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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신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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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소스 공국 Ducato di Nasso | ||||||||||||||||||||||||||||||||||||||||||||||||||||||||||||||||||||||||||||||||||||||||||||||||||
국기 | 국장 | |||||||||||||||||||||||||||||||||||||||||||||||||||||||||||||||||||||||||||||||||||||||||||||||||
1207년 ~ 1579년 | ||||||||||||||||||||||||||||||||||||||||||||||||||||||||||||||||||||||||||||||||||||||||||||||||||
수도 | 낙소스 | |||||||||||||||||||||||||||||||||||||||||||||||||||||||||||||||||||||||||||||||||||||||||||||||||
위치 | 키클라데스 제도 | |||||||||||||||||||||||||||||||||||||||||||||||||||||||||||||||||||||||||||||||||||||||||||||||||
정치 체제 | 봉건제 | |||||||||||||||||||||||||||||||||||||||||||||||||||||||||||||||||||||||||||||||||||||||||||||||||
국가 원수 | 공작 | |||||||||||||||||||||||||||||||||||||||||||||||||||||||||||||||||||||||||||||||||||||||||||||||||
언어 | 중세 베네치아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 | |||||||||||||||||||||||||||||||||||||||||||||||||||||||||||||||||||||||||||||||||||||||||||||||||
종교 | 가톨릭 (국교), 정교회 | |||||||||||||||||||||||||||||||||||||||||||||||||||||||||||||||||||||||||||||||||||||||||||||||||
종족 | 이탈리아인, 로마인 | |||||||||||||||||||||||||||||||||||||||||||||||||||||||||||||||||||||||||||||||||||||||||||||||||
건국 이전 | 앙겔로스 왕조 동로마 제국 | |||||||||||||||||||||||||||||||||||||||||||||||||||||||||||||||||||||||||||||||||||||||||||||||||
멸망 이후 | 오스만 제국 |
언어별 명칭 | |
이탈리아어 | Ducato di Nasso |
그리스어 | Δουκάτο της Νάξο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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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04년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라틴 제국의 명목상 공국이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속국. 군도 공국(이탈리아어: Ducato dell'arcipelago, 그리스어: Δουκάτο του Αρχιπελάγους), 에게해 공국으로도 일컬어진다. 낙소스에 기반을 두고 시로스, 산토리니, 파로스, 안티파로스, 밀로스, 이오스, 키트노스, 아모르고스, 키몰로스, 시프노스, 시키노스, 폴레간드로스 섬 등 키클라데스 제도를 지배했다. 1579년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되었다.2. 역사
2.1. 사누도 왕조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벌어지기 오래전부터 에게해의 이권을 쟁취하는 데 사활을 걸었고, 12세기에 에게해의 패권을 놓고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1204년 5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뒤, 플랑드르의 백작 보두앵 1세가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옛 잔재는 십자군에 참가한 세력들에 분할되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피로스 일대와 두라초, 코르푸 등 에게 해의 여러 섬 지역을 가지기로 했다.120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조카이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베네치아 영사관에서 판사로 활동했던 마르코 사누도는 키클라데스 제도 정복전을 이끌기로 했다. 그는 자비로 갤리선 8척을 준비하고 자원자들을 모집한 뒤 섬으로 출행했다. 이후 낙소스에 상륙한 그는 갤리선을 전부 불태워서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게 한 뒤, 5주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아파리로스 성을 공략했다.
이후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17개 섬 주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닉소스를 수도로 삼고 동료들에게 여러 섬을 봉토로 나눠줬다. 그의 조카인 마리노 단돌로는 안드로스 섬을 별개로 정복한 뒤, 그의 가신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레오나르도 포스콜로는 아나피 섬을 점령했으며, 산토리니 섬은 야코포 바로치에게, 아스티팔리아는 에네토스 퀴리니에게 넘겨졌다. 안드레아 기지와 예레미야 기지 형제는 티노스와 미코노스 섬을 봉토로 부여받은 뒤 스코펠로스, 스키로스, 스키아토스, 케아 및 세리포스 섬을 추가로 점령했다. 다만 파트모스 섬은 정교회 성지인 점을 감안해 독립을 인정받았고, 그곳의 수도사들은 여러 특권을 누렸다.
마르코 1세 사누도는 라틴 제국의 앙리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로부터 공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키클라데스 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누이인 라스카라이나와 결혼함으로써 니케아 제국과도 우호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주민 대부분이 정교회를 신봉하는 그리스인인 점을 고려해 정교회 신앙을 존중했고 낙소스 정교회 교구를 유지해 그리스 주민들의 호의를 얻었다. 그러면서도 많은 가톨릭 사제들을 키클라데스 제도에 초빙했다. 그 결과 밀로스, 산토리니, 타노스, 시로스 섬에 가톨릭 교구가 설립되었다.
1227년, 마르코 1세 사누도가 사망한 뒤 아들 안젤로 사누도가 제2대 낙소스 공작이 되었다. 그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라틴 제국을 지원하는 등 라틴 황제에 대한 가신으로서의 의무를 준수했다. 1225년 니케아 제국이 사모스, 키오스, 레스보스를 공략하자, 이들의 추가 공세를 막기 위해 함대를 파견해 에게해를 순찰하도록 했다. 1230년 크레타에서 베네치아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베네치아를 대신해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가 강력한 함대를 파견해 크레타 반란군을 도우려 하자, 그는 즉시 함대를 철수시켰다. 1232년 또는 1233년 로도스를 지배하던 그리스 총독 레온 가브라스가 요안니스 3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베네치아는 레온 가브라스를 돕기로 하면서 낙소스 공국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안젤로는 레온이 로도스와 키클라데스의 군주로 칭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도와주지 않았다.
1235년, 요안니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해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 2세와 동맹을 체결하자, 라틴 제국의 섭정인 장 드 브리엔은 가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안젤로는 함대를 파견해 콘스탄티노폴리스 해상을 지키도록 했다. 요안니스 3세는 이에 응징하기 위해 아모르고스 섬을 탈취했다. 1247년 아카이아 공작 빌라루두앵의 기욤 2세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모넴바시아를 포위 공격했을 때 해군을 제공했다. 1248년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가 낙소스 공국의 주권을 아카이아 공국으로 이양하면서, 그는 기욤 2세의 직접적인 가신이 되었다. 1259년 기욤 2세의 부름을 받고 니케아 제국과의 일전에 참여했지만,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체포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뒤 낙소스로 돌아왔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면서 라틴 제국이 멸망하는 걸 막지 못했고, 테베로 피신한 보두앵 2세에게 아내와 장남 마르코를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이에 보두앵 2세는 마르코 2세에게 라틴 제국의 기사로 봉했다.
1262년 제3대 낙소스 공작에 선임된 마르코 2세 사누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동로마 제국의 부활에 호응한 주민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먼저 밀로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진압하고 주동자를 처형했다. 그러나 스코펠로스, 스키로스, 스키아토스, 알로니소스, 렘노스 섬이 동로마 제국 해군의 공세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나마 건진 섬들도 해적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고통받았다. 특히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동로마 해군을 해산하면서 실업자가 된 선원들이 해적들과 합류하면서, 해적의 규모는 더욱 거대해졌다.
급기야 스코펠로스, 케아, 산토리니, 이오스 섬이 해적의 은신처가 되어버렸고, 1292년 시칠리아 해군 제독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카탈루냐 해적들을 이끌고 안드로스, 티노스, 미코노스, 키트노스 섬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게다가 사누도 가문과 기지 가문 사이의 안드로스 영유권 분쟁까지 발생했다. 이렇듯 갈수록 암울해지던 낙소스 공국은 1296년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간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베네치아의 독려를 받은 낙소스 영주들은 이오스, 바로치, 산토리니, 기지, 아모르고스, 케아 및 세리포스를 탈환했다. 1303년 베네치아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낙소스 공국은 이 탈환한 섬들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마르코 2세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경의를 표하는 걸 그만두고 나폴리 왕국 국왕 카를로 2세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베네치아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303년 마르코 2세 사누도가 사망한뒤 아들 굴리엘모 1세 사누도가 뒤이어 낙소스 공작이 되었다. 그의 치세에 여러 가신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꾀했고, 그는 진압하는 데 애를 먹었다. 1323년 굴리엘모 1세가 사망한 뒤 새 공작이 된 니콜로 1세 사누도는 1325년 아카이아 공작 조반니가 동로마 제국에 상실한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을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1326년 봄 조반니가 지휘권을 양도하고 나폴리 왕국으로 돌아가자, 그는 모레아로 진군해 수적으로 열세한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모레아 각지를 약탈한 후 낙소스로 귀환했다. 1329년 튀르크 해적의 연이은 습격에 고통받언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35년 바로치 가문으로부터 산토리니 섬을 탈취했고, 뒤이어 이소스 섬도 탈취했다. 이제 낙소스 공국은 낙소스, 안드로스, 파로스, 안티파로스, 밀로스, 키몰로스, 산토리니, 시로스, 이오스 등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섬을 직접 통치했고, 키스노스와 아모르고스는 가신에게 양도했다. 반면 사누도 가문의 경쟁자인 기지 가문은 여전히 미코노스와 티노스 섬을 지배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에 경의를 표했다.
1341년 니콜로 1세 사누도가 사망한 뒤 아들 조반니 1세 사누도가 새 공작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낙소스 공국의 쇠락으로 점철되었다. 1344년 오스만 술탄국이 낙소스 섬 일부 지역을 공략한 뒤 현지인 6,000명을 생포해 노예로 삼았다. 이후 조반니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베네치아 편을 들었지만, 1354년 여러 섬을 제노바군에 빼앗기고 생포되어 제노바로 끌려갔다가 1355년 평화 조약이 성립된 후 풀려났다. 1361년 조반니 1세 사누도가 사망한 후, 외동딸인 피오렌자 사누도가 낙소스 여공작이 되었다. 그녀는 본래 네그로폰테 영주인 조반니 달레 카르체리와 결혼했지만, 조반니 달레 카르체리는 그녀가 낙소스 여공작이 되기 전인 1358년에 사망했다.
피오렌자의 재혼은 키클라데스 제도와 에게해의 패권이 달린 중요한 문제였다. 제노바 출신 키오스 영주 비뇨소가 그녀에게 청혼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은 청혼을 거부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피오렌자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 딸은 베네치아의 적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설득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듯 했지만, 아카이아 공자 네리오 1세 아차이올리[1]가 그녀에게 청혼하고 아카이아 공국과 나폴리 왕국이 이를 지원하자, 이대로 가다가는 나폴리 왕국이 키클라데스 제도를 석권할 거라는 위기감을 품었다.
결국 베네치아 공화국은 1364년 낙소스에 갤리선에 파견해 피오렌자를 크레타 섬으로 호송한 후, 그린디아 영주 굴리엘마초 사누도의 아들이자 마르코 2세 사누도의 증손자이며, 그녀의 6촌인 니콜로 2세 사누도 스페츠바다와 재혼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피아렌자는 1371년까지 별다른 실권을 누리지 못하고 잠자코 지내야 했고, 니콜로 2세는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낙소스 공작으로 추대된 뒤 베네치아 공화국에 경의를 표하며 튀르크인들과 맞서 싸웠다.
2.2. 크리스포 왕조
1371년 피아렌자 사누도가 사망하면서 사누도 왕조가 단절되었고, 피오렌자와 조반니 달레 카르체리의 외아들인 니콜로 3세 달레 카르체리가 낙소스 공작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지극히 무능해 신민들의 경멸을 받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가뜩이나 오스만 술탄국이 에게해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를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1383년 3월, 밀로스 영주 프란체스코 1세 크리스포가 베네치아의 사주를 받아 사냥에 열중하던 니콜로 3세를 암살하고 도적들의 짓으로 위장한 뒤 낙소스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낙소스 공작에 취임했다.그 후 20여 년간 무슬림을 상대로 사략 행위를 벌이던 프란체스코 1세는 1397년 여러 자식을 남기고 사망했다. 장남 자코모 1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에 취임했고, 그의 형제들은 남작으로서 여러 영지를 나눠가졌다. 1416년 대규모 튀르크 함대가 키클라데스 제도로 쳐들어가서 수많은 주민을 살육하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당시 키클라데스 제도를 방문했던 피렌체 신부 부온델몬티는 시프노스와 낙소스 지역에서 여인들이 결혼할 남자를 찾을 수 없었고, 주민들은 동물처럼 살면서 밤낮으로 튀르크 해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기술했다. 여기에 시로스 주민들은 캐롭과 염소고기를 먹었으며, 안티파로스와 시키노스는 독수리와 야생 당나귀의 손에 버려졌고, 파로스의 나우사는 해적들의 본거지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1418년 자코모 1세가 페라라에서 이질로 사망한 뒤, 형제 조반니 2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이 되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자 1426년 오스만 술탄국과 조약을 맺어 그들에게 노예세를 지불하고 그들의 선박이 자국의 항구에 마음껏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할키스의 베네치아 총독에게 오스만 함대의 접근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는 걸 중단하기로 했다. 이후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의 영토인 키오스를 약탈하자, 제노바 제독 스피놀라는 낙소스와 안드로스를 점령했다. 그는 이에 저항하길 포기하고 항복한 뒤 막대한 자금을 바치는 대가로 낙소스에서 철수하게 했다. 1433년 조반니 2세가 사망한 뒤 자코모 2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이 되었다. 1442년 무라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의해 나이수스 전투에서 참패하자, 그는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공물 납부를 중단하고 함대를 강화했으며, 베네치아 함대에 갤리선을 제공했다. 하지만 1444년 무라트 2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멸하자, 1446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오스만 술탄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47년 자코모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 지네브라 가틸루지오는 6주 후 아들 잔 자코모 크리스포를 낳았다. 잔 자코모 크리스포가 갓난아기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다. 그의 친할머니인 프란체스카 모로시니가 자신이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잔 자코모의 삼촌이자 아나피의 영주인 굴리에모 2세 크리스포와 시로스의 영주 니콜로 크리스포가 프란체스카를 감금한 뒤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섭정 위원이 되었다. 얼마 후 니콜로 크리스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2세 크리스포가 라틴 대주교 프란체스코 모로시니와 낙소스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면서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비준을 받았다.
1453년, 잔 자코모 크리스포가 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보다 앞서, 조반니 2세 크리스포의 여동생인 아드리아나 크리스포는 안드로스의 영주인 도미니코 소마리파와 결혼했을 때, 조반니 2세의 후손이 단절될 경우 낙소스 공국을 물려받는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잔 자코모의 섭정을 맡았던 굴리에모 2세 크리스포와 프란체스코 2세 크리스포가 이에 불복해 살리카법을 적용해 아드리아나의 권리에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낙소스 공작을 서둘러 세워서 키클라데스 제도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여겼다.
베네치아는 처음엔 굴리에모 2세와 프란체스코 2세를 제외하고 아드리아나의 남편인 도미니코 소마리파를 공작으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굴리에모 2세가 자신이 경험이 풍부하고 자신이 가진 해군력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자, 베네치아는 그를 공작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리하여 낙소스 공작이 된 굴리에모 2세 크리스포는 온갖 악재에 직면했다. 1457년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속출했으며, 1458년 아테네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면서 베네치아로부터 지원을 받기가 요원해졌다. 그 후 메흐메트 2세가 낙소스 항구에 무슬림을 해친 해적이 정박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이를 응징하기 위해 야니스 베이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낙소스 섬으로 파견했다. 굴리에모 2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고, 베네치아 국기를 제거하고 메흐메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며 매년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낙소스 공작으로 계속 군림하는 걸 인정받았다.
1463년 굴리에모 2세가 사망한 뒤, 프란체스코 2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에 취임했지만 곧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아들 자코모 3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이 되었다. 그의 치세는 1463 ~ 1479년에 걸쳐 벌어진 제1차 베네치아-오스만 전쟁과 일치했다. 1468년, 튀르크 선박이 낙소스 공국에 속한 안드로스 섬을 공격해 수많은 포로와 15,000두카트 상당의 전리품을 확보했다. 1470년 튀르크 함대가 재차 안드로스를 공격해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안드로스 섬에 남겨진 사람은 2,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오스만 해군 및 무슬림 해적이 낙소스 공국을 수시로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급기야 1477년 오스만 함대가 낙소스에 접근하자, 낙소스 당국은 즉시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침략을 면제받았다. 147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중단되었다.
1480년 자코모 3세 크리스포가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는 딸 피오렌자가 있었지만, 살리카법이 적용되면서 계승권이 배제되었고, 남동생인 조반니 3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후 산토리니 섬의 스카로스에 상륙하여 피사니 가문의 깃발을 크리스피 가문의 깃발로 교체했다. 크레타 공작이자 산토리니 섬의 영주였던 도메니코가 베네치아에 항의하자, 베네치아는 조반니 3세에게 산토리니 섬을 돌려보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조반니 3세는 이곳은 본래 낙소스 공국의 영역이었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조반니 3세가 섬을 계속 점거하되 도메니코에게 보상해주기로 합의했다. 그 후 그는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아나톨리아 해안을 침략하는 기독교 해적들을 받아들였다.
1490년 6월 7일, 나소와 파로 섬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니콜로 대주교가 행정관 니콜로 피사니에게 두 섬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헌정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베네치아 원로원은 조반니 3세가 이를 승인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반니 3세는 자신에게 독립하려는 나소와 파로 섬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대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를 한 성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그는 크리스피 가문의 구성원들과 다른 베네치아 귀족들과 함께 성에서 농성하다가, 로도스의 구호 기사단이 구원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후 반군 지도자들을 대거 처형해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1494년 독살당했다.
조반니 3세에게는 외아들 프란체스코 3세 크리스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성년자였고, 주민들은 그를 공작에 선출하는 대신 베네치아에 사절단을 통해 직접 통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베네치아 정부는 피에트로 코다리니를 총독으로 세워서 낙소스 공국 영역을 통치하게 했다. 그 후 낙소스 공국은 6년간 베네치아의 직할 통치를 받다가, 1500년 베네치아 정부가 성년이 된 프란체스코 3세 크리스포에게 공국을 물려주기로 결정하면서 크리스포 가문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에 걸렸고,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게 대해, 병사들이 "이럴 바엔 차라리 튀르크인을 섬기겠다"고 맹세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에 베네치아 공국은 이러다간 오스만 제국이 낙소스 공국을 탈취할 것을 우려해 프란체스코 3세를 체포해 무라노 섬의 성 미셸 교회에 가뒀다.
1510년 성 미셀 교회에서 탈출한 프란체스코 3세는 낙소스로 돌아와서 아내 카테리나 로렌타노를 죽이려 했다. 그녀가 이모 루크레치아 로렌타노의 집으로 탈출하자, 그는 이모 집으로 쳐들어가서 문을 부수고 난입한 뒤 그녀의 손과 배를 칼로 쳐서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조반니 4세 크리스포를 새 공작으로 세우기로 했고, 살해된 공작부인 카테리나의 형제이자 조반니 4세의 외삼촌인 안토니오 로렌타노를 후견인으로 세웠다. 그 후 프란체스코 3세는 크레타 섬으로 이송되었고, 1511년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베네치아 사령관 안토니오 로렌타노가 조반니 4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몇 년간 공국을 통치했다.
1517년 성년이 되어 낙소스 공국의 통치를 맡은 조반니 4세 크리스포는 1517년 파로스의 영주 프란체스코 솜마리파가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파로스를 낙소스 공국에 통합하려 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프란체스코의 여동생인 피오렌자 솜마리파를 파로스 여성 영주로 세우면서 무산되었다. 1522년 쉴레이만 1세가 파견한 오스만 대군에 맞서 싸우는 로도스 기사단에게 식량과 사료를 보냈지만, 로도스 기사단은 1523년에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고 로도스를 떠나야 했다. 1537년 제3차 베네치아-오스만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이 베네치아가 점령한 에게 해의 모든 섬을 습격해 대거 공략한 뒤 키클라데스 제도의 가장 큰 섬인 낙소스를 공격해, 성채를 제외한 모든 땅을 약탈하고 모든 건물을 파괴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구원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하자 노예 생활을 면하는 대가로 연간 5,000 두카트를 오스만 제국에 바치고 쉴레이만 1세를 주권자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는 25,000 두카트 상당의 전리품을 챙기고 철수했다.
그 후 조반니 4세는 교황 바오로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등 서방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사절을 잇따라 보내, "만약 모든 기독교 군주가 단합하여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80년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단결하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40년 제3차 베네치아-오스만 전쟁이 마무리되었을 때, 낙소스 공국은 안드로스, 키트노스 외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그는 영토를 재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기로 했고, 그들이 보내준 해군의 지원으로 케아와 시피노스를 탈환했다.
그러나 조반니 4세는 오스만 제국에 바칠 공물을 모으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서 주민들의 증오를 받았다. 1559년, 칸디아의 마무소가 "수많은 로마인이 소수의 프랑크인에 의해 수 세기 동안 관습과 종교가 타락하는 걸 지켜만 봤던 건 매우 슬픈 일이다."라며 반란을 선동했고, 파로낙시아 대주교는 신자들에게 마무소의 연설을 읽어주며 이에 호응했다. 조반니 4세는 마무소를 유배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오스만 제국의 허락을 받아 카클라데스 제도에 남은 가톨릭 주교들을 모조리 추방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가톨릭 주교와 대수도원장들을 내보내고 그리스인들을 그 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그 후 그는 낙소스 성채에 틀어박혀서 오스만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말년을 조용히 보냈다.
1564년 조반니 4세가 사망한 뒤, 아들 자코모 4세 크리스포가 새 공작이 되었다. 그는 실권 없는 공작 직위에 흥미를 잃고 오락과 사치에 푹 빠져 지냈고, 그를 모시는 가톨릭 성직자들은 정부를 공개적으로 둬서 그리스인들의 반감을 샀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쉴레이만 1세에게 자코모 4세를 폐위하고 총독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자코모 4세는 급히 12,000 두카트를 가지고 이스탄불로 달려갔지만, 쉴레이만 1세는 그를 폐위하고 6개월간 투옥했다. 그 후 피알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낙소스 섬을 점거했고, 안드로스와 케아의 라틴인 영주들도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이탈리아로 도주했다.
2.3. 멸망
1566년 파디샤에 즉위한 셀림 2세는 유대인이자 총신인 조셉 나치를 낙소스 공작에 선임하고 매년 14,000 두카트를 이스탄불로 보낼 의무를 부과했다. 조셉은 13년간 공작위를 누리면서도 섬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그 대신 스페인 출신 유대인인 프란체스코 코로넬로를 그곳에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서 통치하도록 했다. 프란체스코가 수많은 인사를 죽이거나 체포하고 막대한 세금을 가차없이 거둬들이자, 주민들은 차라리 자코모 4세가 나았다고 여기고 셀림 2세에게 자코모 4세를 복위해달라고 청했지만 묵살당했다.한편, 자코모 4세는 감옥에서 나온 뒤 베네치아로 망명해 도움을 요청했다. 1570 ~ 1573년 제4차 베네치아-오스만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베네치아 함대는 낙소스를 일시적으로 탈환하고 자코모 4세를 낙소스 공작으로 복위했다. 그는 1571년 병사 500명을 이끌고 나프파크토스 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흐무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낙소스를 재공략하자, 자코모 4세는 베네치아로 도로 망명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자기 지위를 되찾는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모든 소유물을 베네치아에 양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1573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낙소스 공국의 주권이 오스만 제국에 있음을 인정하는 협약을 맺으면서 실패했다. 그 후 자코모 4세는 키프로스의 페라에서 조용히 지내다 1576년에 사망했다. 그 후 낙소스 공국의 마지막 공작 조셉 나치는 1579년에 사망했고, 키클라데스 제도 전역이 오스만 제국의 직할지가 되었다.
3. 역대 공작
3.1. 사누도 왕조
- 마르코 1세 사누도(1207 ~ 1227)
- 안젤로 사누도(1227 ~ 1262)
- 마르코 2세 사누도(1262 ~ 1303)
- 굴리엘모 1세 사누도(1303 ~ 1323)
- 니콜로 1세 사누도(1323 ~ 1341)
- 조반니 1세 사누도(1341 ~ 1362)
- 피오렌자 사누도(1362 ~ 1371)
- 니콜로 2세 사누도 스페츠바다(1364 ~ 1371)
- 니콜로 3세 달레 카르체리(1371 ~ 1383)
3.2. 크리스포 왕조
- 프란체스코 1세 크리스포(1383 ~ 1397)
- 자코모 1세 크리스포(1397 ~ 1418)
- 조반니 2세 크리스포(1418 ~ 1433)
- 자코모 2세 크리스포(1433 ~ 1447)
- 잔 자코모 크리스포(1447 ~ 1453)
- 굴리엘모 2세 크리스포(1453 ~ 1463)
- 프란체스코 2세 크리스포(1463)
- 자코모 3세 크리스포(1463 ~ 1480)
- 조반니 3세 크리스포(1480 ~ 1494)
- 베네치아의 대리 통치(1494 ~ 1500)
- 프란체스코 3세 크리스포(1500 ~ 1511)
- 베네치아의 대리 통치(1511 ~ 1517)
- 조반니 4세 크리스포(1517 ~ 1564)
- 자코모 4세 크리스포(1564 ~ 1566)
3.3. 오스만 제국 치하
- 조셉 나치(1566 ~ 1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