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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1:50:02

시돈

시돈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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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성채와 도시

아랍어 : صيدا‎, صيدون 사이다
페니키아어 : 𐤑𐤃𐤍 (Ṣdn)
그리스어 : Σιδών
히브리어 : צִידוֹן‬
프랑스어 : Saida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근대2.3. 현대
3. 현재4. 볼거리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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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중남부의 항구 도시. 고대 페니키아 시절부터 경쟁도시였던 티레는 시돈에서 남쪽으로 40 km,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북쪽으로 40 km 떨어져 있다. 도심 인구 8만 명, 광역 인구 27만 명으로, 레바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지명은 어촌이라는 뜻으로, 페니키아 시절부터 '시둔'이라 불리다 이슬람 정복 후 '사이둔'을 거쳐 '사이다'가 되었다. 다만 국외에서는 라틴-영어식 지명인 '시돈'으로 주로 표기된다.

주민들의 종교성향은 이슬람 순니파 80%, 시아파 11%로 집계되어 이슬람, 기독교의 비중이 비슷한 레바논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인 도시이다. 또한 레바논의 몇 안되는 순니파 다수 도시로, 주변의 시아파-기독교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외에 3.7%의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신도와 3.3%의 마론파, 0.7%의 그리스 정교도, 0.6%의 아르메니아 정교도가 있다.

2. 역사

선사 시대부터 일대에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아슐리형 주먹도끼 등 석기가 다수 발견된 바 있다. 비블로스와 함께 시돈은 페니키아인들의 초기 정착지로, 호메로스[1]성서도 칭송한 유리 공예와 보라색 염료 생산으로 번영하였다. 주민의 일부는 남하하여 티레를 세웠는데, 그 역시 번영하며 페니키아의 중심 도시[2]를 놓고 경쟁했다. 기원전 1350년, 이집트 신왕국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제두나'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시돈 국왕 지므레다(디므리-하다드) 왕은 이집트의 봉신이었다. 다만 얼마후 이집트가 약화되자 지므레다는 티레의 아비밀쿠, 비블로스의 리브-핫다와 함께 페니키아 지역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이로써 비블로스가 약화되었고, 아카르 평원에는 히타이트의 지원 하에 아무루 왕국이 세워졌다. 뒤이어 람세스 2세의 치세에 페니키아 도시들은 재차 이집트에 복속했지만, 기원전 12세기 바다 민족의 침공 후 재차 자립하였다.

시돈의 주민들은 도시의 주신인 아슈타르트(이슈타르)를 숭배했고, 그 밖에 바알 역시 중요한 신이었다.[3] 아시리아칼데아의 간접 지배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에게 페니키아가 정복되었지만, 관용 정책의 일환으로 상당한 지치권을 누리며 왕정이 이어졌다.[4] 다만 기원전 351년에 반페르시아 봉기 때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함락되어 피해를 입었다. 이때 티레에게 페니키아의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때에는 티레가 저항을 택했다가 망했던 것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에게 순응하여 살아남았고, 역시 높은 자치를 누렸다. 그러면서도 2세기간 이어진 페르시아의 지배로 인해 건축 양식이 그와 유사해지는 등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헬레니즘 시기에 시돈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시리아 지방의 도시들을 모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성된 시돈의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은 이스탄불 박물관에 있다.[5]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도 시돈은 자체적으로 은화를 주조하였다. 헤롯 대왕,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 등이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시돈은 큰 항구였다. 로마 제국기에는 2세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식민도시로 지정되어 '콜로니아 아우렐리아 피아 시돈'이라 불렸다. 551년 페니키아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베이루트의 법 학교가 피신해 오기도 했다. 그러던 638년, 도시는 이슬람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아랍인들이 정착하였고 시돈의 아랍식 명칭인 사이다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2.1. 중세

파일:SidonSeaCastle.jpg
십자군 시대의 바다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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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구도심 남쪽에 세운 성채

1109년 7월 트리폴리, 1110년 5월 베이루트가 함락된 후 십자군은 페니키아 도시들을 노렸다. 1110년 여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 1세가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이 60여 척의 배를 타고 우투르메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보두앵 1세와 합세하여 시돈을 포위하였다. 1차 십자군이 다가오자 식량을 바치기에 바빴던 다른 레반트의 도시들과 달리 비록 실패했지만 그들을 습격하기도 했던 시돈은 베이루트 함락 후 벌어진 학살을 보고 항전 의지가 꺾였다. 카디 등 시민 대표단이 파견되어 보두앵과 항복을 협상한 결과 1110년 12월 4일 도시는 항복하였다. 십자군 시절 도시는 사에테(Saete) 혹은 사게테(Sagette) 등으로 불렸다. 1187년에 살라흐 앗 딘이 수복하였지만 곧 3차 십자군이 닥쳐왔다.

1192년 시돈은 세금의 절반을 내는 대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1197년 가을, 독일 십자군이 시돈을 공격하여 방어벽을 허물고 일시적으로 도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227년 말, 6차 십자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그에 고무된 티레와 베이루트의 십자군은 시돈에 무혈입성하였다. 재차 점령된 시돈은 십자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점령 이듬해인 1228년 현존하는 시돈 요새가 건설되었다. 1249년, 시돈은 아이유브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리고 1260년엔 몽골군에게 함락되어 파괴되었고 그때 이후로 현재까지 성벽은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2.2. 근대

오스만 제국기 시돈은 레바논 지역과 팔레스타인 북부를 포괄하는 시돈 에얄레트의 치소가 되어 상업적 중요성을 회복하였다. 17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아미르 파크르 앗 딘 2세 (1593~1633년)는 현재 레바논에 해당하는 영토를 규합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17년간 별 방해를 받지 않고 레바논에 군림했는데 시돈은 그 수도로 번영하였다. 그동안 많은 모스크와 교회가 건립되었다. 18세기에는 각종 밀레트 및 상인들에 대한 징세관 출신의 함무드 가문이 집권하여 면화 생산과 수출을 독점하였고, 그들 역시 여러 궁전과 공공 건물을 세웠다.

19세기 오스만-이집트 전쟁 당시 초반에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점령되었으나, 1840년 9월 찰스 네이피어 제독 하의 영국-오스만-오스트리아 함대가 도시를 폭격한 후 기습 공격하였다. 이집트 수비대는 이틀만에 항복하였고, 이후 영국군은 아크레로 남하하였다(9월 26일). 영국 왕립 해군은 이를 기념하여 함선 중 2척을 HMS 시돈이라 명명하였다. 1887년부터 오스만 당국은 시돈의 네크로폴리스를 대대적으로 발굴, 알렉산드로스 석관 등의 보물을 이스탄불로 운송하였다. 1차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시돈은 프랑스령 레바논에 편성되었다.

2.3. 현대

2차 대전기 시돈은 다른 레바논 도시들처럼 비시 프랑스에 맞선 영국군에게 점령되었다. 1944년 독립 후 시돈은 레바논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1948년의 나크바(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다수 유입되어 에인 엘힐위 및 미에 미에 난민촌이 조성되었다.[6] 티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돈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역시 도시의 일부이긴 했으나 사실상 다른 행정구역 취급을 받았고,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이한 구역으로 여겨졌다. 한편 시내의 유대인들은 보복을 우려하여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7]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던 도시는 80년대 레바논 내전과 함께 혼란을 맞았다.

수니파 도시인 시돈은 역시 수니파가 대부분인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PLO와 밀접한 관계였고, 현지 유지인 바쉬르 게마일은 자흘레(베카 고원)의 팔랑헤(카테브당) 세력과 대립하였다. 1981년 4월의 부활 주일에 친이스라엘 마론파 민병대인 SLA가 시돈 도심을 무차별 폭격해 최소 16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1982년 이스라엘의 침공 후에는 2년 반 동안 이스라엘군의 점거 하에 놓였다. 1997년 8월, 제지네 폭탄 테러로 SLA 지도부 자제 2명[8]이 사망하자 SLA는 재차 시돈을 폭격하여 민간인 7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하였다.

다음날 헤즈볼라는 반격의 뜻으로 SLA의 '보안구역'에 60-80발의 로켓을 발사하였다.[9] 한편 시돈 포격으로 인해 한동안 대립하던 시아파 무장 단체인 헤즈볼라와 아말이 휴전에 합의하고, 레바논 군경과의 공조에 나서게 되었다. 이는 이듬달 시돈-티레 사이의 안사리야에 침투한 이스라엘 특수 부대를 헤즈볼라와 아말이 협공하여 격퇴한 '안사리아 매복'에서 드러났다. 1999년 6월에는 두 괴한이 법원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법관 3명과 부장검사를 죽이고 도주하였는데, 아무도 배후를 주장하지 않았다. 레바논 당국은 수피 알 아흐바쉬 운동 지도자를 살해하고 트리폴리의 무프티(성직자)에 대한 살인 미수로 궐석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오스바트 알-안사르의 지도자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3. 현재

1900년 당시 인구 1만의 소도시이던 시돈은 21세기 들어 도심에 7만, 광역권에 20만이 거주하는 대도시로 변모하였다. 이름대로 어업은 여전히 활발하며, 매일 아침 생선 도매 시장이 열린다. 어업항 외에 상선을 위한 부두도 설치되어 있고, 교외 지역에서는 밀과 채소 및 귤과 바나나 등의 과일이 재배되어 식품이 풍족한 편이다. 2000년에는 레바논 아시안컵을 위해 사이다 시립 경기장이 세워졌다.

4. 볼거리

https://www.google.co.kr/search?q=sidon+castle&client=ms-android-lgu-kr&prmd=imvn&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iKjfbWyrnaAhWJxLwKHegWBBYQ_AUIESgB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요새

알 하즈 모스크

다베네흐 궁전

5. 매체에서의 등장



[1] 시돈 장인들의 유리 공예와 자주색 옷감 및 여인들의 자수 능력을 칭찬했다. 시돈은 티레와 달리 유리 공예가 염료 산업보다 더 중시되었다.[2] 부모 도시, 즉 메트로폴리스[3] 기원전 5세기경 시돈 왕의 어머니는 '시돈의 여신' 아슈타르트 신전의 여사제였다.[4] 이러한 내용은 1855년에 발견된 에쉬문아자르 2세의 석관을 통해 알려졌다.[5] 당시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된 것들은 리키아 양식 무덤, 울부짖는 여인 석관(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6] 본래 텐트였으나 점차 주택화되었다.[7] 이후 기존 유대인 묘지는 해안 침식에 노출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8] 모두 10대였으며 도로변 폭탄으로 사망했다.[9] 다만 UNIFIL에 의하면 그저 과시용으로, 무주지를 겨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