
배우자 | 마테아(또는 마리아) 스탐파 |
자녀 | 페르난도(또는 페란테) 카스텔도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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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용병대장, 초대 카사노 후작, 피아데나 백작, 동헝가리 왕국 총독.2. 생애
1493년경 이탈리아 노체라 시 인근 산 피에트로 마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카를로 카스텔도는 노체라 출신의 귀족이자 정치가로, 그가 11살 때인 1504년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어머니 마리엘라 리날디도 노체라의 귀족 가문 여식이다. 그는 1510년대에 제국군에 입대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거의 모든 원정에 동행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룩셈부르크,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면서 빠르게 진급해 나중에는 이탈리아 용병대 지휘관이 되었다.1525년 파비아 전투에 참여해 제국군의 승리에 기여했고, 1527년 사코 디 로마에 참여헀다.[1] 같은 해 라치오와 로마냐 일대의 총독으로 선임되었고, 1530년 볼로냐에서 열린 카를 5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530년 기적을 행하는 성모 마리아 성소가 설립된 노체라의 올리베탄 수도원에 기부했다. 1532년, 카를 5세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초대 카사노 후작으로 선임했다. 1541년 형제 조반니 마테오 카스텔도와 함께 카솔라 디 노체라 근처에 있는 산타 마리아 아몬테 예배당을 가족 예배당으로 개조했다. 1545년에는 크레모나 인근의 피아데나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외에도 비나스코, 비나누오바, 시비우, 칼디냐 일대의 영주 칭호를 얻었고, 방대한 재산을 확보했다. 1546년에는 육군 사령관(maestro di campo generale)에 선임되었다.
1551년,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 1세의 지시에 따라 독일, 보헤미아, 스페인,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를 포함한 제국군 9,000명을 이끌고 동헝가리 왕국으로 향했다. 그의 임무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예르데이를 지켜내고, 1549년 9월 8일에 체결된 나르바토르 협약에 따라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로부터 헝가리 대관식 휘장과 성 이슈트반 왕관을 넘겨받는 것이다. 에스테르곰 대주교이자 동헝가리 왕국 섭정인 프라테르 죄르지는 그에게 성 이슈트반 왕관과 헝가리 대관식 휘장을 넘겼고, 그는 이것들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냈다. 1551년 8월 6일,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는 에르데이를 떠났고, 페르디난트 1세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가 에르데이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통치권을 맡기기로 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가 에르데이에서 축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에르데이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노했다. 그는 루멜리아의 베글러 베그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군대를 소집해 페르디난트 1세를 에르데이에서 축출하라고 명령했다. 소콜루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크림 칸국, 비딘과 니코폴리스 방면 오스만군을 규합해 50,000 가량의 군대를 일으켰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 연간 공물을 오스만 제국에 보냈고, 여러 편지를 보내 예르데이는 여전히 쉴레이만 1세를 주권자로 받들 것이며, 독일군은 반란을 일으킨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소콜루는 일단 쉴레이만 1세를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국경지대의 몇 개 성채를 공략한 뒤 후방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리파는 별도로 움직이던 오스만 분견대에게 손쉽게 항복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난 후, 카스텔도는 황제군 및 예르데이군과 함께 오스만 분견대 수천 명이 지키고 있던 리파를 포위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러다가 오스만 분견대가 몰살당하면 쉴레이만 1세의 분노를 사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오스만 분견대에게 항복하는 대가로 신변의 자유를 보장한 채 오스만 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스텔도는 페르디난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리파를 무력으로 공략하고 오스만군을 학살하고 싶었지만, 다수의 인사들이 죄르지의 주장을 찬성했기에 결국 그의 뜻대로 이뤄졌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여기에 더해 물러나는 오스만군에게 음식과 말을 공급했다.
이에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이 예르데이를 온전히 점령하도록 한 뒤 자기가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예르데이를 통치하려는 야심을 품은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 의심은 프라테르 죄르지가 그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하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의 지역이 아닌 티살툴 마을에서 겨울을 보내라고 권고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그는 죄르지가 티살툴 마을에 머무는 자신과 황제군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겼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관해 보고했지만, 평소처럼 자긴의 계획과 행동을 카스텔도에게 전혀 밝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카스텔도가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는 걸 막지 못했다.
1551년 12월 16일, 카스텔도는 알빈크 성에 있던 프라테르 죄르지와 대면했다. 그는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오스만 분견대에게 음식과 말을 공급한 연유를 캐물었지만, 죄르지는 이번에도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두 사람은 이로 인해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카스텔도는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자리를 박차고 떠난 뒤, 카스텔도는 무장병들을 성으로 인도했다. 12월 17일 새벽 1시 또는 2시경, 카스텔도의 비서인 마르칸토니오 페라리, 스포르자 팔라비치니 대위, 그리고 몇몇 무장병들이 프라테르 죄르지의 방에 들이닥쳐서 그를 칼로 찌르고 소총으로 쏴 죽였다. 그의 귀 한쪽은 스페인 용병 한 명에게 잘려진 뒤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내졌다. 그의 유해는 70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1552년 2월이 되어서야 줄러페헤르바르 성직자들에게 수습된 뒤 2월 25일 성 미카엘 대성당 지하실에 안장되었다.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를 처단한 뒤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고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카스텔도를 옹호하고 프라테르 죄르지의 배신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 율리오 3세에게 87개 항목으로 구성된 프라테르 죄르지 기소장을 발송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생전에 추기경을 맡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격분했다. 율리오 3세는 페르디난트 1세가 보낸 기소장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고, 카스텔도와 페르디난트 1세가 에르데이를 손아귀에 쥐기 위해 추기경을 살해했다고 여겼다. 이후 추기경 4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553년 3월부터 1554년 3월까지 조사하면서 총 139명의 증인을 심문했다.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예르데이를 오스만 제국에 넘기려 했고, 자신과 제국군을 모살하려 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1세의 강한 합력을 받은 조사위원회는 555년 2월 14일에 600페이지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과 내통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살인에 연루된 자들과 공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552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왈라키아 공국에 자신들의 대의에 헌신하는 통치자를 세우기로 했다. 카스텔도는 라두 5세의 아들이며 망명중인 보야르들의 지지를 받는 라두 8세를 옹립하기로 했다. 1552년 11월, 카스텔도는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왈라키아 공국 현직 보이보드인 미르체아 5세는 8,000 ~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에 배신이 두려워 보야르 47명을 식사하던 중에 체포해 처형했다고 하다. 1552년 11월 16일 매네슈티 전투에서 카스텔도가 승리했고, 미르체아 5세는 지우르지우로 피신했다. 이후 라두 8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내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공물을 계속 바치는 조건으로 집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카스텔도는 1552년 7월 오스만 제국의 예르데이 원정에 참여해 부르젤란트와 세케이란트를 황폐화하는 데 일조한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슈테판 6세 라레슈를 예르데이 귀족 바토리 이슈트반과 함께 기습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 암살 사건에 반발한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귀순했고, 오스만 제국은 1552년 여름 바나트 저지대를 점령했다. 카스텔도는 에르데이 총독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려 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했고, 병사들의 급료를 마련하지도 못했으며, 헝가리 귀족들의 전쟁 참여 거부에 직면했다. 결국 티미쇼아라, 세게드, 에게르 등 여러 요충지를 무기력하게 상실한 그는 빈에 "상황을 타개할 방도는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보고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1553년 봄 그를 에르데이에서 소환했다. 그 후 에르데이 의회는 자기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페르디난트 1세를 더 이상 따를 이유가 없다고 보고, 1556년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각각 헝가리 왕비와 헝가리 국왕으로 복위했다.
그 후 카스텔도는 1556년부터 황제에게 충성하는 몇몇 귀족과 함께 밀라노 공국의 행정을 맡았고, 1563년 교황청 군대의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교황청 군대에 실제로 부임하기 전인 1563년 1월 6일 밀라노에서 사망했고, 산 비토레 알 코르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출생지인 노케라 델 모나스테로로 옮겨져 카스텔도 가족 예배당인 산타 마리아 아 몬테 예배당(현재 카펠라 디 산 니콜라 예배당)에 이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밀라노 귀족 필리포 스탐파의 딸인 마테아(또는 마리아) 스탐파와 결혼해 페르난도(또는 페란테) 카스텔도를 낳았다. 아들 카스텔도는 아버지 사후 카사노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