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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및 중심 도시) | ||||
알바세테도 (알바세테) | 시우다드레알도 (시우다드레알) | 쿠엥카도 (쿠엥카) | 과달라하라도 (과달라하라) | 톨레도도 (톨레도) |
타호 강이 3면으로 둘러싼 구도심 전경
비사그라 성문 일대
톨레도 Toledo | |
<nopad> | |
시기 | |
<colbgcolor=#CE2B2B> 국가 | <colbgcolor=#ffffff,#191919> |
지역 | 카스티야라만차주 |
행정구역 | 톨레도도 |
면적 | 232.1 km² |
인구 | 86,526명[1] |
인구밀도 | 359.58km²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UTC+2) |
시장 | 카를로스 벨라스케스 로모[2] |
1. 개요
스페인 중부 톨레도도의 도시. 카스티야라만차 자치 구역에 해당한다. 인구는 83,000명이고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67km 거리에 있다. 중세 시기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고, 11세기의 톨레도 토후국을 거쳐 12-16세기 카스티야 왕국의 사실상 수도였다.
세르반테스 언덕을 타호 강이 둘러싸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발전해 왔고 스페인 역사에서 오랫동안 수도 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의 유적이 공존하고 스페인 문화를 잘 대변하는 곳이어서 도시 전역이 국립 기념지로 선포되었다. 크레타 섬에서 나고 자라 이탈리아에서 경력을 쌓으며 스페인에 정착했던 화가인 엘 그레코가 사랑하고 종국엔 제2의 고향으로 아꼈던 도시이기도 하다.
2. 역사
로마 시대에 타호 (테주) 강에 세워진 다리
구도심 북서쪽, 신도심 서남쪽의 타호 강변 평지에 위치한 로마 ~ 서고트 시대의 야시미엔토 유적지
기원전 3세기 무렵 켈트인의 일파인 카르페타니 부족의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193년 로마 장군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켈트[3] 군대를 격파하고 그 군주 힐레르무스를 사로잡으며 로마 공화국 령이 되었다. '톨레툼 (Toletum)'이라 명명된 도시는 비시민권자들의 조공 도시란 뜻인 키비타스 스티펜디아리아 지위를 거쳐 로마 제국 시기인 서기 1세기 후반에 자치 도시인 무니키피움 지위가 주어졌다. 이로써 공공 의무를 수행한 현지 인들도 시민권을 얻었고 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목욕탕, 저수조 및 수로 등이 세워졌다.
특히 길이 400m, 폭 100m에 1만 5천석을 지닌 전차 경기장은 히스파니아 최대 규모였다. 주로 축제일에 경기가 열렸고, 성과를 과시하려는 유력자가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키르쿠스에서는 5세기 초까지 경기가 계속 열렸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톨레툼에 대해 "작지만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4]라 기록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3-4세기 무렵 톨레툼 시내의 도무스 (저택)들과 성벽이 확장되고, 도시 북쪽에도 저택들이 더 세워졌다. 로마 제국 시기에 조성된 길, 우물, 목욕탕, 배관 중 일부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2.1. 서고트 왕국의 수도
4세기 들어 톨레툼은 기독교화 되었고, 서기 400년에는 알비파와 유사한 프리실리아누스파에 대응하기 위한 주교 회의가 열렸다. 서로마 제국 말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주역인 서고트족은 451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동해, 457년경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507년 서고트 왕국은 남프랑스의 아키텐을 상실한 후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로 축소되었고, 531년 나르본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에 패한 후 톨레도 (톨레툼)를 사실상 수도로 삼았다. 400년부터 702년 사이에 18차례에 걸쳐 열린 톨레도 공의회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결정 기구였고 대부분의 경우 서고트 왕국의 군주가 소집했다. 6세기 초엽 톨레도는 대주교구가 되었다. 589년의 3차 공의회에서는 레카레드 1세에 의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정되었다.610년의 주교 회의에서는 동로마 제국령 카르타헤나의 대주교구가 톨레도로 이전되었고, 633년의 4차 공의회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제 개종이 철회되었다. 다만 638년에 일부 유대인들이 화형되었다. 5,6차 공의회는 서고트 왕실에 대한 도전을 금했고 644년의 7차 공의회는 인근 주교들에게 매년 1달씩 톨레도에 살게 했다. 8차 공의회는 궁정 관료들과 주교들이 함께 새 왕의 선출은 톨레도 혹은 왕이 사망한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항에 서명했다. 동시에 주교들은 국왕 선출권을 박탈당했고, 톨레도 대주교가 대관식을 치러주는 권한만 남았다. 7세기 중반 톨레도는 롬바르드 왕국의 파비아와 함께 서유럽의 양대 왕성 도시였고,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650년경 국왕 친다수윈트는 로마 등지에서 도서를 수집해 도서관을 세웠고, 자신이 편찬한 법전도 소장시켰다.[5]
673년, 파울루스의 반란을 진압한 국왕 왐바는 톨레도에서 그의 머리를 효수하고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그는 674-75년에 톨레도 성벽을 보강했고, 675년의 11차 공의회에서 성밖의 성 베드로 & 바울 성당[6]에 새 주교구를 설립해 대관식 진행을 맡기며 톨레도 대주교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681년 1월의 12차 공의회에서 왐바는 폐위되었고 대관식 진행도 다시 톨레도 대주교에게 돌아갔다. 또한 대주교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유대계였음에도 유대인을 차별하는 28개 조항을 제정해 성 마리아 성당의 유대인 대표단 앞에서 공표했다. 683년의 13차 공의회는 10년 전 왐바에 대한 반란자들을 사면했고 왕의 사후에도 그 가족들의 보호를 명시했다.[7] 684년 율리안이 왕의 재가 없이 공의회를 소집했음에도 모든 주교들이 참석할 정도로 톨레도 대주교의 권한은 왕권에 버금갈 수준이었다.
693년 봄, 톨레도 대주교 시시베르트는 중앙집권화에 나선 국왕 에기카에 맞서 수니프레드를 옹립하고 도시를 장악했으나 진압된 후 폐위되었다. 이듬해의 17차 공의회에서 유대인은 기독교도의 거래, 시장 방문, 공직 취임을 금지당했고 종교세를 내게 되었으며 유대인 아이들은 7세까지 기독교도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 710년 위티자 왕의 사후 귀족들은 그 아들들 대신 친다수윈트의 손자 로데리크를 추대했고, 위티자의 장남 아길라 2세는 일부 귀족들과 톨레도를 탈출해 왕국 북부에서 자립했다. 이로써 서고트 왕국이 내전에 빠진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해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크를 전사시킨 후 북상했다. 톨레도에서는 오파스가 왕을 칭했으나 타리크가 접근하자 도주했다. 이로써 번영하던 톨레도는 별다른 전투도 없이 점령되었다.
2.2. 알 안달루스 (이슬람 시기) : 툴레이툴라
| |
이슬람 지배기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밥 알 마르둠 모스크 ( مسجد باب المردوم) |
711년 톨레도를 점령한 타리크는 오파스의 도주를 도왔다는 이유로 남아있던 귀족들을 전부 처형했다.[8] 톨레도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던 서고트 왕국은 수도와 대주교의 상실로 더 이상 정통 군주를 배출할 수 없던 상황에서 귀족 계층마저 붕괴하자 손쉽게 붕괴했다. 713년, 톨레도에서 타리크와 합류한 그의 주군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이듬해까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석권한다. 이슬람 정복 후 톨레도는 '툴레이툴라' (طليطلة) 혹은 왕들의 도시라는 뜻의 '마디낫 알 물르크 (مدينة الملوك)'[9]라고 불리게 되었고, 코르도바 및 세비야에게 밀려나 기독교 세력을 견제하는 북부의 군사 거점 정도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일대에는 남부와 달리 아랍인보다 베르베르인이 더욱 정착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의 비아랍 무슬림 (마왈리)에 대한 차별로 인한 베르베르 대항거의 여파로 741년 안달루스에서도 베르베르 봉기가 벌어졌다. 봉기군은 삼분되어 각각 코르도바 (쿠르투바), 알헤시라스 (알자지라 알카드라), 툴레이툴라로 진격했다. 이로써 한 달간 포위된 툴레이툴라는 742년 시리아 군대를 데려온 발즈 이븐 비슈르 알 쿠샤이리에 의해 구원되었고, 반란은 진압된다. 8세기 중반에 툴레이툴라는 안정을 누리며 문화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남부 도시들과 달리 이슬람의 영향이 적었고, 여전히 현지 주교는 안달루스의 아랍화된 기독교도 (모사라베)들을 대표했다. 750년에 3차 피트나를 틈타 안달루스 총독 유수프 알 피흐리는 왕을 칭하며 자립한다.
2.2.1. 후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란
| |
톨레도 성벽 구조. 유일하게 강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북쪽 성벽은 2중이다 | 옛 비사그라 (밥 샤크라)[10] 성문 |
- 코르도바 정권에 맞선 해 : 756-64년, 785년, 788-89년, 797년, 837년, 852-73년, 897년, 903-32년
756년 5월, 우마이야 왕족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게 코르도바를 빼앗긴 후 사촌 히샴 이븐 우르와가 있던 툴레이툴라로 피신하던 중 피살되어 수급이 코르도바로 보내졌다.[11] 그럼에도 히샴은 툴레이툴라에서 계속해서 후우마이야 왕조에 맞섰고, 761년 아브드 알 라흐만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양측은 협상하여 히샴은 아들 중 하나를 인질로 바치는 대가로 툴레이툴라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히샴이 복속을 거부하자 분노한 아브드 알 라흐만은 인질인 그의 아들을 처형한 후 투석기로 그 수급을 성내로 던졌다. 764년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다시 툴레이툴라를 포위했고, 효과적으로 방어하던 히샴과 해방 노예 바드르는 주민들의 배신으로 사로잡혀 후우마이야 진영에 넘겨졌다. 이로써 도시는 후우마이야 령이 되었으나 785년에 유수프 알 피흐리의 아들 압둘 아스와드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아브드 알 라흐만은 3차 피트나 도중 잃은 줄 알았다가 재회한 장남 술라이만을 툴레이툴라 총독에 봉했다. 788년 아브드 알 라흐만의 사후 그의 차남 히샴 1세가 계승하자 술라이만은 모스크에서 이복 동생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히샴 1세는 툴레이툴라를 포위했고, 술라이만은 동복 동생 압둘라에게 도시를 맡긴 후 빠져나와 지원 세력을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789년 압둘라가 항복하자 술라이만 역시 이듬해 항복한 후 추방되었다. 792년 히샴 1세는 아들 알 하캄 1세를 툴레이툴라 총독에 봉했고, 그는 부임 직후 왕세손 아브드 알 라흐만 2세를 얻었다. 툴레이툴라의 알 하캄 1세는 796년 부왕의 사후 아미르가 되었다. 797년 툴레이툴라의 시인 기르비브 이븐 압둘라는 후우마이야 조에 반대하는 시를 지어 주민들을 선동했고, 이븐 하미르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알 하캄 1세가 보낸 중군 아므루스 이븐 유수프는 툴레이툴라 서쪽의 탈라베라에 주둔하며 반군 중 바누 마흐사 파벌에게 배신한다면 총독으로 봉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그들은 이븐 하미르를 죽여 수급을 바쳤으나, 아므루스는 배신자들 역시 처형한 후 잔당 세력을 설득해 항복시켰다. 툴레이툴라에 입성한 아므루스는 남은 7백여 지도자들을 성채의 연회로 초대해 하나 하나 참수했다. 그 수급은 이 목적을 위해 파여진 참호에 던져졌고, 이는 아랍 연대기에 '참호의 날'로 기록되었다. 이후 아므루스는 802년까지 툴레이툴라 총독을 지냈다. 한편 785년 ~ 794년에 걸쳐 톨레도 주교 엘리판두스가 주장한 '예수의 인간성 입양설' (Adoptionism)은 아스투리아스 왕국 등 북방 주교들과의 갈등 소재가 되었다.[12] 이는 모사라베 정체성이 심화되고 있고 툴레이툴라가 여전히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중심지임을 나타낸다.
8세기 말엽 후우마이야 왕조는 북방의 기독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변경 지대에 세 군관구 (앗 타그르)를 설치했다. 그중 툴레이툴라는 중앙 군관구, 즉 앗 타그르 알 아우사트의 중심이 되었다.[13] 9세기 초엽의 상대적 안정기를 지나 툴레이툴라 출생인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의 치세인 837년에 도시의 기독교도들과 유대인 공동체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후 툴레이툴라에는 높은 성벽과 성탑을 지닌 요새, 즉 알카사르가 세워졌고 일부 유력자들이 코르도바 궁정에 인질로 잡혔다. 852년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의 사후 툴레이툴라 주민들은 차별과 부패에 맞서 군대를 조직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총독을 감금해 인질 교환 협상을 벌였다. 막 즉위한 무함마드 1세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사실상 독립한 툴레이툴라는 인근의 경쟁 도시 칼라트라바를 침공해 853년에 그 성벽을 파괴한 후 주민들을 학살 및 추방했다.
놀란 무함마드 1세는 병력을 보내 칼라트라바를 재건하고 툴레이툴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툴레이툴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오르도뇨 1세 및 팜플로나 왕국의 가르치아 1세 에네코이츠와 동맹을 맺었다. (854년) 이에 무함마드 1세는 바누 카시 소속의 사라고사 총독 무사 이븐 무사와 함께 정예병을 편성해 친정에 나섰다. 툴레이툴라 동남쪽 15km의 과잘레테 (과달라세테) 강변 (현 비야미나야 일대)에서 양측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븐 칼둔에 의하면 아미르의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본 툴레이툴라-기독교 연합군은 강을 건너 우마이야 군을 공격했. 짧은 전투 끝에 무함마드는 남쪽으로 후퇴했고, 연합군은 그를 추격하였으나 아랍 군대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다. 이 매복이 계획된 것인지 장군들의 기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툴레이툴라-기독교 연합군은 약 8천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다.[14]
패전 후에도 도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툴레이툴라 수복에 있어 후우마이야 군대는 직접적인 공성전 대신 인근 요새들에 기병들을 배치해 도시를 외부로부터 봉쇄하는 지구전에 나섰다. 3년간 버티던 툴레이툴라는 857년 서쪽의 후우마이야 거점 탈라베라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듬해 무함마드 1세는 재차 친정에 나서 툴레이툴라로 이어지는 다리를 파괴하였으나 함락은 실패하였다. 결국 859년, 무함마드 1세는 툴레이툴라와 휴전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툴레이툴라는 비록 적대적인 이웃 도시들에 둘러쌓이긴 했지만 20년간 사실상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다만 반란을 주도한 주교 에우제니오는 감금된 후 처형되었고, 무사 이븐 무사의 아들 룹 (루푸스)이 툴레이툴라 총독으로 봉해졌다. 862년 부친의 사후 룹은 오르도뇨 1세에 복속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872년 그의 동생들은 사라고사와 투델라를 장악했다.[15]
873년에 재차 친정한 무함마드 1세는 룹이 동생들에 합류한 틈에 (휴전이 지속되던) 툴레이툴라를 포위, 현지 지도자에게 총독위를 제안해 복속시켰다. 뒤이어 사라고사를 평정한 무함마드 1세는 반군을 배신해 도움을 준 물라디 아르무스 이븐 우마르를 우에스카 태수에 봉했다가 후일 툴레이툴라 총독에 봉한다. 한편 내전을 틈타 기독교 왕국들이 영토를 확장하자 878년 왕세자 알 문디르가 툴레이툴라 총독 살리드 이븐 가님과 함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원정했다. 툴레이툴라에서 출정한 알 문디르는 병력을 양분해 자신은 레온으로 진격했고, 살리드의 툴레이툴라 군대는 오르비도로 향하게 했다. 이에 아스투리아스 국왕 알폰소 3세는 상대적으로 약한 툴레이툴라 군대를 공격해 폴보라리아 전투에서 격파했다.[16] 이에 알 문디르가 철수했으나 알폰소 3세가 추격해 발데모라 협곡에서 격파한다.[17]
884년 사라고사를 수복하며 한숨을 돌린 듯하던 무함마드 1세는 뒤이은 우마르 이븐 하프순의 반란으로 다시 우환에 빠져 곧 사망한다. 그후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의 치세인 897년 1월, 툴레이툴라 주민들은 20여년 만에 반란을 일으켜 사라고사를 포위하던 바누 카시의 무함마드 이븐 룹에게 지도자 자리를 제안했다. 이에 그는 대리인으로 아들 룹을 파견했고, 859년 이후 28년만에 '2번째 룹'이 툴레이툴라의 지도자가 되었다. 897년 8월 룹은 바르셀로나 원정에 나서 백작 윌프레드를 전사시켰고 남부의 반란자 우마르 이븐 하프순과 동맹해 코르도바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10월에 부친이 전사했다는 급보에 룹은 회군했고, 그는 부친의 영지 세습을 위해 투델라로 향하며 아미르 압둘라에 복속했다. 이로써 툴레이툴라 역시 복속했으나 903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주민들은 사라고사를 포위 중이던 룹에게 지도자 자리를 제안했고, 후자는 동생 무타리프를 파견했다. 툴레이툴라에 입성한 무타리프는 아미르를 칭했으나 곧 조카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게 찬탈되었고, 후자는 다시 906년에 암살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룹은 기독교 세력들과 싸우느라 개입하지 못했다가 907년에 전사했고, 이후 바누 카시 세력은 빠르게 소멸되었다. 이후 툴레이툴라는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우마르 이븐 하프순과 동맹했고, 후자의 아들 자파르를 지도자로 삼았다. 912년에 즉위한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913년 세비야를 수복했고, 917년 우마르 이븐 하프순이 사망하자 그 잔당에 대한 공세에 나서 마침낸 928년에 완전 진압에 성공한다. 안달루스 남부를 평정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930년에 바다호스, 메리다, 알카세르 두 솔 등 서부를 평정한다.
2.2.2. 기독교 세력에 대한 원정 거점
10세기에 로마 다리 옆에 세워진 알칸타라 성문
930년 후우마이야 군대는 툴레이툴라를 노리며 그 주변을 초토화시킨 후 도시를 포위했고, 2년의 공방전 끝에 자파르는 레온 왕국에 망명해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레온 왕국의 라미로 2세 역시 동생 알폰소 4세와의 내전 중이었기에 개입하지 못했다. 이에 932년 8월 2일, 남은 주민들은 사면을 대가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에게 항복했고 4천여 열성파 반군만 밤을 틈타 포위망을 돌파해 도주했다. 937년에는 사라고사도 복속하며 안달루스는 다시 후우마이야 왕조 하에 통일되었다.
932년 이후 툴레이툴라는 70여년간 평화를 누리며 이젠 칼리파로 격상된 후우마이야 군주들 및 10세기 말엽의 권신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이끄는 기독교 세력들에 대한 원정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알 하지브 알 만수르는 툴레이툴라에서 출정해 977년 살라망카, 9981년 아스트로가, 982년 레온, 984년 바르셀로나, 987년 코임브라, 997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1000년 부르고스 등을 함락한 후 도시로 돌아왔다. 그의 사후에도 두 아들 압둘 말리크와 압둘 라흐만이 이어 재상에 올라 섭정 역할을 했다.
2.2.3. 톨레도 타이파국 (바누 딜눈 토후국)
10세기에 세워져 11세기에 확장된 앗 답바긴 모스크 (현재의 산 세바스티안 성당)
11세기 초엽에 세워져 앗 답바긴 모스크 (산 세바스티안 성당)의 세정 의식을 맡던 테네리아스 목욕탕
1009년 2월의 정변으로 재상 압눈 라흐만이 피살되며 안달루스는 2년이 넘는 피트나 (내전)에 돌입한다. 한편 툴레이툴라는 슬라브계 총독 와디흐 앗 시클라비의 수중에 있었고, 베르베르 군부가 옹립한 술라이만[18] 대신 무함마드 2세[19]국과 함께 코르도바를 점령한 후 정권을 장악한다. 하지만 술라이만과 베르베르 군대 역시 알헤시라스에서 세력을 회복해 코르도바를 포위했고, 결국 무함마드 2세와 와디흐는 처형된다. 1013년과 1016년의 코르도바 약탈로 안달루스의 분열이 심해지다가 1018년 툴레이툴라 주민들 역시 총독을 축출하고 자립했다. 다만 아부 발라 야이스 이븐 후맘마드, 이븐 마사라, 압둘 라흐만 & 압둘 말리크 이븐 마티요 형제 등이 연이어 집권하며 혼란이 이어지던 끝에 1032년 (혹은 1036년)에 주민들은 동북쪽 산타바리야 & 쿠엔카의 베르베르 영주 압둘라흐만 이븐 딜눈에게 통치를 부탁했다.
이에 그는 아들 이스마일 앗 자히르를 보냈고, 이스마일은 아미르를 칭하며 툴레이툴라 토후국 (딜문 왕조)을 세웠다. 이웃 토후국들과 친선을 유지한 이스마일은 문학과 과학을 좋아해 후원했고, 툴레이툴라는 안정 속에서 문화적으로 번영했다. 11세기 중엽 툴레이툴라의 인구는 2만 8천명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그중 대부분은 현지 출신 개종자인 무왈라드였고, 4천은 유대교도였다. 역시 수천 가량이던 모사라베 기독교도들은 자체 주교가 있었다. 시내에는 수십개의 모스크와 6개의 목욕탕 (함맘)이 있었고, 성벽은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다.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이스마일은 1043년에 사망했고, 아들 야흐야 알 마문이 계승한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알 무스타인과 대립하던 알 마문은 레온 왕국의 페르난도 1세에게 사라고사에 대한 합동 공격을 제안해 성사시키며 경쟁국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동맹' 페르난도는 1062년에 툴레이툴라 령이던 탈라만카 데 하라마를 점령하고 알카라 데 에르난데스를 포위했다. 이에 알 마문은 파리아스 (연공) 납부를 대가로 그를 회군시켰고, 1065년에 (페르난도의 도움 및 허가 하에) 발렌시아 토후국을 정복해 영토를 지중해 연안까지 넓혔다. 한편 같은해 페르난도 1세의 사후 그의 영토는 분열되어 레온 왕국은 알폰소 6세, 갈리시아 왕국은 가르시아 2세, 신설된 카스티야 왕국은 산초 2세에게 계승되었다. 1071년 산초 2세는 동생들을 공격해 카스티야 왕국 하에 레온, 갈리시아 왕국을 정복했다. 패배한 알폰소 6세는 1072년 6월에 기존에 연공을 받던 툴레이툴라로 망명했다. 같은해 8월, 산초 2세가 암살당하자 알폰소는 알 마문에게 그와 그 자손들에 대한 지원을 서약한 후 10월에 본국으로 돌아가 형에 이어 레온-카스티야-갈리시아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계속해서 1만 2천 디나르 금화의 연공을 납부하며 기독교 세력의 성장을 돕던 알 마문은 1074년에 알폰소와 함께 안달루스 남부로 남하했다. 알폰소가 세비야 토후국과 함께 그라나다 토후국을 복속시키는 동안 알 마문은 세비야 령이던 코르도바를 공격해 1075년 2월에 정복한다. 하지만 같은해 7월 알 마문은 코르도바에서 독살되었다. 그를 계승한 손자 야흐야 알 카디르는 툴레이툴라의 친-카스티야 세력을 축출했는데, 이를 핑계로 발렌시아가 툴레이툴라에 대한 연공을 거부하며 독립했다. 1077년에는 코르도바 역시 재차 독립했다. 이후 세비야 토후국이 1078년 발렌시아, 데니아, 코르도바에 이어 툴레이툴라 남쪽의 라 만차 지역까지 정복하며 안달루스 최강국이 되었다. 여론의 지지를 잃은 알 카디르에 대해 툴레이툴라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알폰소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후 주민들은 바다호스 토후국의 알 무타와킬에게 복속했고, 그는 1079년 (혹은 1080년) 툴레이툴라에 입성했다. 알폰소는 쿠엔카로 피신한 알 카디르의 복위를 위해 바다호스 방면의 코리아를 정복해 압박했고, 이에 알 무타와킬은 툴레이툴라에서 철수한다. 이에 따라 1081년에 복위한 알 카디르는 알폰소가 자신의 영토 내의 두 곳에 자신의 부담 하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한편 기독교 연대기에 따르면 복위 후 알 카디르는 불안정한 툴레이툴라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알폰소가 세비야에게 빼앗긴 발렌시아 회복을 도와주는 대가로 도시를 그에게 넘긴 후 발렌시아의 아미르가 되기로 밀약을 맺었다 한다. 그리고 1082년, 툴레이툴라 주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알 카디르는 잔당을 마드리드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이 무렵 알폰소는 툴레이툴라 정복을 결심했고, 1083년에 지브롤터 인근의 타리파까지 남하해 무력 시위를 하며 세비야의 아미르 알 무타미드에게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2.2.4. 톨레도 함락 (1085년)
1080년경 안달루스 정세
알폰소 6세가 입성했다고 전해지는 비사그라 (밥 샤크라) 성문
마침내 1084년 가을, 알폰소는 툴레이툴라 인근에 영구 주둔지를 세우며 농사 활동 및 외부에서의 보급을 차단하며 포위했다. 12월에 레온으로 돌아간 알폰소는 1085년 3월 중엽, 더 많은 병력과 함께 포위망으로 돌아왔다. 사기도 낮은 상황에서 외부의 지원을 얻지 못한 알 카디르는 알폰소를 매수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무슬림 주민들의 생명, 재산, 종교 존중, 자유를 보장하는 대가로 5월 6일에 항복했다. 유대 공동체와도 따로 협상한 알폰소는 5월 25일[20] 툴레이툴라에 입성했다. 기독교 연대기에 따르면 전란에 지친 주민들은 이미 처음부터 항복을 결정했으나, 도시의 위상 유지 및 무슬림들의 지탄 회피를 위해 2년 가량 저항하는 척 연기를 했다 한다.[21]
8월까지 레온-카스티야 군대는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등 남은 툴레이툴라 토후국의 영토를 장악하며 이베리아 반도 중부를 평정했다. 항복 후 도시는 '톨레도'로 불리게 되었고, 톨레도 토후국 영토를 계승한 '톨레도 왕국'의 중심지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중 하나가 되었다. 톨레도는 기독교 세력이 정복한 첫 안달루스 대도시였고, 이후 레콩키스타 전쟁이 절정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후 안달루스 남부의 모사라베 기독교도들이 대거 톨레도로 이주했다. 알폰소는 톨레도에 산 세바스티안 성당 등, 모사라베 전례를 따르는 6개 성당을 지정해 보호했다. 한편 알폰소의 도움으로[22] 1086년 발렌시아의 아미르가 된 알 카디르는 1092년의 민중 봉기로 폐위되어 처형된다.
2.3. 카스티야 왕국의 실질 수도
톨레도 정복 후 알폰소는 관용을 베풀어 도서관과 번역 기관들을 보존했고, 오히려 무슬림 및 유대인 학자들을 고용해 아랍어 및 히브리어 서적들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한 후 다시 카스티야 학자들에게 라틴어로 번역하게 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잊혀져 가던 그리스-로마 고전들과 중세 이슬람권의 뛰어난 학문이 서유럽으로 전해질 수 있었고, 이른바 '12세기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다. 톨레도는 이전의 문화적 위상을 유지했고,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실질적 수도로써 이슬람 시기보다 정치적으로 더욱 중시되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톨레도는 12세기 중반까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 톨레도 상실에 충격을 받은 안달루스의 이슬람 토후국들은 서로 간의 전쟁을 멈추고 바다 건너편 마그레브의 신흥 세력인 무라비트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그 군주 유수프 이븐 타슈핀이 개입해 무슬림 연합군을 결성했다.2.3.1. 무라비트 왕조의 위협
1110년 무라비트 군대에 의해 파괴된 알칸타라 다리 건너편의 수도원을 템플 기사단이 개조한 산 세르바노 성채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무슬림 연합군은 알폰소의 기독교 연합군을 격파했다. 톨레도로 철수한 알폰소는 유수프가 후계자이던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모로코로 돌아가며 한숨을 돌렸다. 다만 무슬림 토후국들이 연공을 중단하며 경제난에 처한 그는 기존에 대립하던 엘시드를 톨레도로 불러 화해했다. 그러던 1087년 10월, 톨레도 대주교는 콘스탄사 왕비와 공모하여 무장 병력을 보내 여전히 모스크로 쓰이던 톨레도 대사원을 점거한 후 미나렛에 종을 다는 등 성당으로 개조했다. 항복 당시의 서약이 깨진 것에 분노한 알폰소는 가담자들을 체포해 죽이려 했으나 무슬림 주민의 대표 파키흐 아부 왈리드가 지비를 베풀 것을 청해 철회했다.[23] 이로써 톨레도 모스크는 대성당이 되었고, 1088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카스티야의 중심 성당으로 선포되었다. 다만 무슬림 공동체는 4세기 이상 유지되었다.
1088년 안달루스로 돌아온 유수프는 무르시아 인근 알레도를 포위, 함락하진 못했지만 결국 카스티야 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그는 마드리드 등을 함락하며 톨레도를 압박했다. 1090년 6월, 다시 안달루스로 돌아온 유수프는 이번에는 톨레도로 진격했다. 하지만 당장 기독교 세력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무라비트 왕조의 세력이 너무 커져 자신들을 병합할 것이라 여긴 무슬림 토후국들은 이번에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알폰소와 협상했다. 따라서 유수프는 무슬림 연합군 없이 7월에 무라비트 군대만으로 톨레도를 포위했는데, 이미 수비대가 보급품을 비축하는 등 공성전에 대비해 둔 상태였고 알폰소와 아라곤-나바라 왕국의 산초 레미리스가 남하하자 8월에 철수했다.[24] 이후 유수프는 도움을 거부한 무슬림 토후국들을 멸망시켜 사라고사를 제외한 안달루스를 통합했다.[25]
1097년에 4번째로 안달루스에 상륙한 유수프는 장군 무함마드 이븐 알 핫즈를 톨레도 방면으로 보냈다.[26] 이에 알폰소 역시 남하했으나 8월 톨레도 동남쪽의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패배했고, 엘시드의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전사했다. 무라비트 군대는 알폰소가 피신한 콘수에그라 성채를 8일간 포위한 끝에 함락하지 못했고, 레온 귀족 알바르 파녜스가 수비를 맡았던 톨레도 동쪽의 도시 쿠엥카를 함락한 후 회군했다. 1099년 6월, 무라비트 군대는 다시 톨레도 방면으로 공세를 가해 이번에는 콘수에그라를 함락했다. 다만 알바르 파녜스가 알칼데 (수비대장)를 맡은 톨레도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고, 전선은 타호 강을 경계로 고착화되었다. 이로써 톨레도는 카스티야의 최전방 도시로 전락했고, 그마저 종종 습격을 당하는 돌출부에 해당했다. 따라서 알폰소는 주로 후방의 사하군과 레온 등지에 머물렀다.
1100년 알폰소는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톨레도 방어를 맡겼고, 톨레도 상실에 대비해서 살라망카와 아빌라의 성벽을 보강했다. 1102년 봄에는 엘시드의 과부 히메나 디아스가 발렌시아를 넘긴 후 추종자들과 톨레도로 망명했다.[27] 1103년 알폰소는 무어인 첩에게서 얻은 유일한 아들 산초를 후계자로 선포하며 톨레도를 맡겼다. 그리고 1104년 7월, 톨레도와 사라고사 사이의 메디나셀리 (마디나트 살림)를 점령해 도시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알폰소는 1106년까지 수 차례 안달루스 남부로 진격해 모사라베 기독교도들을 대거 톨레도 일대로 이주시켜 인구 및 생산력을 늘렸다. 1108년 5월, 유수프의 아들인 그라나다 & 코르도바 총독 아부 타히르 타밈이 북상하자 톨레도의 산초는 알바르 파녜스와 함께 3천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톨레도와 쿠엥카 사이의 우클레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알바르 파녜스가 패잔병을 규합해 톨레도로 철수했고, 산초 역시 도주했으나 부상이 심했기에 톨레도 방면의 벨린촌에 의탁했다. 다만 현지 무슬림들이 봉기하여 그를 죽이고 타밈에게 넘겼다.[28] 우클레스 전투의 결과가 알려지자 톨레도 동쪽의 아란후에스 등지에서 무슬림 봉기가 벌어졌고, 우카냐와 쿠엥카 등 톨레도 왕국 동부가 무라비트 령이 되었다.[29] 그나마 타밈이 톨레도를 공격하지 않고 그라나다로 철수한 것이 기적으로 여겨졌다. 한편 톨레도로 급히 달려와 비보를 접한 알폰소는 딸 우라카를 후계자로 지목했고, 히메네스 왕조의 남성 직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1109년 여름,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알폰소가 사망하자 아라곤-나바라 국왕 알리폰소 1세와 결혼한 우라카가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유수프[30]의 후계자 알리는 정권 교체를 틈타 안달루스로 돌아와 공세에 나섰다.
알리는 톨레도 서쪽의 탈라베라와 동북쪽의 마드리드를 함락한 후 톨레도 인근 27개 요새를 함락했다. 1110년 초엽에는 고립된 톨레도를 3일 (혹은 7일)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주변만 약탈한 후 회군했다. 그후 알리는 사라고사를 정복, 안달루스를 통일한다. 이러한 위기 상항에서 알리폰소가 카스티야에 대한 야욕을 지나치게 드러내자 우라카는 그와
한편 카스티야 내전에 있어 1113년 봄에는 우라카 편에 선 알바르 파녜스가 톨레도를 수복했고, 6월에는 우라카가 톨레도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 수비를 강화했다. 이에 마즈달리는 톨레도 동북쪽의 오레하 (아란후에스 인근)를 점령하고 톨레도를 압박했다.[31] 무라비트 왕조의 압박이 거세지던 1114년, 우라카와 알리폰소 부부는 교황청의 중재로 화해하고 이혼했다.[32] 같은해 여름에도 마즈달리는 톨레도 북쪽의 라 사그라 지역을 습격했다. 하지만 1115년 3월, 재차 톨레도 인근을 습격하던 마즈달리는 카스티야-아라곤 군의 반격으로 전사했다. 1116년 우라카는 아들 알폰소 7세를 톨레도에 봉하여 무라비트 왕조를 견제하게 했다. 다만 1118년 알리폰소가 사라고사 함락 후 발렌시아 방면으로 남하하며 전선이 동쪽으로 이동했기에 톨레도 전선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1128년 알리의 아들로써 그라나다 및 코르도바 총독에 봉해진[33] 타슈핀 이븐 알리가 매년 타호 강 유역을 습격하고 성채들을 파괴하며 톨레도를 고립시켰다. 톨레도 남쪽의 칼라트라바, 동북쪽의 콜메나르를 군사 거점으로 삼은 그는 1130년 여름에 톨레도와 불과 20km 거리의 오레하 성채를 공격해 함락했다.[34] 뒤이어 타슈핀은 톨레도 북쪽 7km 거리의 바르가스에 이어 톨레도의 로마 다리 (알칸타라) 건너편 타호 강변의 산 세르반도까지 함락한 후 그라나다로 회군했다. 1131년에는 칼라트라바 영주 알 파라즈가 톨레도 서북쪽의 에스칼로나 (알라민)에서 추격에 나선 카스티야측 톨레도 총독 구티에레 아르밀데스를 매복 공격해 전사시켰다. 이때 귀족 무뇨 알폰소 등이 사로잡혀 코르도바에 감금되었다가 배상금을 내고 풀려난다. 한편 1130년에 내부 반란을 진압한 알폰소 7세는 대반격에 나섰다.
2.3.2. 알폰소 7세의 반격
1144년 기준 이베리아 반도 정세
1131년 알폰소 7세는 사라고사 토후국의 후예 자파돌라 (사이프 앗 다울라)에게 톨레도 인근 영지를 주어 봉신으로 삼았다. 그리고 1133년 9월에 그와 함께 톨레도에서 남하하여 코르도바, 카르모나, 세비야 인근을 약탈했다. 카스티야 군대는 추수가 다가오던 밭을 불태우고 올리브 및 포도 나무를 베는 등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헤레스와 카디스를 함락해 불태운 알폰소 7세는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대동하고 같은 달에 톨레도로 돌아왔다. 1138년 알폰소 7세는 톨레도 총독 로드리고 페르난데스와 함께 재차 남하해 하엔, 우베다, 바에자, 안두하르 등에서 주민과 가축을 사로잡고 방화와 삼림 훼손을 벌였다. 다만 일부 병력이 과달키비르 강을 건넜다가 마침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고립되었고, 무라비트 군대가 공격하자 포로와 가축을 다 죽인 후 전멸했다. 이를 무기력하게 지켜본 알폰소 7세는 톨레도로 철수했다.
1139년 4월, 톨레도의 안전을 확보하기로 결심한 알폰소 7세는 톨레도 총독 로드리고 페르난데스를 보내 동북쪽 50km 지점의 무라비트 거점인 오레하[35] (아우렐리아) 성채를 포위했다. 오레하의 영주 알리는 성내의 거대한 투석기를 기반으로 저항하며 포위가 길어지자 알폰소 7세는 스페인측 연대기에 따르면 공성병기와 함께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의 '가용 병력 전부를 동원하여' 포위망에 합류했다. 식량이 떨어진데다 저수조의 물마저 줄어들던 포위군이 식수 차단에 나서고 성탑들을 파괴하자 알리는 협상에 나서 연락 후 한달 내로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할 것을 약속했다. 알폰소 7세는 알리가 15명의 인질을 주고 무기와 포로를 남겨두는 조건 하에 이를 승인했고, 결국 원군이 안 오며 10월 말에 항복한 알리는 잔여 병력과 함께 재산을 챙겨 칼라트라바로 철수했다.
이후 톨레도에서는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개선식이 열렸고, 도시의 안위를 확보한 알폰소 7세는 '레온과 톨레도의 황제'라 칭송되었다. 다만 일부 주민들은 무슬림 수비대를 살려둔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1142년 6월 알폰소 7세는 살라망카 남서쪽의 코리아를 점령했고, 1143년 3월에는 카스티야 장군 무뇨 알폰소가 코르도바 근교를 약탈한 후 귀환하다가 추격해 온 무라비트 군대를 톨레도와 무르시아 사이의 몬티엘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금, 은, 예복, 가축, 무기, 포로 등을 얻은 무뇨 알폰소는 톨레도로 개선했고 전사한 세비야와 코르도바 총독 등 무라비트 장군들의 머리를 창에 꽂아 행진한 후 성탑에 걸었다. 다만 왕비 베렝가리아는 머리들을 유대인 및 무슬림 의사들에게 주어 몰약과 알로에를 바른 후 코르도바로 보내어 과부들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
톨레도에 머물며 무라비트 왕조의 쇠퇴를 지켜보던 알폰소 7세는 2차 타이파 분열기를 틈타 1146년 5월, 코르도바를 포위해 복속시켰다. 이후 세비야의 무라비트 총독도 복속시킨 그는 회군하던 중인 1147년 1월에 톨레도 남쪽의 무슬림 거점이던 칼라트라바를 점령해 요새화했고, 톨레도 대주교 후안 2세는 칼라트라바 기사단 조직을 후원했다. 같은해 알폰소 7세가 알메리아를 점령하는 등 레콩키스타의 기세를 올리며 톨레도는 왕실이 거주할 정도로 안전해졌다. 다만 1157년 마그레브의 새 강자 무와히드 왕조가 개입해 알메리아를 포위하자 알폰소 7세는 구원에 나섰다가 실패했고, 톨레도로 철수하던 도중 사망했다. 안달루스 대부분을 통합한 무와히드 왕조는 이듬해 칼라트라바를 공격하나 격퇴되었다. 한편 톨레도에서 반격을 준비하던 산초 3세는 사망했고, 3세에 불과한 아들 알폰소 8세가 계승했다.
2.3.3. 무와히드 왕조의 위협
1200년 기준 이베리아 반도 정세
어린 알폰소 8세의 즉위 후 카스티야에서는 카르틀 가문과 라라 가문이 섭정권을 두고 내전을 벌였다. 그중 수세에 몰린 카스트로 가문은 레온 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도움을 받아 버틸 수 있었다.[36] 그리고 1162년, 페르난도 2세는 톨레도를 무력 점령한 후 카스트로 가문의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를 그 총독에 봉했다. 라라 가문과 알폰소 8세는 아빌라에서 저항했다. 그러던 1166년, 무와히드 군대가 알칸타라 등을 점령하며 바다호스 방면에서 타호 강에 다시 이르자 페르난도 2세는 톨레도를 카스티야에 반환했다. 1172년 7월, 무와히드 칼리파 유수프 1세가 톨레도와 쿠엥카 사이의 우에테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1173년 3월에는 아빌라의 민병대장 산초 히메네스가 코르도바 인근을 약탈한 후 돌아오다가 무와히드 군대에게 따라잡혀 톨레도 남쪽의 칼라트라바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1177년 알폰소 8세는 쿠엥카를 점령해 톨레도 동쪽의 안전을 확보했다. 다만 레온 vs 카스티야 대립은 1194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동안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톨레도의 수비를 맡았다. 그나마 아폰수 1세의 노력으로 전선이 안달루스 서부에 집중되며 톨레도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렸고, 1190년 알폰소 8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휴전을 맺었다. 다만 1195년에 그는 세비야 공격에 나섰고, 이에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코르도바에서 북상하자 알폰소 8세 역시 톨레도에서 남하했다. 후자는 레온 왕국의 사촌 알폰소 9세에게 지원을 부탁했지만 아직 앙금이 남아있던 그는 거절했다. 톨레도와 코르도바 사이에서 벌어진 1195년 7월의 알라르코스 전투는 무와히드 군대의 대승이었고, 칼라트라바와 말라곤 등 톨레도 남쪽 거점들이 함락되었다. 알폰소 8세는 간신히 톨레도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나마 야쿱이 군대가 지쳤다고 여겨 톨레도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한편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는 지원군과 톨레도에 당도했지만 영토 반환이 거부당하자 도움을 주지 않은 채로 떠났고, 오히려 무와히드 왕조와 동맹하여 카스티야를 공격했다. 1196년 야쿱은 에스칼로나, 탈라베라 등을 함락하며 톨레도를 서쪽에서 압박했다. 뒤이어 그는 톨레도를 포위했으나 알폰소 8세는 마침 1천의 기사들을 이끌고 합류한 아라곤 국왕 페로 2세의 도움 덕에 버틸 수 있었다. 따라서 야쿱은 포위를 풀고 마드리드, 알칼라 데 에르난데스를 공격했으나 카스티야 귀족 디에고 로페스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과달라하라, 쿠엥카, 오레하, 우에테, 우클레스 등 톨레도 동쪽을 약탈한 야쿱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지시로 톨레도 대주교는 레온 왕국을 파문했다.
1197년에 코르도바를 거쳐 다시 북상한 야쿱은 탈라베라를 거쳐 재차 톨레도를 포위했으나 역시 함락하지 못했다. 뒤이어 그는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오레하, 우클레스, 우에테, 쿠엥카 등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6월에 알폰소 8세와 휴전을 맺은 후 내부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모로코로 돌아갔다. 포르투갈과 동맹해 레온 왕국을 응징한 알폰소 8세는 1197년 알폰소 9세와 화해했고,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10년 이상의 평화를 맞았다. 그러던 1211년, 무와히드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가 시우다드 레알 인근의 살티비에라 성채를 함락하자 알폰소 8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십자군 선포와 함께 스페인과 프랑스 등지에서 병력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프랑스 병력은 톨레도에서 유대인과 무슬림 주민들을 공격하다가 알폰소 8세에게 제지되었다.
이후 연합군은 톨레도에서 오순절을 기린 후 1212년 6월에 남하하여 칼라트라바를 점령했는데, 알폰소 8세가 항복한 수비대에 대한 학살을 금지하자 분노한 프랑스 병력은 결국 도중 대부분 회군해버렸다.[37] 그럼에도 여전히 대군이었던 연합군은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알폰소 8세는 우베다와 바에사를 함락하는 등 안달루스 남부로 깊숙히 침투했다. 이로써 전선이 타호 강 일대에서 과달키비르 강 유역까지 내려가며 톨레도는 후방 도시가 되었고,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1214년 알폰소 8세, 1230년 알폰소 9세가 사망한 후 카스티야 국왕이던 후자의 아들 페르난도 3세가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설립하며 톨레도는 그 중심지로써 번영하게 되었다. 1200년경 인구는 이슬람 시대보다 늘어난 3만 7천에 이르렀고, 기독교도가 다수였다.
2.3.4. 안정기
1227년 ~ 1493년에 새로 세워진 톨레도 대성당. 산초 3세, 산초 4세, 알폰소 7세, 엔리케 2세, 엔리케 3세 등의 군주가 안장되었다.
이렇듯 톨레도는 다시 이슬람 세력권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이베리아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후일 성인으로 시성된 페르난도 3세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며 톨레도 대성당 건설에 나섰다. 다만 인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3만명 대를 유지했고, 점차 기독교화되었다. 이로써 톨레도의 상징과도 같던 다종교, 다민족의 공존인 콘비벤시아는 13세기 들어 깨지기 시작했다. 1212년의 첫 반유대인 봉기[38]를 시작으로 1368년, 1391년, 1449년, 1486-90년에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특히 1449년의 경우 세금에 반발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비기독교도 및 신규 개종자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고 결국 반봉건적 성격을 띠었다. 한편 15-16세기 톨레도의 유대인들은 박해 속에서 톨레도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연대기를 서술했다.[39]
2.3.5. 코무네로 반란 (1520-22년)
카를로스 1세 시기에 세워진 비사그라 누에바 성문
펠리페 1세의 사후 1517년, 플랑드르에서 자라던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군주가 되어 환호와 함께 톨레도에 당도했다. 하지만 카스티야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던 어린 카를로스는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출신 측근들로 궁정을 채웠다. 특히 스페인 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톨레도 대주교에 네덜란드인 빌럼 (기예르모)을 임명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기 위해 국고에서 백만 플로린 이상을 뇌물로 사용한 것은 여론의 반발을 샀다. 그러던 1519년 카를로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취임하기 위해 독일행을 준비하며 코르테스 (카스티야 의회)에 세금 인상을 명령했다. 1520년 3월에 소집된 코르테스에서 귀족들은 불만을 표했고, 일부 성직자들이 국왕을 비판하며 코무니다데스 (자치 공동체)가 카스티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비록 카를로스는 코르테스를 해산한 후 재소집하고 압박을 가해 세금 인상안을 통과시켰지만, 독일로 떠나기 전에 또다른 네덜란드인 아드리아인을 섭정에 봉하며 여론을 자극했다. 그러던 4월, 톨레도 정부는 국왕에 반대하는 과격파 의원들을 타지로 배치하려 했다. 이에 군중이 모여들어 의원들의 압송을 막으며 호송대를 몰아냈고, 왕당파 세력은 알카사르로 피신했다. 알카사르를 제외한 도시를 장악한 시민들은 후안 로페스 데 파디야를 지도자로 선출해 코무니다드라 선포했다. 5월에 카를로스가 독일로 떠나자 코무디다드 운동은 세고비아, 부르고스, 과달라하라, 레온, 아빌라, 사모라 등지로 확산되었고 왕당파 관료들이 피살되었다. 증세 철회, '카스티야인에 의한 카스티야' 등의 구호는 파급력을 얻었고 코무니다드 내에서는 카스티야 도시들을 이탈리아와 비슷한 자치 도시 (코무네)로 전환하는 것도 제안되었다.[40]
6월 들어 많은 카스티야 도시들이 세금 납부를 중단하고 자치에 나섰고, 후안 로페스는 톨레도의 민병대와 함께 왕당파에 의해 포위된 세고비아를 구원했다. 이에 왕실 도시 바야돌리드마저 반란에 가담하자 섭정 아드리안이 축출되었다. 하지만 코무니다드 (코무네로) 운동의 기세가 높아지며 일부 농민들이 귀족들을 공격하며 봉건제 혁파에 나서자,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귀족들은 왕당파에 접근했다. 마침 카를로스 역시 증세안을 폐기하고 카스티야인 섭정을 세우며 유화책을 펴자, 결국 대부분의 귀족들은 왕당파에 적극 가담했다. 12월의 토르데시야스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왕당파는 1521년 초엽 부르고스를 탈환했다. 다만 코무네로 반군은 더욱 반봉건적 성격을 고양하며 버텼고, 마침 카를로스와 함께 독일에 있던 대주교 빌럼이 사망하자 톨레도에서는 안토니오 데 아쿠냐가 자체적인 대주교로 추대되었다.
안토니오는 15~60세의 남성 주민들을 징집하여 인근 농촌을 잠식하던 왕당파와 소모전을 벌였다. 그러던 1521년 4월의 비야라르 전투에서 8천 4백의 왕당파는 7천 4백의 코무네로 군대를 격파했고, 반군 지도자 후안 로페스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바야돌리드, 세고비아 등이 왕당파에 항복했고 마드리드와 톨레도만이 코무네로 수중에 남았다. 후안 로페스의 사망 소식에 애도 기간을 갖던 톨레도는 그의 과부 마리아 파체코를 사실상의 지도자로 삼았다. 5월 11일에 마드리드가 항복하고, 나바라로 향했던 안토니오가 사로잡히자 주민들은 약탈과 학살을 피하기 위해 왕당파와의 협상을 고려했다. 알카사르의 마리아는 숙부 비예나 후작을 통해 왕실과 협상했으나 결렬되자, 세금을 거두고 수비를 강화했다. 하지만 왕당파의 포위가 길어지자 그녀는 자녀들의 사면 및 재산권 보장을 대가로 항복했다.
나바라를 두고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왕실 역시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았고, 10월 31일 코무네로 세력은 재산권 및 자유를 보장받아 알카사르를 떠났다. 다만 마리아 는 여전히 톨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카를로스가 직접 휴전안에 서명하기 전까지 비밀 무기고를 공개하지 않겠다며 버텼다. 이에 1522년 2월, 왕당파 군대가 항복안을 폐기하고 마리아를 붙잡아 처형하려 했다. 이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왕당파가 협상하는 동안 마리아는 농부로 위장해 포르투갈로 망명했다. 그해 7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온 카를로스는 코무네로 세력을 전부 처벌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다고 여겨 11월에 (293명의 핵심 인사들을 제외한) 대사면을 내렸고, 남은 치세동안 카스티야 왕국은 카스티야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안정적으로 합스부르크 (압스보르고) 왕조 체제로 들어섰다.
2.3.6. 스페인 제국의 수도에서 지방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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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대에 기존 무어 양식의 성채를 대대적으로 증축한 알카사르 |
1528년 카를로스는 알카사르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를 접견, 이듬해 그를 멕시코 부왕에 봉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취임 후에도 카를로스는 스페인에 체류할 때마다 톨레도에 머물렀고, 왕궁으로 알카사르를 건설했다. 1528년에 3만 2천이던 인구가 1561년에 5만 6천까지 늘 정도로 톨레도는 황금기를 보냈다. 한편 카를로스 시기 스페인은 중앙 집권화된 단일 국가가 아니라 덩치랑 위상은 가장 크다해도 실질적으론 유럽 전역에 걸쳐져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편 제국 중 구성국에 가까웠는데[41], 후계자인 펠리페 2세 시절엔 합스부르크 제국 자체가 각각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한 동서로 분리되고 스페인만의 단독 열강으로써 패권과 행정 체계를 쌓아가는 쪽으로 국정 운영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전까진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영구적인 수도를 지정하게 되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코무네로 반란 진압 후로도 여전히 강력한 도시 자치민과 지역 봉건 영주 세력이 있던 톨레도 대신 토착 세력이 약했던 동북쪽의 마드리드를 스페인 제국의 수도로 선택했고, 이로써 톨레도는 4세기 가량 침체되었다. (1561년) 당시 기준 5만 9천에 달했던 인구는 이후[42] 감소하여 1597년에는 4만 7천명에 그쳤다. 그나마 톨레도 대주교의 종교적 권위만이 유지되었다. 한편 1571년 알푸하라 산지의 모리스코 (무어인 개종자) 반란을 진압한 펠리페 2세는 그라나다 일대의 모리스코 기독교도들을 카스티야 각지로 이주시켰다. 이때 톨레도에도 6천여 모리스코가 정착했고, 기존 기독교도 주민들의 차별에 시달렸다. 16세기에 호황이던 톨레도의 비단 산업은 점차 쇠퇴하여 19세기에는 아예 사라졌다.
2.4.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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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사르를 공격하는 공화파 시민군 | 1940년에 알카사르 폐허를 방문한 하인리히 힘러 |
20세기 후반에 재건된 알카사르와 톨레도 대성당
이베리아 반도 전쟁 중인 1808년 톨레도는 프랑스 제국군에게 점령되었고, 5월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떠났으나 12월에 재점령했다. 1812년 8월에 철수할 때까지 프랑스 군대는 톨레도에서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도시는 더욱 정체되었고, 인구는 중세 시기보다 적은 2만명 수준에 불과했다. 산업화 시기의 개발을 피해갔기에 구도심이 매우 잘 보존되어 20세기 후반 들어 스페인의 주요 관광 도시로 거듭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러던 19세기 중반 톨레도는 마드리드의 행정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고, 1858년에는 철도가 개통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초엽, 국민파의 군사 봉기에 호응한 톨레도 군사령관 호세 모스카르도는 1천 병력과 알카사르를 장악했다.
이에 7월 21일부터 공화파 군대 및 민병대가 알카사르를 공격했고, 그 틈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톨레도를 우회해 마드리드를 공격했다. 알카사르 성채를 상당 부분 폭파했음에도 함락하지 못한 공화파는 9월에 철수했고, 국민파 군대가 톨레도를 장악해 알카사르를 구원했다. 그후 '벙커'로 알려진 알카사르는 스페인 보수파의 상징이 되었다. 1940년 10월에는 나치 독일의 고위인사 하인리히 힘러가 폐허로 변한 알카사르를 방문했다.[43] 1950년에도 톨레도의 인구는 16세기 중반에 못미치는 4만에 불과했다. 그러다 구도심 밖에 신시가지가 조성되고, 관광업 활성화와 함께 1980년대에 카스티야 라만차 주의 주도가 되며 톨레도는 발전하게 되었다.
3. 특징
구도심 일대 전경
이슬람 시기에 처음 세워져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정면부가 더해진 비사그라 성문
고대부터 품질 좋은 강철이 생산되어 유럽 최고의 갑옷과 도검 산지로 유명했다. 특히 톨레도산 검(劍)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세 때까지도 최고의 명품으로 호평받았다. 그 이유는 우선 톨레도에서 채광되는 철광석의 품위가 좋았던 점, 저탄소 강과 고탄소 강을 반복 접쇠하는 기술이 일찍부터 개발되어 우위를 점한 점[44], 강철의 최종적 품질을 결정짓는 열처리(담금질/뜨임) 기술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그 공정들이 표준화되었던 점이다. 몇몇 소수 장인들의 감과 경험에 의존하는 것보다[45] 기술을 표준화하는 것이 품질의 상향 평준화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단적인 예로 시계가 없던 시절에 담금질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담금질 시간에 박자가 맞춰진 표준화된 기도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워낙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고급품은 전문 장인도 일 년에 두세 자루 정도씩밖에 만들지 못했다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톨레도산 강철은 명품이라는 이미지가 생겼고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제강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잘 알려진 로마군의 글라디우스도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어졌고[46] 서고트인들과 무어인들이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유들 중 하나도 톨레도 점령 이후부터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기 시작한 무기와 갑옷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신대륙에서 압도적인 전력 차를 헤쳐 나가거나 오히려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수급이 불안정한 화약 무기보다는 언제나 믿음직한 톨레도산 무구의 위력 덕이 더 컸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부분 흑요석 무기를 사용했고 전금속제 무기는 사실상 본 적도 없어 강철 검의 대응법을 몰라서 검을 막을 만한 갑옷도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조차도 방어구 분야에서는 톨레도 강을 대체할 수 없었던 정도다. 애당초 다마스쿠스 강이 개발된 이유도 톨레도 강 냉병기에 비견할 만한 강철검을 만들자는 것이었기도 하고. 톨레도 강에 비해 다마스쿠스 강은 전성과 연성이 떨어지며 경도가 너무 높아서 취성이 크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도 시 중심부에서 검과 철제 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실전용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용 검을 만들어 낸다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유적지가 모두 남아 있다. 또한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중세 가톨릭 성당, 이슬람 왕궁 등 여러 문화의 유적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역사가 깊은 도시다. 고딕 양식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도시의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데 고야, 반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미술관도 있다.
톨레도 구도심은 1986년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4. 주요 명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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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톨레도 역사도시 |
영어 | Historic City of Toledo | |
스페인어 | Ciudad histórica de Toledo | |
프랑스어 | Ville historique de Tolède | |
국가·위치 |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톨레도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6년 | |
등재기준 | (i)[47], (ii)[48], (iii)[49], (iv)[50] | |
지정번호 | 379 |
구도심 관광 지도 |
톨레도 알카사르(Alcázar de Toledo) | |
알카사르의 내부 모습 |
알카사르(Alcazar)는 톨레도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스페인어로 '성'이라는 뜻이다. 레콩키스타 시기에 이슬람과 싸우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 전국에 있는 여러 알카사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세르반테스 언덕 위 해발 548m에 세워졌다. 로마 시대인 3세기에 처음 지어져 관아로 사용되었고 이후 이슬람 지배를 거쳐 카스티야가 수복한 후 이슬람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51]가 낡고 오래된 요새를 개축할 것을 명해 1538년부터 1551년에 걸쳐 당시 최고의 건축가들을 동원해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그러나 장본인은 애초에 주 관심사가 유럽 대륙이라 평생 스페인 밖에서 전쟁이나 하러 돌아다니고, 아들 펠리페 2세가 완공된 지 불과 10년 만에 마드리드로 천도하면서 왕궁으로서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 전쟁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와중에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 내전 초기 나머지 톨레도 지방과 시 전체는 공화파가 사수하고 당시 군구장 호세 모스카르도 휘하 프란시스코 프랑코파 쿠데타 반군은 이 알카사르 요새만 점령한 상태로 포위, 두 달간의 치열한 농성 끝에 나머지 국가군에게 포위망이 풀려 톨레도를 정복한 바가 있다.[52] 이 과정에서 알카사르는 공화파의 포격으로 거의 가루가 될 만큼 완파되었다가 전후 프랑코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1939년부터 1957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복구되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의 건축학적 가치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군사 박물관 겸 인근 대학의 연구실/도서관 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전근대 역사뿐만 아니라 이런 스페인 근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이기도 했고 군사 박물관 내부 구성물과 영어 번역도 충실하기 때문에 스페인 역사에 관심 있는 여행객들은 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일반에게 공개된 구역 중 알카사르 최상층은 카스티야라만차 대학 도서관인데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있다. 독서대에 앉아 창밖을 보면 타구스 강변에 지어진 중세 보, 성벽 구조물들과 산 마르틴 대교가 장관이긴 한데 자리가 좀 부족해서 넋 놓고 구경하다 보면 실제로 공부해야 하는 현지 학생이 눈치를 줄 수도 있다. 책가방 메고 스페인 어디서나 넘쳐나는 에라스무스 교환학생인 척하고 당당하게 구경하자. 어차피 스페인 현지 학생들도 그 자리에 가방만 던져놓고 공부 안 한다.
-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Toledo)
연혁은 바로 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벨리사리우스 장군 아래, 서로마 멸망 이후 서고트 왕국 설립 이전 100년도 안되는 비교적 짦은 시간 동로마 제국이 히스파니아를 수복했던 6세기까지 올라가는 이베리아 전체에서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성당 중 하나이다. 톨레도 대주교좌는 현대 가톨릭 교회에서 실권은 딱히 다른 주교에 비해 특출나진 않지만 어쨋든 의전, 명목상으론 해당 국가 주교단의 최상석인 히스파니아(중세 초기에 만들어진 교구인 만큼 포르투갈도 포함) 수석주교(primate) 자리이기도 하다. 13세기에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가 16세기 르네상스의 전성기 때 대대적 확충을 하며 고딕, 초기 르네상스, 후기 르네상스, 무데하르, 바로크, 로코코 양식 모두 보여주며, 당장 그 유명한 엘 그레코를 시작으로 루카스 호르단, 클라우디오 코에요, 후안 데 보르고냐, 호세 데 추리게라, 나르시사 토메 등 각 시대별 양식을 대표하는 스페인 예술사 올스타급 예술가들이 한번쯤 거쳐간 스페인 최고의 대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서고트 왕국 시절 도입되어 이슬람 지배 시기 계속 보존, 발전되어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옛 히스파노-모사라베 예법 미사가 매일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 밥 알 마르둠 모스크(Mezquita Bab al-Mardum)[아랍어] / 크리스토 데라루즈 (Cristo de la Luz, 빛의 예수) 성당
- 소코도베르 광장(Plaza Zocodover)
무슬림 통치기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톨레도 시의 중심 광장(plaza mayor). 16세기 초반 르네상스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재건축한 이후 지금도 스페인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양식 중심광장 중 하나이다.
- 톨레도 성벽(Las murallas de Toledo)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중세 성벽 도시인 이웃 카스티야이레온 주의 아빌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톨레도도 중세 구시가지 성벽 구간 다수가 큰 훼손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구시가지 외곽 걸어서 30분 가량, 차타고 5분 거리쯤 되는 언덕 위에 있는 인근 전망대(parador)에서 보면 일부 구간은 맨 아랫부분의 큼지막한 벽돌로 구성된 로마 시대 구조물, 그 위 작고 촘촘한 벽돌로 이루어진 이슬람 시대 구조물, 그리고 맨 위에 재정복 후 카스티야 왕국 시절 지은 부분 등 각 층마다 톨레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 비사그라 누에바 성문 (Puerta de Bisagra Nueva)
톨레도 성의 북문이자 정문으로, 무어인 시대에 있던 2중 성문에 1559년 카를 5세의 문장을 양각한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를 더했다. 두 성문 사이의 옹성 내부에는 카를 5세의 석상도 있다.
-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델 트란시토 시나고그(Sinagoga de Santa María la Blanca, del Tránsito)
상술한 모스크들과 비슷한 시기 건설되어 중세 후기에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된 유대교 예배당으로 중세 이베리아 세파르딤 유대인 문화의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 현대에는 세파르딤 유대인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근처에선 전통 톨레도식 금은 세공으로 만든 하누카용 촛대 같은 유대교 관련 기념품들을 많이 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가 오래된 이베리아 반도 대도시들은 웬만한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톨레도의 경우 스페인 기준으로도 이런 중세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세 종교가 같이 번영했던 도시'라 불리곤 한다.
- 엘 그레코 생가(Casa-museo del Greco)
성벽 안 구시가지 동서쪽 구석에 있는 박물관 겸 미술관인데, 사실 진짜 엘 그레코 생가는 아니고 두세 집쯤 떨어져 있는 다른 귀족의 집이었지만 16세기 당시 주거 양식과 비종교적, 비정치적 일상 건축을 잘 보존한 건축학적 가치도 겸해 얼떨결에 생가 아닌 생가가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12사도 초상화, 톨레도 풍경화 등 엘 그레코의 걸작 다수와 동시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 아버지를 열심히 따라하려고 한 흔적은 보이지만 퀄리티는 영 못 미치는 엘 그레코 아들의 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산토 토메(성 토마스) 성당(Iglesia de Santo Tomé)
엘 그레코 최대, 최고의 걸작인 오르가스 공작의 매장 벽화가 그려진 성당이다. 벽화는 확실히 걸작이긴 하지만 딱히 미술사에 큰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거대 단일 예술품들이 그렇듯이 벽화 하나 본다고 10유로에 육박하는 입장료를 내는 게 창렬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 유의. 물론 성당 자체로도 훌륭한 중세 카스티야 성당 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적지이긴 하지만 이렇게 역사가 오래된 성당 자체야 스페인 내에서도 꼽아주는 역사도시인 톨레도에선 널렸고, 다른 엘 그레코의 작품들을 보려면 상술한 생가 박물관과 골목 몇 개만 돌아 걸어서 5분거리인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수도원에 가도 된다.
- 서고트족 역사 문화 박물관(Museo de los Concilios y de la Cultura Visigoda)
서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 정복 이전 톨레도를 수도 삼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서고트 왕국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는데, 기록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수공예 기술을 가졌던 문명인 만큼 전시품의 퀄리티도 상당히 높다. 박물관이 소재한 산 로만 성당 건물 자체도 12세기까지 올라가고 르네상스 시기 대대적으로 재건축하며 조각가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 작 중앙 제대 부조물을 비롯해 유명 예술가들이 참여한 가치 높은 건축 문화재이다.
- 플라이 톨레도(Fly Toledo)
이름에서도 느꼈겠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역사 유적 관광지와는 성격이 다른 여행지이며,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짚라인 어드벤처. 짚라인을 타며 내려다 보는 톨레도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둘째 치고 꽤 무섭다. 스릴을 즐기는 여행객이라면 방문해 보자.
5. 여담
미국의 이리 호 서부, 디트로이트 남쪽에 동명의 도시가 위치한다.[54] 지명의 유래는 스페인의 톨레도. 다만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없다. 그래도 인구가 280,000명에 달하고 유리 공업으로 명성이 있는 중규모 공업 도시다.자연 그늘 같은 게 없고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그대로 맞는 이베리아 메세타 중부 고원에서도 위도가 높은 편에 속한지라 스페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덥고 건조한 도시 중 하나이다. 특히 문화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구시가지는 산성 위에 지어진 도시 전체가 언덕길이라 햇빛 쨍쨍한 여름날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관광하다 보면 열사병 먹고 훅 쓰러지기에 딱 좋다. 햇빛을 가려줄 모자, 선스크린 같은 자외선 차단 도구와 얼음물, 부채, 손선풍기 같은 걸 꼭 챙기고 중간중간에 휴식하면서 관광하자.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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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파세오 델 프라도와 부엔 리테로, 예술과 과학의 경관 Paseo del Prado y el Buen Retiro, paisaje de las artes y las ciencias | 2023년 메노르카 섬의 탈라요티카 선사시대 유적지 Menorca talayótic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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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기타 지역에 생육하는 고대 및 원시 너도밤나무 숲 Bosques antiguos y primarios de hayas de los Cárpatos y otras regiones de Europa | ||||
복합유산 | 1997년 피레네 산맥 : 몽 페르뒤 산 Pirineos - Monte Perdido | 1999년 이비사의 생물 다양성과 문화 Ibiza, biodiversidad y cultura |
[1] 2024년 기준.[2] Carlos Velázquez Romo[3] 바카아이, 베토네가, 켈티베리 부족[4] Urbs parva, sed loco munita[5] 그의 법전은 후일 스페인 왕국 법령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주교들 역시 활발히 저술 활동에 임했다.[6] 서고트 왕들이 원정 전에 참십자가 하의 축복 의식을 행하고 왐바가 대관식을 치른 곳[7] 다만 후자의 조항은 688년 15차 공의회에서 폐지된다.[8] 후일 당도한 무사가 지시한 것이라고도 한다.[9] مدينة(madina) = city, ملوك(muluk) = kings[10] 신성하다는 뜻인 라틴어 sacra를 아랍어로 음차한 것 혹은 고귀한, 평원, 작은 등의 뜻이라고도 하나[11] 혹은 툴레이툴라에 당도하여 2-3년간 계속 버티다가 주민들에게 피살되어 수급이 코르도바로 보내짐[12] 794년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 역시 프랑크푸르트 주교 회의에서 이를 규탄했다.[13] 그리고 메리다와 사라고사가 각각 서부와 동부 군관구의 치소가 되었다.[14] 그들의 수급은 코르도바에 보내져 안달루스 전역에 조리돌림 되었다.[15] 기독교 연대기는 룹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톨레도를 바쳤다고 하나 연공을 바친 것일 수도 있다. 아랍 연대기에는 연공이나 복속 중 어느 것도 나오지 않는다.[16] 기독교 연대기는 이때 1만 2천 ~ 1만 3천여 무슬림 군인이 전사했다고 과장한다.[17] 결국 무함마드 1세는 배상금 지불을 대가로 휴전을 맺는다.[18] 칭호: 알 무스타인[19] 알 마흐디)를 지지하던 그는 후자가 같은해 9월에 패주하자 환대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010년 6월, 무함마드 2세와 와디흐는 바르셀로나[20] 혹은 24일[21] 실제로 알폰소도 포위만 하고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22] 신임하는 카스티야 귀족 알바르 파녜스를 파견했다.[23] 대성당 내에는 지금도 아부 왈리드를 기리는 기둥이 있다.[24] 7월 중순에 소식 접한 후 8월에 철수함[25] 1090년에 그라나다, 말라가 병합. 1091년에 코르도바, 세비야, 알메리아 병합. 1094년에 바다호스 병합. 1102년에 카스티야에 복속했던 발렌시아 병합[26] 유수프 자신은 발렌시아의 엘시드를 견제하고 패할 시에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27] 발렌시아의 주인이 바뀐 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카스티야에 대한 연공 납부를 중단한다.[28] 당시 산초는 불과 14세였다. 이때 귀족들 중 알바르 파녜스만 생환한다. 기독교 연대기는 전투 전날 본래 타밈은 철수하려 했으나 카스티야의 무슬림 병사가 탈영해 군대 배치도를 알려주자 전투에 임하기로 했고, 또 유대인 보조 병력이 도중 이탈해서 패했다고 기록했다. 산초의 시신은 후일 발견되어 산하군의 모친 무덤에 함께 묻혔다. 승리 후 무라비트 군대는 남겨진 적군을 모두 참수해 언덕을 만든 후 그 위에 무에진이 올라 단체 예배를 드렸다. 이후 카스티야 군의 피로 물든 강은 와디 지하드, 즉 성전의 강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베디자' 강으로 남아있다.[29] 이로써 1110년 무라비트 군대는 어렵지 않게 사라고사를 정복할 수 있었다.[30] 1106년에 사망함[31] 톨레도를 사실상 지배하던 알바르 파녜스는 1114년 세고비아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사망한다.[32] 다만 알리폰소는 바스크, 라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톨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33] 1128-29년 그라나다에 봉해지고 1131년에 코르도바에도 봉해짐[34] 역시 성채는 파괴되었고, 3백여 수비대가 전사했다. 성주 테요 페르난데스 등의 포로는 코르도바를 거쳐 모로코로 압송되었다.[35] 카스티야 내전 중인 1113년에 무라비트 군대가 점령했다.[36] 1157년 알폰소 7세의 사후 장남 산초가 카스티야, 차남 페르난도가 레온을 계승하며 레온-카스티야 왕국은 다시 해체된다.[37] 프랑스 병력이 주도해 함락한 말라공에서는 무슬림 수비대가 항복 후에도 학살되었다. 칼라트라바 함락 후에는 150인의 기사만이 남았다.[38] 앞서 언급된 프랑스 십자군 병력이 주도함[39] 저자 중 1명이자 왕실 관료였던 돈 이삭 아브라바넬은 톨레도의 원래 이름은 피리스발레였고, 기원전 5세기에 유대인들이 처음 정착한 후 툴라이툴라로 불렸다고 기록했다.[40] 동시에 카를로스를 폐위하고 그 모친인 후아나 혹은 카스티야에서 태어난 동생 페르난도를 추대하는 것도 논의되었다[41]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페인 그 자체도 마치 냉전 시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편의상 계속 '러시아'라 부른 것처럼 포괄적인 국방, 외교만 빼곤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다른 나라였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합쳐서 편의상 부르는 이름에 가까웠다. 실제로 '에스파냐 군주정(monarquía hispánica)' 소속 개별 왕국들이 법적으로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이란 하나의 단일 국가로 묶인 건 18세기 보르본 왕조 시절 일이고, 이 시기 공문서들이나 서적들을 보면 주로 비정치적인 문맥에선 포르투갈도 '스페인'의 범주에 종종 묶였다가 빠졌다가 한다. 동시대인들도 정치적인 의미로서 포르투갈은 엄연한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라고 당연히 인식했지만 지리학적 의미, 특히 가톨릭 교구상으론 여전히 '히스파니아'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의미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42] 특히 1560년대와 1590년대[43] 1954년에는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방문하는 등 프랑코 정권의 선전용으로 활용되었다.[44] 접쇠 하면 흔히 일본도의 타마하가네나 패턴-웰디드 다마스쿠스 강이 유명하지만 기록상으로 접쇠 공법을 최초로 도입한 것은 톨레도산 강철이다. 고대 로마군의 글라디우스 제작에도 접쇠 공법이 쓰였다. 그나마 일본도는 사철의 조악한 품질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고육지책으로 택한 것.[45] 장인 정신으로 유명한 전통 일본도는 겉으로 보이는 예술성은 뛰어날지언정 실제 성능은 명성에 못 미쳤다. 통일 이후부터 소수의 명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도입했으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아 쇠퇴하였다. 차라리 근대 기술을 사용해 공장에서 찍어낸 95식 부사관도 같은 것이 실제 성능은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46] 원래 이름이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로 '스페인 검'을 의미했다.[47]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8]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49]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50]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1] 엄밀하게 따지면 아버지인 미남공 펠리페 1세가 최초의 합스부르크 출신 스페인 왕이지만 워낙 단명한 관계로 실질적으론 카를로스 1세로 본다.[52] 이때 일어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 유명한데,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주님께 영혼을 맡기고 '그리스도 왕 만세, 스페인 만세!'를 외치며 애국자로서 당당히 죽거라"라고 작별인사를 했고, 아들 루이스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루이스는 바로 처형됐다고도 하고, 국민파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은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었으며, 프랑코 사후에도 '벙커파'라고 불린 친프랑코 강경파들이 펴낸 잡지 이름이 '알카사르'였을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아랍어] مسجد باب المردوم[54] 이쪽은 주로 '톨리도'로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