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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정복

이슬람 팽창에서 넘어옴
파일:The_Prophet_Muhammad_and_the_Muslim_Army_at_the_Battle_of_Uhud,_from_the_Siyer-i_Nebi,_1595.jpg

1. 개요2. 아랍 무슬림
2.1. 예언자의 시대2.2. 정통 (라쉬둔) 칼리파 시대
2.2.1. 1대 아부 바크르2.2.2. 2대 우마르
2.2.2.1. 시리아와 이라크2.2.2.2. 소강기 (638 ~ 639년)2.2.2.3. 이집트와 이란
2.2.3. 3대 우스만
2.2.3.1. 지중해 진출과 사산 왕조의 멸망
2.2.4. 4대 알리: 1차 피트나2.2.5. 우마이야 왕조
2.2.5.1. 초기: 아프리카 & 아나톨리아2.2.5.2. 2차 피트나 (683 ~ 691년)2.2.5.3. 중기: 마그레브, 이베리아, 호라산2.2.5.4. 쇠퇴기2.2.5.5. 3차 피트나 (742 ~ 751년)
2.2.6. 아바스 왕조
2.2.6.1. 시칠리아 & 크레타 정복
3. 튀르크 무슬림
3.1. 가즈니 제국3.2. 셀주크 제국3.3. 튀르크 토후국들3.4. 오스만 제국
3.4.1. 동남 유럽 (루멜리아) 정복3.4.2. 중유럽 정복 & 지중해 전역
3.4.2.1. 쉴레이만 1세 카누니3.4.2.2. 전선의 확대3.4.2.3. 13년 전쟁3.4.2.4. 빈에서 키예프까지
4. 인도 이슬람 왕조5.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이슬람 정복.gif

중세 이슬람 세력[1]이 외부 세력[2]을 정복하거나 싸운 전투/활동 목록이다. 현지 세력이 이슬람화한 경우[3]는 제외하였다.

2. 아랍 무슬림

2.1. 예언자의 시대

파일:Capture+_2018-04-09-20-54-03-1-1.png

2.2. 정통 (라쉬둔) 칼리파 시대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이란 정복

2.2.1. 1대 아부 바크르

2.2.2. 2대 우마르

파일:이슬람 제국 1.png
우마르 즉위 당시 이슬람 제국의 판도

할리드 대신 아부 우바이다가 총사령관이 되며 전개 속도가 느려졌고 이때부터 통치 체계의 정립이 시작된다.
2.2.2.1. 시리아와 이라크
2.2.2.2. 소강기 (638 ~ 639년)
파일:Syria_toward_end_of_Muslim_conquest,_c._638.png
칼리파 우마르는 동쪽으로는 자그로스 산맥,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고원과 타우루스 산맥 (카파도키아), 서로는 시나이 반도의 국경선에 만족하였다.
2.2.2.3. 이집트와 이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Mohammad_adil-Rashidun-empire-at-its-peak-close.png
644년, 라쉬둔 (정통) 칼리파 조의 강역

2.2.3. 3대 우스만

해군 편성과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의 성장
2.2.3.1. 지중해 진출과 사산 왕조의 멸망

2.2.4. 4대 알리: 1차 피트나[82]

2.2.5. 우마이야 왕조

2.2.5.1. 초기: 아프리카 & 아나톨리아
2.2.5.2. 2차 피트나 (683 ~ 691년)
2.2.5.3. 중기: 마그레브, 이베리아, 호라산

자세한 내역은 레콩키스타/연표 문서 참고

파일:이슬람 인도.png
북인도 전역
2.2.5.4. 쇠퇴기
2.2.5.5. 3차 피트나 (742 ~ 751년)

2.2.6. 아바스 왕조

2.2.6.1. 시칠리아 & 크레타 정복

3. 튀르크 무슬림

3.1. 가즈니 제국

술탄 마흐무드의 힌두 샤히령 펀자브 원정

3.2. 셀주크 제국

3.2.1. 아나톨리아 정복


이후 ~ 13세기 초까지는 십자군 전쟁/연표 참고

3.3. 튀르크 토후국들

3.4. 오스만 제국

3.4.1. 동남 유럽 (루멜리아) 정복

3.4.1.1. 메흐메트 2세 파티흐, 로마 제국의 멸망

3.4.2. 중유럽 정복 & 지중해 전역

3.4.2.1. 쉴레이만 1세 카누니
3.4.2.2. 전선의 확대
파일:오스만 제국.png
1590년경, 최대 판도에 이른 오스만 제국

파일:오스만 유럽 전선.png
1591년경 크로아티아 전선. 보스니아의 오스만 제국군바냐루카를 중심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3.4.2.3. 13년 전쟁
3.4.2.4. 빈에서 키예프까지
파일:헝가리-오스만 국경.jpg
1620년대 오스만-합스부르크 국경

파일:오스만 국경 1683.png
1660 ~ 1682년까지의 정복. 오라데아, 노베잠키, 포돌리아, 서부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대튀르크 전쟁 문서로 이어짐

1685년 10월 25일 : 코시체 상실

1687년 9월 27일, 트란실바니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복속
1689년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의 오라데아 포위 실패
1692년 오라데아 점령

4. 인도 이슬람 왕조

4.1. 가즈나 왕조

4.2. 구르 왕조

4.3. 델리 술탄 왕조

4.4. 무굴 제국

사실 무굴 제국은 인도를 정복하면서 힌두교 세력과 싸운 사례보다는 다른 이슬람 왕조와 싸운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무굴 제국을 붕괴시킨 가장 큰 원인은 시크교 반란과 힌두교 세력인 마라타 연합이다.

5. 관련 문서



[1] 아랍, 베르베르, 튀르크, 몽골이란[2]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유교불교, 토속 신앙[3] 동남아시아의 말레이계 술탄국이나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제국 등.[4] 후에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의 메디나로 개칭[5]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6]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7]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8] 원래 10년 기한이었다.[9] vs 가산 왕국 + 동로마 제국[10] 629년에 동로마 군대가 크테시폰까지 밀어붙인 후, 이 해에 로마와 사산 제국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렇다고 두 세력이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양국은 아랍 무슬림 세력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의 속국이자 방패인 가산 왕국라흠 왕국의 간곡한 권고를 양측 모두 레반트를 둘러싼 싸움에만 집중하다보니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지금 쓰고 있다.[11] vs 베두인[12] vs 산악민족[13] 함락에 실패했지만 이후 주민들이 자진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항복하였다.[14] 10월, 북부 아라비아. 이후 아카바의 단성론파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진영으로 이탈함[15] 서북부 아라비아[16] 9월[17] 10월[18] 오만 방면[19] 12월[20] 남부 아라비아[21] 사슬 / 카지마흐 전투[22] 4월 3번째 주, 유프라테스 강 / 우발라 전투[23] 할리드 알 왈리드[24] 5월 말, 라흠 왕국의 멸망[25] Battle of Dathin, 2월. 가자 인근, 아므르 이븐 알 아스[26] Battle of Marj Rahit, 4월 24일, vs 가산 왕국[27] Battle of Al-Qaryatayn[28] 6~7월. 가산 왕국 멸망[29] 7월 20일, 티베리아스 호수 근처[30] 7~8월, Battle of ajnadayn[31] 8월 19일, Battle of Marj al-Saffar (634)[32] 8월 21일 ~ 9월 19일, Siege of Damascus (634)[33] 할리드가 다마스쿠스를 향하던 로마군 격파[34] Battle of Maraj-al-Debaj[35]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베이루트 인근에서 로마군에 포위되어 있던 아부 알 쿠다스의 군대를 구원. 10.15[36] Battle of Namaraq, 쿠파(도시) 인근[37] Battle of al-Jisr[38] 아인나딘 요새 함락[39] 아므르[40] 슈라빌[41] 야지드[42] Battle of Maraj-al-Rome, 아부 우바이다 지휘[43]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친위대만을 이끌고 테오도로스의 다마스쿠스 탈환 시도 격퇴[44] 실패, 하지만 야르무크 전투 이후 이어진 2차 포위에서 결국 함락 (640년)[45] 무슬림 군대는 일시적으로 킬리키아 지방의 마라쉬 (현재 터키)까지 점령하였다.[46] 원래 칼키스와 에데사는 아부 우바이다와 1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으나 이라클리오스가 대규모 군대를 안티오키아에 군집시키자 아랍 측은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두 도시를 포위하였다.[47] 헤라클리우스의 포위 후 각개격파 전술을 간파한 할리드가 아부 우바이다에게 간언한 전술이 채택된 것이다. 점령지의 무슬림 군대는 전부 도시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경기병대가 강점인 아랍 군대는 전통적으로 회전에 강했다. 자비야 평원에서 야르무크 평원으로 이동하던 아랍 군대의 후미는 할리드와 그 친위대가 지켰고, 동로마 선발대를 격파하여 기선을 제압하였다.[48] 8월 15 ~ 21일, 할리드의 지휘. 이후 로마의 레반트 포기[49] 이븐 우바이다의 주최. 예루살렘과 카이사레아 놓고 출동. 칼리파 우마르: 예루살렘 지목[50] ~ 637년 4월, 무슬림 군대는 수비군의 식량이 바닥나기만을 기다렸다. 이후 총대주교는 칼리파 우마르에게 직접 항복한다는 조건으로 백기를 들었다.[51]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의 지휘[52] 이후 쿠파(도시)가 세워진다.[53] 12월 20일경[54] 야지드[55] 슈라빌[56] 아므르[57] 항복 후 로마 사령관 요아킴은 4천명의 병사들과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 충실한 장군이 되었다.[58] 현재 시리아 북부 터키와의 국경도시. 터키 도시인 킬리스와 마주하고 있으며, 알레포와 가지안테프 중간 쯤에 있다. 이들리브 - 알레포 - 킬리스 - 가지안테프로 도로가 이어진다. 안티오키아 포위의 전초전[59] 아이나딘, 야르무크 전투 다음으로 동로마 측이 가장 큰 인명 손실을 본 전투.[60] 10월 31일. 패잔병들은 로마로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61] 할리드의 원정대[62]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내부의 기독교도들이 내통하여 함락하였다.[63] 직후에 도시도 함락됨[64] 칼리파 우마르가 장군 쿠아카에게 서신을 보내어 점령지 (수아드)와 페르시아 간의 국경선은 자그로스 산맥이 적합하다고 명령.[65] 헤라클리우스의 사주를 받았다.[66] 7월경으로 추정됨. 할리드의 친위대의 대승리. 기독교 아랍인들의 후퇴[67] 8월[68] 할리드 이븐 왈리드와 리야드 이븐 가늠[69] 현재. 터키의 카라만마라쉬.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 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킬리키아 관문을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중 할리드의 군대와 간발의 차이로 접촉을 피하얐다. 시리아를 두고 후퇴하며 그가 남긴 시는 이라클리오스 문서의 후반 부분 참고[70] 이야드 이븐 가님. 수비대가 강경 저항하자 후퇴하여 5-6일간 주변 초토화시키자 항복해옴. 후에 자지라 총독으로 부임[71] 7/6[72] 12/21[73] 12/22[74] 헤라클리우스 사망[75] 피루즈의 반란 진압[76] 무슬림 측도 앗 누만 이븐 무크린 전사[77] 다만 산간 지방은 정복되지 않음[78] 다만 칼리파 우마르의 지시로 회군[79] 무아위야[80] 4만여 학살[81] 이후 야즈대게르드 3세는 페르가나 칸국을 거쳐 당나라로 도피, 다시 거병하여 호라산으로 돌아오나 다시 패배하고 살해당한다.[82] 무슬림 내전[83] 동로마 당국이 주민 시칠리아로 대피시키고 사실상 포기함[84] 동로마-베르베르 군 격파[85] 카히나의 베르베르 군.이후 도시 공격해 초토화시켜 아랍인들의 야욕 낮추려 함[86] 본래 본국으로 철수하려 했는데 동로마 함대의 방해로 좌절되자 함대 불사르고 내륙의 미네오 향함. 3일간의 포위 끝에 항복하자 그곳을 거점으로 삼음.[87] 엔나 측이 항복 제안하며 초청, 이에 에우페미오스가 소수의 호위대와 입성하자 살해함[88] 위에 활약한 알 파즐 이븐 야쿠브의 아들로 추정됨[89] 베르베르계 암살자는 이후 시라쿠사로 도주[90] 이때 동로마 측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을 따로 석방하며 두 집단의 반목 부추겼다고 함[91] 점차 팔레르모 vs 아그리젠토 간 지역 대결로 전개됨[92] 일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당도[93] 하필은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고[94] 힌두 샤히의 수도[95] 앞서 점령한 후 자치 주었다가 완전히 다시 점령함[96] 혹은 14238년 9월 5일[97] 그후 11월 1일, 트란실바니아 공 서포여이 야노시가 입성해 헝가리 왕에 오른다. 다만 이듬해 8월, 대립 국왕인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가 부다를 장악한다[98] 7월 31일 : 머저로바르와 죄르, 합스부르크 군에 항복, 8월 8일 도나우 건너 대포 운송. 8월 9일 코마롬 점령. 8월 10일 자폴랴, 타타 점령. 8월 12일 야노시 1세, 세케슈페헤르바르 포기하고 페슈트 향함. 8월 18일 에스테르곰 포위[99] 혹은 7일[100] 다음날 본격 철수, 12월 16일 코스탄티니예 당도[101] 11월 21일 코스탄티니예 귀환[102] 같은해 디우 공방전[103] 5월 결정, 8월 6일 실리스트라 당도. 도브루자로 향하여 8월 17일 바바 다그의 13세기 수피인 사리 살투크 바바 영묘 방문. 9월 10일 8천 크림 칸국군과 합류[104] 7일간 머물며 9월 21일 몰다비아 영주들의 봉신 서약 받고 스테판 옹립, 11월 27일 귀환[105] 이때 시지게트바르 합스부르크에 귀순[106] 9월 2일 오스만 원군 파견[107] 12월 17일 에드르네, 월동 후 6월 4일 벨그라드 당도[108] 10일이라고도. 7월 31일 항복 제안 거절, 8월 6일 도시 함락. 다음날 시타델[109] 당도한 날짜. 본격적인 공격은 2일 후부터[110] 5일 후 벨그라드 당도, 11월 16일 코스탄티니예 귀환[111] 무려 28명의 수비대와 1만 2천 포위군의 싸움[112] 그 전에도 1507, 1514년 칸의 제지에도 귀족들이 독립적으로 습격함. 1533년 러시아 : 브랸스크 - 툴라 - 라쟌 방어선 구축, 1552년 카잔 칸국 정복[113] 유일한 성과라면 테레크 강의 러시아 요새 파괴[114] 1월에 미르 알리 베그, 예멘에서 소말리아 향함. 모가디슈 주민들 봉기 선동. 바라와, 파자 인들 오스만에 충성. 15척 지님, 포르투갈 선박 나포. 라무의 군주가 시내의 포르투갈 피난민 인도. 몸바사에 요새 건설. 20척과 1백 포르투갈 포로 대동하고 모카 귀환[115] 1월에 포르투갈령 고아 총독, 18척의 함대와 650 병력 스와힐리 해안 파견. 파자 습격, 몸바사 위협해 4천 크루자도 뜯어냄. 말린디는 여전히 포르투갈에 충성. 밀 알리 베그 발견 못하자 소코트라, 호르무즈 거쳐 고아 귀환[116] 알리 베그, 5척의 함대와 모카 귀환. 모가디슈부터 스와힐리 해안으로부터 보호 명목 조공 받아냄. 말린디 공격 시도하나 포르투갈 군 주둔, 밤에 접급하는 알리 베그 함대 포격해 몸바사로 몰아냄. 알리 베그, 몸바사 섬 해안에 작은 요새 건설하고 포대 설치. 고아에서 19척의 함대와 900 포르투갈 병력 파견. 2월 라무 당도. 3월 5일 포르투갈 함대 몸바사 당도, 포화에도 항구 당도해 3척의 오스만 함대 나포. 함상 포격에 요새 버림. 3월 7일에 5백여 포르투갈 군 상륙, 몸바사 주민들은 오스만 군과 인근 숲 피신한 상태. 포르투갈, 식인 부족인 짐바스 부족을 섬에 들여보내자 주민들 대혼란 겪으며 선박으로 도주. 다수 익사, 피난 도중 알리 베그 등이 포르투갈에 사로잡힘. 3월 24일 포르투갈 함대 말린디 개선, 친오스만 반군에 축출된 군주 펨바 복위시킴. 라무 군주는 사로잡혀 공개 처형됨. 포로된 알리 베그는 환대받으며 포르투갈로 보내져 기독교 개종[117] 한때 즈린, 카진, 오스로비차 상실[118] 파크락 산작베이 알리 베그 전사[119] 이후 1588/89년의 센즈 습격 외에는 양측의 충돌 없이 평화 유지[120] 선발대. 3일 후 본군 당도, 14일부터 포격[121] 하산 파샤, 3만 5천 포로 얻음[122] 하산 파샤 및 산작베이 5인 전사. 그중엔 술탄 무라트의 조카 술탄자데 메흐메트 베이도 포함, 복수 분위기. 휴전 깨고 선전포고, 긴 전쟁 혹은 13년 전쟁의 시작[123] 크로아티아 군이 군량 부족 해산, 승리 활용 못함. 고작 1백 수비대 배치된 상태의 성채에 대군 및 포병대와 함께 포위. 8월 30일 성벽 붕괴[124] 코자 시난 파샤, 7월 19일 코스탄티니예 출정 후 9월 4일 벨그라드 당도[125] 옛 로마 도나우-다키아 사이 평야지대. 벨그라드 위의 현 루마니아령 티미쇼아라 ~ 헝가리령 세게드에 해당. 이에 대해 오스만 당국은 세르비아 인들의 상징인 성 사바의 성유물을 그의 축일인 4월 27일에 불태운 후 흐트려 훼손함 https://en.wikipedia.org/wiki/Burning_of_Saint_Sava%27s_relics[126] 부다와 에게르 사이. 5월 6일 코자 시난 파샤가 벨그라드 출정, 터터 진군[127] 불타버린 성[128] 약 2천, 그외에 오스만 상인들 처형[129] 다만 실리스트레 공격은 실패, 4천 왈라키아 병력 처형됨. 정권 교체기 및 4월 22일 시파히 봉기 진압 후 5월 1일 10만 원정군 출정. 그외에 스페인 함대가 파트라스 습격해 전소, 보복으로 코스탄티니예의 미혼 그리스인 축출 혹은 레조 습격[130] 3500 수비대 남김, 트르고비슈테와 함께 요새화[131] 8월 27일 호틴, 9월 3일 이아시. 이에 크림 칸국 역시 개입, 9월 6일 폴란드 군 프루트 강 건넘[132] 수비대는 항복했으나 관통형 당해 죽음[133] 도나우 도하해 후퇴하는 오스만 군 습격해 격파[134] 23일이라고도. 30여년만에 처음으로 있는 술탄의 친정. 8월 9일 베오그라드 당도[135] 항복한 수비대 학살[136] 9월 21일 포위, 10월 12일 함락이라고도. 하트반의 복수로 수비대 전원 학살. 10월 22일 1만 2천 독일군과 조우[137] 막대한 화력에 흩어졌으나 독일군이 전리품 약탈에 몰두하자 반격해 승리[138] 사트르즈 메흐메트 파샤, 6월 9일 출정, 8월 13일 벨그라드 당도[139] 사트르즈 메흐메트 파샤, 6월 18일 벨그라드 떠나 베츠케르크에서 55일간 크림 칸국군 기다림, 오지 않자 출정. 독일군의 헝가리 진군에도 소수의 원군 보내고 그대로 트란실바니아 향함[140] 지지부진, 대포를 겨우 3문만 가져옴. 에게르에 요청한 대포알 역시 기상 조건으로 당도하지 못함[141]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 5월 23일 플로브디프 당도. 10월 26일 페슈트 당도 후 벨그라드 향함. 크림 칸국이 에르셰쿠이바르 습격 담당[142] 1599년 10월 트란실바니아, 1600년 6월 몰다비아 정복하며 왈라키아 공 미하이가 루마니아 통합, 1601년 4월 트란실바니아 복구[143] 23일이라고도, 공격 제안한 티르야키 하산 파샤가 신설된 주의 총독 부임. 쿠유 무라트 파샤 - 바보츠사 진군. 시지케트바르 회의 - 에스테르곰 대신카니예 공격 결정, 부다 공격하려던 독일군 진로 바꿈. 점령 후 벨그라드 월동[144] 예미슈지 하산 파샤. 8월 9일 출정, 9월 6일 제문 당도. 공백기 동안 독일군이 공세. 티르야키 하샨 파샤의 구원 요청에도 대신 세케슈페헤르바르 향했다가 패하고 철수[145] 30년 전쟁 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페르디난트, 원군 당도했다 여기고 도주. 그의 왕관 및 47문의 대포와 라이플 1만 4천정 등 막대한 전리품 획득. 베이럴베이 거쳐 1603년 루멜리아 총독위 제수[146] 6월 20일, 세케슈페헤르바르 향하는 보급선 습격. 예미슈지 하산 파샤, 6월 26일 사바 강 건너 진군. 세케슈페헤르바르 수비대장이 7월 7일 마티아스에 보고. 7월 24일 회의에서 마티아스, 5만 대군 원정 지시. 예미슈지 하산 파샤, 부다에서 7만 대군과 당도. 12일부터 포격, 23일로 예정되었던 독일 원군 지체됨. 28일 총공격 실패했지만 수비대 절반으로 감소. 부관이 수비대장 명령도 없이 협상 나섬, 사기 저하를 틈타 29일 재차 공격해 대부분의 수비대 죽이고 장교들 포로 되어 벨그라드 압송. 4천 수비대 배치, 파퍼 공격 예상과는 달리 바르파톨라 습격 외엔 별 움직임 없음.[147] 6월 29일 오스트리아 군에 패하고 오스만령 티미쇼아라 도주, 8월 23일 클루지나포카 의회에서 총독 바스타는 친오스만 귀족들 처형. 9월 9일 죄르 작전회의, 오스만 군의 에스테르곰 진군 예상. 포로 심문 끝에 트란실바니아 진군 계획 실토. 원군 파견 후 마티아스는 빈 회군. 9월 12일 부다 출정한 예미슈지 하산 파샤는 솔노크, 서르버시, 리포바 거쳐 트란실바니아 향함. 죄르의 독일군 염려한 부다 성주 알리의 요청에도 회군 안함. 9월 20일 2만 4천 독일군이 에스테르곰 진군. 15일 랄라 메흐메드 파샤의 2천 원군이 부다 입성[148] 10월 9일 마티아스, 빈에서 출정. 11일부터 독일군의 포격 개시. 13일엔 리포바에서 비보를 듣고 회군한 예미슈지 하산 파샤가 2만 병력과 페슈트 당도. 14일부터 페슈트 포격. 16일 3천 독일 기병대가 부다 급수탑 장악 시도,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오스만 군은 부다 포위망 향하는 보급 탈취[149] 18일 페슈트 대대적 포격, 독일 원군 격퇴 후 21일 총공격하나 실패. 22일엔 독일군이 부다에 총공격하나 역시 1500 잃고 실패. 휴식 후 25일 재차 페슈트 공격, 다음날 독일군이 페슈트 포위망 야습. 10월 말엽 보스니아의 6천 오스만 원군이 세케슈페헤르바르 당도. 하지만 페슈트 포위군의 보급을 맡은 부다의 지휘관이 성내의 식량 부족하다며 후퇴 부탁. 28일 총공격 실패 후 결정[150] 3일 부다 수비대가 오부다의 2천 독일군 진영 야습, 4시간 동안 격전 끝에 물러났으나 1천 이상 죽임. 톨너로 후퇴한 예미슈지 하산 파샤는 보스니아 병력의 합류 기다림. 마티아스, 5천 차출해 다뉴브 강변 장악하여 보스니아 군의 도하 저지하고 컬로처 약탈 후 방화. 독일군, 기근 / 질병 / 공격 시달리며 지침. 9일 마티아스, 철수 결정. 10일, 12일 부다 수비대의 역습. 13일에는 마티아스 본영 공격, 코시체 기병대에 격퇴됨. 지속적인 출혈, 페슈트는 부다의 포격에 시달리고 용병 위주의 수비대 반발하여 역시 철수 원함. 13일 항명하자 포격, 12명 살상하여 복종시킴. 4천여 수비대 남김. 다뉴브 도하처인 아도니에도 병력 파견[151] 에스테르곰으로. 15일 기병대 호위, 19-20일 전부 떠남. 부다 수비대는 추격 안함. 철수 직후 1만 3천의 보스니아 원군이 부다 당도. 언덕 성채 장악하고 페슈트 포격. 마티아스, 페슈트에 탄약 보내줌. 교황 자금 지원, 이탈리아 공병대로 요새화. 마티아스, 내년 4월에 오스만 군이 당도하기 전에 부다 재차 포위할 것 공언[152] 1월 6일 코스탄티니예 시파히들의 조르바 반란, 10월에야 예니체리에 의해 진압됨. 1월 중순 에스테르곰에서 페슈트 향하던 보급 탈취, 바르다 민병대가 회복. 2월 10일 부다 수비대가 페슈트 공격하나 격퇴당하고 대부분 전사. 3월 1일 페슈트 포격, 페슈트 측의 대응 사격이 부다의 화약고 명중해 성벽 허뭄. 1300 독일군이 야습하나 격퇴됨. 5월 말 독일측 보급선 공격, 6월 초 재차 에스테르곰-페슈트 보급선 공격해 탈취는 실패하나 호위 병력 5백에 큰 타격. 7월 10일 포격 이어지던 와중의 페슈트에 5백 기병대와 함께 6개 병단의 새 병력 당도[153] 2월 24일 루돌프 2세, 브라티슬라바 의회 여나 전쟁에는 소극적. 4월 15일 프라하 회의 전달하나 5월 9일 역시 비관적 답장. 크림 칸국군이 판노니아 평원 (트란스다누비아) 습격, 현지 크로아티아 병력이 격퇴[154] 루돌프 2세는 외부 지원금 사적으로 착복, 스페인 측의 지원 중단. 이탈리아-독일 지도부 다투다가 칼부림까지, 6월 5일 루스보름 재신임. 메흐메트 3세, 작년 사로잡은 세케슈페헤르바르 수비대장 지오반니 마리오 이솔라노 석방하며 평화 협상 제안. 에게르, 너저카니자 영유 대가로 페슈트, 에스테르곰, 트란실바니아 영유 인정. 협상 기간 동안 양측은 재차 전쟁 준비. 8월 2일 오스트리아 군 빈 출정, 부다 대한 무력시위 위해 에스테르곰 향함. 10일 후 출정한 랄라 메흐메트 파샤, 페슈트 수복 초점. 다만 휘하 1만 병력 중 상당수는 기존 카라야즈즈 반란 후 사면된 데일 하산 파샤 휘하의 비정규군. 그들과 다투기 싫었던 크림 칸국군 귀환[155] 8월 12일 독일 해군 역시 탄약과 함께 에스테르곰 당도. 섹사르드에서 3천 독일 기병과 루멜리아 총독 무라드 파샤의 군이 조우, 전자의 공격으로 후자에 8백 전사. 독일군 강변 장악, 다리 방화하자 무라드 파샤 후퇴. 9월 초 1만 넘게 증강되어 돌아오자 부다에 있던 독일 기병대는 바츠로 철수[156] 루돌프 2세, 마티아스에게 코마롬 협상 중단케 하고 루스부름에게 진격 지시. 9월 17일 루스부름, 오스만군 진격 접수. 섬들에 병력 배치. 10월초, 센텐드레 섬에 배다리 놓음. 그외 체펠, 하로스 섬[157] 4만 오스만 군이 부다 남쪽 당도, 60척의 함대와 3천 예니체리 대동. 9월 21-23일 독일군 집결, 역시 4만이었으나 10월 말에야 전원 집결했기에 그전까지 제대로 맞서지 못함. 24일 루스부름, 첩자 보고로 오스만 군에서 실질 무장 인원은 1만 5천 남짓이고 나머진 보조병이라 여김. 다만 24-26일의 폭풍우로 교전 못함. 다뉴브 건넌 난민이 다음날 오스만 군의 체펠 섬 공격 계획 알려줌[158] 27일부터 다리 놓으며 진군, 교전 시작. 장교들의 반대에도 28일 새벽 재차 공격, 루스부름이 8천 기병대와 지원하며 포로 잡지 말고 강으로 밀어넣으라 지시. (왈롱 병사들 사체 훼손 대한 보복) 퇴로 막힌 예니체리 부대 결사저항, 저녁까지 싸우며 페슈트 다리와 독일군 진영까지 이르렀으나 독일 기병대의 반격에 밀려난 후 학살당함. 지휘관인 보스니아 총독 데르비스 파샤 포함 7천 전사, 역사가 크자탑 첼레비 포함 2천 생환. 독일군은 겨우 수십여 전사 및 150 부상, 오스만 지도부 서로 탓함. 다만 전투 틈타 부다의 독일군 진영 기습해 약탈. / 10월 4일 베오그라드에서 당도한 예미슈지 하산 파샤 해임, 16일 파트와 후 처형. 사파비 조의 아바스 1세, 9월 니하반드와 하마단 점령. 10월 15-21일 타브리즈 수복 후 11월 15일 레반 포위, 루돌프 2세의 사절 접견[159] 루스부름, 섬들 감시하며 평정. 체플 섬 중심 삼음, 10월 6일 부다 부근 오스만 진영 포격해 강변에서 철수시킴. 루돌프 2세, 10월 1일과 2일의 편지에서 루스부름에게 겨울 다가오니 부다 포위 포기하고 큰 전투에 응전하지 말며 페슈트와 체플 섬 방어에 치중할 것을 지시. 그외에 오스만 진영 습격해 와해시키고 그들의 철수 기다린 후 세케슈페헤르바르 탈환 시도하도록. 이에 부다 오스만 진영 근처에 진지 세우기 위해 서안과 다리로 연결된 하로스 섬 점령 계획, 11일 헝가리 군이 서안 진출. 12-13일 토벽 세워 600명 전초기지. 체플 섬의 포병대 엄호, 만약 대비해 후퇴 위한 선박 대기. 13일 정오 오스만 기병대의 습격, 30여 전사. 혼란 속에 사려관 콜니치 겨우 선박 당도. 루스부름, 총병과 대포 보내 지원하려 했으나 일요일에 병사들 취해 있어 실패. 장교들이 직접 포격하나 효과 미미. 2시간 교전 끝에 3개 전초기지 장악됨. 14일부터 체플 섬과 페슈트 대대적 포격, 오부다에 오스만 함선 끌어옴. 오스만 본영 에르드에서 언덕으로 남하. 다만 머르기트 섬 방면 대비 위해 오부다에도 재차 일부 배치. 20일 헝가리 군 탑승한 페슈트의 함대가 남쪽 퇴쾰리 섬의 오스만 함대 공격하나 병력 차이 지대함을 깨닫고 루스부름에게 지원 청하나 독일인들의 목숨 허비할 수 없다며 거부하자 철수, 그나마 큰 피해 없이 귀환.[160] 27일 비가 오자 루스부름, 체플 섬의 진영 접고 31일 전군과 북상. 센텐드레 섬의 다리 건너 서안 건너감. 교두보는 21일부터 기오르기 투르조가 지킴, 섬 남쪽에 사열한 후 편지 보내 전투 신청하나 응답 없음. 11월 1일 루스부름, 수백 기병대와 부다 성채 무력시위 나서나 랄라 메흐메트 파샤는 응전 금함. 독일군은 말을 전부 잃었고 고작 4-5일치 식량만 남은 상태, 2일 작전 회의에서 부다 포위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5일, 이번엔 오스만 기병대가 무력시위. 루스부름이 대군과 진군했으나 교전 없이 저녁에 양측 모두 회군. 6일 밤, 무라트 파샤에게 부다 맡기고 랄라 메흐메트 파샤 휘하 주 병력이 조용히 베오그라드 철수. 부다 수비대는 약화된 독일군 공격 안함, 13일 이성 잃은 일부 독일군이 인근 터키탕에서 발견한 비무장 터키인 30명 학살.[161] 지도부는 10주 간의 원정에도 2번째로 실패한 루스부름 비난, 이에 그는 돌연 하트반 공격 결정.12일 선발대 파견 후 15일 루스부름이 본군과 하트반 진군해 18일 당도. 포격하며 수비대에 항복 요구, 다음날 안전 철수 대가로 항복하고 솔노크 철수. 20일 루스부름과 독일군 역시 4백 수비대 남기고 철수. 12월 20일 메흐메트 3세 사망, 13세 아흐메트 1세 계승[162] 1604년 1월 헝가리 장군 페렌츠 나다스디 사망, 1605년 루스부름 기소된 후 처형됨. 아흐메트 1세, 재정 위기와 군부 반란에 시달리던 루돌프 2세에게 휴전 제의[163] 랄라 메흐메트 파샤, 독일군이 보치카이 반란에 집중된 틈에 진군. 독일 수비대 철수, 입성 후 부다 더욱 요새화[164] 11월 25일 벨그라드 당도[165] 1605년 전방위적인 오스트리아 측 전서의 붕괴 가속화. 랄라 메흐메트 파샤, 독일 점령 하에 놓인 마지막 주요 오스만 거점인 에스테르곰 해방을 통해 합스부르크 측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로 결정[166] 성 토마스 언덕 = 테페델렌.[167] 1605년 2월 21일 트란실바니아 의회, 보치카이 대공 선출. 3월 총독 바스타를 브라티슬라바로 축출 후 랄라 메흐메트 파샤에게 노베잠키 점령에 있어 도움 요청. 보스니아 총독 휘스레브 파샤 파견됨. 11월 11일 페슈트 당도한 보치카이는 랄라 무스타파 파샤의 주재 하에 헝가리 왕관 받음[168] 전 너저카니자 베이이자 신임 루멜리아 총독 티르야키 하산 파샤, 노베잠키 점령 후 남하하며 1598년에 잃은 두 도시 수복한 것[169] 신성로마제국, 에스테르곰 상실 후 전의 상실. 오스만 제국 역시 페르시아 전선 집중 요망. 5월 14일 협상 개시[170] 아흐메트 1세와 대공 마티아스 간에 서명. 북헝가리 소유 명목으로 납부하던 금화 3만닢의 연공 폐지, 20만닢 일시불로 퉁침.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사르' 인정, 바츠 할양 외에는 헝가리 국경 현상 유지. 크로아티아 전선의 페트린자, 모슬라비나, 차즈마 할양.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왕으로써 체결한 첫 조약. 1627년 갱신[171] 클루지나포카 항복, 10월 22일 의회에서 가보르 베틀렌 대공 선출. 오라데아에서 오스트리아 지원 기다리던 바토리 가보르는 10월 27일 살해됨[172] 사모스 부근, 시나리 파샤와 알렉산드리아 베이 마하메트 등 6백여 포로. 9월 27일 팔레르모 개선[173] 궁전에 있던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연기를 목도하고 경악, 반격하게 하나 격파됨[174] 궁전을 비우게 된 무라트 4세의 분노로 민간 선박까지 징발해 함대를 급조하자 철수한 것[175] 그중 1/4는 크림칸국, 왈라키아, 몰다비아 등 제후국 병력, 7월 12일 몰바비아의 야시 당도. 8월 27일 코사크 기병대 공격 받아 큰 피해 입었으나 전멸시킴. 31일 반격, 코사크와 폴란드 본군 분리해 섬멸하려 하나 실패[176] 당일 코사크 부분, 3일 주요 방어선 공격하고 재차 코사크 진영 총공격하나 실패하고 진지까지 밀려남. 4일 다시 코사크 진영 공격 실패, 폴란드 군의 반격으로 대포 일부 파괴됨. 7일 또다시 코사크 진영 공격하나 격퇴됨, 낮에 예니체리 부대가 잠든 폴란드 진영 기습해 수백 보병 살상하나 역시 밀려남. 다시 1만 대군으로 공격하나 시파히가 윙드 후사르에 분쇄됨, 30:500 교전비. 폴란드군, 10일 제안으로 12-13일 밤 야습 준비하나 장마로 철회. 그후 봉쇄하여 말려죽이기로 함. 14일 드네스트르 강에 가교 건설해 연락 차단, 15일 공격 역시 실패. 18일 코사크 군이 강변 진영 습격, 다수 전사. 21-22일 반복, 오릴리 후세인 파샤 막사 집중하여 포로될뻔. 24일 폴란드군 사령관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 과로사. 전날 위임받은 부관 루보미르스키, 약화된 수비대를 더 짧은 내벽으로 철수시킴. 오스만 군의 공세 실패, 28일 최후의 공세. 4만 손실, 오스만군 역시 식량 떨어져감. 오스만 2세, 수비대 측의 협상 요구 수용 (사실 호틴 수비대 화약 사실상 바닥난 상태)[177] 노가이의 칸 테미르의 사위 등도 포로 되고 노획물 대부분 상실[178] 폴란드 사령관 코네스폴스키, 카메니에크 포돌스키 요새화. 실리스트라 총독 아바지, 수천 타타르 보조병과 진군. 10월 중순 호틴 당도, 10월 20일 드네스트르 도하. 같은날 코네스폴스키와 충돌 ~ 21일까지. 22일 아바지가 공격하나 큰 손실과 격퇴됨. 폴란드 원군 / 조정의 명령 / 승산 없다 여김 중의 이유 중 하나로 철수[179] 4월 27일 에디르네 당도 후 상황 주시, 이라크 회복이 더 시급. 폴란드가 휴전 의사 내비치자 수용, 코스탄티니예 회군[180] 당시 러시아-폴란드 전쟁 중, 러시아 본토 심부에 대한 마지막 타타르 습격[181] 1636년 1만 포로, 마지막은 코즐로프 습격. 1636년[182] 술탄 이브라힘의 최후 통첩에 러시아가 굴복[183] 각각 1만, 6천 포로.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있어 노꾼이 필요했던 포르테의 부추김에 의한 것이라고도[184] 일시적으로 크닌까지[185] 자다르 ~ 스플리트 사이[186] 술탄 지시, 세게드의 파샤 트란실바니아 공격. 6만 대군과 대포 60문, 2월 12일 동북 헝가리 하즈두 대표들이 모여 전쟁 결의[187] 중상 입고 6월 7일 오라데아에서 사망함. 7월 13 혹은 14일 오스만 구이 도시 포위. 8월 27 혹은 28일 항복[188] 모든 교회 파괴, 궁전 교회는 모스크 전환[189] 크로아티아의 반 미크로시 즈리니, 1661년 너저카니자 부근에 즈리니-우즈바르 (노비즈린) 성채 건설. 지속되는 크레타 전쟁에 오스만 재상 메흐메트 쾨프륄뤼 역시 베네치아 본토 공격 구상, 남부 헝가리-카린티아-프리울리 혹은 달마티아 루트 구상. 레오폴트 1세, 트란실바니아 개입 원치 않음, 1661년 트란실바니아 합병 가능성 보이자 빈, 죄르, 코마롬 보급 기지로 삼고 트란실바니아에 소수 병력 파견. 다만 여전히 양 제국은 최대한 전쟁 피하려 함[190] 노비즈린 파괴, 레오폴트 1세는 케메니 야노시 돕지 않을것. 코마롬에서 출정한 1만 5천의 독일군은 식량 부족으로 도중 8천 상실, 트란실바니아 진군 후에도 9월 18일 미하일 1세 아파피 등극 소식에 클루지나포카 포기하고 철수[191] 9월 14일 선출, 11월 20일 의회 승인[192] 시기쇼아라 부근. 그후로도 오스만 지휘관 쿠추크 메흐메트는 계속 주둔[193] 빈에 당도한 날짜. 독일군이 트란실바니아 일부 계속 주둔, 레오폴트 1세의 빈약함을 이유삼아 재상 쾨프륄뤼 파즐 아흐메트가 전쟁 추진. 모라비아, 체코, 슐레지엔 정복해 빈을 양면으로 압박할 계획. 또 1661년의 협정 당시 파괴된 즈리니-우즈바르가 재건된 것 역시 전쟁 구실. 브라티슬라바 제국 의회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전쟁 준비, 용병들의 횡포에 헝가리 영주들이 코시체에 모여 분노 표출 후 빈에 사자 보내 오스만 측에 복속할 것이라 통보. 빈 조정은 프랑스의 오스만측 참전 여부를 두려워하며 우유부단, 12월 포르시아 공이 제국 지원금을 수비에만 쓰겠다며 반격 기류에 찬물 끼얹음. 12월 31일 코마롬 사령관 크리스토프 백작은 완전한 패배를 당할 것이기에 선전포고해선 안될 것이라 간언,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와 러시아를 공격하도록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 그럼에도 전쟁 준비 지속, 스페인과 교황청 도움 없이 헝가리 통합 돕기로 한 라인 연맹과 프랑스의 지원 수용.[194] 8만 오스만 군 진군, 7월 말에야 진군 가능. 노베 잠키 공격 결정, 강우 동안 오스트리아측 숨돌림. 그럼에도 머저로바르의 독일군은 기병 4300, 보병 1200, 경대포 24문에 불과. 한편 트란실바니아 군은 크림 칸국의 침공 위협을 받은 8월에야 오스만 진영 합류. 미하일 1세는 비밀리에 오스트리아와 협상, 개신교 자유 인정해주면 협력할 것을 시사 (다만 오스트리아 역시 페렌츠 라코치 옹립 고려함). 브라티슬라바가 전장이 될 것을 두려워한 레오폴트 1세는 왕관을 빈으로 옮기려 했지만 귀족들이 반대, 조정을 후방의 린츠로 옮길 것 역시 고려. 페렌츠 베셀레니, 16세 이상 장정 총 들 것을 요구[195] 에스테르곰에서 다뉴브 건너 북상, 노베 잠키 수비대가 응전해오자 격파. 2일 후 노베잠키 집결. 1만 2천-5천 독일군 준비되었지만 다른 영주들 응답 없고 감히 빈을 비우지 못함. 크로아티아의 즈리니는 9월 9일 1만 병력 모은 후 쾨세그 거쳐 브라티슬라바 건너편 루소프체 당도. 한편 9월 8일 파즐 아흐메트는 인접국에 술탄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함[13] 혹은 25일이라고도. 원군이 10월 초 브라티슬라바 당도, 급 문제로 진군 못함. 프랑스 병력 지체, 독일-체코 농민들은 보급 명령에도 숲과 산으로 도주. 11월 10일 레오폴트 1세, 외부 원조 수용 결정 후 프랑스-스웨덴-영국-스페인 등지에 사절 파견. 12월 22일 레겐스부르크 향하여 제후들의 도움 호소. 다만 직접 이끌기 원함[197] 바츠 북쪽, 27일간 포위[198] 배치된 독일 용병대가 한달 이상 급료 체불되자 도시 헌납하고 본국 귀환한 것. 한편 오스만 군은 모라비아 습격. 2백만 플로린 배상금, 미하일 1세의 헝가리 왕 인정, 노비즈린 등의 성채 파괴 요구[199] 2만 5천에 달하는 크로아티아-헝가리-독일군과 진군[200] 그후 페치 방면 습격대 파견, 시지케트바르 부근 쉴레이만 1세의 가묘 파괴. 2월 15일, 프랑스-네덜란드-영국이 대오스만 동맹 결성. 루마니아와 러시아에도 접근.[201] 오라데아 총독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가 레비체 향하는 독일군의 흐론 강 도하 막으려 한 것[202] 출정한 오라데아 수비대 전멸, 다만 라슬로 라코치 전사. 남은 수비대 굳건하여 독일군 철수[203] 파즐 아흐메트, 오시예크 다리 대신 배다리 건설한 후 드라바 강을 건너 6만 대군과 구원 나섬. 6월 11일 마인츠 대주교, 그만 싸우고 레오폴트의 대튀르크 전쟁 협력 지시[204] 즈리니의 요구에도 독일 군부는 식량, 지형 언급하며 돕지 않음. 오스만 군을 소진시키고 모으는 희생양 역할. 분노한 즈리니는 빈으로 회군, 파즐 아흐메트는 노비즈린 파괴한 후 너저카니자 주둔. 한편 빈 당도한 즈르니에 시민들은 6주간 축하해줌[205] 빈 조정은 프랑스 출신의 장 루이 드 수쉐에게 전군 통솔 맡김, 방어전 준비. 7월 22일 장 드 콜리니의 8천 프랑스 병력이 알프스 넘어 남서부 헝가리의 렌티에서 독일-헝가리군 합류 후 레바 강변 북상. 7월 23일 오스만 군이 바스 진입, 레바 강 따라 행군[206] 전선이 레바 강에 집중된 틈에 에스테르곰 총독 알리 파샤가 레비체, 니트라 수복 나섰으나 격퇴당하고 전사함. 이후 독일-헝가리 군은 8월 1일 슈투로보 진군하여 다리를 파괴함[207] 파즐 아흐메트 휘하의 선발대가 레바 강 도하 시도하나 우주방어에 실패, 프랑스 지휘관 장 드 콜리니 부상 입히긴 함[208] 7월 31일 남안의 오스만 군이 다리 건설, 1만 2천 선발대가 새벽에 건너 북안의 너지팔바 장악하며 개전. 수차례 연합군의 공격 버텼으나 예니체리 제외 병력이 약탈하던 틈에 프랑스 군이 공격해오자 무너짐. 한편 오스만 본군은 부족한 말먹이 모으며 다음날 개전 염두에 두느라 북안 돕지 않음. 게다가 금요일이라 열심히 싸울 마음 없음, 정오에야 증원됨. 참호 파며 다음날까지 버틸 준비, 콜리니가 철수하려 했으나 독일 사령관 볼프강이 루이 14세가 자신에게 지휘권 위임했다는 서신 보이며 무마시킴. 직속 상관 몬테쿠콜리의 저녁 철수 지시까지 거부, 1시에 초승달 모양으로 총공격. 오스만 군은 힘들게 버텼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파즐 아흐메트가 예니체리 부대를 다리 교두보 방어를 위해 철수시킴. 이에 남은 병력이 붕괴, 무질서한 후퇴. 프랑스 군의 추격과 사격으로 다수 사망, 홍수와 함께 다리까지 붕괴. 갑옷으로 수영 힘들고 수영 가능한 자도 못하는 자에 눌려 익사함. 가까스로 남안까지 간 이들도 집중 사격받아 학살됨. 7시간의 전투 끝에 약 2만여 오스만 군 전사. 부다 총독이자 메흐메트 4세의 매부인 이스마일 파샤 포함 35명의 아가-파샤 전사. 유럽 측은 약 4천 전사. 다만 홍수로 추격당하진 않음[209] 노비즈린 재건 금지, 노베잠키-니트라-레베치 영유 인정. 양측 모두 헝가리 독립 지원 않고, 그들의 준동 서로 알려줄 것을 합의. 프랑스 외에 오스트리아에도 오스만 제국 내의 무역 특권 줌. 다만 빈 조정은 이를 비밀에 부침, 그동안 루이 14세, 헝가리에 4천 추가 파병. 8월 16일 브라티슬라바 작전 회의, 전쟁 지속 주장. 8월 29일 미하일 1세, 승리 축하. 9월 27일에도 전략 회의 열려 향후 진로 논하나 휴전 알려지자 격노. 헝가리의 대실망, 유럽 전역 걸쳐 합스부르크 명성 추락. 한편 오스만 조는 협약 준수, 1670년 1월 즈리니 등 불만 품은 헝가리 귀족들이 반란 모의하며 지원 청하자 거절[210] 특히 1667년 10월 포다이체 전투에서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대패, 후자는 이듬해 2월 폴란드군 사령관 등극[211] 파즐 아흐메트 휘하 8만 대군[212] 10만 대군과 1천여 수비대. 8월 12일 접근, 14일 파즐 아흐메트 휘하 본군 당도하여 포격. 16일 후발대 당도, 20일 구 성채 탑의 화약고 명중해 폭발. 그후 공격하나 큰 피해와 격퇴됨, 계속 포격만 지속. 수비대는 구 성채로 물러남. 25일 구 성채의 탑 폭파, 공격하나 재차 격퇴됨. 다만 3차례 공격하며 압박[213] 27일이라고도. 30일 수비대 떠남, 9월 3일 파즐 아흐메트 입성해 성당 모스크 전환. 1만 수비대 주둔, 유대인 보호.[214] 5만 대군 vs 5백 수비대. 27일 성탑 중 하나 점령하나 다음날 격퇴됨, 지속된 포격으로 29일 틈 생김. 그러나 30일 협상[215] 무려 2만 2천 두카토, 한편 얀 소비에스키는 후사르와 10일 450km 를 누비며 4만 4천명을 구출함[216] 후사르의 진격에 시파히 붕괴, 혼란 초래. 후세인 파샤, 드네스트르 건너편으로 피신 명령하지만 연방군의 포격으로 유일한 다리가 파손된 탓에 오스만 군의 하중에 붕괴함. 3만 5천 수비대 중 수천만이 카미에니츠 당도. 그후 얀 소비에스키는 루마니아 일대 정복하려 했지만 승전 후 군대가 해산하여 카미에니츠 수복 나서지 못하고 수체아바, 호틴에 수비대 배치하는 것에 만족[217] 연방군은 저항하지 않고 철수[218] 서안 코사크의 헤트만 페트로 도로셴코는 여전히 오스만에 충성, 동안의 이반 사모일로비치는 러시아에 충성. 러시아-동안 코사크 군대는 도로셴코의 수도 키히린 포위[219] 9일간의 포위 끝에 함락한 우만에서 코사크-오스만 군은 남성 인구 학살하고 여성과 어린이 노예화함[220] 1675년 6월 말엽 이브라힘 시슈만 휘하 2만 군대가 르부프 진군, 7월 3만 크림 칸국군 합류. 얀 소비에스키 역시 르부프 남하해 주둔, 8월 22일 1만 타타르 군을 르부프 근교로 파견. 협곡에 갇혀 섬멸당함[221] 1만 병력, 루브프-케미아네츠 사이의 요충지. 1백 수비대와 2백 주민 결사항전, 르부프의 얀 소비에스키가 구원 준비[222] 이브라힘 시슈만과 기라이 1세 휘하 4만 오스만-크림 칸국군, 얀 소비에스키가 2만 대군과 반격 나섬[223] 타타르 군이 카루쉬 부근 약탈, 주라브노의 얀 소비에스키가 반격 나섰으나 타타르 군이 증원되어 철수. 이를 타타르 군이 공격하나 격퇴됨, 그후 폴란드 군은 3면이 강으로 보호받는 주라브노 요새화하고 주둔[224] 9월 26일 크림 칸국군, 28-29일 오스만 제국군 당도. 29일 얀 소비에스키가 강변으로 진영 옮기자 폴란드 군을 끌어내려 하나 실패, 포위 개시. 포격으로 큰 피해 입고 13일 밤에 일선 옛 방벽 버리고 진영 근처의 새 방벽으로 옮김. 도중 폴란드 포병대장 마르친 카지미에레즈 카트스키가 근교 성에서 옛 대포를 가져오게 하여 발사, 폴란드 군에 대포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이브라힘 시슈만은 원군 당도했다고 여겨 협상 개시 (포위측 역시 손실 큼)[225] 1만 기독교 포로 석방하고 포돌리아와 일부 루테니아 등 우크라이나 1/3의 지배권 공고히함. 다만 호틴 상실, 폴란드의 연공 백지화[226] 포르테는 유리 크멜니츠키를 헤트만으로 옹립, 4만 5천 대군 준비. 선발대와 타타르 군이 7월 30일 키히린 접근, 8월 3일 본대 당도. 10일 러시아군 출정, 24일 술라 강을 건너 진군. 오스만 군, 드네프르 건너편 부진에 교두보 마련하나 러시아-코사크 군이 습격해옴[227] 2만 상실, 9월 5일 러시아 군이 키히린 구원[228] 그랜드 와지르 카라 무스타파 휘하 12만 대군, 수비대는 1만 4천. 9일 카라 무스타파, 성채에 항복 요구. 저녁 드네프르 건너 성채로 향하던 2200의 원군을 격퇴, 20일부터 포격. (하루 최대 1천발) 22일 러시아-코사크 군이 부진 건넘, 다음날 2만 선발대가 포위망 공격해오자 격퇴. 25일 러시아 군의 공세에 밀리나 러시아 군이 원군 기다리며 고착화. 8월 5일 우크라이나 공 유리 크멜니츠키, 코사크 수비대에 항복 권유. 7일 외성의 교회 불 붙음, 4천의 러시아 원군 당도. 8일부터 특정 구역에 17문 집중 포격, 13일부터 틈에 3번 공격. 다른 곳에서 갱도 폭발로 성벽 붕괴, 맹공 하나 2시간 혈전 끝에 격퇴됨, 피해 살피던 장군 이반 레제프스키가 포탄 파편 맞아 전사[229] 드네프르 강변의 차스민 언덕. 10일 러시아 군, 오스만 선발대 격파하고 드네프르 도하. 11일 차스민 언덕의 오스만 진영 공격하나 혼란 빠져 패주. 13일 재차 공격해 1천 5백 잃었으나 3만 대군으로 밀어붙여 점령, 오스만 군은 다리 불사르고 후퇴. 러시아 측에 2명의 파샤 포함한 5백 병력 및 28문 대포 상실. 14일 러시아 군이 키히린 근교 주둔, 감히 응전하진 못하고 성채에 제한적 원군 보냄. 오스만 군, 재차 틈 벌려 공격하나 격퇴됨[230] 16-17일 러시아 군이 하류 방면 섬에 교두보 마련하나 격퇴. 오스만 진영 대한 포격도 효과 없음. 20일 성채로 1만 5천 보냄, 반격하나 무용. 21일 틈이 2개 증가, 오스만 군의 총공격. 코사크 부대의 분전으로 밀려나나 재차 공격, 차스민의 다리에서 러시아 군 격파. 수비대 혼비백산 하여 다리로 몰려들다가 무너져 다수 익사. 오스만 군은 시가지에 방화, 내성의 수비대 저항하나 22일 새벽 철수하며 화약고 발화해 진입한 4천 오스만 병력 폭사시킴. 22일 러시아 군이 수레를 두른 채로 드네프르 방면 철수, 추격 나섬, 23일 고지대 점령하고 러시아 군에 포격, 밀집된 탓에 모든 포탄에 살상. 24-26일 러시아 군이 고지대 공격하나 격퇴, 드네프르 건너편 코사크 병력 역시 공격하자 러시아 장교들 이탈 시도. 8월 31일 오스만 군이 키히린 파괴 후 철수, 9월 2일 소식 러시아 진영 닿음. 9월 6일 러시아 군 역시 철수[231] 주민 학살, 크멜니츠키의 부탁으로 교회에 피신한 70여 명은 살려줌[232] 1679년 1월 1일 러시아 특사가 코스탄티닝 당도, 2년간 협상 지연되다가 동맹 못찾은 러시아가 오스만 측 제안 수용[233] 러시아, 흑해 150km 거리 이지움 선 진출[234] 러시아는 크림 칸국에 사실상 조공, 코사크 인들의 권리 확대[235] 9월 26일 트란실바니아에서 모인 망명 귀족들 (쿠루크)은 케스마르키 퇴쾨이 임레를 지도자로 선출, 트란실바니아 대공 미하일 1세의 지원과 함께 상헝가리에서의 봉기 준비. 11월 27일 쿠루크 병력 헝가리 동부의 데렉스케에 집결시킴. 1678년 2월 16일 프랑스-트란실바니아의 추천으로 미할리 텔레키가 지휘관 되나 여전히 임레가 실권 지님. 터슈나드에서 트란실바니아 군과 합류, 6월 침공[236] 8월 초 센드르, 무란 요새 점령, 다만 텔레키와 트란실바니아 군의 프라쇼브 포위는 오스트리아의 원군 당도에 실패. 임레는 현지 슬로바키아 농민들과 침공 지속, 질리나-프레쇼브 사이 북부 일대와 흐론 강 유역 광산촌 점령. 10월 10일 반스카비스트리차 저항 없이 항복, 다만 11월 1일 지아르나트흐로놈에서 패한 후 광산촌 포기[237] 코시체 부근, 이로써 1680년 1월 8일 상헝가리의 단독 지도자로 선출됨[238] 8월 15일 케주마로크 점령, 레보차 포위 실패. 11월 15일 오스트리아와 휴전[239] 휴전 후 비노라디브, 베레호베 (둘다 우크라이나), 사투 마레 (루마니아)에서 월동. 1681년 4월 28일 레오폴트 1세, 쇼프론 의회 소집, 개신교 문제를 논의하지 않아서 쿠루크 측은 참가 거부. 5월 30일 부다의 이브라힘 파샤가 그랜드 와지르의 협력 제안 전달, 휴전 파기. (4월에 이미 지시한대로) 8월 말 트란실바니아 대공 미하일 1세가 출정[240] 트란실바니아 + 오라데아 파샤 휘하 오스만 병력, 1만 정도. 다만 티서 강 유역 습격한 후 회군, 11월 13일 오스트리아와 재차 휴전. 12월 평화 협상, 지지부진 되자 1682년 1월 코스탄티니예 사절 파견. 포르테는 2년 내로 헝가리 왕국 수복해 돌려주겠다고 약속. (퇴쾨이에는 헝가리 국왕 혹은 트란실바니아 대공 약속) 바스바르 조약 연장하려 와있던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지나친 요구하며 근래의 원정 준비. 6월 24일 퇴쾨이, 오스트리아와의 협상 중단.[241] 7월 말 부다의 이브라힘 파샤 휘하 3만 대군, 8월 초 미하일 1세의 8천 병력 출정. 도중 오노드 점령, 파괴[242] 그후 쿠루크 군대는 바흐 강 유역에서 오스ㅌ리아 군과 싸우고 이브라힘 파샤는 노베잠키 향함. 10월부터 광산촌에서 자금 조달, 오스만 제국에 매년 4만 탈러 연공[243] 광산촌 오스트리아에 돌려주었으나 5만 포린트의 수익 중 3천을 매년 상헝가리에 줌,그후 퇴쾨이는 오스트리아-오스만 중재[244] 베네치아 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