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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9 18:43:14

마라트 알 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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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아이유브 왕조 대에 지어진 대사원
1. 개요2. 역사
2.1. 1098년, 마라의 십자군2.2. 중근세2.3. 시리아 내전 : 격전지

1. 개요

아랍어 معرة النعمان
영어 Maarat al-Numan

시리아 중북부 이들리브 주의 도시. 이들리브에서 남쪽으로 25km, 하마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인구 6만의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남쪽 세력 입장에선 알레포, 북쪽 세력 입장에선 하마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십자군 전쟁 전반기와 시리아 내전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격전지가 되었다. 서쪽의 작은 도시 알 바라와의 사이에 로마시대 빌라 유적 세르질라 (سيرجيلة)가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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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박물관 (대사원 오른편에 위치)의 모자이크 대사원 내부 시설. 로마 유적의 재활용

로마 시대 때부터 도시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름은 '아라'였는데 635년 비교적 일찍 이슬람 제국군에 점령되었다. 666년 압둘 라흐만 이븐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 이어 홈스 총독이 된 누만 알 안사리[1]의 이름과 아랍어로 요새를 뜻하는 마라트 (혹은 기존 이름 아라)가 합쳐져 현재의 이름으로 붙여졌다. 다만 축약형인 '마라'로 곧잘 불린다. 891년 압바스 왕조의 지리학자 야쿠비는 당시 마라가 유적인 상태였다고 기록했는데 951년 이타크리는 포도, 무화과, 피스타치오, 올리브, 아몬드 등이 재배되며 좋은 물건이 가득한 호화로운 도시로 묘사하였다. 그 무렵부터 함단 왕조를 거치며 마라에는 베두인 바누 킬랍이 정착하였다. 1011년, 마라의 바누 킬랍은 할랍의 아미르 만수르를 도와 파티마 군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하지만 약속한 영지를 받기는 커녕 보복을 당하였다. 그러던 1016년 파티마 조에 의해 할랍 총독 아지즈 앗 다울라는 바누 킬랍과 친선을 유지하였다.

이후 1022년 아지즈 앗 다울라가 제거된 후 총독이 자주 교체되는 혼란기에 바누 킬랍의 지도자 살리흐 이븐 미르다스가 1024년 할랍을 점령하고 미르다스 왕조를 세운다. 살리흐는 종교를 막론하고 공정한 통치를 했는데 1026-27년 마라의 무슬림 군중이 범죄 의혹만으로 해당 기독교도의 와인 창고를 부수자 그들을 엄벌하였다.[2] 1047년 마라를 방문한 나시르 호스로는 금요 예배 사원과 인파로 북적이는 바자르 등이 있는, 성벽이 둘러진 큰 도시라 언급하였다. 그 이듬해 도시는 할랍 정벌에 나선 파티마 군에 점령되었으나 그들은 곧 할랍 포위에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다만 미르다스 군주 티말은 파티마 군에 함락되었던 하마와 마라의 성벽을 허물어 적의 이용을 막았다. 1061년 티말이 사망한 후 아티야와 마흐무드 간에 벌어진 내전에서 후자는 하마와 마라를 점령하였고 자신을 도와준 튀르크 용병들에게 마라를 영지로 주었다. 다만 도시는 1071년 아티야와 동로마 군의 습격을 받는다.

2.1. 1098년, 마라의 십자군

파일:마라 성채.jpg
1098년 학살의 장이 된 마라 성채

이후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마라는 안좋은 면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1098년 6월 안티오크를 함락한 십자군은 그곳에서 5개월간 주둔한다. 다만 예상과 달리 안티오크에서 충분한 식량을 찾지 못한 십자군은 주변 약탈에 나섰는데 그럼에도 식량난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 약탈전의 일환으로 십자군 지도자인 툴루즈 백작 레몽의 부관 레몽 드 필레가 7월 17일 마라를 공격한 것이 악연의 시작이었다. 다만 10일 후 알레포 (할랍)의 리드완이 구원에 나서 첫 공격은 실패하였다. 한편 9월 25일 백작 레몽이 직접 남하해 마라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알 바라를 점령, 주민들을 학살하고 주교를 봉하였다. 11월 말엽 안티오크 소유권의 결론이 나자 십자군은 남하하여 27일 마라를 포위하였다. 마라의 민병대는 서유럽 기사들을 상대로 무려 2주간 대등히 싸웠고 십자군은 공성탑을 만들어 한쪽을 공격하는 동안 일단의 기사들이 허술한 반대편을 공격한 후에야 성을 함락하였다. (12월 11일)

십자군이 몰려오자 주민들은 성채로 피신하거나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였다. 예상보다 저항이 강력하자 안티오크 공 보에몽은 항복하면 목숨을 보장해주겠는 제안을 하였고 시민들은 그에 따랐다. 하지만 12일 도시를 점령한 십자군은 약속과 달리 8천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한편 예상과 달리 마라 역시 수만명의 병력을 위한 충분한 식량이 없었고 십자군의 굶주림은 지속되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성벽을 장악한 보에몽과 시내를 장악한 레몽 간의 주도권 다툼이 일며 진군이 지연되자 배고픔을 견디다 십자군 병사들은 8천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인육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 과정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권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혐오주의.] 마침내 병사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보에몽이 안티오크로 돌아가자 레몽은 마라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방화한 다음 고드프루아와 함께 순례자 차림을 갖춰 입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이후 마라는 안티오크 공국령으로 남았는데 1104년 5월, 하란 전투에서 보에몽이 패배한 틈에 알레포의 리드완이 알 바라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던 1110년 12월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가 알레포를 침공하며 마라를 재차 점령하였는데 이듬해 9월 모술 총독 마우두드가 이끈 셀주크 제국군이 샤이자르 전투 직전 또다시 점령한다. 이후 도시는 다시 안티오크령이 되었는데 1119년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공작 로제르가 전사하자 그해 8월 샤이자르가 차지한다. 며칠 후 하압 전투에서 승리한 보두앵 2세가 수복한다. 1135년 4월 장기 왕조의 알레포 총독 사와르가 카파르탑과 함께 재차 마라를 점령하나 곧 안티오크 공국이 수복하였다. 1137년 여름 바린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장기는 그해 10월 마라를 점령하지만 이듬해 봄 샤이자르 공방전을 향하던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가 점령하였다. 다만 동로마 군이 철수하며 마라는 11번의 쟁탈전 끝에 무슬림령이 되어 평화를 회복한다.

2.2. 중근세

파일:마라트 알 누만.png
마라 대사원의 회랑

장기 왕조 이후 시리아를 제패한 살라흐 앗 딘은 1179년 바알벡 총독 이븐 무카담에게 도시를 동생 투란 샤에게 넘기는 보상으로 마라를 하사하였다. 이후 1185년 도시를 지난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마라는 주변이 정원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족한 곳 중 하나라고 서술하였다. 한편 1201년 봄 알 아딜에 반발한 알레포의 앗 자히르가 전자의 동맹인 하마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며 먼저 마라를 점령하였다. 다만 그후 도시는 안정적으로 아이유브,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거친다. 다만 1355년 마라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규모가 작은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때까지도 무화과와 피스타치오를 다마스쿠스에 수출하였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오스만 제국을 거쳐 현대 시리아로 이어진다.

2.3. 시리아 내전 :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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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시리아 군이 입성한 마라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마라의 주민들은 아사드 정권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후 2012년 반군과 정부군은 두 번씩 뻇고 빼앗기며 마라 쟁탈전을 이어갔고 그해 10월 최종적으로 반군의 자유 시리아 군이 점령하였다. 다만 정부군 역시 알레포로 향하는 거점인 마라를 포기하지 않아 싸움은 이어졌고 무수한 민간인 피해를 낳았다. 2016년 2월 정부군의 미사일에 병원이 맞아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는데 2017년 4월과 2018년 1월 이는 되풀이되었다. 이후 헤테시가 점령했지만 2018년 2월 반군이 되찾았고 2019년 7월 미사일이 시장에 떨어져 43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다. 결국 정부군의 무자비한 공세 속에 정부군의 수헤일 알 하산 장군이 2020년 1월 28일 마라를 점령, 알레포 이들리브의 반군을 압박하고 있다.


[1] 메카 출신 무슬림. 1차 피트나 때에 알리를 따른 대부분의 안사리들과 달리 무아위야를 지지하여 우마이야 왕조의 신임을 받았고 670년엔 요직인 쿠파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2차 피트나 때에 무아위야의 직계가 끊기자 메디나의 칼리파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를 지지, 그 휘하에서 홈스 총독을 지냈으나 684년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에 패하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차녀는 핫자즈 이븐 유수프 (الحجاج بن يوسف‎)와 결혼한다[2] 다만 이에 고무된 안티오크 총독 미카일이 미르다스 조를 침공하였고, 이는 1030년의 아자즈 전투로 이어진다[혐오주의.] 십자군 연대기 작가이자 목격자인 라울 드 카엥에 의하면 어른은 끓여 먹고 아이들은 꼬치로 구워 먹었다고함. 풀케르 드 샤르트르에 의하면 엉덩이 살을 베어내 구웠는데 굶주림을 참지 못한 병사들이 더 구워지기도 전에 먹었다고 함. 이 사건은 십자군의 잔혹함의 대표적 예시로 여겨진다. BBC 의 The Crusades: A Timewatch Guide 에서 이를 다룬 바 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