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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06 17: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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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전/이후의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1. 개요2. 역사
2.1. 상고대2.2. 고대
2.2.1. 에메사 왕조2.2.2. 세베루스 왕조와의 인연2.2.3. 3세기의 위기
2.3. 크리스트교의 도래2.4. 이슬람의 도래 & 아랍화
2.4.1. 에메사 공방전2.4.2. 레반트 지역 시아파의 중심지
2.5. 중세: 혼란 속의 번영
2.5.1. 9세기 중반: 연이은 반란들2.5.2. 10세기의 혼란2.5.3. 셀주크 제국과 십자군2.5.4. 장기 왕조2.5.5. 아이유브 왕조2.5.6. 맘루크 왕조 (vs 일 칸국)
2.6. 오스만 제국
2.6.1. 시리아의 맨체스터
2.7. 근대2.8. 시리아 내전
3. 창작물에서

1. 개요

파일:CH2-5.jpg
전쟁 전 홈스의 한 거리 모습 #

시리아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Ḩimş (힘스) 라고도 불린다. 현지 방언으로는 '훔스' 정도로로 발음된다. 인구 66만으로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알레포 다음으로 큰 제3의 도시이자 무슬림, 기독교도가 공존하던 도시이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 초기 격전지가 되며 2016년 통계에 의하면 20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2024년 시리아 내전이 종결된 이래로 난민들이 조금씩 돌아오며 어느 정도 회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로마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당시 명칭인 에메사가 더 친숙할 것이다. 3세기의 로마 황제인 세베루스의 황후 율리아 돔나와 이후 황제가 되는 엘레가발루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홈스는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태양신 숭배 신앙의 중심지로서 '검은 돌들의 어머니' (أم الحجارة السود)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무슬림에게는 7세기의 명장인 이븐 알 왈리드의 도시로 불린다.

4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도시이며, 십자군 전쟁기에는 서유럽 성채 건축의 진수라 불리는 크락 데 슈발리에가 도시 인근에 방어용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성 엘리아누스 성당과 알 누리 모스크의 공존이 돋보였던 도시였으나 시리아 내전 중에 일어난 홈스 공방전으로 시가지가 심하게 파괴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성벽은 검은색 화강암이 섞인 돌로 지어졌으며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으나 도시화와 여러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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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깊은 시타델. 다만 19세기에 파괴되었고 20세기 프랑스군, 21세기 시리아 군의 기지가 되며 더욱 파괴되었다. 칠중성?

2.1. 상고대

도시 중심부의 시타델 (내성) 발굴 결과 기원전 2300년경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구약 성경에는 조바흐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람세스 2세의 이집트 제국과 무와탈리 2세의 히타이트 제국이 대결한 카데시 전투가 홈스 인근의 오론테스 강가에서 일어났다.[1]

2.2. 고대

헬레니즘 ~ 로마 시대에 홈스는 에메사로 불렸다.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셀레우코스 1세가 설립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곳에 토착 왕조가 들어섰고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정복을 도우며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2.2.1. 에메사 왕조

기원전 1세기부터 에메사를 다스리던 셈계 (아랍/아람인) 왕조는 군주임과 동시에 태양신 엘 가발 (엘라가발)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정교일치 체제는 300여 년간 이어졌다. 그 시조격인 아지즈는 본래 베두인 족장이었는데 시리아로 이주, 오론테스 강가에 정착하였다. 그는 쇠퇴해 가던 셀레우코스 왕조에 개입하여 필리포스 1세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꺾고 즉위하게 도와주었고 그 후계자인 필리포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다. 아지즈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1세는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협조하여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로마의 요청대로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13세를 죽였다. (기원전 64년)

다만 삼프시케라무스 때의 수도는 에메사의 북쪽 교외에 위치한 아레투사였고 그의 후계자인 람블리쿠스 1세 (기원전 48 ~ 31년) 때에 에메사로 천도하였다. 에메사 일대의 화산질 토양 덕에 도시는 농업을 바탕으로 번영하였다. 도시 서쪽에 위치한 카티나 호수와 오론테스 강에 조성된 댐은 안정적인 농업 용수를 제공해 주었다. 그외에도 동쪽의 팔미라에서 페니키아로 향하던 상인들이 왕래하며 에메사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도시였다. 한편, 람블리쿠스 1세는 왕실과 폼페이우스 간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전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전투 당시 그에게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그 대가로 람블리쿠스 1세는 로마 시민권과 율리우스 성을 하사받았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람블리쿠스 1세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는 그의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의 수중에 있었고, 그는 람블리쿠스의 동생 알렉시오스 1세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람블리쿠스는 살해되었고 알렉시오스가 즉위하였으나 (기원전 31년) 같은 해 악티움 해전으로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시오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다. 이후로 에메사는 시리아 속주의 자치 도시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람블리쿠스 1세의 아들 람블리쿠스 2세 (기원전 20 ~ 서기 14년)를 에메사의 왕으로 임명하며 왕조는 복원되었다.

람블리쿠스 2세가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후 그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2세 (14 ~ 42년) 29년간 재위하며 에메사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콤마게네 왕국의 공주 로타파와 결혼하였으며 에메사 일대 한정이긴 하지만 삼프시케라무스 2세는 대왕 (Regis Magni)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치세인 32년에 에메사는 헬리오폴리스 (바알벡)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재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지즈 (42 ~ 54년)는 52년 경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헤롯 왕국의 공주 드루실라와 결혼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드루실라는 곧 로마의 유대 총독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져 이혼한 후 그와 결혼해버렸다. 아지즈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고 동생 소하이무스 (54 ~ 73년)이 계승하였다.

그는 친로마적 태도를 강화하여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에 궁수들을 파병하였고 72년 외가인 콤마게네를 로마가 합병할 때도 반발없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소하이무스의 친로마 정책에도 불구하고 73년에 그가 사망하자 에메사의 자치권은 박탈되었다. 소하이무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2세는 국왕 대신 로마 제국의 에메사 총독이 되었다. 이후로 시리아의 율리우스 가문은 태양신 엘 가발에 대한 제사장으로의 활동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엘 가발 신전의 사제는 금으로 수놓인, 발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보라색 튜닉을 걸쳤고 각종 보석이 박힌 왕관을 썼다.

2.2.2. 세베루스 왕조와의 인연

파일:세베루스황가.png
세베루스-에메사 황가

에메사 왕족 출신의 율리우스 바시아누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2세기 말엽 에메사의 제사장을 지냈는데, 당시 재혼을 위해 시리아 일대를 돌아다니던 로마 장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자신의 차녀 율리아 돔나를 결혼시켰다. 이후 193년, 세베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었고 바시아누스는 황제의 장인으로서 영화를 누렸다. 세베루스는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율리아 돔나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그중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하였는데 그역시 217년 파르티아 원정 직후 암살되었다. 당시 안티오키아에서 와병 중이던 모후 율리아 돔나는 아들의 시신을 마주하곤 자살하였다. 한편, 카라칼라의 치세에 에메사는 Ius Italicum, 즉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는 특례 도시가 되었다.

카라칼라의 암살을 사주하고 즉위한 마크리누스는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율리아 돔나의 언니인 율리아 마이사는 역시 에메사 왕가의 일원으로 보이는 율리우스 아비투스와 결혼하여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얻었다. 그리고 소아이미아스는 시리아 귀족 마르켈루스와 결혼하여 아들 아비투스를 얻었다. 마이사는 외손자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218년 5월 15일, 카라칼라를 그리워하는 병사들이 그를 에메사 인근 라파나이아의 군단 기지로 데려갔다. 병사들이 아비투스를 추대하자 마크리누스는 도주하였으나 결국 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아비투스가 즉위하며 로마는 첫 시리아인 황제를 맞았다.

그러나 본래 황위와 별 관련이 없던 그는 어린 시절 엘 가발 신전에서 사제로 지낸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신전의 수호자라는 뜻인 엘라가발루스로 불렸는데, 황제가 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아 로마에 미트라 신앙을 강요하고 남색을 일삼는 등 지지를 잃어버렸다. 이때 에메사 신전의 상징인 검은 돌[2]이 로마로 옮겨지고 포로 로마눔에 있던 유피테르 신전이 엘라가발리움이란 이름의 태양신 신전으로 바뀌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가문 자체가 붕괴될 것을 염려한 그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그나마 인망이 있던 그의 사촌이자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인 알렉산데르를 카이사르 (부제)로 삼았다.

그리고 222년, 엘라가발루스와 태후 소아이미아스가 근위대장에 의해 살해되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추대되었다. 그는 유약한 성격이었지만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지도로 무난히 재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27년, 10여년간 섭정을 맡았던 유능한 정치가 마이사가 사망하였다. 비록 알렉산데르는 232년에 사산 제국과의 전쟁은 무난히 치러냈으나 유약한 성품 탓에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휘둘렸고, 불행하게도 그녀는 어머니에 비해 정치에 소질이 없었다. 결국 235년, 게르만 족의 침공에 대비하러 원정에 나선 알렉산데르는 전투도 없이 평화를 매수하려 시도했다가 병사들의 반발을 샀다. 모녀는 진영에서 살해되었고 이로써 세베루스-에메사 황가가 단절되며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2.3. 3세기의 위기

에메사 황가 이후 로마 제국은 238년의 여섯 황제의 해와 연속으로 암살된 두 황제들[3], 또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한 데키우스를 거치며 쇠퇴하였다. 데키우스를 이은 트레보니아누스는 253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공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같은 해에 게르만 족이 재차 남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게르만 족을 격퇴한 아이밀리아누스가 봉기하여 그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역시 반역자 처단을 외치며 봉기한 라인 군단의 발레리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었다. 세 황제의 해 (253년)를 거치며 로마의 국방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254년, 샤푸르 1세는 재차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이때 235년부터 에메사의 총독을 맡았던 에메사 왕가의 후예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이란군을 격퇴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260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 나선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 1세의 포로가 되며 3세기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해 갈리아 제국이 독립하였고 267년에는 오데나투스가 사망하자 부인 제노비아에 의해 팔미라 제국이 세워졌다. 이듬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가 암살되며 분열은 장기화 되었다.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고트족을 격파하였으나 병사하였고 270년, 퀸틸루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부를 정비한 후 272년, 시리아 정벌에 나서 안티오크에 이어 에메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팔미라 군을 격파하였다. 제노비아는 포로가 되었고 팔미라가 항복하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에메사의 엘 가발 신전을 찾아 감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다만 에메사의 주요 교역 상대였던 팔미라가 몰락함에 따라 도시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2.3. 크리스트교의 도래

제국을 통합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사후 잠깐의 타키투스 형제를 지나 로마는 프로부스, 카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리고 사두정치 이후 등장한 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현제들의 치세를 거치며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기존 로마 정치에 대한 불신과 종말론적 사회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크리스트교가 뿌리내렸다. 다만 에메사는 인근의 다마스쿠스와 달리 태양신 숭배의 중심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4세기에도 여전히 소수였다. 주교가 설치되었지만 실권은 없었고 초대 주교인 실바누스는 메소포타미아 원정을 위해 에메사를 들른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처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막지 못했는지 5세기 무렵 에메사는 시리아 중부의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로마 관리의 아들로서 개종을 거부하고 순교한 성 엘리아누스 (? ~ 282년)를 기념하는 성당이 기존 엘 가발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432년) 변화의 상징이었다. 452년에는 시내에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에메사는 시리아 중부를 관할하는 주교구가 되었다. 엘리아누스 성당에는 6세기 경 프레스코 화가 남아있다. 에메사는 618년 이란 군대에 함락되었으나 큰 피해를 입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로마-사산제국 전쟁을 틈타 바누 칼브를 중심으로 한 아랍인들이 에데사 인근에 정착하였다. 아랍화는 이슬람 정복 이전에 시리아와 이라크에 만연하였다.

2.4. 이슬람의 도래 & 아랍화

그들의 식량은 낙타의 고기와 젖에 불과하다. 그들은 추위를 버텨낼 수 없다. 추운 날마다 그들과 응전하라, 봄이 올 때까지 그들 중 아무도 남아있지 않도록.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에메사 총독 하르비스에게.

634년 9월,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며 시리아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공세가 본격화 되었다. 635년, 라쉬둔 왕조의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시리아 중부로 파견하였다. 이에 에메사와 킨나스린의 주민들은 공물을 바치며 아랍 측과 1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다만 동로마 지원군이 도달한다면 휴전은 무효화 된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에메사는 1만 디나르와 100벌의 예복을 제공하였다. 휴전이 성립되자 에메사의 성문은 개방되었고 무슬림들이 시내의 시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메사의 동로마 지도부에게 휴전은 수비 태세를 강화할 시간 벌이용에 불과하였다.

에메사는 동로마 제국의 대아랍 사령부가 위치했던 중요한 도시였고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에메사 총독 하르비스는 곧 다가올 겨울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아랍 군대를 약화시킬 것을 믿고 협정을 위반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에메사 대신 시리아 중북부를 공략하던 아랍인들은 샤이자르를 항복시킬 즈음 이 소식을 들었다. 할리드를 선두로 한 군대가 협정을 어긴 에메사를 포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동로마 수비군이 성밖을 나와 맞섰지만 할리드에게 패배하고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635년 12월) 원형 성벽에 해자가 둘러진 에메사는 당시 시리아 도시들 중 가장 견고한 요새였다.

2.4.1. 에메사 공방전

우리는 기존에 경험한 (동로마 제국의) 억압과 폭정보다 당신의 지배와 정의를 훨씬 더 선호합니다.
ㅡ 에메사 시민들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알 발라두리의 기록
자애롭고 자비로운 신의 이름으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주민들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중략) 그는 그들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교회들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들의 도시 성벽은 파괴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무슬림도 그들의 집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유일신과 그의 예언자, 칼리파들, 그리고 그의 신도들의 보호를 서약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인두세[4]를 납부하는 한 그들에게 좋은 일만이 있을 것입니다.

ㅡ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약속[5]

아랍 군대는 4개의 문에 각각 진영을 세웠고 북문 쪽에 아부 우바이다와 할리드가 배치된 본영을 설치하였다. 이후로 3달간 양측은 서로 활을 쏘며 대치하였고 예상과 달리 무슬림 병사들은 겨울을 이겨내었다. 해가 바뀌어 636년 3월, 겨울이 끝나갔음에도 포위가 유지되자 동로마 수비대는 당황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식량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이에 하르비스는 포위측에 지원병이 도달하기 전에 그들을 격파하기로 하고 5천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아침 일찍 성을 나와 아랍 진영을 기습하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랍인들은 당황하여 밀려났다. 하지만 할리드는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활약하였고 이에 무슬림 군대는 재정비할 수 있었다.

할라드는 방어에 일관하다가 한순간 반격을 가하여 동로마 군을 몰아내었고, 해질녘 쯤에 그들은 다시 성안으로 퇴각하였다. 포위 내내 아랍 측이 가장 큰 피해인 200여명을 잃긴 했지만 결국 하르비스의 돌파 시도는 실패하였다. 한편, 다음날 아침 아부 우바이다는 작전 회의를 열어 전날 습격을 허용한 병사들을 질타하였다. 할리드 역시 '그들은 내 지금까지 봐온 로마군 중 가장 용감했다'고 말하였다. 이에 아부 우바이다가 조언을 구하자 할리드는 거짓 후퇴 작전을 내었고 이는 수용되었다. 다음날, 아랍 군대는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정석과 달리 후미에 정예병이 배치된 상태였다. 아쉽게도 하르비스는 용맹했으나 전략에 능하지 못하였다.

아랍인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패주한다고 생각한 하르비스는 이 기회를 놓칠새라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무슬림 군대를 '따라잡자' 그들은 즉각 돌아서서 반격하였고 할리드가 명령을 내리자 두 무리의 병사들이 전장을 이탈하였다. 그들은 동로마 군대를 우회하여 그들의 후위에 나타난 후 그대로 돌격하였다. 13세기 몽골군의 모습을 보는 듯 아랍 기병대는 체계적으로 동로마 군대를 포위망에서 옥죄기 시작하였다. 한편, 할리드는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동로마 군의 중심으로 돌격하였다. 그는 전투 중이던 하르비스를 노리고 있었다. 거구의 동로마 장수가 막아섰으나 할리드와의 일기토에서 쓰러졌고 하르비스도 곧 전사하였다.

한편, 전투가 지속되던 와중에 마아즈 이븐 자발이 이끄는 5백의 아랍 기병대는 전장을 떠나 에메사로 향하였고 성안의 로마군이 나오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성밖의 로마군이 성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통제하였다. 다만 5천에 달하던 동로마 추격대 중 고작 백여명만이 살아남아 마아즈가 활약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1만 5천의 무슬림 군대는 세 달의 포위 동안 겨우 235명만을 잃었다. 결정적인 전투 이후 할리드가 재차 에메사를 포위하자 주민들은 10만 디나르의 지즈야[6]를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아부 우바이다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636년 여름, 에메사를 탈환하려 노력하던 헤라클리우스는 야르무크 전투에서 대패하자 철수하였다.

2.4.2. 레반트 지역 시아파의 중심지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부는 다마스쿠스, 북부는 에메사 (홈스)를 중심으로 분할하였다. (준드 힘스) 이때 5백여명의 사바하 (무함마드의 동료)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이 유입되며 홈스는 7세기경 시리아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럼에도 홈스 중심부에 위치한 성 요한 성당의 절반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마스지드 (모스크)로 개조된 것을 제외하면 시내의 교회들은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665년, 4대 칼리파 알리의 즉위와 함께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가 벌어졌다. 이때 홈스 시민들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 대신 정통성을 지닌 알리를 지지하였는데, 661년 알리가 암살되며 무아위야가 승리하였다. 그는 홈스가 중심인 준드 힘스를 분할하여 시리아 북부를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준드 킨나스린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응징하였다. 이때부터 시리아는 3개의 지방으로 분류되게 되었다.

홈스는 우마이야 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의 거점으로 남았다. 특히 알리의 지문이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설교단은 성유물로 여겨졌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말엽 벌어진 3차 피트나 당시 홈스 주민들은 바누 카이스에 맞서 바누 칼브가 속한 예메니, 그리고 그 예메니를 선호한 왈리드 2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가 살해되고 야지드 3세가 집권하자 홈스 시민들은 무아위야 1세의 증손자 아부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옹립하였으나 정부군에 패하였다. (744년) 다만 이후로도 홈스는 혼란을 틈타 반정부 도시로 남아있었다. 왈리드 2세 사후 744년에 야지드 3세가 요절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브라힘이 양위하며 마침내 마르완 2세가 집권하였다. 제국 복원을 꾀한 마르완 2세는 745년 말, 우선적으로 홈스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무려 10개월이나 지속되었고 그 틈에 이라크 북부에선 앗 다하크가 카와리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746년 여름, 홈스는 함락되었다. 다만 3년도 못가 도시는 아바스 왕조령이 되었다.

2.5. 중세: 혼란 속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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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왕조 시절 시리아 일대와 준드 홈스

891년 무슬림 지리학자 알 유쿠비에 의하면 홈스는 큰 강 옆에 위치하여 주민들의 식수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10세기 초엽 아랍 지리학자 알 마수디는 홈스의 거주민들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였다고 기록하였다. 985년 알 무카다시는 홈스가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나 '큰 불행'을 겪었고 파괴의 위협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2.5.1. 9세기 중반: 연이은 반란들

압바스 왕조 시절 홈스는 수차례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854 ~ 855년에 일어난 반란이 가장 큰 규모였다. 9세기 중반 무렵 압바스 조는 튀르크 인들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삼았고 홈스에도 튀르크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가 시민들과 충돌한 것이다. 854년 가을, 튀르크 주둔군 사령관이자 태수인 무사가 홈스의 원로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하는 일이 벌어지자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튀르크 병사들이 다수 살해되었고 무사를 포함한 압바스 측 관료들은 하마(도시)로 도주하였다. 이에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후임 태수로 아랍인인 무함마드 이븐 압다와야를 파견하였고 이어진 협상에서 시민들은 그를 수용하였다.[7] 하지만 이븐 압다와야 역시 높은 세금을 유지시켰고 당시 시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폈다. 결국 855년 가을에 도시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2차 반란이 일어났다.

비보를 들은 알 무타와킬은 신속히 다마스쿠스와 팔레스타인 (라믈라)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3명의 원로들이 장살당한 후 십자가에 메달렸고 20여명의 시민들이 매질을 당한 후 제국의 수도인 사마라로 압송되어 성문에 효수되었다. 한편, 그렇지 않아도 타종교에 대한 불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알 무타와킬은 2차 반란을 그리스도교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637년에 이슬람 제국군에 점령된 후 200여년간 무슬림들과 공존하던 홈스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때 추방되었고 시내의 교회들이 이슬람 사원 (마스지드/모스크)로 바뀌었다. 절반은 성당으로, 나머지 반은 모스크로 쓰이던 성 요한 성당은 이때 알 누리 모스크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다만 수십 개의 교회들은 이때에도 살아남아 현재에 이른다.

홈스는 이후로도 862년과 864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전자의 경우 태수 카이다르의 폭정에 의한 것이었고 그는 도시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850년대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새로 파견된 태수 알 파질을 수용하였다. (862년) 그럼에도 반란 세력은 여전하였고 이에 파질이 도당들을 처형하고 백명의 귀족들을 사마라로 압송하였으며 도시 성벽을 허물었다. 하지만 그의 강경 조치는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 하였고 결국 시민들은 아랍 부족인 바누 칼브와 연합하여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864년) 파질은 칼리드 궁전에서 농성하였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반군에 넘겨져 처형되었다. 반군은 그의 시신을 성문에 효수하고 몇개월간 반란을 지속하였으나 압바스 조의 튀르크 계 장군인 무사 이븐 부가에게 진압되었다. 878년부터 홈스는 툴룬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903년 (아직 압둘라 알마흐디에 충성하던) 시리아 카르마트에게 점령되어 그 중심지가 되었다가, 이흐시드 왕조를 거쳐 함단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944년)

2.5.2. 10세기의 혼란

함단 왕조는 960년대 동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아 약화되었다. 그러자 함단 조의 튀르크계 장군이던 아프타킨이 북부 시리아를 침공하여 홈스를 근거지로 삼았다. 975년, 동로마의 중흥을 이끈 요안니스 1세는 파티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남하하여 340년만에 홈스에 로마군이 주둔하였다. 이때 일시적으로 모스크들이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학살과 약탈이 이어졌다. 995년에는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군이 일시적으로 홈스를 점령했고, 999년에도 동로마 군이 근처를 지나가며 1001년의 휴전 체결 시까지 불안이 계속되었다.

2.5.3. 셀주크 제국과 십자군

십자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요새
11세기 들어 파티마 제국의 속국인 미르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홈스는 1080년 우카일 왕조의 군주 샤라프 앗 다울라 무슬림이 점령했다. 그는 바누 킬랍 출신의 사이프 앗 다울라 칼라프 이븐 물라이브 알 아슈하비를 홈스의 총독으로 봉했다. 칼라프는 1085년 무슬림이 사망한 후 알레포에서 자립한 튀르크인 호족 아크 순쿠르 알 하지브에도 복속했다. 다만 1086년 아크 순쿠르가 셀주크 제국에 복속했음에도 셀주크 술탄 말리크 샤의 미움을 산 칼라프는 1090년에 축출되었다.[8] 1095년 시리아 셀주크의 투투쉬 1세가 사망하고 두 아들인 리드완과 다쿠크가 대립하자, 전자의 알레포 후국에 복종하던 홈스 총독 자나 앗 다울라는 내전이 격화되던 1097년에 자립했다. 1098년 자나 앗 다울라는 다마스쿠스의 다쿠크 및 모술의 카르부카와 함께 1차 십자군이 포위한 안티오크 구원에 나섰으나 곧 물러났다.

십자군은 홈스를 '라 샤멜레'로 지칭했고,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드 생질은 홈스를 점령해 수도로 삼으려는 야망이 있었다. 1103년 봄, 자나 앗 다울라는 신생 안티오크 공국의 아스포우나 요새를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했다. 하지만 같은해 5월 그는 트리폴리 인근 자신의 요새를 구원하러 가기 전, 출정식의 일환으로 금요 예배를 드리던 도중 아사신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홈스는 다마스쿠스 후국 (부리 왕조)령이 되었다. 그리고 1106년 아파메아, 1108년 하마가 함락되는 등 홈스는 점차 십자군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었다. 1109년 트리폴리 구원에 나선 다마스쿠스 병력이 십자군에 패한 후 홈스로 도주했고, 추격해 온 십자군은 요새화된 홈스 대신 샤이자르를 약탈한 후 돌아갔다.

한편 1104년 두카크 사후 다마스쿠스를 얻은 툭테긴은 튀르크 장군 키르한 이븐 카라자를 홈스 총독에 봉했는데, 점차 독립성을 보였다. 1115년 1월 키르한은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를 사로잡았고, 그는 아들 아야즈를 인질로 풀려난 후 홈스를 포위했다. 다만 같은해 술탄의 명으로 출정한 아미르 부르수크가 다가오자 일 가지는 철수했고, 키르한은 술탄 군대에 가담했다. 1115년 6월, 부르수크는 다마스쿠스령 하마를 점령한 후 키르한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이로써 키르한은 홈스와 하마를 지배하며 시리아 제3의 무슬림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듬해 툭테긴이 술탄과 화해하며 홈스 지배권을 인정받았지만, 명목상에 그쳤다.

1117년, 알레포의 권신 이븐 미힐은 일 가지의 대리인으로써 상주하던 아들 키질을 키르한에게 넘기며 동맹했다. 1118년 6월, 일 가지가 알레포로 향하자 이븐 미힐이 구원을 청했으나 일 가지와 동맹한 툭테긴이 홈스를 공격해 키르한을 묶어두었다. 그동안 일 가지는 알레포를 점령했다. 1125년, 키르한은 알레포의 새 군주 알 보르소키와 아자즈 전투에 나섰으나 십자군에 패했다. 1126년 1월 툭테긴은 홈스의 아사신 지부와 함께 마라즈 앗 사파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군주 보두앵 2세를 격퇴했다. 다만 그후 트리폴리 백작 퐁스가 보두앵 2세의 도움으로 라파니아를 점령하고 (시타델을 제외한) 홈스를 약탈했다.

1128년, 키르한은 샤이자르의 문키드 왕조와 함께 알레포의 새 군주 이마드 앗 딘 장기에 복속했다. 다만 얼마 후 다시 부리 왕조에 복속했다가, 1130년 10월 부리에게 반기를 들며 장기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남하한 장기는 하마를 점령했고, 키르한을 감금한 후 홈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키르한의 아들이 붙잡힌 부친을 본 후로도 결사 저항하자, 40일의 공성전 끝에 장기는 근교를 약탈한 후 회군했다. 1131년 8월 장기는 홈스를 포위했으나 부리가 이라크의 베두인 군주 두바이스를 인질로 넘겨주자 회군했다.[9] 1137년 6월, 장기는 다시 홈스를 포위했다. 부리 왕조의 총독 우누르는 결사 저항하며 트리폴리 백국에 구원을 청했다. 이듬달 장기는 포위를 풀고 트리폴리로 진격한다.

한편 그해 9월, 레반트로 친정한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에게 항복한 안티오크 공작 레몽은 도시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레포-하마-홈스-샤이자르 영지를 요구했다. 10월, 4번째로 홈스를 포위했던 장기는 곧 포기하고 남쪽의 바니야스 등지를 점령했다. 1138년 2월, 장기는 5번째로 홈스를 포위했고 도중 압바스 칼리파의 예복을 수령했다. 이듬달 요안니스 2세는 레몽과 함께 홈스를 목표로 남하했으나, 도중 샤이자르 공방전에서 패하고 철수했다. 6월, 장기는 부리 왕조의 태후 주무루드에게 청혼하며 지참금으로 홈스를 요구했다. 8월, 홈스에서 결혼식이 치러졌고 장기 왕조령이 된 홈스를 대신해 우누르에게는 바린이 영지로 주어졌다.

2.5.4. 장기 왕조

파일:누리 모스크.jpg
기존의 엘 가발 신전에서 세례 요한 성당을 거쳐 모스크가 되었고, 1180년경 누르 앗 딘에게 증축된 앗 누리 대사원

1139년 부리 왕조의 실권자가 된 우누르는 십자군과 동맹해 장기에 맞섰고, 이에 주무루드 태후의 구원 요청을 받은 장기가 남하해 바알벡을 점령한 후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장기는 아미르 자말 앗 딘에게 항복하면 홈스 혹은 바알벡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우누르가 묵살시켰다. 여러 차례 포위한 끝에 마침내 1154년 4월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 마흐무드는 항복한 아미르 무지르 앗 딘 아바크를 홈스에 봉했다. 다만 2달도 안되어 그가 다마스쿠스 수복을 꾀하다 발각되자, 영지를 압수했다.[10] 1157년 8월의 시리아 대지진 당시 홈스는 큰 피해를 입었다. 1163년 9월, 부카이아 전투에서 십자군에게 패배한 누르 앗 딘은 홈스로 피신했다.

이때 부관이 십자군의 추격을 우려하며 이동을 제안했으나 누르 앗 딘은 복수 전까지 그늘에 앉지 않겠다 신에게 맹세하며 보급품을 징발해 병사들 및 전사자 유가족에게 분배했다. 그러자 십자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1168년 10월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는 홈스 공격을 선포했고, 이에 누르 앗 딘이 북상하자 남하하여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이에 누르 앗 딘은 홈스 총독 시르쿠를 이집트로 파견했다. 1169년, 이집트의 실권자가 된 시르쿠가 사망하자 조카 살라흐 앗 딘 유수프가 계승했다. 1170년 6월, 재차 대지진이 벌어져 홈스는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누르 앗 딘과 대립하던 살라딘은 1174년 다마스쿠스를 접수한 후 같은해 12월 홈스를 점령했다.

2.5.5. 아이유브 왕조

다만 시타델은 여전히 버텼고, 살라딘은 요새화된 시타델을 정면 공격하는 대신 포위군을 둔 후 북상하여 하마를 접수했다. 1175년 2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홈스 시타델과 합류해 아이유브 주둔군을 공격하자 살라딘은 알레포 포위를 풀고 남하했다. 그러자 십자군은 철수했고, 알레포의 앗 살리흐는 감사의 표시로 르노 드 샤티용 등의 포로들을 석방했다. 뒤이어 홈스 시타델 포위에 나선 살라딘은 3월 중순에 함락했고, 4월의 하마 전투에서 알레포-모술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살라딘은 사촌 나스르 앗 딘 무함마드 이븐 시르쿠를 홈스의 아미르에 봉하며 팔미라라흐바의 영지를 더해주었다. 홈스 아이유브 가문은 87년간 이어진다.

1178년 3월, 살라딘은 몽지스가르 전투의 설욕을 위해 홈스에 주둔했고 6개월 후 하마 전투에서 승리했다.[11] 1182년 홈스 군대는 다마스쿠스 총독 피루크샤의 하비스 잘두크 점령을 도왔다. 1186년 3월, 살라딘이 홈스에 머물던 때에 홈스의 아미르 나스르 앗 딘이 사망하고 아들 알 무자히드 (시르쿠 2세)가 계승했다. 작년 살라딘의 와병 시에 찬탈을 모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암살된 것이라 한다. 살라딘 사후 내전이 벌어지던 1199년, 알 아프달은 알레포-홈스 병력과 함께 알 아딜과 맞섰으나 패했다. 1201년 6월, 알 자히드는 알레포 군대가 다마스쿠스를 점령한다면 앗 자히르에게 복속할 것을 서약했다. 다만 포위는 실패했고, 그해 10월 알 아프달은 홈스로 철수했다.

그후 알 무자히드는 알 아딜에게 복속, 1203년 5월 그의 지시대로 하마의 알 만수르와 함께 크락 데 슈발리에를 공격했다. 다만 실패한 후 10월에 구호기사단과 휴전을 맺었다. 1225년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에 의하면 홈스를 강력한 요새 도시로 묘사했다. 알 무자히드는 술탄 알 카밀의 사후 이집트의 알 아딜 2세를 지지했는데, 1239년 3월 다마스쿠스의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하마의 알 무자파르와 함께 홈스를 포위했다. 다만 곧 이집트 아미르들이 내통하며 초청하자 포위를 풀고 나블루스에서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틈에 바알벡의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알 무자히드와 함께 다마스쿠스를 기습 점령했고, 반격하려던 아이유브는 케라크의 앗 나시르에게 사로잡혔다.

무려 반세기 넘게 통치하던 알 무자히드는 1240년 2월에 사망했고, 아들 알 만수르 이브라힘이 계승했다. 그해 말엽, 알 만수르는 석방되어 이집트를 장악한 아이유브가 풀어둔 호라즘 용병대와 맞서느라 십자군에 반격하지 못했다. 1241년, 알 만수르는 호라즘 군을 격파하고 하산케이프를 제외한 아이유브령 자지라 전역을 점령했다. 다만 그해 여름 다마스쿠스의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 패했고, 그 틈에 호라즘 군이 홈스를 공격했으나 격퇴했다. 이후 이스마일에 복속했던 알 만수르는 1243년 이스마일과 아이유브가 화해하자 후자를 술탄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곧 내전이 재개되자 1244년 가을, 알 만수르는 이스마일의 동맹인 야파 백작 고티에와 아크레 근처에서 합류했다.

다만 이어진 라 포르비에 전투는 시리아-십자군에 대한 이집트-호라즘 군의 완승이었고, 알 만수르는 홀로 분전하다 철수했다. 1245년 10월, 알 만수르는 영지 보존을 대가로 이스마일과 함께 술탄에 항복했다. 1246년 4월, 이스마일이 호라즘 군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자 아이유브에게서 그 총독 자리를 약속받은 알 만수르는 즉각 구원에 나섰다. 5월의 알 카삽 전투에서 알 만수르는 포위군을 격파했고, 호라즘 지도자 베르케 칸이 전사했다. 이로써 시리아는 7년간 이어지던 호라즘 군대의 침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를 얻은 후 외곽에서 아이유브의 초청을 받아 이집트로 갈 채비를 하던 알 만수르는 같은해 6월에 병사했다. 사후 어린 아들 알 아슈라프 무사가 계승했다.
1247년, 아이유브가 다마스쿠스와 바알벡 등지를 친히 정복하며 북상하자 알 아슈라프는 살라미야를 바치며 복속했다. 술탄의 회군 후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이스마일이 홈스를 포위했고, 아이유브는 후삼 앗 딘을 살라미야로 보내 그곳의 근위대와 함께 구원하게 했다. 다만 친정에 나서려던 아이유브는 병으로 취소했고, 그러자 알 아슈라프는 8월에 팔미라-라흐바 영지를 대가로 항복했다. 그러자 아이유브는 가마를 타고 가을에 다마스쿠스에 당도, 장군들에게 왕실 휘장과 함께 홈스를 봉쇄하게 했다. 1249년 3월,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사절 나즘 앗 딘 알 바디라이가 홈스에 당도해 협상을 중재하자 아이유브가 수용했다. 이로써 홈스는 앗 나시르 유수프의 영토가 되었다.

2.5.6. 맘루크 왕조 (vs 일 칸국)

1260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시리아를 정복할 때에 알 아슈라프는 남쪽으로 향한 앗 나시르 유수프를 떠나 2월에 알레포에서 훌라구에 복속했고, 홈스 영지의 회복에 더해 시리아 전역에 대한 나이브 알 물크 (총독)로 봉해졌다. 같은해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알 아슈라프는 몽골군에 가담했다가 바이바르스의 밀서를 받은 영향인지 도중 이탈해 팔미라로 피신했고, 승리한 술탄 쿠투즈가 다마스쿠스를 접수하자 그곳으로 향해 용서를 구했다. 쿠투즈는 그대로 홈스 영지를 영유하도록 사면했고, 뒤이어 바이바르스는 훌라구가 파견한 2천의 몽골 구원 부대를 홈스에서 격파했다. 12월의 1차 홈스 전투에서 바이바르스는 시리아 연합군을 이끌고 6천의 몽골군을 격파했다.

1261년 7월에는 맘루크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아쿠쉬 알 바를리가 홈스로 남하해 알 아슈라프에게 호응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었다. 1262년 (혹은 1264년) 알 아슈라프는 사망했고, 홈스는 맘루크 술탄의 직할령이 되었다. 이로써 시리아의 아이유브 제후국은 하마만이 남아 1342년까지 이어졌다. 1265년 바이바르스는 홈스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원을 세웠다. 다만 당시의 모습은 1912년의 보수 공사로 인해 다소 달라졌다. 같은해 보에몽 6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카이사레아, 아르수프, 하이파를 잃은 것에 대한 반격으로[12] 홈스를 습격했으나 현지 아미르가 정보를 선입수하고 준비해 두었기에 격퇴되었다. 홈스는 바이바르스의 대십자군 공세 거점이었다.

1266년 봄, 가자에 당도한 바이바르스는 칼라운 휘하 7천의 선발대를 홈스로 보냈다. 그곳에서 트리폴리 공격 지시를 받은 칼라운은 아르카를 기습 점령했고, 바이바르스는 각지를 약탈한 후 홈스로 돌아왔다. 그해 9월 바이바르스는 홈스 남쪽의 기독교도 마을 카라에서 학살을 벌였다. 1268년, 야파와 보포르를 함락한 바이바르스는 5월 홈스를 거쳐 안티오크까지 공격해 정복한다. 1275년 11월, 아바타이가 이끄는 일 칸국군이 알 비라를 포위하자 바이바르스는 홈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침공군이 떠나자 회군했다. 1281년 10월, 망구 테무르가 이끄는 몽골-룸-십자군의 8만 대군이 남하하자 당시 홈스에 있던 하마의 알 만수르 2세는 방어를 준비했다.
곧 술탄 칼라운이 홈스에 당도했고, 도시 북쪽의 평야에서 적을 기다렸다. 뒤이어 벌어진 2차 홈스 전투에서 칼라운은 대승을 거두었다. 1287년 3월에 지진으로 홈스 시타델이 붕괴되었으나, 곧 완벽히 복구되었다. 1289년 6월에는 트리폴리를 함락한 칼라운이 홈스를 거쳐 다마스쿠스로 개선했다. 1291년의 아크레 공방전에서도 홈스 병력은 트리폴리 총독 앗 타바키의 지휘 하에 참여했다. 1299년 12월, 가잔 칸이 대군과 함께 남하하자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가 맞섰으나 패배했다. (3차 홈스 전투) 뒤이어 홈스와 다마스쿠스가 항복하며 시리아는 다시 몽골 지배 하에 놓였으나, 곧 가잔 칸이 철수했고 1303년의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로 맘루크 왕조의 시리아 지배는 확정되었다.

이어진 맘루크 시기에 홈스는 비록 군사적 중요성이 하락했지만, 안정을 누렸다. 1355년 홈스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괜찮은 나무가 많고 좋은 시장이 있으며 좋은 자미 마스지드 (금요 모스크)를 가졌다고 기록하였다. 또 주민들이 모두 아랍인이라 하였다. 1400년, 티무르의 시리아 침공 시에는 아미르 이븐 알 라와스가 보물을 바치며 복속했다. 일설에서는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홈스만은 약탈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따라서 다른 시리아 도시들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15세기 말엽 맘루크 조가 쇠퇴하자 홈스는 베두인들의 습격에 노출되었다. 1510년 베두인 부족장 알 파즐 이븐 누아이르가 다마스쿠스 총독의 사주로 홈스의 시장을 약탈했다.[13]

2.6. 오스만 제국

1516년 홈스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15세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농경과 목축, 그리고 모직물 산업이 중흥기를 맞을 수 있었다. 알레포의 양 & 염소를 다마스쿠스의 소 & 낙타와 교환이 이루어지던 홈스의 가축 시장 역시 매우 유명했다. 또한 도시에서 생산된 비단은 이스탄불의 상류층에 의해 소비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정책에 집중하며 시리아 지역은 서서히 쇠퇴하였다. 17세기 무렵 도시를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가는 성벽의 견고하모가 시장의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다고 기록하였지만 1785년 방문한 여행가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현재는 '처참한' 상태이며 넓지만 폐가가 많고 다마스쿠스에 의존하는 상태라고 기록하였다.

2.6.1. 시리아의 맨체스터

18세기 말엽 오스만 당국이 반란을 우려하여 성문을 허물어버리자 홈스는 15세기 때처럼 베두인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19세기 초반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홈스는 1832년 자립한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시리아를 등한시 여겼고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하였는데, 근대화된 이집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때 유서깊은 시타델이 파괴되었다. 다만 1860년대 홈스를 회복한 오스만 제국은 시리아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870년대 유럽의 직물 산업이 침체에 빠지자 홈스의 면화가 산업이 발전하였다. 홈스 내외로 5천여 개의 직물 공장이 가동하는 것을 본 영국 영사는 '시리아의 맨체스터'라는 말을 남겼다.

2.7.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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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시리아 총독 나짐 후세인 파샤에 의해 중건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19세기 말엽의 경제 부흥을 계기로 시리아의 중심 도시로 재부상한 홈스는 1차대전 이후 수립된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놓였다. 1925년 가을, 드루즈 교도들을 중심으로 반프랑스 봉기가 시리아를 휩쓸었을 때에 홈스도 그에 동참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프랑스는 1932년 다마스쿠스의 군사 학교를 홈스로 옮겨 도시에 대한 장악을 공고히 하였다. 동시에 키르쿠크에서 트리폴리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과거 대상들의 행렬을 연상시키며 홈스를 지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당국은 홈스 군사 학교에 소수인 알라위 파를 기용하여 다수인 수니 무슬림을 감시하게 하였다. 아사드 정권을 세운 하페즈 알 아사드 역시 그 출신이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때에 이스라엘 공군이 홈스의 정유소를 폭격하기도 하였다.

2.8. 시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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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홈스 : 드론 영상

2011년 5월부터 홈스는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식량과 의약품, 연료 등이 차단되며 고통의 도시가 되었다. 무자비한 폭격과 함께 수천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결국 2015년 12월, UN의 중재 하에 시내의 반군과 그 가족들은 홈스를 빠져나갔다. 현재 복구 공사가 진행중이다. #

2023년 10월 5일, 홈스 육군사관학교에서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장교 졸업자 및 행사 참석자 100여명이 사망하고 약 300명이 부상을 입었다.

2024년 12월 8일 반군의 공세로 해방되었다.

3. 창작물에서


[1] 무려 6천여대의 전차가 동원된, 역사상 가장 많은 전차가 동원된 전투였다.[2] 메카의 카바 신전에 있는 검은 돌과 유사한 것으로 추정됨.[3]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부스 아라부스.[4] 성인 1인당 1 디나르와 한묶음의 밀.[5] 다마스쿠스, 바알벡, 하마 등의 도시에서도 항복 시 같은 약속을 하였다.[6] 인구가 10만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7] 그를 호위한 압바스 군대는 시민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도시를 포위할 예정이었다.[8] 이후 아파메아에 웅거한다. 1094년 투투쉬 1세는 아크 순쿠르를 처형하고 알레포를 점령한다.[9] 대신 장기는 일전에 사로잡은 부리의 아들 세비츠를 풀어주었고, 한동안 이라크 문제에 집중한다[10] 다만 죽이진 않고 바그다드에 은퇴시켰다[11] 이때 그답지 않게 포로들을 처형했다[12] 그외에 맘루크 관리들과 보에몽 6세 간의 마찰도 있었다[13] 그럼에도 고용된 '값'을 챙기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