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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에 자리한 시가지
구도심과 비잔틴 시기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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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어 Sinop그리스어 Σινώπη (시노피)
튀르키예 북부의 도시. 삼순에서 서북쪽으로 110km, 카스타모누에서 동북쪽으로 130km 떨어진 흑해 연안에 자리한 인구 6만여의 작은 항구도시이다. 옛 지명은 시노페 (Σινώπη)로,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고사가 있었고 폰투스 왕국의 수도였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중세 시기에는 동로마 제국 및 트레비존드 제국과 룸 셀주크 간의 각축장이었고, 마침내 1265년 후자가 승리한 후로는 페르바네 왕조와 잔다르 왕조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오스만 제국기에는 크림 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평화를 누렸다. 시내에는 동로마 시절 성벽과 셀주크 시절의 내성, 알레에딘 모스크, 페르바네 마드라사 등의 유적 및 시노프 박물관이 있다. 서쪽 3km 지점에 시노프 공항이 자리하고, 서쪽 8km 지점에는 시노프 원자력 발전소[1]가 건설 중이다.
2. 역사
기원전 4세기 시노페에서 주조된 동전
밀레투스 출신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로, 카파도키아산 적갈색 안료인 시노피아[2]를 수출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키라'라고 했다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Διογένης ὁ Σινωπεύς, 기원전 412년? ~ 기원전 323년?)'가 이 곳 출신이다. 헬레니즘기에 자치를 유지하며 폰투스 왕국에 맞섰으나 기원전 183년에 결국 점령되어 그 수도가 되었다. 로마에 맞선 미트리다테스 6세의 출신지이자 매장지 역시 시노페였다. 기원전 70년 루쿨루스가 점령하여 로마령이 되었고, 카이사르에 의해 식민도시로 지정되어 콜로니아 율리아 펠릭스라 명명되었다. 로마 시대 시노페는 크림 반도 및 콜키스 (조지아)와의 교역항이었다.
2.1. 중세
헬레니즘기에 세워져 동로마 대에 보강된 성벽
동로마 제국기 시노페는 트라브존과 함께 흑해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838년 호람딘 출신의 장군 테오포보스가 시노페에서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곧 테오필로스에게 항복하기도 하였고, 858년에는 압바스 왕조의 습격을 받았다. 만지케르트 전투 후 1081년 시노페는 셀주크 제국에 점령되었으나 얼마후 알렉시오스 1세가 수복하였다. 1101년 메르지푼에서 대패한 롬바르드 십자군의 패잔병이 시노페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였다. 1204년 4차 십자군의 혼란기에 시노페는 트레비존드 제국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214년 룸 셀주크의 카이카우스 1세가 포로로 잡은 알렉시오스 1세를 이용해 점령하였고, 해군 기지로 활용하였다.
2.1.1. 페르바네 왕조
13세기 중반 셀주크 양식으로 세워진 페르바네 마드라사
1220년대 중반 시노페에서 출항한 튀르크 해군은 크림 반도의 수다크를 점령하였다. 1254년 마누일 1세가 수복했으나 1265년 룸 셀주크의 실권자 무인에딘 쉴레이만 (페르바네)가 재점령하였고, 튀르크식 지명인 시노프로 불리게 되었다. 1277년 페르바네가 아바카 칸에게 처형된 후에는 그의 자손들이 시노프를 중심으로 자립하여 페르바네 왕조가 세워졌다. 일 칸국에 복속한 채로 제노바 공화국 및 트레비존드 제국과 대립하던 페르바네 왕조는 1322년 페르바네의 손자 가지 첼레비가 사망하고, 그의 외동딸이 계승하자 카스타모누에 기반한 잔다르 왕조의 쉴레이만 베이가 시노페를 점령하며 멸망하였다. 잔다르 왕조는 1383년 카스타모누의 쉴레이만과 시노페의 바예지트 형제 간에 양분되었다.
2.1.2. 잔다르 왕조
알라에딘 모스크 내부의 이스펜디야르 영묘
139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트 1세가 카스타모누를 병합하자 잔다르 왕조는 시노프 일대만이 남았고, 그 지배자인 이스펜디야르 베이의 이름을 따서 이스펜디야르 왕조라 일컫기도 한다. 1402년 앙카라 전투 후 이스펜디야르 베이는 티무르에 복속하여 카스타모누와 찬크르 등 가문의 옛 영토를 돌려받았으나 여전히 수도는 시노프로 유지되었다. 다만 세력을 회복한 오스만 제국에게 1416년 찬크르, 1419년 삼순을 상실한 끝에 1423년 이스펜디야르 베이는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약화된 잔다르 조는 1461년 트라브존 원정에 나선 메흐메트 2세에게 저항 없이 시노프를 내주며 멸망하였다. 그후 오스만 제국령이 된 도시는 1614년 코사크 해적에 의해 약탈과 방화를 당한 것 외에는 5세기 가량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2.2. 시노프 해전
시노프 해전 묘사도
1853년 크림 전쟁때는 이 곳 앞바다에서 시노프 해전이 벌어졌다. 시노프 해전은 해전사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전투인데, 1853년 11월 이 전투에서 러시아 해군이 '폭발하는 포탄'인 작열탄을 처음 사용했기 때문. 쭉 애용되던 철로 만든 단순한 땡포탄의 발사 원리는, 적절한 양의 화약을 포탄과 함께 밀어넣고 난 뒤, 그 포탄을 발사하여 순수 운동에너지로만 적을 피격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함선 내 화약을 보관하는 장소를 운 좋게 피격하지 않는 이상 함선 자체가 침몰되기는 몹시 어려웠다. 하지만 이 신기술을 등에 업고 러시아 제국 함대는 오스만 제국 함대 11대 중 10대를 그야말로 대파하여 침몰시켰으며 이 해전을 계기로 포탄의 개념이 완전히 뒤바뀌고 범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철갑을 두른 전함이 주류가 된다.
2.3. 근현대
오스만 제국 말기 시노프 우표
13세기 초에 카이카우스 1세가 세운 내성 안에 1882년 세워진 감옥
20세기 초엽 시노프의 인구는 8천이었고, 그리스계 기독교도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보스포루스와 바투미 사이의 가장 안전한 항구라 불리던 시노프 항에서는 밀, 담배, 종자, 목재, 가죽 등을 수출하였고 석탄과 가공 제품을 수입하였다. 1920년대에는 이 곳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인구교환을 통해 그리스로 이주되었다. 이들은 서부 그리스에 네오 시노피(Νέα Σινώπη)라는 마을을 세웠다. 1919년 5월, 터키 독립 전쟁을 이끌기 위해 삼순에서 앙카라로 향하던 무스타파 케말이 정박하여 시가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냉전 시절에는 미군 기지가 있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