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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이는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도이며 시리아와 접해 있다. 중심지는 안타키아다.[1] 본래 오스만 제국을 거쳐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통치령에 속했다가 1938년 하타이국으로 독립하였고, 1939년에 주민투표를 거쳐 튀르키예 공화국에 병합된 지역이다. 튀르크계 외에도 아랍계, 아르메니아계, 그리스계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던 지역이었지만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학살과 추방으로 대부분 사라져 튀르크계 무슬림과 소수의 아랍계 무슬림 (알라위파 포함) / 기독교도 만이 남아있다. 시리아에서는 알레포의 외항이 사라진 것이기에 튀르키예의 하타이 병합을 상당히 애석히 여기며, 시리아 내전 이전까지만 해도
2. 역사
하타이는 오스만 제국 시절에 오스만 시리아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하타이 주민의 대부분이 튀르키예인으로 이뤄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20년대부터 하타이는 시리아-레바논의 일부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하타이가 터키 공화국으로 포함되려는 움직임이 매우 컸다. 1939년에 하타이는 주민투표를 통해 터키에 편입되었다.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에서 다수의 건물이 무너지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타이 공항의 활주로도 갈라지며 파괴되었다.#
3. 주민
전술했다시피 대부분의 주민들이 튀르키예인들이다. 하지만 소수의 아랍계 터키인들도 거주하고 있다. 안티오크에는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하타이에서 쓰이는 터키어는 인근의 가지안테프, 샨르우르파, 마르딘과 같은 남동부방언대에 해당하며, 아랍어, 아르메니아어 등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4. 기타
하타이는 시리아와 접해 있다. 게다가 2010년대 중반에는 다에쉬의 위협이 매우 컸고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에쉬에 가담하기 위해 튀르키예 국경을 넘어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에 튀르키예 정부는 하타이, 킬리스를 포함한 튀르키예 남동부 국경 지역의 경비를 강화했다.[2] 그리고 시리아 내전 당시에 시리아 난민들이 하타이로 이주하면서 치안이 매우 불안한 편이다.[3] 성 베드로 동굴 성당 등 기독교 유적이 많고, 안타키아와 이스켄데룬에는 기독교 공동체 및 성당이 남아있다. 그외에 알라위파 신도들도 다수 거주한다.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의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아주 절묘하게도 딱 하타이 공화국이 존속했던 그 1938년이 배경이다. 공화국 대통령이 온갖 금은보화가 아니라 롤스로이스 자동차에 덥썩 낚여 나치에게 군대를 지원해주는 것으로 나오는데, 어차피 사라진 나라라 이렇게 희화화 해도 딴지 걸 사람도 없으니 실제 촬영장소인 요르단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하타이로 설정한 듯.
5. 관련 문서
[1] 안티오크는 튀르키예에 속해 있다.[2]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지역은 치안이 매우 불안한 편이다.[3] 한국 정부도 킬리스, 하타이를 포함한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은 여행경보 3단계를 발령했다.